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를 위한 수행인가

 

요즘 한국불교도 동남아시아 상좌불교의 영향을 받아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에 가서 잠깐 동안이나마 상좌불교를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행병(修行病)에 걸린 듯하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바쁜 재가자들에게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수행은 무엇 때문에 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수행인가?’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현재 남방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위빳사나 수행을 명상(meditation)’ 혹은 마음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빨리어 바와나(bhāvanā, 수행)를 일본인이 명상(瞑想)’이라고 번역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위빳사나 수행이든 사마타 수행이든 통틀어 수행(修行, bhāvan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을 바르게 닦으려면 초기불교에 대한 교학과 불교의 수행체계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냥 앉아서 일어남’ ‘사라짐(정확히 말하면, ‘내려감이라고 해야 한다. 영어로는 ‘rising’ ‘falling’이라고 한다)만 관찰한다고 해서 수행에 진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메커니즘(mechanism)과 수행의 원리를 모르면 내면의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행과 삶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행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재가자에게 지나치게 수행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강요하기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나머지 여력이 있으면 이웃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도의 바른 삶의 자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면 진정한 불제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결코 세속의 아픔을 외면하라고 하지 않았다. 붓다는 중생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임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고 선언했다. 유마거사의 정신을 계승한 대승불교에서 출가자들이 중생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유마거사의 가르침에도 위배된다.


대승불교는 한마디로 보살의 불교이다. 보살의 삶은 나보다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흔히 소승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남방의 상좌불교에서는 사회적 문제에 더욱 적극적이다. 그들은 출가 사문으로서 권력에 대항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고 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승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Pallekelle Devanapethis Samatha Vipassana Meditation Centre in Sri Lanka



그런데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불교 승단에서는 세속과 담을 쌓고 선방에 앉아 있는 것을 최고라고 여긴다. 이러한 잘못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이것이 과연 대승보살의 길인가? 선승들이 그토록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는 현재의 상좌불교보다도 못한 소승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불교학자는 사석에서 한국불교는 대형버스를 혼자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차라리 소승이라고 자처하고 혼자 타고 가는 자가용이 더 대승적이지 않은가? 한국불교는 밖으로는 대승불교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큰 대형버스를 혼자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어느 쪽이 더 경제적인가?


입으로는 대승을 외치면서 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이쪽이 아닌가? 시주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태국불교의 경우, 단기 출가자를 포함하여 약 40만 명이나 된다. 그 많은 승려들이 경제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태국의 승려 상당수는 교육과 복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태국 국민들의 교육은 승려들이 거의 다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승려 교사 혹은 승려 교수 등의 신분으로 각자 자기 직책에 따른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탁발을 통해 신자들에게 복을 지을 수 있는 복전(福田)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기의 고유 업무가 별도로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불교는 물론 국가와 이웃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속된 말로 밥값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사원에서 보내는 많은 승려 중에는 자신의 밥값을 충실히 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다. 실체 없는 깨달음에 함몰되어 선방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면 자기 자신은 물론 한국불교와 국가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제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정신활동, 종교의 신성함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일부 승려는 선방에서 해제비를 받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승려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해제비 때문에 선방에 앉아 있다면,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노동하여 먹기를 권한다.


한때 까시바라드와자(Kasibhāradvāja)라는 바라문이 붓다께 당신도 농사를 지어 밥을 먹으라고 말했다. 그때 붓다는 나도 밭을 갈고 농사지은 후에 먹는다고 대답했다. 나에게 믿음은 씨앗이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쟁기와 호미, 부끄러움은 호미자루, 의지는 쟁기를 매는 줄, 생각은 호미 날과 작대기입니다.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실을 김매는 일로 삼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내 소를 쟁기에서 떼어 놓습니다.” 붓다가 말한 이와 같은 진정한 의미의 밭갈이를 하고 밥을 먹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도 승려로서 밥값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출가자로서의 밥값을 다하기 위함이다.

2019. 5. 8.

마성 이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