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남이녀의 자녀를 둔 윌슨 부부는 휴가차 산타 크루즈 해변의 별장으로 향합니다. 그곳은 아이들 엄마인 ‘애들레이드(애디)’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죠. 즐겁고 편안한 휴가를 기대하지만, 애디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겪었던 ‘어떤 일’이 생각나 불안합니다. 애디의 불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휴가 첫 날, 가족들은 의문의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합니다. 자신들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로부터요.


애들레이드의 어린시절을 보여주는 첫 시퀀스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마구 뒤섞여 있어 관객들을 사로잡습니다. 어린 애디가 겪은 일은 무엇이며, 어둠 속에서 본 똑같이 생긴 소녀는 과연 누구일까요.


‘도플갱어’의 아이디어는 이 영화와 무척 잘 어울릴뿐더러 매우 효과적입니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미스터리의 핵심인 동시에 영화 전체의 톤(tone)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영화가 바로 이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한 가족이, 혹은 주인공이 포함된 한 집단의 인물들이 의문의 악당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는 설정도 전혀 새롭진 않지만 썩 좋습니다. 폐쇄된 공간이 만들어지고 한정된 무대에서의 다양한 액션이 기대되죠. 이 영화처럼 주인공이 한 가족이라면 가족애, 연대 같은 주제도 무척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고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런 끔찍한 일을 윌슨네만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친구, 타일러 일가는 윌슨네보다 운이 좋지 못합니다. 타일러 부부와 쌍둥이 두 딸은 자신들과 똑같이 생긴 무리들로부터 ‘끔살’ 당합니다.


이쯤 되면 영화 속 도플갱어들의 존재가 의심스럽습니다. 저들은 독일 민담에 나오는 불길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도플갱어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존재를 드러냅니다. 저렇게 한낮에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다니진 않죠.


아무래도 ‘복제’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인간들이 복제되는 걸까요? 어떻게 여태까지 한 번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다가 왜 한꺼번에 저렇게 몰려나온 걸까요.





영화는 많은 장르들을 마치 널을 뛰듯 오갑니다.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SF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죠. 하지만 영화가 가장 천착하고 있는 장르는 미스터리입니다. 빨간 옷차림에 가위를 들고 설치는 존재들은 과연 누구이며, 그들은 왜 선량한 사람들을 공격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게 주인공들(그리고 영화)의 목적입니다. 그건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애디의 클론인 ‘레드’가 (마치 자백이나 하듯이) 사건의 내막을 술술 털어놓는 클라이맥스는 미스터리 장르의 전형적인, 그리고 게으르고 안일한 클리셰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산만하고 두서가 없습니다. 감독의 연출력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자체는 흥미롭고 맵시 있게 잘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진행할수록 포커스가 갈팡질팡한다는 겁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분배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처럼도 보이며, 누군가 누리는 행복(이익)은 다른 누군가의 불행(희생)에 의한 결과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를 돌아보고 개개인들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만들어지는 ‘계급’을 고발하려는 성찰과 반성의 목소리는 클라이맥스를 지나며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레드’의 고백은 마치 핑계처럼 들립니다. 물론 우리의 사회, 경제적 시스템에 존재하는 오류엔 정부, 혹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들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인간성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요?

클론들의 공격 대상이 바로 ‘우리’라는 설정은 생뚱맞습니다. 그들이 복수의 가위를 휘두를 대상은 그 음모의 주체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들에 대해서는 일언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가위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역시 음모의 피해자이고 희생양입니다. 이 영화의 액션은 마치 제 편들끼리 칼을 겨누는 꼴이라 볼썽사납습니다.

이 영화의 플롯 상, 진정한 엔딩이 되려면 폭력이 제 방향을 잡고 옳은 궤도를 찾아야 합니다. 영화의 끝을 보고도 뭔가 석연찮은, 열린 결말과 다르게 미완의 기분이 드는 건 그런 이유입니다.

게다가 신파조에 어설픈 설명으로 일관하는 엔딩에 액세서리처럼 덧붙여지는 반전이라니. 애디에 관해서는 앞뒤가 안 맞습니다. 끝에 밝혀지는 애디의 정체는 반전을 위한 반전일뿐입니다. 이런 깜짝쇼는 전혀 불필요할뿐더러 제 살 깎아먹기에 다름없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왜’라는 의문은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습니다. 애당초 저들이 만들어지고 버려진 이유 말이에요. 그건 화려한 디테일과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스타일’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면 이 영화는 그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큰 그림보다는 사소한 것들, 디테일이나 상징 같은 사소한 것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은 영화에 잘 붙지 못하고 따로 놀아, 적절하지 않고 요란스럽게 보입니다. 그것들의 의미는 대부분 단편적이라 ‘영화 언어적’으로 크게 확장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습니다.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에 화려한 벽지를 바르고 고급 카펫을 깔고 값비싼 가구와 소품들로 장식한 것처럼 보입니다. ‘알맹이’인 이야기 자체가 허술한데 이런 디테일이라니, 사상누각에 다름없습니다. 맵시 있는 스타일(연출력)로 눈을 사로잡지만 공허합니다.


과연, 감독이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영화를 보면서 현대인의 소외, 계급 간의 갈등, 자본주의의 아이러니 외에 ‘통제’에 대한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화의 엔딩을 거치며 모든 것이 거짓말에 성의 없는 변명이 되고 맙니다.

감독이 어떤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 자체만 본다면 상당히 기만적입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까발리려는 것 같더니 정작 들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언변만 화려한 만담가를 마주한 기분이 드니까요. 


굳이 ‘어떻게’의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정말 궁금한 건 ‘왜’이니까요. 왜? 왜? 왜? 어떤 이유로 저들은 우리와 똑같은 클론이 필요했던 걸까요. 우리와 저 클론들은 어떤 함정에 빠진 걸까요. ‘통제’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를 어떤 식으로 통제하려 했으며 그 계획은 어떤 이유로 실패한 걸까요. 실패한 이후 클론들은 왜 제거되지 않은 걸까요. 이런 설명과 ‘저들(음모자들)’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 필수적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그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의욕과 아이디어가 너무 넘칩니다. 감독은 머릿속에 있는 거의 모든 걸 이 영화에 쏟아 부은 것 같습니다. 할 말만 따박따박 단도직입적으로 뱉어낸 전작에 비한다면 이 영화는 기만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산만합니다.

처음의 2/3는 좋습니다. 나머지 1/3은 거의 ‘개망’입니다. 기대에 못 미쳐요. 어쩜 개봉 전부터 호들갑을 야무지게 떨어댄 언론 탓도 있을 겁니다.




사족


1. 이 영화의 감상이 칭찬 일색, 천편일률적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 역시 ‘통제’의 결과처럼 보입니다. 개봉 전부터 가졌던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마찬가지고요.


2. 도플갱어라는 아이디어, 결말의 반전 등, 이 영화와 많은 부분이 흡사한 《the Broken(2008)》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작은 영화이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소재를 잘 주무른, 잘 빠진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호연, 일관성 있는 연출, 충격적인 엔딩 등으로 저는 오히려 이 영화의 편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헬렌 매클로이(Helen McCloy)’의 소설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도 추천합니다. 기숙사 여학교를 배경으로 생령(生靈, 도플갱어)이 등장하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압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