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어떻게 신행할 것인가?

 

불교를 어떻게 신행(信行)해야 합니까?” 이것은 제가 강의를 마치고 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불교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제 강의를 열심히 들은 사람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신앙(信仰)이 아니라, 믿음과 수행을 겸해야 하는 신행(信行)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종교의 세 가지 구성 요소인 교리(敎理, doctrine), 수행(修行, practice), 의례(儀禮, rite)가 서로 일치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기(所期)의 목적을 조기에 달성할 수 있습니다. 교리란 그 종교를 지탱하는 사상적 체계를 말합니다. 수행이란 교리를 바탕으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의례란 교리와 수행을 하나로 묶는 종교적 의식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의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의례를 통해 교리와 수행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신심을 돈독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행활동은 이 세 가지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2030년 절에 다녀도 붓다의 가르침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또한 불교를 어떻게 신행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불교교리는 단일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릅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그 성립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현격한 교리적 차이가 나타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향한 자리적(自利的) 수행을 강조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제도를 위한 이타적(利他的) 실천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추구하는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교리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혼란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붓다의 교설은 출가자를 위한 교설과 재가자를 위한 교설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출가자에게 해당되는 교설을 재가자에게 설하고, 재가자에게 해당되는 교설을 출가자에게 설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때문에 재가자들은 설법을 들으면서도 많은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재가자로서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출가자는 무소유의 삶이 미덕이지만, 재가자는 보다 많은 재화를 획득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의 승려들은 재가자에게 무소유의 삶을 살라고 강요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화법입니다.


초기경전에 속하는 숫따니빠따(經集)에서는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사람으로부터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n.36)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n,38)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 내용은 가정을 버리고 출가한 수행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재가자는 세속에서 많은 사람과 부딪히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은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장이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간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책임한 부모나 무책임한 남편이 되고 말 것입니다. 특히 많은 사람을 상대로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재가자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외톨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 재가자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겠다는 보살의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대승불교에서 자리적 수행보다는 이타적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결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고통을 내가 다 대신 받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을 깊이 유의하지 않고 초기경전의 내용과 대승경전의 내용을 뒤섞여 말한다면 혼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둘째, 불교의 수행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불교에서의 수행이란 탐()()() 삼독(三毒)에 토대를 둔 잘못된 생활습관을 올바른 생활습관으로 바꾸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根機), 즉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지적 능력에 따라 다양한 수행법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오정심관(五停心觀)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정심관이란 다섯 가지 불건전한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법입니다. 이른바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계분별관(界分別觀), 수식관(數息觀) 등입니다. 첫째, 부정관은 탐욕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 닦는 수행법입니다. 둘째, 자비관은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 닦는 수행법입니다. 셋째, 인연관은 어리석은 사람이 닦는 수행법입니다. 넷째, 계분별관은 아집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 닦는 수행법입니다. 다섯째, 수식관은 분별심이 강한 사람이 닦는 수행법입니다.


이 외에도 초기경전에 묘사된 수행법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틀어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이라고 하는데,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서른일곱 가지 특질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수행법은 출가자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상좌불교에서 위빳사나 수행을 많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가자들은 초기경전에 제시된 다양한 수행법을 닦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재가자들에게는 수행보다 공덕 쌓기를 권했던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시(布施, dāna), 지계(持戒, sīla), 수행(bhāvanā) 혹은 명상입니다. 재가자의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은 예불(禮佛), 염불(念佛), 참선(參禪), 송주(誦呪), 간경(看經) 등입니다.

(1) 예불(禮佛)이란 예경제불(禮敬諸佛)의 준말로 모든 부처님께 예경 드린다는 뜻입니다. 예불은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수행의 첫걸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또한 불자가 삼보에 귀의함과 더불어 세세생생을 통해 끊임없이 계속해야 할 행원(行願)입니다.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예불이라는 별도의 의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과 함께 정해진 규범, 즉 계율에 따라서 하루의 일과를 충실하게 생활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이 중요한 수행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대승불교 국가에서 예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습니다. 특히 한국의 사찰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조석 예불을 거르는 일이 없습니다.



대웅전에서 스님들이 새벽예불하는 모습


(2) 염불(念佛, Buddha-manasikāra)이란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잊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한편 칭명(稱名)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처럼 염불과 칭명은 원래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나무아미타불등 불명호(佛名號)를 외우는 칭명을 염불이라 일컫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3) 참선이란 불교사전에서는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앉아 있는 수행.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앉아서 거기에 몰입함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간화선(看話禪) 전통에서는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4) 송주(誦呪)란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문은 곧 다라니(陀羅尼, dhāraṇi)를 가리킵니다. 송주는 다라니를 지송하는 것인데, 대승불교의 중요한 수행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한국의 선사 중에 다라니 지송을 일과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는 그의 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다라니 지송을 권장했습니다. 이 영향으로 많은 고승들이 선 수행에 앞서 다라니를 지송했습니다. 근세의 수월음관(水月音觀, 1855-1928) 스님과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 스님은 천수다라니 지송으로 큰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의 불자들은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육자주(六字呪), 대비주(大悲呪), 능엄신주(楞嚴神呪) 등을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백용성 스님은 옴마니반메훔지극한 마음으로 행주좌와에 끊임없이 외워라. 처음에는 소리를 내어 외우되 글자 글자를 역력하고 분명하게 하여 자기 귀에 낱낱이 들리도록 10만 편 정도를 외워라고 권했습니다.


(5) 간경(看經)이란 경전을 본다는 뜻입니다. 즉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간경이라는 말 대신에 풍경(諷經)독경(讀經)독송(讀誦)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원래 경전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자를 위해 독경해서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다양한 수행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수행법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꾸준히 실천해야 어떤 경지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의례는 신앙심과 수행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법이 의례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는 수행과 의례를 둘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수행이 곧 의례이고, 의례가 곧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불교도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천수경(千手經)은 경전이 아니라 의식문입니다. 천수경은 다라니를 중심으로 발원, 귀의, 찬탄, 참회, 송주 등을 한 한 번의 독송을 통해 얻을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불교의례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핵심 교리나 사상은 의식문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대승불교권인 중국한국일본의 불교의례 속에는 예배, 찬탄, 공양, 참회, 발원, 회향 등 구체적인 덕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수행 덕목이면서 또한 의례입니다. 따라서 수행과 의례가 일치하지 않으면 정신적 향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백용성 대종사는 만년(晩年)에 저술한 『오도(吾道)는 진리(眞理)』라는 책에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과 같은 성인(聖人)의 명호를 부르되, 하나만 부르고 여러 성인의 명호를 불러 산란케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한 성인의 명호를 부르되 어묵동정(語默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지극히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어 부르지만, 나중에는 입으로 부르지 않고 오직 생각만으로 분명해지면 스스로 자기 자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는 이러한 불교수행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상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신중단에는 화엄성중을, 지장단에는 지장보살을, 영단에는 아미타불을 칭명합니다. 이렇게 하면 교리와 의례가 일치하지 않아서 혼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도량의 성격에 맞게 의례를 통일시켜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상좌불교도가 대승불교의 의례를 봉행하거나 반대로 대승불교도가 상좌불교의 의례를 봉행한다면 이것은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것과 같습니다. 교리와 의례가 서로 상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좌불교에서는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만을 스승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상좌불교도가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교리는 이론에 해당되고, 수행과 의례는 실제에 해당됩니다. 이 세 가지를 줄이면 이론과 실제(theory and practice)가 됩니다. 불교의 신행도 이론과 실제가 일치해야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18. 3. 15. 

마성/ 철학박사팔리문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