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화를 거부하는 붓다

 

지난해 내가 법보신문에 <붓다는 전지자인가>라는 칼럼을 발표했을 때, 어떤 불교학자가 감정에 섞인 반론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붓다가 전지자라고 우겼다. 그런데 일본의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가 쓴 불교개론에 위 제목의 글이 나온다. 그래서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여 소개한다. 정확한 출처는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이원섭 옮김, 불교개론개정2(서울: 현암사, 2001), pp.48-53에 실려 있다. 편집자 주

 

이것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나는 한 경(상응부경전22:87 바카리)이 전하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경의 이름 그대로 바카리(Vakkali, ‘왁깔리로 읽어야 한다)라는 병든 비구를 주인공으로 하는 슬픈 이야기이다. 그는 마가다의 서울 라자가하(王舍城)의 어느 옹기장이네 집에서 병을 앓는다. 그러나 병세는 나빠질 뿐이어서 나아질 가망은 없어 보인다. 그때 그가 일으킨 마지막 소원은 다시 한 번 붓다의 모습을 뵙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그 뜻을 붓다에게 전한다.

붓다는 그 무렵 라자가하의 교외인 죽림정사, 즉 베루바나(竹林)의 승방에 머물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붓다의 모습을 본 바카리는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을 만류하며, 그를 다시 편안히 눕게 하고 그 머리맡에 앉았다.

 

어떠냐, 바카리야, 견딜 만하냐. 좀 차도가 있느냐?

대덕이시여, 저는 이제 마지막입니다. 병은 더할 뿐이어서 아무래도 회복될 가망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소망으로 세존의 모습을 우러러 뵙고, 두 발에 정례(최대의 경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붓다가 그에게 하신 말씀을 경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바카리여, 이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는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본다고.”(SN., p.120, 편자 삽입)

 

이 말씀은 필시 따뜻한 어조를 띠고 있었을 것이다. 병든 제자의 머리맡에 앉아, 붓다의 마음은 동고 동비(同苦同悲)의 생각으로 차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말씀은 바카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함께 자리를 한 비구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붓다는 자기에게 예배하고자 하는 청을 거부하고, 죽어 가는 제자에게조차 너는 나를 보려 하지 말고 법을 보라고 설한 까닭이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인용한 것은 거기에 붓다와 그 제자들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붓다의 가르침과 수범을 따르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붓다는 그들에게 예배의 대상도 아니고 매달려서 구제를 탄원해야 할 상대도 아니다.



병든 왁깔리 비구를 방문한 붓다의 모습

 

물론 불교라 해도 교조(敎祖)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는 점에서는 기독교나 회교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수가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지위라든지 또는 마호멧이 회교 안에서 담당하는 구실과 비교해 볼 때 붓다와 불교의 관계는 그런 것들과 꽤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기독교의 구원은 바울의 말에 의하건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로마서3 : 2324)

 

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무소불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또 그 독생자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피를 흘려 속죄했다는 것, 그리고 심판자로서 재림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 독생자,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폰테오 빌라도 때 괴로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으나,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무수불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시어, 거기서부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을 믿노라.”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것, 또 인간을 위한 속죄자요 심판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이런 예수 그리스토의 존재는 영원히 빠뜨릴 수 없는 중심 관념을 이루고 있어서, 그에 관해 이런 신앙 고백을 하지 않고는 기독교가 성립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불교에도 교조인 붓다 고따마에 대한 신앙 고백은 있다. 붓다의 제자나 신도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른바 삼귀의를 표명해야 한다.

 

붓다에게 귀의하나이다.

담마()에 귀의하나이다.

상가(僧伽)에 귀의하나이다.

 

이 삼귀의에서 붓다에 대한 신앙 고백이 첫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뜻하는 바는 그가 법을 알고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니까, 그 지혜와 인격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한다는 것이며 그 이외의 뜻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붓다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 이런 표현이 경전 속에 자주 나타난다.

 

붓다에 대해 무너짐이 없는 믿음을 지니노라. 세존께서는 응공(應供)정등각자(正等覺者)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타(佛陀)세존이시라고.”

 

여기에 열거된 어마어마한 열 가지 이름은 예로부터 붓다의 십호(十號)’라고 일컬어지거니와, 그것들을 쉽게 풀이하면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응공), 샅샅이 깨달은 사람(정등각자),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사람(명행족), 다시는 윤회를 되풀이 하지 않는 사람(선서), 이 세상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세간해), 모든 중생의 스승인 사람(천인사), 가장 높은 사람(무상사), 마음 잘 조종할 수 있는 사람(조어장부), 진리를 깨달은 사람(불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세존)이라는 뜻이어서, 어디까지나 그가 위대한 인간임을 찬미한 것은 될망정 신적(神的)인 존재로서 다루어진 흔적은 전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나 따지고 보면 붓다는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신의 아들이 아니며, 신과 인간의 중재자이거나 속죄자도 아님이 분명하다. 더구나 심판자이거나 신일 수는 없다. 신격화의 시도는 한 걸음도 붓다의 교단에 발을 붙일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