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랑스 항공전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  ( Sichelschnitt )

 
1939년 10월 9일, 폴란드 함락 직후, "총통 명령 제 6호"가 하달되면서,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본격적인 대프랑스, 저지대 국가 침공 계획의 구상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황색작전(Fall Gelb).... 당시 군수뇌부의 거물 육군총사령관 발터 브라우히치(Walter von Brauchitsch) 원수와 그 참모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대장은 일차대전 당시 독일의 진격 과정과 유사한 북프랑스 진격을 계획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는 스위스 북단부터 시작되는 마지노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이 버티고 있어, 바보 아닌 다음에야 이곳을 정면돌파하는 것은 곧 자살행위라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는 기정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노선이 끝나는 룩셈부르크의 북단과 벨기에 동부는 광대한 삼림지대인 아르덴느 지역이 진격을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라, 이들이 구상한 초기 계획은 독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Gerb von Rundstedt)장군의 참모장인 에이리히 만슈타인(Erich Manstein)장군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훗날 독소전에서도 천재적인 용병술로 이름을 날리는 명석한 두뇌의 지장으로, 그는 프랑스를 상대로 이런 뻔히 속이 보이는 전면전을 시도할 경우, 승리 가능성이 희박할 뿐 아니라, 어렵게 승리하더라도 독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함을 간파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프란츠 할더등이 계획한 북프랑스 진격의 목표는 프랑스 전체의 함락이 아니라, 저지대 3국 점령과 북프랑스에 영국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지도] 독일의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 침공 지도.... A, B, C 집단군의 위치와 각각의 진격 루트를 잘 볼 수 있다. 먼저 B 집단군이 프랑스가 예상한 공격루트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경유해 북프랑스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며, 대대적인 유인작전을 벌였고, 프랑스와 영국 원정군은 프랑스 북부로 거의 모든 병력을 집중시켰다. 연합군 항공전력도 주로 마스트리츠와 리에주 사이의 축을 방어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했다. 이때 주공인  A 집단군의 기갑전력이 아르덴느 삼림지대(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을 향해 비어있던 프랑스 후방을 향해 맹진을 시작했다. 프랑스 남부부터 벨기에에 이르는 마지노선(검은 색 굵은 선)과 아르덴느 삼림의 천혜의 요새를 맹신한 프랑스는 어처구니 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에 반해 만슈타인(좌측 사진)은 이른바 낫질 작전 "Sickle stroke"을 주장했는데, 기갑군단장 구데리안(Heinz von Guderian)이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 이들의 계획을 대강 요약하자면 이렇다. (1) 할더 등의 주장대로 또 연합군의 예상대로 B집단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평원을 진격해, 북프랑스의 연합군 주력과 대치함으로써 대대적인 유인작전을 펼친다.  이로써 연합군 수뇌부는 그들의 예상 방향으로 독일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든다. (2) 이때 독일의 주공 A 집단군의 기갑사단이 아르덴느 삼림을 돌파 한다. (3) 아르덴느를 무사히 돌파한 기갑사단은 공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뮤즈강을 도하한 후, 쾌속의 진격을 시도한다. (4) 송곳의 끝, 기갑사단의 방어선 돌파와 진격을 측방과 후방에 포진한 보병사단이 연이어 따르며, 재빨리 공간을 메워 나간다. (5) 기갑사단은 진격로를 북서로 잡고, 영불해안에 도달해 아예 프랑스 양단시켜버림으로써 북프랑스에 밀집한 연합군의 대규모 병력을 완전 포위 섬멸한다. 정말 어마어마한 작전이 아닐 수 없다. 그 작전계획 "낫질작전"이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 이들은 마치 수확기의 벼를 그 밑둥에서 낫으로 잘라, 그 아래 작은 뿌리 부분(프랑스 남부)은 남겨두더라도, 그 윗쪽에 열린 풍성한 곡물(북프랑스에 몰려 있는 프랑스와 영국의 주력부대)을 손쉽게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진] 하인츠 폰 구데리안 장군의 모습.. 프랑스에서 아르덴느를 뚫고 스당으로 곧장 진격해 뮤즈강 도하를 성공시킨 후.... 프랑스 심장부를 가르고 양단해 단 며칠만에 영불해에 다다른다.
 
 
만슈타인의 낫질계획을 처음 접한 브라우히치와 할더를 위시한 대다수의 독일 수뇌부는 이 계획에 반발하고 일어났다. 이들은 전차를 신뢰하지도 않았고, 급속 진격이 불러올 보급의 장애와 프랑스의 대반격을 우려했던 것이다. 히틀러도 양단간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1940년초....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각기 히틀러와 독대할 기회를 잡았고, 히틀러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즉 1940년 2월 먼저 만슈타인이 히틀러와 오찬을 할 기회에 자신의 계획의 타당성을 다시금 설명했다. 훗날 만슈타인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히틀러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내가 지난 몇달간 주장해왔던 요점을 파악했으며, 나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그 얼마후인 3월 15일 구데리안과의 면담을 가진 히틀러는 결정은 했지만, 완벽히 신뢰할 수 없었던 심정을 털고, 드디어 이 놀라운 전략에 적극 지지를 보내게 된다.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단 4일이면 뮤즈강을 도하할 수 있다고 말하자, 히틀러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구데리안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정지명령이 없는 한 계속 진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몇개월 후, 구데리안의 진격은 전광석화와 같이 프랑스를 갈랐다. 재밌는 것은 이날 구데리안이 언급한 "정지명령"이라는 단어는, 반격을 걱정한 히틀러의 말도 안되는 "진격 정지명령"으로 실현되어 버려, 연합군의 덩커크 대철수를 가능케했으니, 말이 씨가 된다고나 할까?
 
이에 반해 프랑스의 준비는 어떠했을까?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Maurice Gamelin)원수는 일차대전 전술의 방식을 아직도 곱게 간직한 위인이었고, 프랑스 중부의 접경은 마지노선에 일임하고, 독일의 주력이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쇄도할 것이라 확신에 차있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의 주력을 벨기에 북부 접경에 배치하였고, 게다가 가장 약체이며 전투 준비마저 미약한 제 2군을 마지노선 바로 위 스당, 버든, 아르덴느 지역에 배치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는 아르덴느의 삼림 지대를 강력한 진격의 걸림돌로 단정했었고, 그나마 제 2군을 배치한것도 북부의 주력부대를 남방에서 지원하기 위해서였으니, 독일이 이런 무능한 사령관을 적의 우두머리로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완벽한 기만 작전  -  B 집단군과 제 2 항공전대의 유인 작전 -

 
1940년 5월 10일... 이날은 프랑스에게는 치욕적인 일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독일은 크게 3개의 집단군으로 나뉘어, B집단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공수부대를 앞세워 진격해 물밀듯 들어갔고, C집단군은 마지노선 근처에서 트릭을 보였으며, 이런 와중 주공인 A집단군이 정중앙에서 벨기에 동부의 아르덴느 삼림을 돌파하고 있었다.
 
당시 루프트바페는 크게 두개의 항공전대로 나뉘어 앞 단원에서 언급한대로, 제 2 항공전대(Luftflotte)는 B 집단군에 배치되어 이를 엄호했고, 제 3 항공전대는 아르덴느를 돌파하는 A 집단군의 진격로 개척을 위해 대거 포진한 상태였다. 이들 두 항공전대의 규모는 300 여기의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1100 여기의 달하는 수평 전술 폭격기들, 호위 전투기 Bf 109만해도 1000 기를 넘는 사상최대의 규모였다.
 
 
폭격기 1120기    (Do-17, He 111, Ju 88)
급강하 폭격기 324기   (Ju 87)
지상공격기 42기    (Hs 123)
단발 전투기 1016기   (Bf 109)
쌍발 전투기 248기   (Me 110)
그외 정찰기 밑 수송기 다수
 
 
5월 11일.... 아침...  독일 제 2 폭격 비행단(KG2)소속 폭격기들이 프랑스의 국경을 넘고 있었다. 가늘고 날렵하게 뻗은 이들의 동체와 쌍발의 엔진.... 일명 나르는 연필(flying pencil)이라고 불리우는 독일의 폭격기 Do-17... 이들은 프랑스의 목표를 향해 편대형을 이루며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프랑스 복스(Vaux) 비행장... 이곳은 파병해온 영국의 제 114 폭격 비행대가 기지로 삼고 있는 곳으로, 아침부터 영국 블렌하임(Blenheim) 폭격기들의 출격 준비로 지상은 온통 복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 영국 비행장 너머에서 일군의 항공기들이 은은한 프로펠러 음를 내며 저공비행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출격을 준비하던 영국 지상병과 조종사들은 어떤 아군 비행대가 이미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겠거니 하며 그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다가오는 항공기들이 그들의 머리 위까지 다달았을때, 영국군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익에 그려진 커다란 검은 십자가....  괴멸은 너무도 짧은 순간이었다. Do-17기들이 일제히 쏟아 부은 50 kg 짜리 투하용 폭탄들은 마치 도미노가 차례차례 쓰러지듯, 폭발과 동시에 출격 준비를 위해 투하용 폭탄을 가득 실은 영국 폭격기들의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비행장은 일시에 불지옥이 되어 버렸다. 아무런 요격기도 발견되지 않는 이런 하늘에서 독일 폭격기들은 여유있게 선회하며, 폭탄창에 남은 폭탄 마저 다시 토해냈다. 이날의 비극은 아직도 영국 왕실 공군의 공식 항공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제 114 비행대 자신들의 비행기지에서 전멸했음."   이날 폭격에 참여한 독일 Do-17 폭격기에 탑승한 무전병 베르너 보르너(Werner borner)는 8 mm 카메라로 이 모습을 생생히 기록했고, 얼마후 이 필름은 히틀러 총통관저에서 "공군의 정확한 폭격의 예"로 상영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단지 일 예일 뿐이다. 독일공군은 개전과 동시에 프랑스의 주요 비행장들을 기습해, 다수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시켜 버렸다. 한마디로 당시 루프트바페는 독일 기갑 사단의 강철 우산과도 같았다.
 
 
 
 
(상) 프랑스의 최신예기 드와르탱 520 전투기.... 개전 당시 30 여기가 운영되고 있어 전세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 프랑스의 호크 75 전투기.. 미국산 P-36의 수출형이었다. 그나마 숫적으로 또 질적으로 주력 프랑스 전투기였으나, 루프트바페의 기습에 괴멸된다. 프랑스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기를 가장 많이 격추한 기종
 
 
5월 12일..... 이날은 독일 공군에게는 경이로운 항공전의 승리... 프랑스와 영국 공군에게는 지울수 없는 오명의 하루가 되어 버린다. 주 공격로인 아르덴느 보다도 훨씬 북부인 마스트리츠(Maastricht)와 리에주(Liege) 사이 공격선에 루프트바페의 공격을 집중해 유인 작전을 시작했다. 이것은 B 집단군의 진격 엄호라는 측면과 더불어 주공인 A 집단군의 아르덴느 돌파의 기습의 효를 극대화하려는 일석이조의 책략이었다. 벨기에에서 쾌속 진격하는 독일의 진격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기들은 여러 차례 폭격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독일 요격기와 대공포의 사격에 줄줄이 격추되었다.
 
특히 독일 제 27 전투 비행단 (JG 27)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날 총 340회 출격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Bf 109 한대당 하루 4-5회 출격을 한 셈이며, 이를 통해 총 28기의 격추를 달성했다. 다른 비행단 역시 JG 27에는 미치지 못하나 각기 20 여기의 격추를 달성해냈다. 개전 3일만에 영국 공군 파병 비행단의 절반에 육박하는 200 여기가 격추 혹은 지상파괴되고 만 것이다. 비록 영국 공군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즉 페어리 배틀(Fairey Batle) 경폭격기 32 대가 진격의 선두를 강타하려 했지만, 독일 Bf 109들의 요격으로 그 절반인 13기가 줄줄이 격추되어 버린 것이다.
 
당시 벨기에 북부 접경에 위치한 영국 파병군 사령관 고트(Gort)경은 본국에 위급합을 알렸다.
 
"우리에겐 항공기가 필요하다.... 전투기와 정찰기가 없이는 적의 진격을 예상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가진 항공전력의 50%는 괴멸당했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아직 항공기의 추가 파병을 결정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 며칠은 연합군에게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만신창이 된 영국 공군이었지만, 이것도 아쉬웠고, 프랑스 지휘부는 영국공군에게 계속 북부 리에주(Liege) 방어선에 전력을 집중해 줄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엄청난 자충수가 되어 버린다. 드디어 저 남쪽 아르덴느 삼림을 조용히 개척하던 독일의 주공 A 집단군의 기갑전력이 기나긴 숲을 벗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이 주공을 막아내야할 영국의 공군력이 다급해진 프랑스의 안달로 아르덴느와는 너무도 먼 북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뮤즈강을 넘어서

 
빽빽한 침엽수림의 끝없는 숲 아르덴느를 전차가 돌파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 못한 것이었기에 그 기습의 효과는 자연히 극대화 되었다. 개전과 동시에 기갑사단의 바로 앞에서 독일 공병들이 숲을 개척해갔고, 드디어 5월 12일 광대한 숲을 꽤뚫어 버린 것이다. 이들은 클라이스트(Kleist)  장군 휘하의 구데리안(Guderian)과 라인하르트(Reinhardt)가 이끄는 독일 기갑 전력이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서 독일 B 집단군의 매서운 초기 유인 공세로 프랑스와 영국은 자신들이 예상한 방향이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전력을 프랑스 북부에 두고 있었으며, 공군 역시 북부 지상군의 지원을 위해 온힘을 다쓰고 있었으니, 이곳은 완벽한 기만 전술에 의한 공백 그자체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안전한 후방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 아르덴느 지역을 맡고 있다고 유유자적하던 프랑스 제 2군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연이어 달려온 독일 수투카를 위시한 폭격기들이 Bf 109의 호위를 받으며, 이들을 괴멸시켜 나갔다.
 
 
[사진] 출격 직전의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 프랑스에서도 역시 아군에게는 전설로, 적지상군에게는 악명을 날린 기종이다. 
 
 
개전 단 3 일만인 5월 12일 저녁,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의 정예 기갑사단은 드디어 뮤즈강변의 스당(Sedan)에 도달했다. 이후 롬멜의 제 7 기갑사단 역시 스당 보다 약간 북쪽의 디낭(Denain)을 점령하면서 뮤즈강변에 도달했다. 뮤즈강은 프랑스의 동부 지방을 남북으로 유유히 흘러내리는 강으로, 그끝이 벨기에를 경유하여  접어 드는 긴 강이다. 당시 프랑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항선이었고, 독일의 입장에서는 아르덴느 이후 두번째로 맞이한 진격의 걸림돌이었다.
 
스당을 중심으로 뮤즈강의 방어선은 "작은 마지노선"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강변을 따라 수많은 진지와 요새화된 포대를 갖춘...... 일차대전 당시 최대 격전 버든(Verdun 혹은 베르덩 전투) 전투가 이 강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벨기에의 요새 에반 에말 역시 뮤즈강 연안에 있는 것만 봐도 방어선으로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프랑스군은 이미 교량을 파괴하고 강 반대편 너머에서 만약 독일이 도하할 경우 강력한 반격으로 일침을 가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독일 기갑사단이 아니라, 루프트바페에 의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만다.
  
5월 13일, 구데리안은 루프트바페에 뮤즈강에 대한 선공을 요청했다. 가장 먼저 날아온 것은 역시 Ju 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이었다. 이들은 먼저 스당의 대공포좌와 포병 진지를 목표로 급강하 공격에 나섰고, 한대씩 급강하를 회복할때마다, 한개의 진지가 검은 연기와 파편을 일으키며 파괴되었다. 뮤즈강 강뚝에 자리잡은 프랑스군들의 머리 위로 날아와 송곳을 꽂듯 정확한 급강하 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수투카의 폭격을 마치고 귀환을 준비할 때, 하늘 저너머에서 다시 일군의 독일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Do-17 , He 111 수평폭격기들..... 수투카가 정확한 조준 폭격으로 이미 대공포 다수를 파괴한 연후라 이들의 공격은 별다른 지상 저항없이 수행되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약 3시간 동안 지속된 루프트바페의 집중 폭격으로 강반대편을 겨누고 있던 프랑스 포병들의 포신은 고철덩이가 되어 버렸고, 프랑스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으며 통제불능의 마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반대편 강변을 돌볼 틈도 없이 프랑스군은 머리를 감싸쥔 채, 살기에 급급했고, 방어선은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구데리안은 88 mm  대공포를 스당의 방어진 공격에 사용해, 훗날 대전차포로서 유명세의 전초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날 저녁 독일 기갑 전력은 저항을 극소화하며 여유있게 도하를 시작했고 강반대편에 교두보를 만들어 냈다.
 
 
[사진] JG 53의 에이스들..... 프랑스 항공전에서 엄청난 전전과를 달성해낸 전설의 비행대.... 역시 에이스들은 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베르너 뮐더스 역시 당시 이 비행단 소속이었다.
 
 
5월 14일,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뒤늦게나마 항공전력을 스당에 집결시켰다. 이차대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항공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기의 양측 항공기들이 스당을 비롯한 뮤즈강 상공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말리는 일대 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일 조종사들은 포니워 기간 동안, 프랑스와 영국 공군을 상대로 탐색전을 펼치는 기간 동안, 프랑스 공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한 상태였고, 또 스페인 내전 이후, 폴란드 등지에서 이미 실전 경험까지 끝낸 엘리트였으며, 세계최강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다. 공격의 선봉에 선 투지에 불타는 이들을 막을 자는 프랑스 상공엔 아무도 없었다.
 
가장 뛰어난 전과는 독일 제 53 비행단(JG 53)에 의해 달성된다. 전설의 에이스 베르너 뮐더스가 이끄는 제 3 그루페가 20기 격추를 달성했으며, 이날 뮐더스 개인적으로도 이차대전 이후 10기째 격추마크를 러더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뛰어난 전과는 JG 53 예하 제 1 그루페가 달성했다. 이들은 단 하루만에 적기 39를 격추시켰고 이중 스페인에서 이미 8기 격추를 달성한 에이스 한스 칼 마이어(Hans Karl Mayer 영국의 항공전에서만 22기 격추를 달성해 8 위의 에이스로 랭크된다. 후에 통산 46기 격추를 달성한다)는 스당 상공에서 하루만에 허리케인 1기를 포함해 총 5기 격추를 달성해 서부전선 최초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뒤늦게 반격을 해보려고 출격했던 영국 폭격기 71대 중 그 절반을 상회하는 40기가 모조리 추락하는 몰살에 가까운 극심한 피해를 본 것을 비롯해, 이날 스당에서 격추된 연합군의 항공기는 90 여 기(이중 27기는 영국의 허리케인기)에 달했다고 하니 루프트바페의 완벽한 승리였다.  5월 14일 스당의 항공전에 대해 훗날 영국 왕실 공군 공식 항공전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 영국 공군의 역사상 단 하루만에 이런 엄청난 규모의 항공기 피격추는 없었다."
 
 
[사진] 뮤즈강을 도하하는 롬멜 휘하 독일 기갑 사단병들... 왼쪽에 동그라미 속의 주인공이 롬멜이다.
 
 
거머쥔 제공권의 강철우산 아래서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는 저항을 극소화하며 5월 15일까지 부교를 통해 뮤즈강 도하를 성공리에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제 9군이 늦게 나마 반격을 시도하려했지만, 이미 도하를 마친 독일에게 목표지점을 선점당해 프랑스군의 방어선은 지리멸렬하며 무너졌다. 또 뮤즈강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3개 기갑사단 모두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괴멸되어 버리고 만다. 즉 제 1 기갑 사단은 플라비옹(Flavion)에서 연료 부족으로, 제 2 기갑사단은 히르송(Hirson)역에서 하차 도중에, 제 3 기갑사단은 스당 남쪽에 고정배치되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각각 괴멸된 것이다.
 
이날 프랑스의 레노(Paul Raymaud) 총리는 처칠(5월 15일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된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패배했읍니다. 스당을 점령당하면서 전투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전화상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 역시 이후 불과 1주일도 채 안되는 기간에 프랑스의 해안까지 독일의 진격이 뻗쳐나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처칠은 레노에게 더 많은 전투기를 보내기로 약속했으나, 영국 전투기 사령관 휴 다우딩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훗날을 위한 다우딩의 예견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대규모로 예상되던 영국 공군의 추가 파병은 다우딩의 반대로 허리케인 전투비행대 8개(기존의 4개 비행대까지 합쳐 도합 12개 허리케인 비행대가 영국에 파견된 셈이다)를 비롯해 구식 글라디에이터 비행대 몇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영국 공군의 대규모 피해를 줄여 영국의 항공전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지휘에 나선 구데리안..... 1940 프랑스에서.... 
 
 
A집단군이 뮤즈강 도하를 마친 5월 15일, 2주이상은 버텨 줄줄 알았던 네덜란드가 항복하면서, 독일 제 2 항공전대는 벨기에를 경유해 프랑스 북부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북부에 몰려 있는 연합공군은 좌우의 협공을 받게 된 것이며, 전멸의 위기는 하루하루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전격전이라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면을 가진 공격법이었다. 적에게 끼치는 물리적 피해보다도 심리적인 파급 효과가 더 엄청났고, 독일군의 진격속도보다도 빨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여기 저기에서 공황상태에 빠진 프랑스 병사들이 군을 이탈했고, 육군 강군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오합지졸 패잔병들에 대해, 독일 장교 한명은 이렇게 회상했다.
 
"패주하는 프랑스군 무리를 장교가 이끌고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 더욱 한심한것은 그들이 무기를 아예 버렸다는 사실이다."
 
 
비록 프랑스와 영국 파병군이 104개 규모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차 3254 대를 보유하고 있어, 독일의 2574 대에 비해 우세했고, 장갑이나 화력면에서도 독일 전차를 압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차를 보병을 지원하는 보조적 수단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이들을 각 보병부대에 분산시켜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전에도 말한 적있지만, 분산되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독일은 10 개의 기갑사단 중 대부분인 7 개를 주공인 A 집단군에 집중시켜, 아르덴느를 돌파하자마자 프랑스의 분산되어 소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개 격파하며 거침없는 쾌속의 진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전격전에 선봉에 섰던 두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독일의 작전의 핵을 알 수 있다.
 
먼저 롬멜은 훗날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지점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 강력하게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에 대열의 양 측면을 보호하면서 진격하여, 적이 반격을 취할 틈도 없이 번개처럼 깊숙이 적의 진지를 뚫고 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사진] 프랑스의 평원을 질주하는 독일의 3호 전차...
 
 
또 프랑스 함락의 최고의 선봉장 구데리안은 이렇게 증언했다.
 
"만약 한쪽 군에 2100 대의 전차가 있는데, 이 전차들을 보병사단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300 마일의 전선에 고루 분산시켜 배치한다면 전차는 1 마일당 7 대가 분포될 것이다. 따라서 국지전의 경우를 제외하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공격의 주요 거점 중에서 도로와 전장에 물리적으로 투입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전차를 배치하면 쉽게 적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있다. 이때 분산 배치된 적의 방어 전차와 대전차포는 그 수효가 너무 적기 때문에 공격해 오는 모든 전차를 파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나머지 전차들과 그뒤를 따르는 차량화 부대들이 재빨리 적 후방까지 밀고 들어가 승리를 쟁취하고, 적군의 주 저항선은 파괴되어 전체 전선이 와해될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표현이 달랐을 뿐 한가지로 압축되는 핵이 있다. 즉 "힘의 분산에 대한 힘의 응집은 그들을 괴멸시켜 버린다"라는 것.... 일차대전 지루한 소모전인 참호전의 교리에 물들어 있던 연합군은 혁신적인 번개 작전, 전격전에 허물어지고 만 것이며 이 두 영웅의 전략은 완벽히 실현되었다. 그리고 창공에는 전격전을 가능케한 독일 지상군의 수호신 루프트바페가 버티고 있었다.
 
 
 
 
 
영불 해협을 향해

 
당시 독일 전격전의 행렬은 한마디로 예를 들자면, 모 음료수 광고에 나오는 달팽이들의 질주를 생각하면 되겠다. 느려빠진 달팽이들이 경주를 하고 있었는데, 덩치 큰 거북이가 눈깜짝 할 새에 옆을 지나가자..."뭔가 지나간 것 같긴 한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하는 달팽이들의 혼잣말.... 당시 프랑스군들도 똑같은 궁금점을 가졌을 것이 뻔하다....
 
 
[사진] 독일군에게 항복하는 프랑스의 전차병.... 그의 전차는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인다....  
 
 
한쪽에서는 군 징집이 한창 벌어지면서.... 프랑스군들이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전선으로 떠나는 열차에 의기양양하게 올라 타고 있을 때, 그 보다 후방 프랑스 도시는 독일군에게 접수당하고 있었다. 군인을 가득 실은 프랑스 군용열차는 이미 독일에게 포위된 전선을 향해 출발했다.
 
또 굳은 결의로 일전을 각오하고 부랴부랴 걸어서 전선으로 이동하던 프랑스군들은 길 저쪽에서 흙바람을 일으키고 질주해 오는 부대가 아군이 아니라 독일의 선봉 부대라는 것을 알고는 허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삼삼오오 걸어가던 프랑스 징집병들은 지나가는 독일의 기갑부대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노견으로 비켜 서야만 했다. 이들 프랑스 병력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의 위세에 총도 겨눠보지도 못했고, 진격에만 신경쓰던 독일군들도 이런 오합지졸 같은 프랑스 소수 병력은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했다. 서로가 총구를 맞대고 싸워야 하는 적이었지만, 정말 개 닭 쳐다보듯 스쳐지나들 갔다.
 
또 어떤 프랑스 후방 마을에서는 독일군이 마을 입구에 도착해 항복 권유 방송을 하자, 전선으로 막 출발하려고 준비하던 프랑스 예비군들이 "어유... 벌써 여기까지 왔어?" 하며 자신들의 무기를 반납했다는 우스게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 이런 두 집단간의 전쟁의 결과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닐까? 일차대전의 승전국이라는 빛나는 프랑스의 이름표가 땅에 떨어져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후발주자 에이스들의 등장

 
뮤즈강 도하 직후인 5월 15일, 초기 루프트바페 에이스들 3 명이 모두 격추를 달성한 우연의 일치를 보였다. 즉 JG 53 소속 베르너 뮐더스가 영국의 허리케인 전투기를, 스페인 내전에서 이미 4기 격추를 달성했고, 훗날 JV 44에서 할약할 JG 3 소속 군터 뤼초브(Gunter Lutzow)가 자신의 이차대전 후 첫 격추를, 또 JG 27의 갈란트 역시 라일(Lille) 상공에서 영국의 스피트화이어 1기를 격추한 것이다. 갈란트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지만, Bf 109가 아닌 He 51기에 탑승했고, 지상 공격 임무를 주로 수행했었다.
 
[사진] 드디어 Bf 109에 탑승하기 시작한 아돌프 갈란트.... 역시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도 시가를 입에 물고 있다.... 골초였다고 한다. 아주 대단한.... 자신의 전투기 칵크핏에 재떨이를 장착할 정도로.....
 
 
또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Hs 123기 공격 비행대 소속이어서, 단 한대의 격추도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포니워 기간 중 갈란트는 친구 군의관에게 부탁해 전투 비행대로 옮길 수 있게 소견서를 부탁했다. 당시 군의관의 소견서는 정말 재밌다.
 
"이 환자는 류마티즘으로 개방형 조종석에는 상태가 악화될 수 있어, 폐쇄형 칵크핏 항공기에 탑승해야 할 것으로 사료됨."
 
He 51이나 Hs 123이 개방형 조종석을 가진것을 염두에 둔 소견서였고, 갈란트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폐쇄형 칵크핏의 전투기 Bf 109를 주력기로한 JG 27 비행대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벨기에 리에주(Liege) 상공에서 첫 격추를 달성함으로써 자신의 104 기 격추의 첫 포문을 연것이다. 당시 갈란트는 고도 4000 m 상공을 초계 비행중 1000 m 아래 8기의 허리케인을 발견했고, 급강하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격추당한 조종사는 영국 제 87 전투 비행대 소속 프랭크 하우웰(Frank Howell)이었는데, 격추에도 살아남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독일기는 고도의 이점을 안고 접근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들의 접근을 전혀 알아 채지 못했었다. 단지 갑자기 내 조종석에 파편이 튀면서, 요동을 시작했고, 겉잡을 수 없는 불길이 번지며 추락하면서 명중당했음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적기를 보지 못했다."
 
이차대전 격추 당한 조종사 중 80 %는 적기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일격필살의 기습에 격추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반면 갈란트는 이 첫 격추에 대해 이렇게 회상 했다.
 
"첫 격추는 아이들의 장난처럼 간단히 끝나버렸다. 뛰어난 화력과 행운이 나와 함께 한것이며,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당시 뮐더스가 스페인에서 14기, 이차대전에서 11기를 포함해 도합 25기 격추를 이미 달성한 상태였던데 반해, 갈란트는 이제야 첫격추를 이룬 것인데, 몇달후 영국의 항공전에서는 거의 엇비슷한 격추기록 경쟁을 벌이게 되니, 단기간내 이룬 갈란트의 격추 행진은 가히 신의 손이라고 봐야 할것 같다.  

 
 
 
[사진] JG 27 비행단의 조종사들이 급히 점령한 프랑스 비행장에서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권투에서도 맞는 사람도 힘들지만, 때리는 사람도 지치기 마련이니.... 저 뒤에 보이는 숲에서 이들은 프랑스 장군 몇 명을 포로로 잡는 웃지 못할 경험을 하기도 한다.
 
  
루프트바페의 공세를 등에 업은 독일 지상군의 진격이 너무도 빨리 이루어지면서 웃지 못할 사건들이 속출했다. 오전에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이 프랑스 비행장을 폭격해 연합군 항공기를 파괴하고 활주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나면, 오후에는 독일 지상군이 그 비행장을 점령했고, 독일 전투기들은 자신과 동료들이 불과 몇시간 전에 탄흔 구멍을 여기 저기뚫어 놓은 활주로에 위험을 무릅쓰고 착륙해야 했다. Bf 109는 착륙 어렵기로 소문난 전투기로 조종사들은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또  JG 2 소속 11기의 Bf 109 들이 초계 비행을 마치고 전방 비행장에 착륙을 시도했으나, JG 27 비행단이 이미 프랑스 비행장을 점령하고 난 뒤라, 하는 수 없이 인근의 프랑스군이 철수해 버려진 비행장에 임시 착륙을 감행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들 전투기 조종사들이 착륙을 마치고, 비행장 주위의 숲을 수색하던 중 뜻밖에도 프랑스 패잔병들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중에는 프랑스 군단장 1명과 사단장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육군 강국 프랑스의 장군들이 전투기에서 내린 독일 조종사들에게 포로 신세가 되고 말다니.....  재밌는 것은 이들 독일 조종사들이 임시 거처로 삼은 곳은 비행장 옆 농가였는데, 그곳은 전쟁 중에도 매춘이 성업 중인 곳이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JG 2 본대의 나머지 동료들은 금남의 구역 수녀원에서 생활하며 프랑스 작전 대부분을 수행하는 극과 극의 웃지못할 상황이 속출되기도 했다.
 
 
  
 
[사진] 지상에서 만신창이 되어 버린 프랑스의 또 다른 주력 전투기 MS 406기의 처참한 모습... 1940년 당시 프랑스 공군의 패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랜딩기어가 그대로 내려져 있고 프로펠러 상태가 좋은 것으로 보아, 이륙도 못해보고 이꼴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럼 개전 당시 연합군 공군의 항공전력은 어떤 정도였나?  총 1500 여기에 달하는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이중 전투기 800 여대에 달했다. 독일에 비해 숫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이들 연합군 전투기는 성능면에서는 더더욱 독일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력 전투기였던 MS 406은 선회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면에서 독일의 Bf 109 E에 완벽한 열세에 있었고 프랑스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침공이 있기 이미 오래 전, 미국 커티스 항공사가 제작한 P-36 전투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커티스 호크 75 (Curtiss Hawk)기 300 대를 주문해 놓았고, 개전당시 약 100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중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 호크 75A-1과 75A-2 버전으로 각각 4정과 6정의 7.5 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어,  1 정의 기관포와 2정의 7.5mm 기관총으로 무장한 MS 406 에 비해 화력에서 약간 밀리는 것을 빼고는, 기동성, 상승력, 속도면에서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들역시 Bf 109의 속도와 상승력에는 미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스페인 내전 이후 실전 공중전을 거치면서 쌓아 온 독일의 공중전 전술에 비교해 보면 프랑스와 영국 파병 공군의 그것은 일차대전 방식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 답보 상태였다.
 
프랑스의 전투기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드와르땡(Dewortin) 520 전투기였는데, 최고속력 330 mph로 Bf 109E와 엇비슷할 뿐 아니라, 선회전에서는 Bf 109를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전인 1940년 4월 포니워 기간중, 독일의 Bf 109E-3기 한대가 불시착후 프랑스의 손에 들어오면서, 성능 비교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5월 개전 당시 일선에 배치된 드와르탱은 단 36 기 뿐이었고, 전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사진] 영국 원정군의 허리케인 전투기의 모습... 영국은 허리케인이 Bf 109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또 영국 공군이 프랑스에 파병한 전투기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의 최신기가 허리케인 전투기였는데, 이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독일 Bf 109 E 보다 한 단계 아래의 전투기였다.
 
영국은 프랑스에 구원의 손실로서 다수의 폭격기와 허리케인 비행대를 파견했지만, 정작 가장 뛰어난 주력기 스피트화이어만은 끝까지 자신의 섬에 고이고이 간직해 두는 교활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영국 전투기 사령부의 수장 휴 다우딩의 계획의 일부였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면 이런 늙은 사자의 결정은 너무도 옳았으니,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뿐이다.
 
프랑스전 개전 5 일만에 거의 모든 프랑스와 영국 원정군의 항공전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 프랑스의 레노 수상은 처칠에게 더 많은 전투기 대대, 구체적으로 25개의 전투기 대대를 추가 파병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 처칠이 정말 이것을 실행에 옮기려 했을 때, 그를 극구 만류한 이 역시 휴 다우딩이었다. 그는 영국 브리튼 섬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투기를 내줄 수 없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숫적 질적으로 부족한 이런 항공기로 루프트바페에 대항해 보려했지만, 거침없는 독일의 진격에 계속 후방으로 기지를 옮겨가며 패주해야만 했고, 특히 통신의 두절과 보급의 악화로, 이륙후에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프랑스 전투기 중 일부는 연료가 떨어지고, 비행장까지 적에게 접수당하자, 들판에 동체착륙해 전투기를 포기하고 조종사는 달아나는 상황까지 자주 벌어졌다고 하니, 이런 전쟁의 승패는 이미 초반에 결정났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사진] 드디어 영불해협에 도달한 롬멜.....
 
 
프랑스의 기갑사단들 마저 괴멸시켜 버린 구데리안은 프랑스의 중앙을 관통하며, 쾌속의 진격을 계속했다. 5월 19일 생 캉탱(St. Quentin) 점령, 다음날인 20일, 훗날 독일과 연합공군간의 처절한 공중전의 기지가 될 운명의 아브빌(Abbeville)까지 함락..... 드디어 5울 20일, 개전후 단 10일만에 240 마일을 진격해 도버해협에 도달함으로써 중유럽의 거인은 낫질에 의해 양단되고만 것이다. 영국 원정군 소속의 허리케인과 블렌하임 비행대들도 20일을 전후해 전원 영국본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합군의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었던 아라스(Arras) 부근의 영국 원정군 사령관 고트(Gort) 휘하의 78 대의 마틸다 전차로 구성된 기갑전력이 아직 전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구데리안의 쾌속 행진과 발맞추어 디낭을 점령한 후 약간 동쪽에서 북진하던 롬멜의 제 7기갑사단과 이들 영국 기갑 전력이 마침내 조우하게 되었다. 프랑스 전투 이후 거의 최초의 전차전 다운 전차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엔 영국 기갑 전력이 무방비에 가까운 독일 보병과 대전차 진지를 일시에 뭉게 버림으로써 승기를 잡은 듯 했었다. 이 대전차포들은 37 mm 직경으로 사실 마틸다 전차의 장갑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롬멜은 임기웅변으로 직접 88 mm 대공포를 지휘해, 강력한 대전차 방어선을 구축해 영국 전차들을 끌여 들였고, 88 mm 그물망 속에서 영국 마틸다 전차 36 대가 일시에 검은 연기를 뿜는 고철덩이가 되어 버렸다. 뒤이어 롬멜이 준비해둔 자신의 7사단의 기갑전력이 영국전차대의 측후방을 강타하여 나머지를 처리함으로써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버렸다.
 
이렇게 마지막 방어막이었던 영국 원정군의 전차들이 괴멸되어 버리자, 프랑스와 벨기에 북부의 해안은 30 여만에 달하는 연합군 대병력으로 복새통을 이루게 된다. 이들은 동쪽에서 몰려오는 B 집단군과 프랑스 해안을 따라 서진해 들어오는 구데리안의 기갑사단을 비롯한 주공 A집단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버린 형국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해안 도시 덩커크에 모인 연합군 패잔병들의 존망은 독일이 단 몇 시간 진격만 하면 끝장날 운명에 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