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찢으시오 나는 주우리오

최명길 vs 김상헌

왜란(1592~1598)이 끝난 지 30여 년이 지난 17세기 전반에 조선은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어요. 만주에서 여진족이 쳐들어왔지요. 이 전쟁을 역사는 ‘호란(胡亂)’이라 기록하고 있어요. 조선이 묵사발이 된 혼란스런 전쟁 와중에 각기 해법을 달리하며 자기 주장을 강하게 했던 맞수 중의 맞수가 있었으니, 최명길과 김상헌이 바로 그들이에요.

전쟁에 대한 대처법을 달리했던 최명길과 김상헌을 초청해서 그들이 대립했던 이유를 알아봐요.

최명길 vs 김상헌
구분 최명길(1586~1647) 김상헌(1570~1652)
정치력 호란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전후에는
책임지고 조정을 이끌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의 대세였던
주전파 리더였다.
지력 통찰력이 깊어 주전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화친하여 도탄에 빠진
조선을 구해 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백성의 고통은
도외시하고 전쟁 지속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지적 능력이 균형감을 상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인품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자기 목을 걸고 임금
앞에서 거침없이 말할 정도로 강단이
있었으며 포용력과 화합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리학자로서 대쪽 같은 기개를 지니고
있었기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죽으면 죽었지, 청의 속국이 될 수는 없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은 광해군 시절과는 달리 명과만 친하게 지냈어요.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외교 정책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후금을 자극해서 두 번의 큰 침략을 받게 돼요.

첫 번째 전란인 정묘호란은 인조가 나라를 5년째 다스리던 1627년에 있었어요. 명과만 친하게 지내던 조선 외교 정책에 후금이 위협을 느껴 쳐들어왔지요. 결과는요? 조선이 후금군에게 흠씬 얻어터져 쌍코피 쭉쭉 흘리며 손이 발이 되게 빌어 겨우 화해를 했어요. 강화 조건이 ‘조선은 명과 관계를 단절하고, 후금을 형으로 모신다’였으니,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어요. 국제 정세에 밝던 광해군이 바로 이런 결말을 걱정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각주1) 외교를 펼쳤던 것이에요.

두 번째 전란인 병자호란은 인조 14년인 1636년에 발생했어요. 한층 힘이 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에 명나라와 일대 결전을 준비하면서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어요. 형과 동생 관계도 부족해서 철저한 주종 관계라 할 수 있는 임금과 신하 관계를 맺자는 얘기였지요.

청나라 사절단이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오랑캐 놈들에게 죽으면 죽었지, 속국이 될 수는 없다. 끝까지 싸우자’부터 ‘아직 나라 힘이 약하니 일단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중에 곱절로 되갚아 주자’까지 여러 주장들이 오고 가며 갑론을박이 벌어졌어요. 결론은요? ‘죽을 때 죽더라도 청나라의 무례한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였어요. 청나라 사절단은 푸대접을 받고 아무 소득이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어요.

청나라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어요. 인조는 청 대군이 성난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자, 강화도로 들어가 청군과 맞짱을 뜨려 했어요. 하지만 섬으로 가는 길목을 청군이 먼저 점령해 버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각주2) 으로 들어가 장기전 태세를 갖췄어요. 청나라 군대 10만여 명이 쳐들어왔는데, 남한산성 안 조선 군대는 1만 3천이었고, 식량은 절약하고 또 절약해도 50일 정도 버틸 양이 비축되어 있었어요. 싸움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할 뻔 자’였지요. 성 안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성 밖 사정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어요. 수많은 백성이 청나라 군사의 살육전 아래 목숨을 빼앗겼으며, 굶어 죽는 백성 또한 부지기수였어요.

이러한 시기에 산성 안에 있던 관리 중에 과감하게 ‘청과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는 선비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지천 최명길이었어요.

남한산성

백성과 나라를 살리는 길은 화친뿐이다!

지천은 최명길의 호예요. 그는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반정공신으로 이조 판서와 호조 판서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까지 지낸 성리학자였어요. 병자호란이 일어날 무렵에는 은퇴하여 집 안에서 책을 보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인조는 최명길을 불러 이조 판서에 임명했어요. 이 자리는 우리나라 현재 직제로 보면, 나라의 실제 행정을 총괄적으로 담당하는 안전행정부 장관이에요.

산성 안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조선 조정은 오랑캐의 막강 파워 앞에 전 국토가 황폐화되자 크게 당황했어요. 대책을 강구하던 조정 관리들은 각자의 정치 견해에 따라 두 개 파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어요. 최명길은 별도리가 없으니,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파각주3) 의 리더였어요.

“성이 포위되어 배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성안 사람들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옵니다. 원망과 고통이 하늘을 찌를 듯하니, 백성을 무마시키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길은 화친밖에 없사옵니다.”

한편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리학으로 무장한 명분의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김상헌이에요. 호가 청음인 김상헌은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 이조 참의, 도승지, 대사헌을 잇달아 지낸 후, 병자호란 당시에는 예조 판서로 나라의 외교와 교육을 책임지고 있었어요. 청음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전파(主戰派)의 대표 주자였어요. 그는 지천 최명길의 주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했어요.

“저들이 보내온 편지를 보면, 우리를 신하로 깔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답서를 보내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오랑캐 족속인 청나라에 결코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주장이었지요. 양 파의 갑론을박에 고민하던 인조는 강화도에 피난해 있던 왕실 사람들이 청군에 붙들려 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어요. 결국 화친을 주장하는 지천에게 항복 문서를 쓰게 했어요.

지천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항복 문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청음은 득달같이 달려가 노기에 가득 찬 음성으로 버럭 소리를 질러 댔어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자결하지는 못할망정, 이따위 글을 쓰고 있는 게요? 이런 더러운 글을 쓰려고 공부를 했단 말이오? 어디 후대에 길이 남을 명문장이나 한번 읽어 봅시다.”

청음은 지천이 쓰고 있던 편지를 빼앗아 읽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어요. 청음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천은 찢어진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리자 그것을 주우며 한마디 했어요.

“대감은 찢으시오, 줍는 일은 내가 하오리다.”

지천의 이 말에는 대단히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어요. 당시 조선을 이끌던 핵심 세력인 사대부들은 대부분이 명분에 얽매여 죽을 때 죽더라도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의였어요. 하지만 지천의 생각은 달랐어요. 전쟁의 지속은 백성들만 도탄에 빠뜨릴 뿐, 실익이 전혀 없는 무모한 도전일 뿐이었어요. 그는 굴욕적일망정 화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말이에요. 그 또한 성리학자였어요. 당연히 그도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그는 청음의 분노를 십분 이해했기에 본인이 쓴 편지를 찢어도 노여워하지 않았어요. 물론 자기라도 항복 문서를 써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굴욕을 무릅쓰고 편지를 완성해 전쟁을 중단시켰지만요.

조선 역사상 최대의 치욕 ‘삼전도 굴욕’

지천이 항복 문서를 들고 가자, 청나라 왕은 거만하게 앉아 편지를 쭉 읽더니, 전쟁 중단의 조건을 내걸었어요.

“조선 임금이 직접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다.”

지천은 임금 앞에 엎드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을 전했어요.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긴 인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다른 방도가 특별히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청의 요구대로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는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을 하며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대굴욕을 당해야 했어요. 이러한 항복 의식이 삼전도각주4) 에서 치러져서 역사는 병자호란의 종지부를 찍은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 하고 있어요.

중국 땅 선양에서 다시 만난 지천과 청음

삼전도에서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군은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주전파 거두들과 함께 조선의 아녀자 다수를 인질로 잡아가 버렸어요. 이때 청음도 청나라 수도 선양(심양)각주5) 으로 끌려가 차가운 감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호란 이후 지천은 잠시 관직에서 은퇴해 있다가, 인조의 부름을 받고 다시 나와 영의정으로 조선의 정치를 주도했어요. 이때 지천은 청을 아버지 나라로 섬기는 척했지만, 비밀리에 명과 연락하며 청에게 치명타를 먹일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이러한 계획은 곧바로 청에 발각되고 말았어요. 청은 지천 또한 선양으로 잡아다가 청음 옆방에 가둬 버렸어요. 지천이 잡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청음이 시를 한 수 지어 보냈어요.

가만히 두 사람의 생각을 되돌아보니
문득 백 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

지천이 화답하는 시를 지어 청음에게 보냈어요.

그대 마음은 돌과 같아서 바꾸기가 어렵지만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되돌리기도 한다오.

그토록 대립했건만, 이국땅 선양 감옥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화해했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