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Introduction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은 겨우 7년 전에 선언된 철학의 한 영역이다. 이제 그것은 헌신적인 블로그들, 최소한 두 개의 온라인 저널, 대중적 및 학술적 논문들에서의 수많은 논평들, 그리고 이 책을 갖추고 있는 대륙 철학의 한 분파이다. 사변적 실재론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빠른 추이는 그것의 중요성을 부인하기에 충분하다. 낡아서 고물이 된 전통들과 흔히 끔찍한 용어 체계를 갖추고 있는 대륙 철학은 변환의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두려운 점은, 철학이 점점 더 논문과 저서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소수의 사례들에서 불과 몇 달 동안의 사유, 몇 개의 블로그 글 그리고 가장 지루한 관념들 앞에 "내가 부르고 싶은 것(what I like to call)"이라는 구절을 삽입할 수 있는 흠모할 만한 능력으로 강화된, 투박한 제목(네오-이것, 메타-저것)의 새로운 사유 체계들을 밀어내는, 스스로를 상표화하는 강단인들의 시장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리학에 대립적인 것으로서, 내가 물리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다른 학과들에서 인용되는 횟수로 우리가 제대로 해냈는지 가늠할 떄에도, 다른 분과학문들은 더 나쁠지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격려한다. (제 저작―적절한 위엄을 부여하기 위해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춘다―을 흔히 사회학자와 정원사들이 인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그 독일 사상가를 읽고, 그의 번역된 어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 그의 저작의 핵심은 그의 자료 보관소에서 찾아낸 어떤 쪽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하는 반복적인 에세이들을 발표하며 평생을 보냄으로써 경력이 만들어지던 시대는 가버렸다. 여러분이 저술하는 모든 장과 에세이―연서와 일상적인 경축일 카드를 포함하여―에서 그(그리고 변함없이 "그"였다)를 인용할 정도로 그 사상가의 낱말들을 복화술로 말함으로써 경력을 쌓아갈 수 있었던 시절은 가버렸다. 확실히 여러분은 데리다 등의 죽음 후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철학자라면 누구든지 간에 그에게 아부함으로써 여전히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정말로 잘 해내려면, 어떤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 체계가 기성의 정치(학)에 딸려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주장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이 곧 출판될 책의 주제이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곧 출판될 책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그래서 학술회의에서 나누게 되는 대화에서 비장의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권의 책이 있는 것이 최선이다. "저 역시 제가 저술하고 있는 책의 한 장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게도,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강단의 새로운 운동들에 관해 말할 것이다. 여러분 이전의 사상가들은 어쨌든 대단히 잘못되었고, 그래서 여러분은 그들의 사상이 나치즘 또는 암 또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어떤 다른 병폐를 어떻게 초래했는지 서술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낱말을 발명할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여러분의 적들을 짚으로 세워서 불에 태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행운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모든 것을 읽어야 한다는 사람이 아니라 대담한 자를 선호한다.

 

또한 가능한 한 빨리 체계를 갖추는 것이 더 좋다.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자 왕이 자질을 발달시키는 데 대략 50년을 소요했다. 명백히 플라톤은 결코 자신의 이력서를 인터폴리오(Interfolio)에 올릴 필요가 없었다. 예산이 삭감된 분과학문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일자리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모금 행사와 경영대학 학장의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동전이 정말로 필요할 것이다. 저서들이 출판되어야 하는데, 다음 가다머(Gadamer)가 60세에 자신의 첫 번째 주요 저작을 출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저작을 업로드하고 팟캐스트를 다운로드하는 이 새로운 시대가 자유롭게 한다고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미리 주어진 표찰―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데리다적, 푸코적, 들뢰즈적, 아렌트적...)으로 알려진다는 것은 매우 기묘했었음에 틀림없다―이 아니다. 앞에 친(pro)라는 접두어를 붙임으로써 독자적인 표찰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를 "-학(-ology)"으로 끝내지 않는 것이 최선인데, 그것은 가장 흥미를 돋우는 분야조차도 흑색종처럼 들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표찰과 관련하여 곤란을 겪고 있다면, 이미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 앞에 그냥 "탈(post)", "트랜스(trans)", 또는 "메타(meta)"를 붙여라. 탈유물론(postmaterialism), 메타자연주의(metanaturalism) 등이 그냥 집어가기를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전에는 이것에 관해 생각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어조로 글을 적어야 하고, 독자들을 마치 현대 세계와 관련된 친숙한 것들―컴퓨터, 뇌 스캔, 휴대폰 등―을 알지 못하는 듯이 여겨야 한다. 그리고 몇 달마다 표찰을 바꾸는 것에 관해 거의 걱정하지 마라. 상습적으로 가게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가격표를 떼내듯이 표찰을 자주 벗겨내야 한다. 그것이 더 오래된, 지금은 몇 달이 지난 저작과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선 그들이 여러분의 저작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라.

 

나는 여기 이 책에서 이런 전면적인 냉소적 견해에 굴복하지 않고 있는가? 몇 년이 지났고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가? 또한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상품권을 협상하고 있는가? 틀림없이 여러분은 내가 잘 속는다고 놀릴 것이다. 나는 앞에서 약술한 냉소주의에 대한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철학에서 수많은 교직의 상실은 학자들이 온라인 출판 선택지들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재빨리 이름을 알려야 하는 더 무거운 부담, 정기적인 급여 수표에 서명하기도 전에 유명해져야 하는 더 무거운 부담을 의미했다―과 동시에 일어났다.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술어를 고안했고, 그 이후로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회원증을 태워버렸다고 말한―오히려 그가 대학생 선교회 회원으로 밝혀질 것이라는 생각을 얻게 된다―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는, 몇 년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변적 실재론은 또 하나의 판촉용 표찰일 뿐이라고 빗대어 말한다.

 

"사변적 실재론 운동"은 아무튼 제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의제―범심론적 형이상학과 소량의 과정 철학으로 양념을 친 행위자 연결망 이론―를 조장하는 일단의 블로거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저는 인터넷이 진지한 철학적 논쟁을 위한 적절한 매체라고 믿지 않습니다. 또한 블로그를 사용하여 민감한 대학원생들의 오도된 열정을 착취함으로써 온라인 철학 운동을 꾀하려고 하는 것은 용인할 만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과업은 어리석음을 막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진술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리석음의 온라인 제전을 창출한 것이 여태까지의 가장 탁월한 성취로 갖고 있는 "운동"에서 철학적 장점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

 

그 인터뷰에서는 어떤 굉장한 두려움이 언급된다. 그리고 "어리석음의 온라인 제전"에 관한 충격적인 세부 내용이 언급된다. 지금쯤 여러분은 여기서 내가 방향을 바꾸어서 잔디밭을 위태롭게 하는 훌리건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기에는 너무 젊다는 것을 이유로 브래시어를 책망하기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또는 여러분이 이 책을 집었을 때 마침 들었을지도 모르는 운동에 관여된 누군가의 세계사적 혁신, 뛰어남을 논의한다. 여기서 나는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그리고 "범심론적 형이상학"이라는 신성한 삼위 앞에서 일어난 나의 개종 경험을 자세히 말하고 나의 참회를 서술할 것이다.

 

그런데 브래시어가 말한 것의 여러 부분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변적 실재론자들을 옹호하고 반대한다고 자칭하는 웹사이트들에서 트롤링을 목격한 적이 있다면 인터넷에 관한 그의 주장은 의심하기 어렵다. 어떤 소문난 관념들의 교환에 대한 인터넷의 약속은 너무 많은 사례들에서 몰아세우는 말와 과장 행위들의 교환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브래시어의 분석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자. 운동은 그저 전시회 카탈로그와 신물이 나는 저작들에 이름을 올릴 것이 아니라 자체의 지구력과 중요성을 입증해야 한다. 운동과 관련된 초기의 책은 "민감한" 사람들과 "의심 많은" 사람들을 공히 납득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여러분이 어느 쪽이 될 것인지 여부는 브래시어 자신을 비롯한 이런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주장, 논증 그리고 해석들에 대한 주의 깊은 평가―너무 많은 온라인 논의들을 특징짓는 표식인 트롤링을 언제나 피하면서 이루어지는―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충분히 오래 지체했다. 도대체 사변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 정확한 대답을 제시하는 것은 동물원의 모든 동물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상, 이 책에서 언급되는 몇 사람은 자신도 그 술어에 의해 감금당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에세이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야기를 말하자. 2007년 4월에, 미들섹스 소재 아메리칸 대학교의 레이 브래시어, 더 웨스트 오브 잉글랜드 대학교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카이로 소재 아메리칸 대학교의 그레이엄 하만 그리고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퀑탱 메이야수는 런던 대학교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 아래 일련의 강연을 행하였는데, 그것들은 나중에 이전까지는 무명이었던 저널 <<콜렙스(Collapse)>>에 출판되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단 한 가지 점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는데, 그것은 칸트 시대 이후로 유럽 철학이 우리가 실재를 어떻게 아는가―증명, 담론, 변증 그리고 해체에 관련된 정말 끝없는 재료―에 관한 생각에 빠져 버렸기 때문에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그만 두었다는 점이다. 그런 분과학문에서 실재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비철학자들이 당황할 때에도 <<풀려난 허무(Nihil Unbound)>>에서 브래시어에 의해 전해진 표찰은 갑자기 팔려나간다―솔직히 여기서 우리는 케샤(Ke$ha)의 최근 앨범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철학자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우리가 실재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고 누가 말했는가?

 

사유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의문들은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중국식 핑거 트랩(Chinese finger trap)만큼이나 언뜻 보기엔 간단하며, 겉보기에 한 가지 전통 전체에 대해서 사유는 존재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당분간 상황을 희극적으로 매우 단순하게 유지하자. 충분히 곧 늘어날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형상들이 실재적이었지만, 형상들을 가리키는 낱말은 이데아였고, 그래서 그는 서양의 원조 관념론자이며, 주변 세계를 비실재적이고 연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까다롭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형상들이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내재했지만, 또한 그는 가장 큰 행복은 아고라의 장황한 정치적 논의와 판매 권유에서 물러나서 세계의 사물들을 계속 외면한 채 이루어지는 사색 속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친다. 긴 역사를 건너뛰면 가톨릭주의와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즉 신이 타락한 세계를 지배한다는 견해를 만나게 되고, 그래서 또 다시 주의는 자연적인 것보다 초자연적인 것에 집중된다. 근대 시대에 경험론이 전개되고 나서야 철학은 세계에 관한 최선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피안에 존재하는 이성의 통찰 또는 피안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는 관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회의주의에 이르는 문을 개방하는데, 그것은 실재와 관련된 확실성을 부인하며, 심지어 원인, 예컨대, 저 당구공을 때리는 이 당구공과 그것의 결과, 저 당구공의 정확한 궤적 사이의 관계도 부인한다. 머지않아 칸트는 그의 유명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는데, 그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사실상 시간과 공간이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 또는 "물자체" 위에 배치하는 오성의 개념들이라고 주장한다. 거기서부터 철학자들은 실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덜 기울이게 된다고 이야기는 이어진다. 오히려 철학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알게 되는 방식, 또는 세계에 관련하여 우리가 형성하는 관념들, 또는 이런 관념들 사이의 관계들, 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문화적 및 언어적 필터들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몇 계단 더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아무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내 문화는 다양한 신과 속삭이는 바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여러분의 문화는 엔돌핀으로 불리는 쾌락을 부여하는 숨은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서부터, 한두 계단 더 떨어지고, 철학자는 무엇이 실재적인지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의 그림자 너머에 존재하는 "물자체"가 신이 아니라고 아무도 확실히 부인할 수 없다고 여러분은 주장한다. 여러분의 신에 대한 사랑은 짝사랑이고 애견 스키피와 함께 영원히 지내기를 바라는 여러분의 희망은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복음주의적 우파가 자유주의적 상대주의를 공격할 때 대립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상대주의와 신앙은 철학이 실재계를 차지하지 못한 것에서 탄생한 씁쓸한 쌍둥이―"상관주의(correlationism)"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 출산을 도운―이다.

 

이것이 실재계에 마땅한 몫을 줄 때라고 주장하는 사변적 실재론자들이 진입하게 되는 시점이다. 드러나지 않게 점수가 올라가는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용서를 받을 것인데, 용맹스러운 이성의 옹호자들이 탈근대적 구성주의자들과 상대주의적 무리들을 강단의 성채로부터 패주시키는 영웅적 장면을 그들의 박력 있는 산문이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마침내 그들로부터 구원될 것이고, 우리가 운이 좋다면 그들 같은 부류들을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인데, 어느 사변적 실재론자가 언젠가 전할 이야기보다 더 단순하다. 여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세부로 깊이 파고 들어감에 따라 그 이야기는 더욱 더 복잡해진다. 상이한 등장인물들과 숨은 경쟁자들―예를 들면, 객체지향 철학자들 대 과정 철학자들―에 관하여 알아내게 될 것이고, 다음 번에 그들이 여러분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방어책을 일깨우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을지 파악하게 될 뿐일지라도, 머지않아 이 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사변적 실재론 작가들과 그들의 해석자들 모두가 후기 구조주의와 다양한 형태들의 담론 연구가 절정(또는 밑바닥)에 이른 후에 등장한 세대 출신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 작가들의 독설 가운데 일부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와 실존주의자들을 일축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여러 세대들의 철학가들은 영향의 불안을 겪으며, 사변적 실재론들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물론, 이것은 진정한 철학적 차이점들과 중요한 철학적 비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책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런 차이점들을 선명하게 하는 일에 착수한다. 그런데 첫 번째 만남이 향후 관계를 대체로 형성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책―아마도 우리가 다룰 작가들에게 유감스럽게도―이 사람들이 사변적 실재론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방식에 있어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인식한다. 2007년에 개최된 최초의 학술회의에 참가한 네 사람에 속하지 않는 사상가들을 비롯하여 "상관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이 표제어 아래 함께 묶을 것―그것이 행복한 결혼일지 여부는 추측에 맡기겠다―이다. 네 명의 원조 사변적 실재론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한 유일한 점은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그레이엄 하만의 말이 맞다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우리는 이것이 2010년대에 상이한 사상가들을 연결하는 공통의 실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그래서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 제인 베넷(Jane Bennett) 그리고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 같은 중요한 철학자들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의 화자로서 나는 내 친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어떤 일도 아무 논평도 하지 않은 채 기록할 수 없다. 내가 구입한 책을 어떻게 즐겼는가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는 반스 앤 노블에서 뉴에이지 서적들이 철학 서가를 더럽히고 있는 것에 대한 신랄한 비난으로 바뀐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집으로 가는 비행은 국가 보안 상태와 여권 심사 라인의 암묵적인 인종차별주의에 관한 독백 속에 도중하차한다. (더 유쾌한 논평들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되는 사상가들과 함께, 이 책의 부제가 말하듯이, 나는 그들의 문제점과 전망들에 관한 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들의 주장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과 나란히 나열되지 않은 다른 저자들과의 잠재적인 연결을 더 잘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내 분석이 어떠하든 간에, 여기서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점이 존재하는데, 나는 내가 크게 존중하지 않는 저자들―나는 그들과 함께 그렇게 많은 정신적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과 더할 나위 없는 철학적 의미를 갖춘 문제들을 통해서 함께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을 상세히 다루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나는 각 절이 끝날 무렵에 여러분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장에서 나는 상관주의라는 문제로 시작하는데, 퀑탱 메이야수가 잘못된 길을 택했었다고 믿고 있는 철학의 칸트 이후 시대를 그가 추적할 때 그 뒤를 바짝 쫓는다. 메이야수에 의해 규정되었듯이, 상관주의는 직설적인 견해인데, 실재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실재에 관한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의 과업은, 가상 경기자들의 통계 등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리그를 설정하는 데 무한한 시간을 소요하지만 실제 챔피언십 경기 결과를 말해줄 수 없는 환상 스포츠 경기자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무시한 채 사유와 존재가 항상 상관되어 있는 무수한 방식들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철학자 리 브레이버(Lee Braver)가 잘 서술했듯이, "철학자가 지식을 얻지만 세계 전체를 상실한다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 철학자들은, 지난 이 세기 동안의 철학에서 사실상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렸으며, 그리고 그것은 가장 나쁘게 상실된 세계라고 믿고 있다."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의 상이한 종류들―커피처럼 그것들은 강한 변양태와 약한 변양태로 나타난다―를 서술하며, 우리는 그것들뿐 아니라 관념론의 여러가지 상이한 형태들도 구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변적 실재론" 사이의 연결을 알아내게 될 것이다. 사변은 칸트의 작업에서 비롯되는 한 가지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순수 이성 비판>>(1781)에서 칸트의 과업은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칸트의 경우에, 그가 "본체계"라고 부르는, 자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세계, 즉 "현상계"가 존재한다. 칸트의 경우에, 우리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를 생각하려고 할 때 사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사변적 실재론―여기서 그들은 동의한다―은 우리가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에 관한 사변을 전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이어서 2장에서 서술되는, 메이야수가 "선조적 논증(ancestral argument)"이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상관주의에 대한 메이야수의 비판을 다루게 된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것이 규정되기를 기다릴 것이지만, 거의 인식되지 않은 점은 메이야수보다 여러 해 전에 영미 철학자 존 놀트(John Nolt)가 비슷한 추리 노선을 추구했다는 점인데, 그들 사이의 비교는 메이야수가 실재론을 옹호하는 다른 논증들과 어떻게 많이 다른지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이것 덕분에 우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영미 철학 또는 분석 철학에서 두드러졌던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둘러싼 논쟁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이 독자적으로 우리를 실재계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최근까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출판된 글에서 메이야수는 몇 년 사이에 대륙 철학에서 가장 대담한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제시했다. 메이야수의 경우에,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순수한 혼돈이다.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보여줄 것이지만, 정말 대담한 것은 3장에 있는데, 메이야수가 순수한 혼돈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도에 그릴 때이다. 메이야수의 경우에, 매순간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어떤 필연적인 존재자도,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있는 그대로 완벽한 신은 고정될 것이고, 그래서 매순간, 또는 언제나 기꺼이 변화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신이 나타나지 않고 산자를 들어올리며 세상에 정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이것은 오늘날 명백히 우리 주변에 없는 신일 것이다―을 배제할 수 없다. 메이야수의 경우에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줄 뿐 아니라―메이야수는 실존의 부조리함을 둘러싸고 무절제한 또 하나의 프랑스인이 아니다―신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요구한다.

 

그런데 실재적인 것이 혼돈이라면, 아스피린 통, 램프, 커피 컵 그리고 우리 주변의 다른 객체들을 어떠한가? 그것들은 실재적인가? 이것이 메이야수에 대한 그레이엄 하만의 비판인데, 메이야수가 우리 세계의 바로 그 질료를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하만의 작업은 사물들의 세계를 무시하지 말자는 강력한 목소리였는데, 이제는 여러 상이한 분야들에서 듣고 있는 목소리이다. 하만의 경우에, 실재하는 전부는 객체들지만, 어떤 변형이 가해진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같은 철학자들의 견지에서 하만을 설정한 독자들과는 달리, 나는 그의 진정한 모형이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라고 생각한다. 레비나스가 그의 윤리학보다 존재론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은 참인데, 자아는 언제나 이미 타자의 인질이고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타자라는 술어는 우리 앞에 오는 사람들의 특이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만은 타자성에 대한 관계의 이런 구조를 수정한다. 복잡한 접근 방식으로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얼굴의 섬세함, 내게 영원히 감춰져 있지만 항상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풍부한 깊이를 통해서 내게 접근할 뿐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객체들의 한 가지 양상만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결국 이것은 그에게 객체들에 관한 네 겹 모형을 제공하고, 그래서 다른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명칭은 십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지만, 2009년에 하만이 사변적 실재론의 자기 판본에 대해 이 표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이 이 주장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도 볼 것이다.

 

그런데 객체에 대한 하만의 해설에서, 내가 메이야수에 관한 글을 적고 있었을 때 나를 괴롭혔던 어떤 생각이 더 분명해졌다. 우리가 알게 되듯이, 메이야수는 집합론이라는 수학이 없었다면 자기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플라톤주의, 즉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시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견해로 복귀하고 있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이 점을 더 언급하지 않을 것이지만, 20세기에 플라톤주의를 버리고자 하는 끝없는 시도를 하지 않은 대륙 철학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만은, 시간은 외양 속에 묻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객체들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설명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 이것이 그의 작업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인지 물을 것이다.

 

플라톤주의라는 이 유령에 맞서서 우리는 객체들이 진행 중인 생성 과정들에 의해 산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실재론자들,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 제인 베넷 그리고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객체뿐 아니라 인간 역시 어떻게 자연력의 산물인지도 해결한다. 각자는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한 비판가이고, 대륙 철학이 그다지 이롭지 않게도 자연을 무시한 세월을 극복하기 위해 실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한다. 이것은 정치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반전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는다. 전에는 정치적 차이점들이 자연적인 것―계급적 차이와 신분적 차이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처럼 사물들의 질서의 일부라고 한다―이라는 구실 아래 은폐되어 있다고 간주되었지만, 이 사상가들은 사회적 담론들에 대한 분석을 통한 실재계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더 나은 자연주의로 대체함으로써 이런 모조 자연주의들의 패배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넷과 그로츠는 둘 다 비슷한 노선을 따라서 상관주의를 반대하는 논변을 전개한다. 베넷은 인간들이 그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 주변에서 작동하고 있는 조립체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다고 상정하고, 그로츠는 자신이 "혼돈적 실재계"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한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실재론에 걸맞는 정치적 사유를 품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데, 그것은 우선 대륙 철학에서 자연주의들이 왜 비판받았는지 논의할 기회를 제공한다. 결국, 인종차별주의와 여성차별주의라는 문제 전체는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들의 산물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서술한다는 사실이지 않았던가? 왜 그것으로 되돌아가는가? 이것이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글을 읽을 때 많은 정치 사상가들이 제기하는 첫 번째 의문이고, 이 세 명의 사상가들이 계속해서 관여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또한 중요하게도, 이런 자연관이 근대 시기에 일반적으로 서술되던 자연관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랜트의 경우에, 이것은 셸링과 플라톤 같은 인물들에서 입수할 수 있는 자연에 관한 어떤 관념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른바 자연의 회피만이 아니다. 알게 되듯이, 몇몇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우리가 뇌에 관한 새로운 연구 결과도 무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많은 영미 철학자들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자기 스스로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이런 신경과학적 통찰들과 연루되어 있는 철학자들에 관해 세 개의 장을 할애할 것이다. 먼저 논의되는 인물은 레이 브래시어인데, 그는 주체의 합리성은 계속 유지하는 한편으로 신경학에 기반을 둔 서술들을 선호하여 자아에 대한 이전의 견해들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래시어는 이것을 자연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자신의 허무주의적 입장의 견지에서 논의한다. 신은 죽었고, 좋은 제거이며, 그래서 이제 영혼, 정신 그리고 마음도 배 밖으로 던져 버리자. 그런데 현존은 무의미하다는 바로 그 이유가 아무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그것이 그의 "선험적 허무주의"를 정당화하는 요점이다. 여전히 브래시어는, 영미 철학자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의 영향 아래, 자신의 정교한 사유 구조를 건설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작업의 일부가 1960년대에 구조주의의 추도사가 낭송된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또 하나의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주장하는데, 그의 작업 속에서 우리는 "인간"을 우선 제시한 통속 심리학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성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브래시어는 허무주의자일 것이지만, 그에게 철학은 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애드리언 존스턴(Adrian Johnston)의 작업은 브래시어와 비슷한 방향으로 대륙 자연주의를 향해 움직이지만, 그는 주체를 낭떠리지에 밀치기 전에 브레이크를 작동시켜야 한다고 경고한다. 역사와 자연이 주체들을 형성했지만, 주체들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가장 정체된 체계들에서도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그의 정치 이론은 이 점을 명확히 한다. 마지막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카트린 말라부는 뜻밖의 방식으로 브래시어에 일치하는데, 최근의 신경과학적 작업을 인간의 최종적 해체로 서술한다. 그런데 또한 말라부는 뇌 가소성에 대한 모형들로부터 존재론과 심지어 정치학도 전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라부가 "해체된 실재계"라고 부르는 것은 가소성 자체일 뿐이다. 최근의 대중적 해설에서 두개골 전체를 통해서 상이한 중심들을 지닌 연결망으로 서술되는 뇌와 마찬가지로, 말라부는 스스로 구성하고 해체하는, 아무 중심도 없이 연결망을 이룬 공동체들의 정치를 요청한다.

 

그런데 이 요약들―서론의 가장 지루한 부분들―을 마무리짓기 시작하자. 그것이 메이야수의 "생성 없는 시간"이든, 하만의 영원히 현재 속에 있는 객체들이든, 말라부의 경고이든 간에, 신경철학자 토머스 메칭거(Thomas Mwtzinger)의 말을 인용하면, 일인칭 관점이 없다면 시간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빨간색 실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마지막 장에서 나는, 하만이 시간을 다루기 전에 가끔 사용한 사고 실험을 행하고 싶다. 충분히 흔하게도, 이것과 같은 책들은 미래의 연구 방법들을 소개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런 접근 방식을 약간 바꾸어서 사변적 실재론이 탈대륙 철학에서 질 들뢰즈의 영향을 받은 철학들과 함께 지배력이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묻는다. 사변적 실재론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첫 데이트에서 손자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명백히 약간 서두는 듯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변적 실재론의 문제와 전망뿐 아니라 그것의 범위를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직감은 이렇다. 사변적 실재론은 시간의 시험을 견딜 것이지만, 그것이 시간의 실재성을 통과해야 할 시험으로 간주할 때에만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독자는 나를 바보라고 여길 것이다. 누가 시간의 실재성을 부인할 것인가? 시간은 지나가고, 우리 모두는 죽으며, 태양은 뜨고 지는데,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그런데, 물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차이는 비실체적이며, 그리고 수많은 신경과학자들은 시간이란 어떤 종류의 진화적 적응―포식자를 피하고 죽기 전에 교미하는 것이 더 좋다 등―을 위해 뇌가 발명한 환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영미 철학자들은 시간에 관한 반실재론의 강한 흐름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철학 자체가 시간적 질서는 존재의 가장 저급한 형식이라고 선언한 플라톤에서 시작되었는데, 철학의 과업은 시간의 실재성에 유의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하는 것, 즉 일시적 세계에서 형상들의 영원한 실재로 상승하는 것이다. 내 견해는, 마르틴 하이데거, 자크 데리다 그리고 다른 여러 철학자들처럼 사변적 실재론자들에 의해 비판받은 철학자들은 "상관주의자"가 아니라 시간 실재론을 추구했다는 것인데, 하이데거가 서술한 대로 시간으로서의 존재는 그의 기획을 구성했고 더 나중에 해체를 가능하게 만든 주장이다. 그것은 보수적 행위, 과거로 되돌아가서 우리가 참이라고 알고 있는 상관주의를 부인하는 시도인 듯 보일 것이다. 나는 왜 이것이 그렇지 않은지, 왜 시간 실재론이 이름을 대지 않는 반실재론들에 대해서 무자비한 파수꾼―아무것도 시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인지 재빨리 보여줄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이것과 관련하여 지체할 것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결국 시간은 행진한다―또한 나는 이런 빠른 시대에 실재와 진리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인 듯 보이는 과학적 실재론이 왜 바로 이런 점에서 실패하는지 보여줄 것이다. 결국, 시간에 관하여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실재적이지 않다고 부정되는 미래의 사실은 궁극적인 비상관성―경험되지 않고, 그래서 생각하는 주체와 상관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실재적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은 맙소사 가 어떤 새로운 운동을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는지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장 자체는 한 가지 결론, 여러분을 전송하기 전에 건네는 일종의 당의정일 뿐이다. 어쨌든, 궁극적으로 만물이 그렇듯이, 비록 그것이 일시적일지라도, 이제 철학의 시간주의(temporalism)를 옹호할 때이다. 그런데 철학은 결코 득점하기, 철학자들이 서로 비난하고 논박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철학은 무엇이 실재적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대 철학의 이런저런 학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보다 시종일관, 아이들이 말하곤 하듯이, 진실되게 행동하면서(keeping it real) 철학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대화에 동참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 피터 그래턴(Peter Gratton), <<사변적 실재론: 문제와 전망(Speculative Realism: Problems and Prospects)>>(2014), pp.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