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高僧傳) 제3권, 역경(譯經), 11) 강량야사(畺良耶舍)

 

 

畺良耶舍。此云時稱。西域人。性剛直寡嗜欲。善誦阿毘曇博涉律部。其餘諸經多所該綜。雖三藏兼明而以禪門專業。每一遊觀或七日不起。常以三昧正受傳化諸國。

   강량야사는 중국말로 시칭(時稱)이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욕심이 거의 없었다.「아비담(阿毘曇)」을 잘 외우고, 율장의 책〔律部〕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대부분 해박하였다. 삼장에도 아울러 밝지만 선문(禪門)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 번 선정의 관문에 들 때마다, 간혹 7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항시 삼매정수(三昧正受)로써 교화를 여러 나라에 전하였다.

 

以元嘉之初遠冒沙河萃于京邑。太祖文皇深加歎異。初止鐘山道林精舍。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멀리 고비사막을 무릅쓰고 건너왔다. 서울에 다다르니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가 매우 특이하다고 더욱 찬탄하였다. 처음에 종산(鐘山)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다.

 

沙門寶誌崇其禪法。沙門僧含請譯藥王藥上觀及無量壽觀。含即筆受。以此二經是轉障之祕術淨土之洪因故沈吟嗟味流通宋國。

   사문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약왕약상관(藥王藥上觀)」과 「무량수관(無量壽觀)」을 번역하였다. 승함이 곧 붓을 들어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번뇌의 장애를 건너는 비밀한 술법〔轉障之秘術〕이자, 정토를 이루는 크나큰 바탕〔淨土之洪因〕이었다. 그러므로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平昌孟顗承風欽敬。資給豐厚。顗出守會稽固請不去。後移憩江陵。

   평창(平昌) 사람 맹의는 소문을 들었다. 삼가 공경해서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제공하였다. 맹의가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면서,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진정으로 간청하였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가 쉬었다.

 

元嘉十九年西遊岷蜀。處處弘道禪學成群。後還卒於江陵。春秋六十矣。

   원가(元嘉) 19년(442년)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유람하며 곳곳에서 도를 펴니, 선을 배우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가 60세이다.

 

   승가달다(僧伽達多)․승가라다(僧伽羅多)

時又有天竺沙門僧伽達多僧伽羅多等。並禪學深明。來遊宋境。達多嘗在山中坐禪。日時將迫。念欲虛齋。乃有群鳥銜果飛來授之。達多思惟。

   이 때에 또 천축국의 사문 승가달다와 승가라다는 모두 선학(禪學)에 매우 밝았다. 송나라에 들어와서 머물렀다.

   승가달다가 일찍이 산중에 있으며 좌선(坐禪)을 하였다. 해가 마침 저물어서 식사를 거르고자 하였다. 그런데 새가 무리를 지어 과일을 물고 날아가다가 내려 주었다. 승가달다가 생각하였다.

 

獼猴奉蜜佛亦受而食之。今飛鳥授食何為不可。於是受而進之。

   ‘원숭이가 꿀을 바치자 부처님께서도 받아 잡수셨다. 지금 날아가는 새가 내려준 음식이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는가’

그러고는 받아서 먹였다.

 

元嘉十八年夏受臨川康王請。於廣陵結居。後終於建業。

   원가 18년(441년) 여름에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의 청을 받아들여, 광릉(廣陵)에서 집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건업에서 돌아가셨다.

 

僧伽羅多。此云眾濟。以宋景平之末來至京師。乞食人間宴坐林下。養素幽閑不涉當世。

   승가라다는 중국말로 중제(衆濟)라 한다. 송나라 경평(景平, 423~424) 말에 송의 서울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였다. 본래의 그윽함과 한가함을 닦으며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以元嘉十年卜居鍾阜之陽。剪棘開榛造立精舍。即宋熙寺是也

   원가 10년(433)에 종부(鍾阜)의 양지쪽에 살 곳을 정하였다.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정사를 건립하였다. 곧 송희사(宋熙寺)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