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 수요일은 이번 궁궐탐사 마지막 날이다.
9시 30분 까지 돈화문에서 집결하여 창덕궁탐사를 하고
11시부터 후원 탐사에 들어가기로 한다.
후원은 일제 강점기 에 격을 낮추어 비원으로 불렸는데
지금도 창덕궁 후원보다 비원으로 아는사람이 많다.
이제는 창덕궁 후원 이라는 제 이름을 찾아주고 불러야겠다.
창덕궁 돈화문,
보물 제 383호,
1412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다가1608년에 재건 하였다,
이 건물은 숭례문,창경궁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대규모문의 건촉양식을 살펴볼수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궁궐애부 지도를 보며 설명하시는 오늘 선생님,
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회나무 세그루,
궁에서는 꼭 심어야하는 나무로 영의정,좌의정,그리고 우의정을 상징한다,
창덕궁 금천교,
2012년 3월 2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 1759호로 정해졌다.
궁궐의 다리중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인데 흐르는 물이 없어 운치가 없다.
그래도 모양은 예쁘다.
창덕궁 인정전앞 품계석,
문무백관이 그품계에 따라 정렬하는 궁궐의정전앞 뜰에 품계를 세겨 나열한 돌.
인정전의 계단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건물 앞쪽에서 먼곳으로 정1품 부터 종 9품의 품계를 차례로 세워져있다.
국왕이 참석하는 조회를 할때 백관들의 품계에 따라 품석앞에 정렬했다.
문관은 동쪽,무관은 서쪽 품계석 앞에 각각 2열로 정렬하여 행사의 의식을 행하였다,
정조가 질서를 위해 만들었다고..
인정전의 용상과 일월오봉도.
창덕궁 인정전,
국보 제225호,
창덕궁은 조선의 법궁으로 조정의각종 의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진곳이다,
인정전에서는 왕세자나 세자빈책봉이 있을때.또는 왕대비의 환갑등 경사가 있을때 왕은 인정전으로 나가 축하를 받았다,
창덕궁 희정당,
보물 제 815호.
연산군 시절에 궁내 수문당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희정당으로 바뿌었다,
건물이 여러차례 ㅜㄹ에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1920년 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해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는등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장락문,
낙선재의 정문으로 장락문 편액은 흥선대원군 글씨로 알려져있다,
낙선재,
낙선재는 연경당과 단청을 하지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건설되었던것으로 추측이 된다고 한다.
1756년 영조 32년에 화재가 있옸고 1847년 헌종 13년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1884년 고종 21년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공사들을 접견했다,
그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 이 일본에서 돌아와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어며 ,
1966년부터 1989년 이방자 여사가 죽을때 까지 이곳에서 사셨다,
낙선재 뒷쪽 굴뚝,
창덕궁 후원입구,
이곳부터는 우리와 같이간 선생님이 설명을 못하고 이곳에 상주해있는 전문 해설자가 안내해준다,
부용지,
장방형 연못으로 가운대에는 도가 사상을 상징하는 원형 인공섬이 조성되었다.
원래는 이 섬에 현종 때 지은 청서정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은 사각으로 만들고 그안에 둥근섬을 만든것은 천원지방 (天圓地方) 하능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믿었기에..
위 아래 보이는 건물이 "규장각"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로
1694년 숙종 20년에 여러 임금의 어제,어서를 봉안하기 위해 별도로 작은 건울을 만들고
숙종이 쓴 현판을 걸었다가 1776년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새 규장각을 만들고 숙종어필 현판을 옮겨 걸었다.
정조는 37세 미만의 젊은 문들의 능력있고 뛰어난 안재을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임금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담고 있는 이름이라고 함,
그리고 어 는 잉어를 칭하는데 잉어는 임금이라는 뚯도 있어 임금만 드나드는 문이기도 하다.
주합루,
정조원년 1776년에 창건된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이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2012년 8월 16일에 대한민국 보물 제 1769호로 지정되었다,
주합루는 부용지 북쪽에 있는 2층 누각으로 부용정과 마주보고 있다
주합이란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뚯으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뚯을 담고있다,
영화당,
영화당은 광해군때 처음 지어졌으며 지금의 건물은 숙종 18년 1692년 에 재건했다.
정조때는 영화당 동쪽 넓은 마당에 과거장을 마련하고 임금님이 친히 참석하여 전시를 보며여
인재를 뽑았다고 한다,
춘향전의 이몽룡이 영화당 앞 춘당대에서 "춘당춘색 고금동"이라는 시제로 장원급제를 하기도 했다고...
불로문,
이문을 통과 하면 늙지않고 불로장생 한다고..
장락문,
이곳 후원에서 장락문 이있다,
순조의 덕을 기리기위해 아들 효령세자가 잔치를 연곳이다,
근데 아들 효령세자가 먼저 세상을 떴다,
선향제,
위 아래 사진은 선향제 인데 책 서고이다.
책의 변질을 막기위해 기와지붕위에 동판지붕 (약간 푸른색)을 또 한번 덮은 특별한 건물이다.
애련지를 아름답게 조망할수있는 곳이라고 한다.
관람정,
정자 건물이 특이하게 약간 둥근모양 부채꼴이라 더 멋스럽다,
예쁜 관람정 앞에서...
존덕정,
특이하게 육각 겹지붕으로 지으졌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기시작했다.
가이드 선생 오늘 (3월 28일)말씀으로는 개화했다고 한다.
소요정,
옥류천 중심에 있는 정자로 인조때 세웠다,
소요정을 중심으로 물길 주변에 신하들과 앉아 왕이 시를 짓고ㅅ신하가 화답하는 시를 지으며
술잔을 돌리는 장소인데 정조와 순조 때 까지 이 행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옥류천,
바위에 홈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하고 연회를 할때 술잔을 띄워
그 술잔을 잡아 마시는데 술잔을 잡기전에 시한수를 지어야하는데
못지으면 벌주로 술을 마시게 했다고..
술이 마시고 싶으면 일부러라도 시를 짓지 못한척 해야할것 같다.ㅎㅎ
옥류천 바위에 새겨진 숙종임금의 시.
"물이 흩날리는게 삼백척이고
까마득한 구천에서 내리네
보고있으니 하얀 무지개가 일어나고
골짜기 마다 우뢰 소리 가득하고 세차게 흐른다"
옥류천 위쪽에 있는 초가정자.
옛날에 임금이 이곳에서 모를 심고 왐비는 누에를 쳐서 백성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같이 한다는 뚯이었다고 함,
아래는 농사짓는 논의 일부.
지금도 이곳 관리인들이 모를 심고 추수를 한다고..
이 돌계단을 오르면 후원 탐사는 끝..
같이간 문화원 강사님이 아까 다 못한 일정을 다시 설명해주셨다.
이곳에도 규장각이 있는데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고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갔다고 했는지 기억이 안나서 확실하게는 모르겠네..ㅠㅠ
보춘문,
여기서 보춘은" 봄을 알린다"의미로 이름을 지었다고 함.
양지당,
조선의 국왕의 어진을 봉안한 선원전과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사이에 있으며 국왕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를 하던 건물이다.
양지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 는 뚯이며 "어재실"이라고도 했으며 조선국왕의 어진이나 국왕이 쓴 글씨 어필을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약방,
내의원을 말하는 것으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이다,
약방이 인정전과 가까운곳에 위치한 까닭은 임금과 가까이에서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다,
대조전,
인조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이었으나 현재는 36칸으로 줄어들었다,
지붕에 용마루가 없으며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가구등을 갖추어 놓아 연대적인 실내장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조전안 현대적인 가구들..
성되자 바가 내려 그 기쁨에 누각의 이름을 "희우루"라고 이름짓고
몇개월동안 가물다가 창덕궁안에 누각이 완성되자 바가 내려 그 기쁨에 누각의 이름을 "희우루"라고 이름짓고
정조가 친히 쓴 글이다.
가뭄끝에 비가내려 기뻐한다는 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