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작용주의

Interactivism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관계"는 생태적 존재론에서 사유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낱말일 것이다. 관계와 관련하여 너무 유령 같은, 너무 무형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 우주 전체에서 모든 것이 가만히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도 여전히 관계들은 존재할 것이다. 사물들은 다른 것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있을 것이고, 수 마일 또는 수 광년 떨어져 있을 것이고, 더 크고 더 작을 것이며, 기타 등등. 그런데 무엇보다도 생태학은 상호작용하며 생성 중에 있는 존재자들을 생각한다. 상호작용은 일종의 관계이지만,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은 "관계"라는 기표로 상실될 위험이 있는, 생태 속에서 존재자들이 결합하는 방식과 관련된 어떤 육체성을 포착한다.

 

생태 속에서 존재자들은 상호작용한다. 이것은 평범하고 명백한 관찰 결과이지만, 우리가 흔히 멈추어 서서 곰곰히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첫째,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상호작용들의 물질성이 존재한다. 모든 상호작용은 육체를 필요로 한다. 무형의 또는 유령 같은 상호작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두 존재자는 상호작용할 것이다. 사실상, 생태학은 흔히 그리고 주로 멀리 떨어진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을 생각한다. 생태적 사유의 참신성은 관련되어 있지 않는 듯 보이는 두 존재자―예컨대 개구리와 자동차―가 사실상 어떤 조립체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주거나 추적하는 것에 놓여 있다. 물론 그것들의 상호작용은 직접적이지 않다. 그것은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을 이겨내며 오고가는 유형의 또는 물질적인 매개체―예컨대 자동차가 배출한 탄소―가 존재한다.

 

상징적 상호작용과 언어적 상호작용들도 일어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대기를 필요로 하는데, 어떤 소리도 진공에서는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전자기파 신호, 종이, 연기, 여타의 다른 매질들을 필요로 한다. 유령 같은 관계들로는 아무것도 오고가지 못한다. 그런데 상호작용에 있어서는 항상 물질적 소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상호작용들은 시간 속에서 전개될 뿐 아니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태에서는 아무것도 결코 즉각적이지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아무것도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늦게 도착하는 편지에 익숙하다. 어떤 편지의 지연은 그것의 육체, 그것의 물질성의 표식이다. 그것이 언설로 전달되든, 종이로 전달되든, 전자적으로 전달되든 간에, 편지는 이동해야 한다. 연못에 돌을 던진 후에 생성되는 동심원처럼 그것이 한 사회의 생태계 전체에 확산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육체의 결과로서 뜻밖의 비극이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감마선 폭발이 현재 우리 행성에 닿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지 않는지 누가 알겠는가?

 

유령 같은 관계들은 그것들이 관련짓는 존재자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의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간에, 그것이 이것에 가깝든 저것에 멀든 간에, 그것이 더 크든 더 작든 간에, 그것은 여전히 이전과 꼭 마찬가지로 남게 된다.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그것은 전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존재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대머리 독수리는 과학자와 상호작용하고 농부는 살충제와 상호작용하는데, 결과적으로 껍질이 얇아지고 생식률이 감소하게 된다. 결국 모든 종류의 식물과 동물은 이런 새들이 부재하는 결과로서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어떤 유기체들이 더 이상 특수한 포식자의 먹이가 되지 않기 떄문에 그 유기체들의 개체 수는 늘어날 것이다. 결국 이런 증식은 다른 유기체들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새, 식물, 설치류 동물, 농부, 곡물, 과학자, 화학 물질, 공장 그리고 일단의 다른 존재자들을 포함하는 어떤 조립체의 물 전체에 걸쳐서 물결이 확산된다.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존재자들의 어떤 가소성을 만나게 된다. 어떤 존재자도 어떤 특수한 시점의 모습을 정확히 유지할 수 없는데, 모든 존재자는 어떤 관계들의 장에 의해 자체의 성질들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바위 또는 납덩이처럼 단단한 것도 상호작용들의 장에 의해 자체의 성질들이 유지된다. 바위가 받고 있는 압력을 변화시키면 그것은 용융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접히거나 알갱이가 변형된다. 금성에서 납덩이는 용융되고 증발된다. 영구성은 비교적 안정한 상호작용 장의 함수이다. 그 장에 거주하고 있는 육체의 전송들을 변화시키면 존재자는 질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다. 존재자의 색깔도 상호작용 장의 결과이다. 존재자는 자체의 표면과 상호작용하는 빛의 파장들의 결과로서 색깔을 나타낸다. 색깔은 하나의 사건이지, 존재자의 고정된 특징이 아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라. 조명 조건이 변함에 따라 채색된 객체를 고찰하라. 색깔이 변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모네가 수련의 큰 잎들과 건초 더미를 연작으로 그린 이유가 있다. 모네는 이런 수련의 큰 잎들과 건초 더미의 사건, 즉 그것들의 생성을 그리고자 했다. 이런 존재자들이 색깔을 변화시키는 듯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색깔을 변화시킨다. 존재자들은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역능, 역량들이 풍부한데,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전개될 때에만 그것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존재자가 그저 어떤 특성 또는 행위를 현실화할 때 이런 상호작용들 가운데 많은 것이 존재자를 변하지 않은 채로 둘 것이지만, 세스 브런들(Seth Brundle)이 파리와 접합되는 허구적 사례의 경우처럼 다른 상호작용들은 존재자의 바로 그 역능들을 변형시킬 것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흔히 존재자들은 가끔씩 또는 일회성 사건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뿐 아니라, 되먹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에게 육체를 전송하여 그것이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현실화되게 만든다. 이어서 수용한 존재자는 육체를 전송한 존재자에게 전송하여 그것이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현실화되게 만든다. 쌍성 체계에서 서로 공전하는 항성들처럼 그 두 존재자는 끝없이 순환하며 물질을 서로 주고받고, 그렇게 함으로써 둘 다 공진화를 겪으면서 그것들 각각의 현실화가 비교적 안정하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체계를 구성한다. 이것이 "음의 되먹임"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노선을 따라 사회적 조립체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조립체가 대단히 억압적이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그것을 변화시키기가 대단히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긴다. 이것은 사회적 조립체의 유형을 다소간 유지하는 음의 되먹임 상호작용들의 촘촘한 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입하여 그런 유형들을 붕괴시키고 변화시키고자 시도하면, 우리 행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상호작용들이 일어나서 조립체의 유형들을 이전의 모습대로 유지시킨다. 이런 되먹임 메커니즘들은 모든 종류의 층위들에서 일어난다. 사회적 조립체를 붕괴시키는 사건들을 규율하는 경찰과 군부의 요란한 되먹임 메커니즘들이 존재한다. 인격체를 구성하는 주체화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사회적 조립체의 생태를 유지하는 특수한 방식들―주체의 의도에도 불구하고―로 행동하고 생각하며 느끼게 하는 성향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부르디외가 아비투스(habitus)라고 부른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식적인 사유의 층위에서는 페미니즘을 공언할 것이지만, 그의 육체적 성향들은 무의식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주의를 나타낸다. 다른 식으로 사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에너지, 노동 그리고 기술의 생태에 삶의 형식들이 갖히게 되는 방식들이 존재한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을 영구적으로 강화하는 매체들이 존재한다. 때때로 참을 수 없는 환경에서 주의를 돌리게 하는, 영구적으로 위안을 주는 소셜 미디어와 오락 같은 기분 전환 거리들이 존재할 뿐이다. 생태가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전제함으로써 작업하지 말아야 한다. 생태가 나타내는 전부는 의존성의 장에서 상호작용하는 존재자들의 존재론인데, 여기서 어떤 상호작용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감성들이 바람직할 수도 있지만, 다른 것들은 상당히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