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홀’을 통해 이어지는 가족애

‘인터스텔라’ 속에 숨겨진 과학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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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의 문화면을 장식하는 화제는 단연 영화 ‘인터스텔라’이다. 특히 인터스텔라는 다른 국가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큰 신드롬급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 북미 박스오피스 집계 전문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는 인터스텔라의 가장 큰 시장이 한국이라고 밝혔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10일 중국 상하이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에 대해 “아마 한국 관객들의 과학적 소견이 높아서가 아닐까 싶다”는 견해를 밝혔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별과 별 사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놀란 감독의 말처럼 과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현대 우주물리학의 성과를 요약해 놓은 영화다.

영화는 세계 각국의 정부와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인간은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우주로 떠나는데, 그 우주여행의 통로는 바로 토성 근처에서 발견한 웜홀이다.

킵 손 박사는 인터스텔라의 웜홀 장면을 영화적 비주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킵 손 박사는 인터스텔라의 웜홀 장면을 영화적 비주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웜홀(wormhole)은 말 그대로 벌레가 파먹은 구멍이란 뜻이다. 여기 한 개의 사과가 있다고 치자. 벌레가 사과 표면의 한 점에서 반대편의 다른 점으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사과 표면 위 두 점 사이의 직선거리로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표면 위가 아니라 사과 속으로 구멍을 뚫고 가면 벌레는 훨씬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 바로 웜홀이다. 즉, 웜홀은 멀리 떨어진 두 지점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통로를 말한다.

웜홀이라는 용어는 1957년 미국의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아인슈타인 및 닐스 보어 등과 함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연구한 저명한 물리학자로서 리처드 파인만이 바로 그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웜홀은 너무 찰나에만 존재하므로 시공간 여행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엔 문제가 있었다. 사람은 물론 그보다 훨씬 작은 물질을 통과시킬 만큼 통로가 길지 않았을 뿐더러 찰나에 붕괴되기 때문이다.

웜홀 통해 시간 여행 가능하다는 이론 발표

그런데 1988년 미국의 물리학자 킵 손 박사는 카시미르 효과를 이용하면 매우 불안정한 터널 같은 웜홀을 보다 안정되게 만들 수 있어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카시미르 효과란 1마이크론 미만의 초미시세계에서 대전되지 않은 도체 사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진공에너지다. 킵 손 박사는 카시미르 효과를 음의 에너지 밀도가 자연에서 가능함을 보여준 증거로 여겼다.

킵 손 박사가 제시한 시간여행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웜홀의 한쪽 입구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시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반대쪽 입구에서 시간의 지연 현상이 일어난다. 웜홀의 입구와 반대쪽 입구에서의 시간이 서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때 시간이 지연되고 있는 입구에서 다른 쪽의 입구까지 이동한 후 웜홀을 통과해 원래의 지점으로 되돌아간다면 출발한 시각보다 앞선 시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웜홀의 한쪽 입구를 우주선에 두고, 반대쪽 입구를 지구에 둔 다음 우주선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1년 동안 우주공간을 달릴 경우 약 3100만 년 후의 미래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쪽 입구에 연결된 지구는 시간 지연 효과 때문에 그동안 시간이 1년만 경과했을 뿐이다. 이때 3100만 년 후의 미래에 사는 사람이 웜홀을 통과해 반대편 입구의 지구 쪽으로 나온다면 3100만 년 전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킵 손 박사는 실제로 이 영화에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 웜홀 장면을 영화적 비주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웜홀을 통한 여행은 아직 수학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웜홀을 통한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시간을 잇는 2개 웜홀 입구를 계속 열어놓을 물리적 힘을 구할 수 없을 뿐더러 정해진 시간 흐름에서 원인과 결과를 뒤바꿀 수 없다는 ‘할아버지 패러독스’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물리학자 루키 버처 교수는 웜홀이 붕괴되기 전에 펄스에 메시지를 담아 과거나 미래로 보낼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호주 퀸즐랜드 대학의 물리학과 티모시 랄프 교수팀은 웜홀을 기반으로 한 과거로의 시간여행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적어도 광양자 입자를 통해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는 등 웜홀을 통한 시간 여행의 가능성에 대한 과학계의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시공간은 중력에 의해 휘어져

웜홀처럼 시공간을 순식간에 이어주는 통로가 과학적으로 조명 받은 이유는 시공간이 평평한 종이 같은 개념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 덕분이다. 중력으로 굽어진 공간에서는 빛도 굽어지며, 중력이 클수록 시간도 늘어나 시간의 지연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실제로 1919년 에딩턴이 이끄는 영국의 과학 원정대는 일식을 관측하면서 별빛이 휘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높은 상공에 있는 인공위성의 경우 더 큰 중력을 받는 지상의 시간보다 빨리 돌아간다. 특히 엄청난 중력을 지닌 블랙홀은 주위의 시공간을 심하게 구부려 빛마저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삼켜버린다.

그런데 한국 관객들이 인터스텔라에 빠져든 이유는 이 같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따뜻한 감성을 품고 있다는 놀란 감독의 신파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놀란 감독은 인터스텔라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영화라고 밝혔다. 또한 지구보다 더 넓은 우주로 나갈수록, 더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여행할수록 영화의 초점이 가족애 같은 사랑의 관계에 모아진다고 했다.

사실 똑같은 생활 속에서 매일 밥상을 마주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지루한 일상처럼 축 늘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처럼 지루한 사랑도 그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블랙홀처럼 놀라운 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가족 중 어느 누가 집을 떠나 외국에 가 있다면, 혹은 인터스텔라에서처럼 머나먼 우주 공간으로 떠난다면 거리는 멀어지지만 애틋한 마음은 그들을 더 가까워지게 만든다. 마치 사랑이라는 강한 중력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져 두 사람 간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동통로인 웜홀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인터스텔라가 한국의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비결도 바로 사랑의 중력이 만들어내는 가족애라는 웜홀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