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2 (2016.03.17)

 

 

 

도산서원의 모습

 

 

상덕사(尙德祠)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 및 사주토병은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공간인 상덕사(尙德祠)와 그 정문 및 담장이다. 상덕사에는 이황뿐만 아니라 제자인 월천 조목(趙穆, 1524~1606)의 위패도 함께 있다. 조목의 위패가 처음 봉안된 것은 1615년(광해군 7)이다.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 및 사주토병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강당인 전교당 뒤편에 있는 상덕사는 1574년(선조 7)에 건립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앞면에 측면 칸을 절반으로 나눈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만들어 놓았다. 기단은 화강암을 다듬어 4단으로 화려하게 쌓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구조는 대들보 위에 동자주형 대공을 세워 마루보를 받치게 하였으나 그 위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대공들은 복화반처럼 생긴 고격을 띤 형식의 대공이다. 이것은 도산서원 강당인 전교당의 모습과 같으며, 네모기둥에 공포(栱包)를 두지 않은 간략한 굴도리집으로, 내부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부엌이 없는 홑처마로 꾸며 매우 검소하며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 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어 놓아 원래의 맛을 잃어버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덕사 현판

 

 

상덕사 퇴계선생 위패

 

 

상덕사 부 정문(尙德祠 附 正門 )

 

 

장판각

 

 

상덕사 부 정문(尙德祠 附 正門)

 

 

박약재

 

 

도산서원 현판

 

 

전교당 현판

 

 

홍의재

 

 

도산서원 전교당

 

 

도산서원 전교당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 서실, 강당인 전교당, 사당인 상덕사(보물 제211호)로 나뉜다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전교당이 있고, 안마당에는 동재인 홍의재와 서재인 박약재가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1574년(선조 7) 처음 창건된 후 1969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면 4칸, 옆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강당으로서는 단아한 건물이다. 평면 8칸 가운데 서쪽의 2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이다. 방과 대청 사이는 들어열개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하나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대청의 전면은 문짝을 달지 않고 개방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판벽을 치고 2짝씩 판문을 달았다. 기단은 장대석 바른층쌓기로 높게 조성했으며, 그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 주두와 살미 등이 없는 민도리집으로 소박하게 건물을 구성하고 있어 유교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한석봉(韓石峰)이 쓴 '도산서원'이란 편액은 강당 처마 아래에, 같은 글씨체의 '전교당'이란 편액은 강당 내부에 걸려 있다.

 

 

전교당에서 본 도산서원의 모습

 

 

진도문

 

 

도산서원 매화

 

 

도산서원

 

 

도산서원

 

 

농운정사

도산서당 건너편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을 위해서 ‘사’() 8칸을 지었는데 각각 ‘시습재’(), ‘지숙료’(宿), ‘관난헌’()이라 이름 짓고, 합해서 ‘농운정사’()라고 하였다. 퇴계가 처음에 지은 건물은 자신이 기거하는 도산서당과 유생들이 기거할 이 농운정사뿐이었다. 농운정사는 평면이 자로 뒷방 쪽에 햇빛이 들지 않아 일반 민가에서는 잘 짓지 않는 형식이다. 그러나 퇴계는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짧은 처마를 사용하여 빛을 받도록 배려하면서 이 형식을 고집하였다. 그것은 이런 자형 집이 기숙사 건물로 적합하며 ‘공부()한다’는 뜻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농운정사 안내문

 

 

농운정사 현판

 

 

도산서원과 산수유

 

 

도산서원의 모습

 

 

도산서원의 산수유

 

 

천연대

옛날 도산서원 입구에 산의 문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를 곡구암(谷口巖)이라 하고 곡구암 동편 큰 바위 절벽위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든 것이 천연대(天淵臺)이다.『시경』의「연비여천 어약우연(鳶飛悷天 魚躍于淵)」에서 취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소리개 날고 고기가 뛰는 것이, 모두가 자연스러운 도의 작용이지 누가 시켜 그럴 것인가, 유행이 활발하니 천연의 이치 묘하구려, 강대에 종일하니 마음과 눈이 열려『중용』의 명성편(明誠篇)을 세 번 거듭 외운다오.” 에서 천지간에 유행하는 도의 작용을 체득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황(李滉)은 ‘연비어약’의 설명에서 진실한 도의 미묘한 작용이 아래위로 밝게 드러나고 흘러서, 움직임이 가득 차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고, 대게 도의 본체와 작용은 원래 없는 곳이 없지마는 ‘연비여천 어약우연’이라는 말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서 제각기 제자리에 머물러 뒤바꿀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암벽의 천연대 각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를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새긴 것이라 한다.

 

 

천연대에서 본 시사단

 

 

천연대에서 본 시사단

 

 

반타석(盤陀石)

 

黃濁滔滔便隱形(황탁도도편은형) 누런 탁류 넘실댈 때는 곧 형체를 숨기더니
安流帖帖始分明(안류첩첩시분명) 고요히 흐를 때면 비로소 분명히 나타나네
可憐如許奔衝裏(가련여허분충리) 어여쁘다! 이 같은 치고받는 물결 속에서도
千古盤陀不轉傾(천고반타불전경) 천고에 반타석은 구르거나 기울지도 않았네

 

이 시는 반타석을 두고 노래한 것으로, 반타석은 「도산기()」에 의하면, “반타석은 탁영담 가운데 있는데, 그 모양이 편편하지는 않으나 배를 매어 두고 술잔을 돌릴 만하다. 늘 큰비를 만나 물이 불면 소용돌이와 함께 물밑으로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반타석재탁영담중) (기상반타) (가이계주전상) (매우료창) (칙여제구입) (지수락파청) (연후시정로야)).”라 기록되어 있다.

반타석은 큰비가 내려 누런 탁한 물이 흘러내리면 그 형상을 물속에 숨겼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고요히 흐를 때면 다시 그 형상을 분명히 드러낸다(『맹자』에 이르기를, “(유유자가왈)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아영)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아족) (공자왈) (소자) (청지) (청사탁영) (탁사탁족의) (자취지야)”라 한 것처럼, 정치가 혼탁하면 몸을 숨겼다가 맑아지면 다시 나타나는 현실에 대처하는 퇴계의 처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함). 이 같은 거센 물결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반타석이 아름답다(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자신은 이처럼 흔들리지 않겠다는 퇴계 자신의 의지의 표명으로도 볼 수 있음).

 

 

반타석(盤陀石)

탁영담 중간(도산서원에서 동쪽=왼쪽)에 넓고 편편한 바위를 반타석이라 불렸다.

 

 

천연대와 반타석

 

 

도산서원 왕버드나무

 

 

도산서원 왕버드나무

 

 

계상서당 

래 퇴계는 현재 도산서원보다 북쪽에 서당을 짓고 자리 잡아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그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5년간 공사후 61세가되는 1561년(명종 16)에 만든것이 도산서당이다.

 

 

계상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