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쉽게 변하지 않는 이유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육체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해가지만, 어떤 개인이 갖고 있는 고착화된 고정 관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長部)》15 마하니다나-숫따(Mahānidāna-sutta, 大緣經)에서는 집착(upādāna)’이 그 근본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에 의하면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것을 네 가지 집착[四取]’이라고 부른다. 네 가지 집착(cattāri upādānāni)이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a-upādāna, 欲取),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見取),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sīlabbata-updāna, 戒禁取),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 我語取)이다.(DN., p.58)


인간의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이 네 가지 집착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때문이 아니라 네 가지 집착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집착에서 비롯된 고착화된 개인의 고정 관념으로 말미암아 아소견(我所見, attaniya-diṭṭhi)이 형성된다. 이 경과 대응하는 한역 《장아함경(長阿含經)》13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에서는 네 가지 집착을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취(戒取), 아취(我取)라고 번역했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도 네 가지 집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欲取]이란 무엇인가? 《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i, 法集論)》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간절한 욕망, 탐욕, 즐거움, 갈애, 애정, 열병, 계박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다.”(Dhs.212)고 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강하게 거머쥔 갈애(渴愛, taṇhā)를 뜻한다. 거머쥔 갈애란 이전의 갈애로 인해 더욱 강해진 그 다음의 갈애이다. 이전의 갈애는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다. 또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 대상을 열망하는 것이 갈애이다고 말한다. 마치 도둑이 어두운 곳에서 손을 뻗는 것처럼, 이미 얻은 대상을 쥐는 것이 집착이다. 나머지 세 가지 집착은 간략히 설명하면 사견일 뿐이다.


둘째, 견해에 대한 집착[見取]이란 무엇인가?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aya, 中部)》(MN41)에 의하면, “그는 삿된 견해를 가진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제사(헌공)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라는 전도된 소견을 가진다.”(MN., pp.287) 요컨대 업의 인과를 믿지 않고, 이 세상에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사문·바라문이 없다고 말하는 것 등이 모두 잘못된 견해들이다. “이러한 형태의 견해 혹은 전도된 억설을 일러 견해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Dhs.212)


셋째,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란 무엇인가?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은 혼동하기 쉽다. 이것은 불교에서 바르게 행해지고 있는 계율이나 의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붓다시대 인도의 고행자들이나 바라문교(지금의 힌두교)에서 잘못 행해지고 있던 규범이나 관습 혹은 종교의례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소의 흉내를 내거나 개의 흉내를 내면 천계(天界)에 태어난다고 하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된 미신적인 행위들이 이에 속한다.


마누법전》에는 먹어도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규정되어 있다. 이를테면 양파나 버섯과 같은 종류, 신에게 공양한 음식, 송아지가 없는 암소의 젖 등은 먹거나 마셔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마누법전54-27) 또한 송아지를 묶은 끈을 넘어서는 안 된다든가, 새벽에 먹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물건을 사거나 해서는 안 된다든가, 손톱이나 수염을 잘라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것이 《마누법전》에 규정되어 있다. (마누법전438-91) 이런 것들은 힌두교도들이 지켜야 할 규범, 즉 계율인 셈이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죄악의 더러움은 신성한 갠지스 강에 들어가 그 물로 씻으면 바로 깨끗하게 되고, 이로써 사후에는 천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힌두교도들 사이에 널리 행해지고 있는 종교의례이다. 붓다는 이러한 종교의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붓다는 정신적인 죄악의 더러움은 물질적인 물에 의해 정결하게 될 수 없고, 오직 마음의 참회나 올바른 수행법에 의해서만 정결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잡아함경44권 제1185; MN7)


한국의 일부 승려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례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의 의례는 근본적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법(方便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의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방식 그대로 꼭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일종의 계금취견(戒禁取見)에 해당된다. 그리고 잘못된 전통과 관습은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붓다는 당시의 잘못된 사회적 관습, 즉 사성계급 제도와 동물희생 제의(祭儀)들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붓다를 사회개혁을 실천했던 조용한 혁명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넷째,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我語取]이란 무엇인가? 스물 가지 유신견(有身見)이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바른 사람의 법에 교육받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한다.”(Dhs.212-213) 오온의 안팎에 불변하는 자아(自我)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있다고 고집하는 집착을 말한다.


네 가지 집착이 일어나는 순서는 먼저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견해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 순서대로 일어난다. 그러나 네 가지 집착을 버리는 순서는 먼저 견해에 대한 집착이 버려지고, 그 다음에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 순서대로 버려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예류도(預流道)에서 제거되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맨 나중에 버려진다. 이것은 아라한도(阿羅漢道)에서 제거되기 때문이다.


한편 네 가지 집착에 대해 가르치는 순서는 먼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가르친다. 대개 사람은 욕망(ālaya)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은 분명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는 자는 감각적 욕망을 얻기 위해 갖가지 제전, 잔치 등을 베푼다. 이것이 그의 견해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 다음에 견해에 대한 집착이 일어난다. 그것은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과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두 가지 가운데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은 소처럼 행동하고 개처럼 행동하는 형태를 보고서 알 수 있기 때문에 거칠다. 그래서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을 먼저 설했고,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은 미세하기 때문에 나중에 설했다. (대림 옮김, 청정도론3, 초기불전연구원, 2004, pp.137-141 참조)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청정도론》에서 언급했듯이, 먼저 견해에 대한 집착[견취]에서 벗어나야 나머지 세 가지 집착을 순서대로 버릴 수 있게 된다. 훌륭한 학자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곧바로 그것을 시인하고 수정한다. 그것이 학문하는 자의 의무이자 자세이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어떤 기사가 오보로 확인되면 곧바로 정정 보도를 내보낸다.


그러나 소인배들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르게 알았을 때에는 그것을 과감히 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예전에 잘못 알고 있던 지식들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불자가 가야할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길이기 때문이다.

2018. 8. 16.

마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