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예전보다 더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제는 머리숱이 많이 없어져서 아침마다 머리를 감을 때 머리숱을 풍성하게 해주는 샴푸를 사용한다. 가끔씩 등산을 하면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 더 조심한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올 때면 무릎에 무리가 간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운동을 해도 예전만큼의 지구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며 몸에 무리가 온다 싶으면 살살하거나 그만한다.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룬 평범한 한 명의 남자로서 살아가다보니,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몸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과 사람들 속에 있는 나라는 사람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나도 이제 좀 철이 들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학생시절에도 가끔씩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지하고 조숙하다는 평가를 듣곤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낭만적이고, 대책 없이 정열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진지하고 조숙했다기보다는 일종의 몽상가적 기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진지함과 조숙함은 몽상가적 기질이 발현된 결과였고, 이 몽상가적 기질은 비현실적이고 어쩌면 약간 모자란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국어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를 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읽었다. 이때 러셀의 책을 읽은 많은 학생들 중에서 철학에 매혹된 멍청이는 나 하나였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철학과로 진학해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이것을 진리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열망이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30대 후반인 내가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은 낭만적이고 대책 없는 몽상가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가끔씩 의사, 변호사, 검사로 일하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며 부러움을 느낀다. 또한 나는 나의 딸이 나중에 의사나 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세계에 존재할 것 같은 보편적인 법칙이나 원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 개인의 차원을 초월한 인간 보편적인 개념이나 기준이 있으리라는 믿음, 이해득실을 기초로 결집된 특정한 집단 내에서의 임시적인 견해가 아닌, 누구나 옳다고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견해를 찾고자 하는 열정. 나는 이러한 열망, 믿음, 열정을 몽상가적 기질의 직접적인 발현이라 부른다. 이런 몽상가적 기질은 오늘날처럼 영특하고 영악한 사람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별 쓸모가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사에 새로운 힘을 가져다주고 역사를 바꾼 것은 몽상가적 기질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자연 탐구에 수학을 도입한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플라톤의 황홀한 꿈, 우주의 신비에 대한 케플러의 맹목적인 믿음 등은 대표적인 몇몇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들 몽상가들이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된 다음에는, 실제로 세상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경쟁 속에서 능숙하게 살아남고 현실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가끔씩 의사들의 흰 색 가운을 보며 고대의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열정을 떠올리지만, 그 열정은 이제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화석이 되어버렸다. 나는 상대성 이론을 보며 자연 법칙의 단순성에 대한 몽상가 아인슈타인의 꿈을 떠올리지만, 그의 꿈과 열정은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몽상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남 좋은 일만 하는 멍청이 같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진지하고 순박하고 열정적인 사람보다는 경쟁에 능하고 영악하고 재빠른 사람들이 잘 살고 많은 것을 누리게 된 이 시대에, 몽상가로서 산다는 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는 내 딸이 철학, 수학, 물리학 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여 정의를 실천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 크게 걱정하며 말릴 것이다.

 

    그러나 피를 속이지는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엄마와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다면 십중팔구 나의 딸에게도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께서 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도 너 같은 자식을 낳아 봐야 안다. 그런데 나는 내 아버지의 순박한 낭만과 열정, 내 어머니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나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또한 안다. 아마 나는 나의 딸에게서 또 한 명의 몽상가를 발견하며 약간의 슬픔을 느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 명의 몽상가인 나는 몽상가적 삶이 가지는 비극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매혹적인 가시밭길을 가고자 하는 인간의 수수께끼와 같은 의지는, 한 명의 개체에 불과한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완고한 것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