기계지향 미학을 향하여: 예술의 힘에 관하여

 

―― 레비 브라이언트(Levi R. Bryant)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힐 수 있다.

                                                    ― 무명씨

 

1. 보철적 소거

 

철학사 전체에 걸쳐 있는 경향은 예술 작품을 하나의 보철물로서 다루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더 나쁘게도, 불필요한 보철물로 다루는 것이었다. 매클루언(McLuhan)의 매체 이해를 좇으면, 다른 모든 보철물들은 어떤 식으로 우리 육체와 지각의 역량을 확장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반면에, 예술은 우리가 그것이 표상하는 것과 직접 관계를 맺기만 한다면 없어도 될 불필요한 우회로로 다루어진다.

 

예술 작품의 이런 소거는 일찌기 플라톤에게서 이미 식별될 수 있다. 플라톤의 경우에, 예술 작품은 미의 형상 또는 이데아의 불완전한 표현이다. 예술 작품은 미의 형상에 결코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 채 점근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대로의 그런 예술 작품은 이중적 본성을 갖는다. <<파이드로스>>―그리고 덜한 정도로 <<향연>>―에서 알게 되듯이, 예술 작품은 영혼 교육의 한 요소로서 영혼을 형상들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향해 정향한다. <<메논>>과 <<파이>>에서 전개된 회상으로서의 학습이라는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우리 영혼 속에 미의 유일한 형상에 대한 회상을 일깨우는 감각적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예술 작품은 이런 형상을 향해 나를 끌고가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 작품의 첫 번째 특징이다. 그런데 또한 예술 작품의 두 번째 특징 또는 본성은 미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것이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랑에 대한 디오티마의 가르침을 상세히 설명할 때 플라톤은 이런 위험에 대한 기본 도식을 개괄한다. 디오티마의 경우에, 사랑 속에는 위험뿐 아니라 지혜도 존재한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이 육체에서 구현되든, 행동에서 구현되든, 정신에서 구현되든 간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의 지혜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사랑은 육체의 욕망에 대한 탐닉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소중한 사람을 음식을 얻기 위해, 하나의 도구로서, 노동력 등으로 사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사랑은 현세적 육체의 가치들을 넘어서는 일단의 가치들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미의 형상을 회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그런 실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위험은 우리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미 자체로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우리가 참으로 욕망하는 것은 미 자체이다. 우리 욕망의 진정한 대상은 미의 형상 그 자체―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모든 실례에서 동일한, 즉 항상 자체와 동일한, 그래서 쇠퇴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는 달리 영원한―이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것이나 아름다운 사람은 우리 욕망의 진짜 대상, 즉 미 자체의 대체물―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빈약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 욕망의 진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지혜로운 사랑은 미의 형상 자체를 직접 사랑한다. 사랑의 위험은 미 자체라기보다 아름다운 사람에 고착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계몽과 발달이 멈추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는 예술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최선의 경우에, 예술 작품은 우리 욕망의 참된 대상을 향한 정신적 행로에서 일시적인 우회로이다. 최악의 경우에, 우리 욕망과 관심의 대상은 미 자체라기보다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예술 작품은 우리 욕망의 참된 대상에 대한 접근을 막는다. 확실히 이것이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시인들이 추방되어야 한다고 느꼈던 한 가지 주요한 이유이다. 플라톤적 틀에 따르면, 예술은 감각을 외양의 세계에서 분리된 더 고등한 기능 작용으로 고양시키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우리를 육체의 감각과 정념의 세계 속에 더 깊이 고착시킬 위험을 항상 수반한다. 예술가들을 전부 추방하고 형상들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통치하는 공화국을 구성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쨌든 플라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미 자체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예술은 전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술은 자체적으로는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형상들을 회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산파술 장치로만 작동하는 우회로이고 불필요한 보철물이다. 예술 작품 자체는 그것이 아닌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암시할 수 있는 자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세계의 질서 속에서 부차적인 지위를 가지며 무언가 다른 것의 단순한 반영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무언가 다른 것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면 예술 작품은 전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술에 관한 이런 관념은 "표현주의(expressivism)"라고 부를 수 있다. 표현주의란 가장 근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예술 작품은 무언가 다른 것에 대한 표현이다라는 테제이다. 철학의 역사 전체에 걸쳐 표현주의는 지배적인 예술 이론일 것이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플라톤의 예술 이론은 표현주의의 한 변양태일 뿐이다. 때때로 표현주의는 작가 또는 예술가의 의도에 대한 성찰 형식을 띨 것이다. 작품은 그런 의도에 대한 표현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의도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 때때로 표현주의는 역사주의 형식을 띨 것이고, 그래서 작품은 그것이 생산된 역사적 환경의 표현물로 이해된다.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그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때때로 표현주의는 독자와 관객들이 작품에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과 관련된 문제가 된다. 때때로 표현주의는 작품을 예술가의 무의식에 대한 표현물로 이해하는 형태를 띤다.

 

각 경우에, 작품의 근본적인 본질은 어딘가 다른 곳-예술가, 역사적 무대, 언어의 구조, 무의식, 청중, 제도, 예술에 관한 담론 등―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표현주의 내에서는 작품 자체가 소거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표현주의적 비평가는 작품의 특징들로부터 작품이 표현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내는지 보여주는 일단의 번역 작업에 관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작업들의 흥미로운 특징은 그것들이 항상 암묵적으로 작품을 표현되는 것의 명시적 표명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즉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은 표현이 아니라 표현되는 것이라고 시사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작품은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간주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기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거나 나타내는 의미 또는 지시 대상이 되는 기호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역설적인 태도로, 우리는 작품에 관해 말하려고 착수하지만 항상 결국은 작품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에 관해 말하게 되는 듯 보인다.

 

2. 예술의 물질성

 

그런데 확실히 예술 작품은 그저 원칙적으로 예술 작품 없이 더 명료한 술어들로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아니지 않는가? 확실히 예술 작품은 자체의 기원 또는 수용자에 관해 무엇을 표현하든 간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나름대로 기여한다. 비표현주의적 예술 이론을 분명히 표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 사유 속에 표현주의적 가정들이 얼마나 깊이 퇴적되어 있는지 감안하면, 작품이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운 일로 판명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작품―그 형태가 소설이든, 회화든, 시든 조각이든 간에―을 대면했을 때 떠오르는 첫 번째 의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작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묻는다. 우리는 작품을 대체할 표현을 찾고,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예술'의 경우에서처럼 작품을 어떤 표현으로 대체할 길이 없는 듯 보이면 많은 사람들이 몹시 불평한다. 때때로 이런 의문을 벗어나는 듯 보이는 유일한 예술은 음악과 건축이다.

 

표현주의에 의해 귀결되는 예술의 소거를 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단순하고 명백한 것들을 상기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표현주의는 예술 작품을 판독해야 할 기호로 간주한다. 퍼스(Peirce)가 가르쳐 주었듯이, 기호는 어떤 측면 또는 역량에 있어서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세 가지 요소, 즉 기호 운반체(sign-vehicle) 또는 기호를 운반하는 것, 기호 대상(semiotic object) 또는 기호가 가리키는 것 그리고 해석체(interpretant) 또는 기호 대상에 기호 운반체를 연결하는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연기라는 고전적 사례를 고려하자. 연기가 나는 곳에 발연물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호 운반체는 연기이다. 기호 대상은 발연물이다. 그리고 해석체는 연기를 지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연기를 발연물에 연결하는 관계인데, 이런 연결로부터 후속적으로 도출되는 함의들―예를 들면, 암, 간접 흡연, 다양한 하위 문화, 동료 흡연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 등에 관한 생각―은 무엇이든 포함된다.

 

기호는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연기를 만날 때 우리는 그저 연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연자 또는 화재를 즉시 떠올리게 된다. 그런 기호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Heideggar)가 서술하는 안경과 대체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떤 사람이 안경이 "코 위에 얹혀져 있을" 정도로 거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안경을 낄 때, 그 안경은 반대편 벽에 걸려 있는 그림보다 그로부터 환경적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 도구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흔히 알아채는 것이 거의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시각은 안경을 관통하여 그 대신에 벽 위에 걸린 그림에 내려 앉는다. 결과적으로 안경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거나 물러서 있게 된다. 이것이 기호와 관련된 상황이며 기호의 "대상성(aboutness)"을 구성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호 운반체는 하이데거의 안경처럼 시야에서 물러서 있고 우리는 그 기호가 가리키는 것, 즉 발연물에 대한 생각에 이끌린다. 결국, 예술 작품이 기호들의 조립체로 다루어지거나 간주된다면, 당연히 그것 역시 물러서 있게 될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예술 작품이 의미하는 것, 그것의 역사적 기원, 작가가 의도했었을 것, 관객이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 기타 등등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소거된다. 그것은 그것 자체를 물러서게 하거나 소거하는 기호의 세계에 속한다. 무언가 다른 것을 가리킬 때 기호 자체는 보이지 않게 된다.

 

예술 작품의 소거를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예술 작품이 그저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실제로 많은 작품들이 결코 어떤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그것이 바로 무언가이기도 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의 의미 작용 잠재력을 일시 중지하고 예술 작품이 나름대로 실재적인 물질적 존재자라고 인식함으로써 실재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예술 이론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지향 미학에서 실재론은 예술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예술 작품의 존재성과 관련된 테제이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무언가, 즉 하나의 존재자, 실체, 개체, 사물, 객체 또는 기계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식으로 물질적으로 육화되지 않은 예술 작품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과 시는 잉크를 사용하여 종위 위에 새겨진다. 회화는 유화 물감, 수채화 물감, 아크릴로 그려진다. 조각과 건물들은 돌, 벽돌, 나무, 금속, 시멘트로 지어진다. 음악은 악기들로 연주되며 울려 퍼지는 진동하는 공기의 다발들로 구성되며, 무용은 몸으로 연주되며 운동으로 구성된다.

 

이런 주장은 매우 명백하여 나는 그것을 제기하는 데 거의 당황하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가 예술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첫째, 예술의 물질성, 예술의 사물성에 대해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의 매체의 특징들에 더 주목하게 만든다. 형식적인 선험적 의미에서 예술―무언가를 의미하기 전의―은 물질적 매체와 그것의 역능 또는 역량에 대한 탐색이다. 그런 매체는 소리, 색깔, 선, 운동 중인 육체, 언어, 진흙, 돌, 금속, 차원, 시간, 영상 등일 수 있다. 게다가 상이한 매체들은 서로 얽힐 수 있다. 물질이 조형적인 한에 있어서 모든 매체의 잠재태들은 무한하다. 예를 들면, 진흙이라는 매체에서 산출될 수 있는 것은 아무 한계도 없다. 위대한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매체의 잠재태들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양식은 매체의 잠재태들을 탐구하여 현실화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스피노자가 서술했었을 것처럼, 예술은 매체가 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작품에 관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기보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것은 자체의 매체로 그리고 매체를 통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라고 묻는다. 영화 관련 저서들에서 들뢰즈는 이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영화에 관한 논의들은 자체의 서사적 기능의 견지에서 영화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그것들은 영화를 줄거리나 이야기에 동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영화의 영상적 구성 요소를 그 요소가 줄거리에 기여하는 방식의 견지에서만 흥미로운 것으로 간주한다. 들뢰즈가 서술하듯이,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화가, 건축가 그리고 음악가에 비견될 뿐 아니라, 사상가에도 비견될 것이다. 그들은 개념 대신에 동영상과 시간 영상들로 사유한다." 무언가 실재적인 존재자로서의 영화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자체의 매체로 무엇을 하는지 또는 그것이 무슨 영상들을 만들어내거나 창안하는지라는 견지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과 회화를 여타의 예술이 이해되고 파악되는 예술의 범형들로 간주하는 대신에 그 어떤 목소리 요소도 없는 음악, 건축 그리고 언어 시를 예술 본질의 범형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의미와 서사가 대체로 부재하는 한에 있어서 이런 예술 형식들은 모든 예술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들 덕분에 우리는 모든 예술에서 작동 중인 소리, 모양 그리고 언어 같은 매체들에 대한 순수한 탐색에 노출된다. 그리고 이런 예술 형식들 경우에, 우리는 작품을 넘어서 의미, 역사, 작가의 의도 등으로 진입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그렇지만 작품이 물질적 존재자라는 점을 떠올리면 표현주의가 엉망이 되는 훨씬 더 심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은 모든 객체가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다고 가르쳤다. 그 어떤 두 존재자도 서로 직접 관계를 맺지 못한다. <<네 겹의 객체(The Quadruple Object)>>에서 하만이 서술하듯이, "객체들을 제대로 다루는 유일한 길은 그것들의 실재가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우며, 모든 호혜성보다 심층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객체는 사밀한 진공 속에 은폐된 암흑의 결정인데, 그것 자체의 조각들로 환원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것이 다른 사물들과 맺는 외향적 관계로도 환원될 수 없다."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에서 나는 객체가 자체의 관계들에 독립적인 까닭에 대한 논변을 전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래서 여기서는 이 테제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여기서 주장되는 것은 모든 객체가 객체이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시점에 그것이 다른 존재자들과 향유할 그 어떤 관계도 반드시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달리 서술하면, 모든 객체는 그것이 현재 다른 존재자들과 맺고 있을 관계들로 환원될 수도 없으며, 어떤 특수한 시점에 그것이 우연히 향유하는 관계들을 단절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객체는 움직일 수 있는 역량, 즉 그것이 현재 향유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들을 단절함으로써 다른 객체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관계들을 단절할 이런 가능성이 모든 객체의 내재적 특징이 아니라면, 그 어떤 운동 또는 변화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만이 서술하듯이,

 

어떤 [객체의] 구성 요소들과 그것의 동맹들 사이에 [어떤] 기본적인 비대칭성이 없다면 순전히 전일론적인 우주를 갖게될 것이다. 모든 것은 그것 위의 [객체들]과 그것 아래의 [객체들]에 의해 같은 정도로 규정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의 맥락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위치는 실재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 대신에 일어나는 일은 구성 요소들이 때때로 통합하여 새로운 [객체], 즉 자체의 조각들로 환원될 수 없는 '창발적' 실재를 형성한다. 그것은 자체의 구성 성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들을 견딜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내던져진 외부 관계들은 더 쉽게 견딜 수 있다.

 

여기서 하만의 주장의 일부는, 어떤 객체가 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움직일 수 있으려면, 그것은 자체가 현재 향유하는 관계들을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 객체가 자체의 관계들과 동일하다면, 그것의 존재가 자체의 관계들이 맞다면, 이런 움직임은 가능하지 않을 것인데, 움직임은 어떤 일단의 관계들을 단절하고 다른 일단의 관계들을 맺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맞다면, 당연히 객체는 그것이 우연히 향유하는 관계들을 넘어서는 어떤 최소의 존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큰두꺼비의 사례를 고려하자. 사탕수수 작물을 황폐화시키고 있던 딱정벌레 한 종을 퇴치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중남미 태생의 큰두꺼비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지역에 도입되었다. 이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된 큰두꺼비는 빠르게 증식하여 지역적 생물 다양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 토종 포식자들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원인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큰두꺼비는 자체의 증식을 제한할 수 있는 포식자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종 포식자들이 큰두꺼비의 등 위 샘에서 분비되는 독물에 대한 면역을 결여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큰두꺼비는 빠르게 증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토종 포식자들의 자체의 개체군을 유지하는 데 의존한 생명체를 먹어치움으로써 이런 다른 동물들의 개체군 붕괴를 초래했다.

 

큰두꺼비―오스트레일리아의 토종 종들은 말할 것도 없이―가 자체의 관계들과 동일하다면,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그런 움직임은 관계들의 변화를 야기하기 때문에 큰두꺼비가 중남미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꽤 명백한 점이 존재한다. 그런데, 더 중요하게도, 둘째, 이런 관계들의 변화는 관련된 모든 존재자들에도 변화를 초래한다. 중남미에 서식하는 큰두꺼비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는 큰두꺼비와 다르다. 자체 환경 속의 포식자들 때문에 중남미 큰두꺼비는 어떤 특수한 개체군 밀도에 이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중남미에서 큰두꺼비는 어떤 특수한 평균 크기에 이를 뿐인데, 1) 포식자들의 존재로 인해 그것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더 짧기 때문이고, 2) 먹이 경쟁이 더 치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먹이의 입수 가능성이 더 크고 생존 가능한 포식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큰두꺼비가 더 큰 크기에 이르게 된다. 우주적 전일론에 따라 큰두꺼비가 우주 속 다른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런 변화들이 어떻게 또는 왜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큰두꺼비가 어떤 일단의 관계들을 단절하고 다른 일단의 관계들을 맺게 될 때에만 이런 변화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큰두꺼비가 어떤 특수한 시점과 장소에서 우연히 맺는 관계들에 선행하며―시간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그리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존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객체를 자체의 성질들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 사이의 분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내가 주장한 적이 있으며, 그리고 여기서 하만과 내가 의견이 갈라지는데, 이런 의견 불일치가 용어와 관련된 것인지 또는 실질적인 존재론적 차이인지에 대한 것인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나는 이런 차원들을 각각 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와 국소적 표현(local manifestation)으로 부른다. 객체가 자체의 성질 또는 국소적 표현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면, 이것은 객체가 여전히 마찬가지이면서 그런 성질들이 변하기 때문이다. 텍사스 건물의 쌀쌀한 냉방 상태에서 내 피부는 움츠러들고 소름이 돋는다. 텍사스 태양의 불타는 열기 속으로 걸어 나가면, 내 피부는 팽창하고, 나는 홍조를 띠며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것들은 모두 내 존재의 성질 또는 국소적 표현들이다. 그것들이 표현들이라면, 이것은 그것들이 어떤 성질이 현실화된 것(소름이 돋은 피부, 팽창된 피부 등)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국소적이라면, 이것은 이런 성질들이 특정한 조건―내가 "끌림의 체제(regime of attraction)"로 부르는 것―에서 또는 태양이나 냉방 상태 같은 다른 존재자들과 맺은 일단의 특수한 관계들의 결과로서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성질적 변화를 겪고서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 존재는 어떤 특수한 순간, 특수한 장소에서 내가 우연히 향유하는 성질 또는 특성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존재로서의 내 존재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관계들의 변화와 성질적 변화를 겪고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인 내 존재의 이런 동일성이 내가 "잠재적 고유 존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성질 또는 특성들, 즉 국소적 표현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능, 역량 또는 정동에 놓여 있다. 어떤 객체의 존재는 그것이 우연히 표현하거나 현실화하는 성질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행할 수 있는 것. 즉 그것의 정동에 놓여 있다. 게다가, 객체의 어떤 성질 또는 특성은 객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게 되는 관계들의 함수로서 객체가 행하는 것이다. 내 피부에 소름이 돋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피부가 소름을 불러 일으킨다. 요약하면, 그 어떤 유형의 세포―뼈 세포, 근육 세포, 신경 세포 등―도 될 수 있는 줄기 세포와 마찬가지로 모든 객체는 다능성을 갖추고 있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독창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

 

객체는 그것이 맺은 관계들에 외재적이라고 전제함에 있어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가끔 제시된다. 그런데 전제가 참이라면 정반대 상황이 맞다. 인식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관계론 또는 전일론과 관련된 주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관계가 무슨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관계는 객체에 외재적이며, 객체는 그것이 맺게될 관계들을 넘어서는 존재를 갖추고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함으로써 객체지향 존재론은 관계들이 무슨 차이를 만들어내는가라는 문제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객체가 이런 끌림의 체제 또는 관계들의 장 속에 편입되면, 그것은 어떤 국소적 표현들을 나타낼 것인가? 그것은 어떤 새로운 상이한 특성들을 표현할 것인가? 그것은 파괴될 것인가? 그것의 행위 역량은 축소될 것인가, 아니면 향상될 것인가? 관계들을 사전에 주어진, 이미 확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관계들의 불안정성과 그것들이 맺어질 때 생성되는 차이들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예술이 그저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무언가이다라는 것이 맞다면, 당연히 객체들 일반에 대해 참인 것은 예술 객체들에 대해서도 참이어야 한다. 모든 예술 객체는 조금이라도 관계들을 넘어설 것이고, 그래서 자체의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다. 확실히 모든 예술 객체는 어떤 종류의 시작 또는 기원이 있을 것―그것은 어느 시점에 생성될 것이다―이지만, 아이가 자기 부모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은 자체의 기원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객체들과 마찬가지로, 예술 객체도 방황과 오류를 자체 존재의 본질적 특징의 일부로 삼을 것이다. 모든 예술 객체는 돌아갈 고향이 전혀 없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든 예술 객체는 자체의 맥락, 작가의 의도, 무의식, 그것을 수집한 기관 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어떤 가능한 상관관계도 넘어설 것이다.

 

확실히 기원 또는 맥락의 견지에서 예술에 관해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떤 예술 작품도 맥락 또는 기원에 대한 관계들의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 모든 객체들과 마찬가지로 작품도 맥락 또는 관계들의 장 속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이런 관계들에 의해 결코 망라될 수 없다. 다르게 서술하면, 자체의 내용으로 포화되어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단절할 수 있는 것을 전혀 유보하고 있지 않은 존재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과 관련하여 내용을 넘어서 유보되어 있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 작품이 애초에 향유했을 어떤 관계들도 넘어서 있는 한, 작품이 생성될 때의 맥락에 특권을 부여할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작품으로서 작품은 세계를 설정하고, [그래서] 세계의 열린 영역을 열어 둔다"고 서술할 때,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세계는 "...유의미성으로서 세계의 세계성을 구성하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관계들의 체계의 의미로 간주될 수 연관 또는 지시들의 맥락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에게 작품은 그것이 생성되는 의미들(유의미성)의 체계 또는 세계에 대한 표현이자 의미의 체계 또는 세계을 정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에서 표현되는 세계가 예술 작품의 진리일 것이다.

 

그런데 예술 작품이 객체이고, 객체가 자체의 관계들과 단절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당연히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세계의 세계성은 예술 작품의 존재를 포착할 수 없다. 오히려, 작품의 존재는 어딘가 다른 곳에 거주해야 한다. 이것이 데리다가 "지시에 있어서 진리의 복권"에서 <낡은 구두>라는 반 고흐의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과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의 분석 사이의 논쟁을 논의할 때 강력히 제기하는 논점이다. 하이데거는 낡은 구두가 농부의 구두이고 그 그림이 농부의 세계를 드러내거나 밝혀준다고 주장한다. 샤피로는 낡은 구두가 노동자의 구두이고 그 그림이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옳은지 아니면 샤피로가 옳은지 결정하기 위해 그 논쟁에 관여하는 대신에 그 회화의 내용을 고정시키려는 우리의 시도가 어떻게 영구적으로 실패하는지 보여주는데, 그 결과 우리는 하이데거가 옳은지 아니면 샤피로가 옳은지 결정할 수 없게 된다. 다르게 서술하면, 그림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은 의미를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의 의미는 그 그림이 특수한 끌림의 체제 속에 진입한 것의 결과인 것이지, 그 그림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다. 그림이 자체의 관계들 또는 맥락에 조금이라도 독립적이지 않다면, 다중의 상이한 의미들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은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3. 극장과 공장: 기계적 예술

 

작품이 자체의 관계들에 무관하거나 그것들을 넘어서는 존재를 지닌 물질적 존재자라는 인식은 예술에 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작품이 자체의 관계들을 넘어서는 존재를 갖추고 있는 한, 그것은 더 이상 의미를 품고 있다고 간주될 수 없다. 작품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거나 표현할 수 있으려면, 작품 자체의 의미가 미정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작품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에 결부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의미는 작가 또는 예술가의 의도, 맥락 또는 역사적 환경에 결부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관계들의 외재성의 결과로서 그 어떤 의도, 맥락 또는 역사적 환경도 작품을 결부시켜 그것의 의미 또는 감각을 고정시킬 수 없다. 작품은 항상 자체의 기원과 맺은 관계를 단절할 수 있고 단절한다. 예술가와 작가들은 작품을 생산할 때 자신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선이 어떻게 이 색깔 또는 저 색깔이기를 원했는지, 등장 인물들이 어떻게 나름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언어가 어떻게 불가피하게 어떤 방향으로 끌리는 듯 보이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관해 말하곤 한다. 그런데 또한 그들은, 작품이 완성된 후에 그것이 이질적인 것이 되도록 어떻게 나름의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이는지에 관해 말할 것이다. 나중에 자기 작품을 대면했을 때 어떤 작가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경험이 없겠는가? "내가 그것을 적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예술가 자신은 자기 작품의 해석자이지, 자기 작품의 유일한 권위자가 아니다. 도구가 그것을 만든 직공이 의도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기능들을 나타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작품은 예술가가 결코 의도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의미 공명들을 산출하는 듯 보인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의 <낡은 구두>에 대한 샤피로와 하이데거 사이의 논쟁 사례에서 이해했듯이, 의미는 본원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공명할 수 있다. 사실상, 데리다가 농담반으로 묻듯이, 그것들이 두 개의 왼쪽 구두인 듯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이 한 켤레의 구두라는 것조차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우리를 예술에 대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듯 보인다. 일단 예술을 맥락, 의도 그리고 역사적 환경에서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예술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하만이 주장하듯이, 예술 작품이 모든 관계와 현전으로부터 물러서 있는 한, 우리는 도대체 예술에 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는 듯 보인다. 예술 비평이라는 기획은 붕괴하고 우리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에 남겨진 듯 보인다. 더 중요하게도, 이런 결론은 실제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 보인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가 주장했듯이, 예술 작품은 우리를 침묵시키기는 커녕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사교성, 아무 제한 또는 결론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생성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의 핵심에 기본적인 교착 상태가 놓여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예술 작품이 여느 객체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관계로부터도 물러서 있다고 결론지었다. 지식이 관계인 한에 있어서 당연히 예술 작품은 지식으로부터 물러서 있을 것이다. 하만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물러서 있는 이런 심층의 존재를 암시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런 심층을 망라하거나 최종적으로 그것의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작품이 맥락, 의도 또는 역사적 환경에 대한 어떤 가능한 관계도 넘어선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대체 예술 작품에 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이 교착 상태는 우리가 계속해서 표현주의적 테제로 작업하는 경우에만 출현하는 듯 보인다. 예술 작품을 기호들의 조립체로 간주하는 경우에만 우리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작품 배후에 놓여 있는 무언가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판에서 이 교착 상태를 넘어서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낸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적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이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에 의해 금세 은폐되었다. 즉 공장으로서의 무의식은 고대 극장으로 대체되었고,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은 재현으로 대체되었고, 생산적 무의식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인 무의식(신화, 비극, 꿈……)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극장 대 공장, 재현 또는 기호 대 기계.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원래 발견은 무의식의 생산성이었다고 주장한다. 1895년의 미출간 에세이 <<프로젝트>>,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그리고 <<꿈의 해석>> 같은 초기 저작들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재현되지 않고, 오히려 활기찬 연출이 실ㅈ제로 욕망을 제작하거나 생산하는 무의식을 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도입함으로써 무의식은 욕망의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의 모든 구성체들―꿈, 증상, 잘못 말하기, 잘못 행동하기, 농담 등―이 가족 드라마의 재현이 되는 극장이 된다. 공장은 무언가를 의미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하거나 생한다. 공장은 일종의 기계이다.

 

그런데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 자체가 하나의 작은 기계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책에 관해 언급되는 것은 모든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언급될 수 있다. 사실상,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내가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자기생산 이론에 기대어 주장했듯이, 모든 객체는 기계로 이해될 수 있다. 기호들의 조립체로서의 예술 작품에서 기계로의 변화는 우리가 작품과 비평 활동에 접근하는 방식을 두드러지게 변형한다. 기호들의 조립체는 자체를 넘어서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가리키는 반면에, 오히려 기계는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조작한다. 에일리언 현상학을 통해서 이안 보고스트가 분명히 표명하듯이, 기계는 조작하는 무언가이다. 대충 말하자면, 기계는 물질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기계 내부의 조작들의 결과로 들어온 물질에 일련의 변형을 가한 다음에 특수한 출력을 생산한다. 예를 들면, 나무 같은 기계를 고려하면, 이것은 햇빛, 물, 이산화탄소, 토양의 무기질 등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기계이다. 일련의 조작들을 통해 기계는 그런 물질의 흐름들, 통과하는 다른 기계들을 광합성 세포와 나무 껍질 같은 다양한 종류의 세포들로 변형시키는 동시에 산소도 생산한다.

 

계속 진행하기 전에 기계의 두 가지 부가적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우리는 기계와 흐름 사이의 관계를 불변의 형태와 무정형의 물질 사이의 관계, 즉 기계를 관통하는 물질의 일방적인 형태 구성이 이루어지게 되는 관계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계를 관통하는 모든 물질은 자체적으로 하나의 기계이고, 자체적으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나름의 조작들에 관여한다. <<육체적 자연들(Bodily Natures)>>이라는 책에서 스테이시 알레이모(Stacy Alaimo)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육체 또는 객체들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방식을 분명히 표명하기 위해 초육체성(trans-corporeality)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기계들이 서로 결합하게 되면, 그것들은 서로에 대해 호혜적으로 작용하여 각자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그저 나무가 햇빛, 물, 영양소 등에 형태를 부여하여 그것들을 세포로 구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다른 객체들과 갖게 되는 만남의 종류들이 나무가 띠게 되는 형태에 대해 핵심적 역할도 수행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무와 그것이 결합하게 되는 여타의 물질들 모두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변화를 겪는다. 한편으로 기계는 다른 존재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자이지만, 또한 기계는 그것이 영향을 주고 상호작용하는 다른 존재자들의 영향도 받는다.

 

둘째, 그리고 이 점은 중요한데, 기계는 다능성 존재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잠재태와 달리, 어떤 기계의 역능은 현실화 과정에서 하나의 목적지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능 또는 역량은 다른 기계들과의 만남 또는 맺게 되는 결합들의 결과로서 다양한 상이한 방식―그리고 항상 창의적이고 놀라운 형태―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 기계가 다능성 존재자라는 주장은 기계가 자체의 존재를 규정하는 그 어떤 고정된 기능 또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기계의 기능은 흔히 경직되거나 정형화되지만, 기계가 다른 기능들을 나타낼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 어떤 기계라도 괴롭히는 기능의 비결정성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에 대한 사례들은 생물 세계와 기술 세계 둘 다에서 풍부하다. 사실상 여기서 우리는, 어떤 존재자의 한 기관이 이전에 수행한 기능과 매우 다른 기능을 나타내게 되는 상호 적응(coadaptation)이라는 진화적 견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생물학자들은 폐가 되는 기관들이 원래는 유기체들이 떠다니는 데 사용한 부레였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은 화약을 발명했지만, 그것을 군사 목적이 아니라 불꽃 놀이용으로 사용했다. <<커넥션(Connections)>>이라는 책에서 제임스 버크(James Burke)는 향수 병의 분무기가 상호 적응을 통해서 어떻게 연료 분사 엔진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기능 또는 조작과 용도는 별개의 술어들이다. 용도는 항상 열려 있으며 사실 이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모든 기계는 그것이 원칙적으로 상이한 기능 또는 조작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기계적 자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점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 점이 예술 작품은 망라될 수 없거나 자체 내부에 끝없이 생산하는 역능을 품고 있는 방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을 기계로 이해함으로써 리쾨르(Ricouer)가 "해석의 갈등"이라고 부른 것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이제 예술 작품은 더 이상 비평가가 판별해야 하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존재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생산하는 존재자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해석하는 것은 표현되는 것을 판별하는 것도 아니고, 작품 속에서 표현되는 의미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한 기계를 다른 한 기계에 결합시켜 결과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다. 해석은 작품 속에 표현된 숨어 있는 의미에 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어떤 재료, 그 기계가 관객의 삶이든 독자의 삶이든 간에 어떤 다른 기계, 사회적 세계, 역사, 작품의 작가 등에 작용하게 하는 창조적 행위이다. 해석한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계지향 미학이 비평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뒤집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표현주의적 비평은 작품을 무엇이든 그것이 표현하는 것의 산물, 어떤 결과물로 간주하는 반면에, 기계지향 미학은 기계적 결합을 통해서 주변 세계에 작용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으로서의 작품에 접근한다. 예를 들면, 신역사주의자가 소설에 접근하여 그것이 생산된 역사적 맥락의 견지에서 읽을 때, 그 역사주의자는 소설의 진리―그것의 역사적 맥락―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비평가가 탐구하는 시대에 대한 혼란스러운 역사적 데이터를 조직하기 위한 기계로 소설을 사용한다. 맥락이 소설의 독법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역사적 시대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조직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역사주의적 독법은 그것이 그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에 관해 말해주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다. 그 독법은 현재를 이해하여 현재에 대한 우리의 관계들을 수정하기 위한 렌즈가 된다. 이런 점에서, 비평과 예술 작품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들이 우리 세계를 드러내거나 노출시킨다―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우리의 친숙한 생활세계와 자연적 지각을 교란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우리 안경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것을 식별할 수 없고, 그래서 자명하다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친숙한 생활세계 너머로 끌고 가며,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 광물 세계, 동물 세계, 양자 세계, 언어의 소란, 색깔과 형태의 폭풍,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관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문화적 세계 및 하위 세계로 우리를 끌고 간다. 작품은 의미를 품고 있거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친숙한 기호학적 의미의 장과 체험을 붕괴시키는 의미 형성 기계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술에 대한 그런 적대가 존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인데, 왜냐하면 작품은 실재와 경쟁하는 "실재에 대한 모방", 즉 시뮬라크룸이 아니라, 오히려 친숙한 세계성의 틀 속에 모든 체험을 동화시킬 수 있는 우리 능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계 속의 전면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상황을 정반대로 만든다. 작품은 세계의 세계성을 정초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와 세계-내-존재에 대한 체험 너머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술, 사건 그리고 혁명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계지향 미학은 예술 작품이 만들어내는 차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포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역사주의적 비평가 또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가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흔히 그가 상황을 후진시켰다는 감각을 얻게 된다. 작품은 자체의 역사적 환경의 표현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렇지만 이런 주장을 할 때 우리는 작품이 자체의 역사적 환경에 작용하는 방식을 상실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정글(Jungle)>>이 미합중국의 도살 행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을 인식한다. 여기서 작품은 그저 자체 맥락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 맥락을 넘어서 그것에 작용한다. <<트와일라잇(Twilight)>> 현상을 관찰할 때 우리는 이 소설이 금욕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맥락에서 양육된 젊은 여성들에게 욕망의 기술을 형성한다는 감각을 얻게 된다. <<트와일라잇>>은 성적으로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기독교적 틀 속에서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맥락에서 비행선 또는 도피 경로를 규정하는 사랑 형식을 만들어내거나 생산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샤피로 사이의 논쟁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의문은 반 고흐의 구두가 농부의 구두인지 아니면 프로렐타리아의 구두인지, 농촌의 구두인지 아니면 도시의 구두인지 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공명들을 만들어내는 기계적 결합들이 이런 독법들을 넘어서 현재의 세계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반 고흐가 농촌 농부의 구두를 의도했는지 아니면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구두를 의도했는지 또는 반 고흐의 그림이 전자를 표현했는지 아니면 후자를 표현했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은 대체로 무의미하다. 기계지향 독법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결합들 가운데 전자 또는 후자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현재 세계에 작용하는 방식이다. 사실상 우리는 다른 독법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한 켤레의 구두인지조차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데리다의 의문을 좇아서, 우리는 이 그림을 신발 생산으로 악명 높은 소비에트 연방의 초기 시절에 대한 고발로 간주하는 독법을 상상할 수 있다. 소비에트 생산은 반 고흐의 생애보다 그 시기가 늦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미하다. 그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소비에트 경험을 조직할 수 있게 하는 기계적 실마리로서 작동할 수 있다. 그 그림이 구두 또는 세계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엔트로피의 현상과 브라이언트의 존재론에서 엔트로피가 표명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는 다른 한 독법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들은 결국 꽤 보잘것없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 그림이 모든 물질 가운데 가장 덧없는 빛의 특성과 그것이 다른 형태들의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는 다른 한 독법도 상상할 수 있다.

 

유일한 기준은 기계적 결합이 작동하는지 여부이다. 이런저런 종류의 결과를 생산하는 식으로 작품이 다른 기계와 결합할 수 있는가? 이것은 결코 미리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다. 우리는 시도하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레이엄 하만은 후설적 자유 변이와 유사한 해석 기계를 만들어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어떤 작가의 스타일을 취하여 본원적으로 상이한 맥락에서 그 작가의 작품이 어떠할지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작품이 북극이 아니라 이집트나 아마존 우림을 배경으로 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우리는 항상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사실상 일종의 과학 소설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만―그리고 이렇게 가정할 때 셰익스피어와 과학 소설 둘 다 변할 것이다―우리가 그런 기계적 결합을 시도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작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생물학에서 배웠듯이, 언제나 기능 작용은 부분들이 결코 전적으로 들어맞지는 않아서 기계가 항상 고장나는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 사태이다. 진화는 항상 이전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입수 가능한 것으로 해야 하며, 기계를 구성하는 기계들 사이의 이런 긴장들을 탐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의 소화 체계는 음식을 소화하는 데 맹장을 사용한 이전의 영장류 소화 체계 위에 구축되었다. 이제 맹장은 아무 기능도 수행하지 않으며 우리를 죽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머리가 더 작았고,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 여성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는 머리가 매우 크기 때문에 출생 과정 동안 그 여성의 협소한 관골을 빠져나가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몸을 비틀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상황이 잘못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임시 방편적이다. 어떤 기계에서든지 어떤 기계적 결합에서든지 간에 항상 빠져 나가는 것이 있다. 그런데 조립된 순간에 고장나는 기계들이 항상 존재하며, 결코 전적으로 들어맞지는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덜커덩거리며 갑자기 움직이면서 아무튼 작동하는 기계들도 항상 존재한다. 할 수 있는 전부는 시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