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除夜) 종 꼭 쳐야하나 ?  

 

타종의 뿌리는 경성방송국 기획프로그램에서 비롯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방식이 사람들마다 다 똑같을 리야 없겠지만, 해마다 서울의 명동거리나 종로와 같은 번화가마다 넘쳐나는 인파는 앞으로도 그다지 줄어들 기미가 없어 보인다.

제 아무리 해넘이도 좋고 해맞이도 좋다지만, 한해의 마무리는 역시 종로의 보신각 앞에 모여들어 종소리와 함께 하는 것이 딱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넘쳐나는 탓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딱히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야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방송국마다 틀어대는 가요대상이니 연기대상이니 하는 프로그램들과 더불어 해를 넘기는 것이 다반사일 것이다.

그렇게 한창 흥이 오르다가도 자정시각만 되면 화면은 자동으로 보신각 앞으로 넘어가는 것은 정말 오래된, 그리고 익숙한 풍경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름하여 '제야(除夜)의 종(鐘)', 이 종소리를 들어야만 이제 정말 새해가 되었음을 실감하는 것은 그야말로 온 국민의 일이 되어버렸지 않나 싶다.

▲ 1985년에 보신각을 떠나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구역에 있는 구석자리로 옮겨진 '원래의' 보신각종. 이제껏 '제야의 종'이 되어본 전력이 없었을 보신각종은 해방 이후 뜬금없이 '제야의 종'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의 하나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인 보신각종의 타종은 제법 오래되기는 했지만 이제 겨우 반세기 정도나 지났을 법한 '신식(新式)' 세시풍속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원래 '제야의 종'이란 것은 제석(除夕) 혹은 대회일(大晦日)에 백팔번뇌를 없앤다 하여 108번의 타종을 했던 불교식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긴 하지만, 이토록 대중적인 연례행사가 된 것은 그 연원이 그리 오래지는 않아 보이니까 하는 얘기이다.

돌이켜 보면 이 땅에 종로의 보신각종이 제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타종되기 시작한 것은 딱 50년 전인 1953년 말의 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의 난리통에 보신각이 완전히 파괴되고 보신각종마저 처참한 몰골로 방치되어 있던 것이 두어 해가 넘었고, 그나마 보신각을 다시 지어올려 재건 준공식을 거행한 것이 1953년 12월 10일의 일이었니 그 사이에 보신각종을 울리래야 울릴 방도는 없었던 셈이다.

▲ 정동의 덕수초등학교 구내에 설치되어 있는 '첫 방송터 기념탑'. 1987년에 세워진 이 기념탑은 1927년 2월 16일에 있었던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의 본방송 개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인 1946년 3월 1일에 삼일절 기념 타종이 있었다는 기록 정도는 있으나, 제야의 종이라는 의미로 보식각종 타종이 이루어졌다는 구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에는 내내 보신각종 자체가 타종된 적이 전혀 없었으니, '제야의 종' 운운할 건더기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 원래 양평 상원사터에 있다가 동본원사로 옮겨진 범종. 이 종은 경성방송국이 기획한 타종행사의 일환으로 1929년 정초를 알리는 제야의 종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한 첫 번째 사례였다.

아주 해묵은 기록을 뒤져보면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일 인정(人定) 28번, 파루(罷漏) 33번씩 타종을 거듭하던 보신각종에 대해 정오 및 자정에만 타종하도록 변경된 것이 1895년 9월 29일이고, 그나마 이러한 타종마저 완전히 폐지되어 포(砲)를 쏘는 것으로 그 기능을 대체하도록 한 것은 1908년 4월 1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도 보신각종이 '제야의 종'이라는 기능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이지 유교국가였던 조선왕조에서 불교식 풍습이었던 제야의 종이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착되었을 리도 만무했을 터이고, 설령 사찰 등지에서 이러한 풍습이 면면히 이어져왔더라도 그것이 일상생활에 보편화되었을 정도로 확산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듯싶다.

예전의 기록을 찾아보면, 기껏해야 '연종포(年終砲)'라고 하여 섣달 그믐날에 궁중에서는 대포를 쏘아 크게 소리를 내어 악귀를 쫓아내는 정도의 풍습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보신각종은 뜬금 없이 '제야의 종'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하나도 어색할 것이 없는 '현대판' 세시풍속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일까?

그 연원을 찾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더니, 제야의 종에 관한 단서 하나는 뜻밖에도 1926년에 설립된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과 맞닿아 있었다. 서울 시내 정동 2번지에 세워진 이 방송국(호출부호 JODK)이 시험방송을 거쳐 본방송을 개시한 것은 이듬해 1927년 2월 16일이었다.

그럼 경성방송국과 제야의 종은 어떻게 연관되었던 것일까? 때마침 근년에 출간된 <한국방송 70년사>에는 이에 관한 증언 하나가 수록되어 있었다.

 

 

 

▲ <매일신보> 1929년 12월 30일자 기사. 1929년에 이어 1930년 정초에는 멀리 일본의 아사쿠사 관음당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받았다

 

"1928년 1월 1일, JODK로서는 처음 맞는 정초라 색다른 기획을 하고 싶었다. 마침 꾀꼬리를 키우는 사람이 있어서 이날 낮 12시를 기하여 꾀꼬리 울음소리를 들려주기로 했다. 아침 7시에 자동차로 꾀꼬리 사육장에 도착하여 3마리를 담요에 정중히 산 후 방송국으로 가져왔다. 기획자들의 심산으로는 담요로 빛을 가리고 있다가 갑자기 담요를 치우면 꾀꼬리들이 아침인 줄 알고 울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낮 11시 30분 담요에 싸여 있는 꾀꼬리를 스튜디오에 안고 들어와서 '지금부터 꾀꼬리의 올해 첫 울음소리를 방송해드리겠습니다'하고 아나운서 멘트를 넣자마자 마이크 앞에서 담요를 제쳐 꾀꼬리를 밝은 세상에 내 놓았다. 아뿔사! 꾀꼬리는 묵묵부답,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낭패를 당한 직원들은 서둘러 휘파람도 불어보고 바이올린으로 흘려 보아도 끝내 예고 시간인 30분을 넘기고 말았다. 아나운서는 37분 경과 후 하는 수 없이 사과방송을 내고 꾀꼬리의 울음소리는 단념하고 말았다.

 

다음해 1929년 1월 1일에는 그래서 남산 기슭의 KBS-TV 옛 국사 자리에 있던 일본 절 본원사에서 범종을 빌려와 아예 제야의 종을 쳤다. 스튜디오에서 자정이 되자 10초에 한 번씩 종을 쳤으니 방송국 전체가 얼마나 울렸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매일신보> 1935년 11월 27일자 기사. 1936년 정초에는 경주의 봉덕사종(에밀레종)이 제야의 종으로 동원되었다.

 

 

해마다 연말이면 제야의 종을 울리고 그것을 방송으로 중계하는 관행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제야의 종'의 연원은 경성방송국의 기획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일본 절 본원사라는 것은 동본원사 경성별원(東本願寺 京城別院)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의 범종이라 함은 원래 경기도 양평의 상원사터에서 옮겨졌다가 나중에 '가짜종'이라 하여 국보지정에서 해제된 내력을 지니고 있는 바로 그 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범종은 조계사 대웅전 내에 보존되어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특별방송을 위한 최초의 '제야의 종' 타종이 이루어진 뒤에 해마다 또 다른 '제야의 종'을 울리고 그것을 중계하는 방식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 이듬해인 1929년 말에는 멀리 일본 동경 아사쿠사(淺草)의 칸논도(觀音堂)에서 직접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하는 방식으로 방송이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 <매일신보> 1939년 12월 9일자 기사. 1940년 정초에는 개성 남대문 문루에 있던 연복사종이 제야의 종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사 속에 인용된 사진은 경주의 봉덕사종을 잘못 인용하여 게재한 것이다


조선의 종소리와 이른바 '내지'의 종소리를 교대로 섞어서 해마다 제야의 종소리를 중계하는 이벤트는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개중에는 경주의 봉덕사종도 있었고, 개성의 남대문종도 있었고, 그 사이 사이에 일본의 사찰에 있는 종을 직접 타종하여 중계를 받는 일도 자주 있었다.

가령 <매일신보> 1939년 12월 9일자에는 개성 남대문루에 있는 연복사종(演福寺鐘)을 제야의 종으로 타종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들어 있어 그 시절의 풍경을 직접 엿볼 수 있다.


"이 해도 벌써 저물어 멀리 은은하게 제야의 종이 울려지려고 한다. 예년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섣달 그믐날이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각처의 종을 '릴레이'식으로 중계하여 각처 방송국 마이크를 통해서 전국에 울리도록 하는데, 금년 섣달 그믐에는 조선으로부터 첫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금년의 제야는 날이 밝으면 역사가 완전히 빛나는 황기(皇紀) 2천 6백년의 새날이 희망 많은 여명(黎明) 속에 밝아올 것이라, 밤에는 '흥아의 종소리'로 신건설로의 향하는 신호를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성중앙방송국(京城中央放送局)에서는 체신국을 통하여 일본방송협회(日本放送協會)에 이것을 교섭하기로 하였는데, 그 동안 각처의 유명한 종을 이미 제야의 소리로 울린 것으로 보아 가장 연대가 오래인 개성 남대문루에 있는 것을 울리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군국주의로 한창 치닫고 있던 시절의 일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제야의 종을 울리는 뜻이 '흥아(興亞)의 종소리'로 변하고 있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울리는 종이 하필이면 조선의 종을 선정하여 그 소리를 일본에까지 중계를 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위의 인용기사에 비추어 보아, 그동안 어지간한 조선의 종은 '릴레이' 방식으로 전부 중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해마다 어떠한 종이 타종되었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을 지라도, 해를 거르지 않고 경성방송국을 통해 제야의 종소리가 중계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듯싶다.

1929년을 맞이하는 새해부터 경성방송국을 통한 제야의 종소리 중계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관행이 적어도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15년 가량은 이어졌을테니 그만한 시간이라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그러한 관념을 심어주는 데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이 보인다. 제 아무리 그것이 숱한 조선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어색한 세시풍속의 하나였을지라도 말이다.

 

 

▲ 이것이 개성 남대문 위에 걸려있던 연복사종이다. 이 종은 1940년 정초에 '황기 2600년'의 새날을 기원하고 '흥아(興亞)의 신건설'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그치질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해방이 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한 번도 타종되지 않았던 보신각종이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구태여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에 크게 확산된 '제야의 종' 타종, 그리고 그러한 종소리를 꼬박꼬박 중계해왔던 라디오 방송의 위력 탓인지 이를 서슴없이 제야의 종으로 두드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식민지 시대의 추억은 그렇게 고스란히 복원된 셈이었다.

그러기를 이제 반세기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제야의 종' 타종식은 꽤나 성공적인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이 보인다. 더구나 한 해를 넘기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텔레비전 중계방송이 이루어진 탓에 제야의 종의 위력은 해가 지날수록 그것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줄어든 것은 아닌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그 사이에 딱히 제야의 종 타종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예전의 보신각종은 피로의 누적으로 지쳐 쓰러져 경복궁의 한켠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새로이 주조된 보신각종이 대신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가 1985년 8월의 일이었다.

애당초 제야의 종을 울리는 뜻이야 하등 나쁠 것이 없겠지만, 그리고 뒤틀어진 형태로 제야의 종을 울리는 일을 그대로 지속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한번쯤 되짚어보아야 할 때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올해도 어김없이 종로거리를 가득 메울 인파 속에 제발 누군가 밀리고 다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