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치욕의 역사

[역사추적] 넘어지고 다시 세우고 또 파묻기를 거듭하다 

 

 

 

▲ 2004년 4월의 '이달의 문화인물'은 백헌 이경석이며,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이와 관련한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2004년 4월의 '이달의 문화인물'은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이다. 때맞춰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지난 3월 12일 이후 한달 동안 특별전시회 '난세의 명재상, 이경석'이 있었고, 여기에는 100여점에 달하는 유품과 더불어 현종 임금이 하사한 궤장(보물 제930호)도 선을 보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내린 궤장을 받은 이가 그리 흔치는 않았으니 그것으로도 가히 그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효종의 등극과 더불어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고, 병자호란 이후 한때는 청나라에 맞섰다가 거듭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조치를 당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명재상'에게는 평생토록, 아니 그 후로도 결코 벗어 던지기 어려운 굴레가 하나 있었다. 치욕의 역사 그 자체인 송파 삼전도의 '대청황제공덕비'에 새겨진 칭송의 글은 바로 그가 지은 것이었다. 어쩌다가 그에게 이 일이 주어졌고, 그로 인해 나중에 송시열의 맹렬한 비난을 샀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다시 36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때의 삼전도 비석은 지금도 번듯하게 남아 있다. 비록 원래 세워졌던 자리는 아니고 또 비석의 뒷면에는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경석의 이름마저 뭉개져 버린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저 놈의 공덕비를 바라보는 심정이 여전히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의 역사공원에는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원초적인 치욕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난 100년간에 벌어졌던 굴곡의 역사도 함께 묻어있다.
ⓒ 이순우
▲ 1909년 가을에 동경제국대학의 세키노 타다시 교수가 보았던 삼전도비의 모습이 <한홍엽>에 수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그저 넘어져 있었을 뿐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매몰된 상태는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때는 이를 치욕의 흔적이라 하여 땅 속에 파묻은 적도 있었으나 그 시기 또한 그리 오래지는 못했다. 설령 부끄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역사적 사실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이내 한강의 대홍수가 지나면서 비석을 묻어놓은 자리를 고스란히 파헤쳐 놓았던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삼전도 비석이 처음 넘어진 것은 100년도 훨씬 더 된 때의 일이었다. 청일전쟁의 뒤끝에 사대의 상징이라 하여 영은문(迎恩門)이 지체없이 헐어낸 것처럼 이른바 청태종의 공덕비 역시 그 무렵에 뒤로 넘어졌던 것이다. 혹자는 이때에 비석을 땅에 파묻었다고 적어놓은 자료들이 간간이 보이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러했다는 흔적은 없다.

1909년 가을에 이곳을 탐방했던 동경제국대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한홍엽(韓紅葉>(탁지부건축소, 1909)에 남겨놓은 사진자료를 보면, 삼전도비가 있던 주위에 민가들이 들어찼긴 했지만 그 사이로 귀부가 그대로 보이고 비신만 넘어간 상태였다는 점에서 "비석을 매몰… 운운"은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 조선총독부는 1917년 9월에 청일전쟁 이후 조선정부가 일부러 넘어트린 삼전도비를 구태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정책은 이 비석을 조선의 보물로 지정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삼전도 비석을 결국 다시 세운 것은 조선총독부였다. 이에 관해서도 분명한 기록 하나가 남아 있다.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이 정리한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외교사상 중대한 일등 사료이며, 조선에 다시없는 만몽문(滿蒙文)을 새긴 비석인데, 나아가 조선시대 중기에 있어서 석비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원히 보존의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중략) 명치 27,8년 전역(즉 청일전쟁) 후에 넘어졌고, 1909년 세키노 박사가 조사할 제에는 더욱이 민가의 담장 안에 드러누워 뒤집어져 있었으나 근년에 본부(本府)에서 수립보존의 의논이 점차 무르익어 대정 6년 즉 1917년 9월, 때마침 본관들이 송파리(松坡里)에 머물던 중 영선과원(營繕課員)의 손으로 수립(竪立)이 완료되었다."

이에 앞서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지어 올린 독립문의 존재를 기꺼이 용인한 것 또한 그네들이었으니, 진작에 조선정부가 일부러 넘어트린 삼전도비를 조선총독부가 구태여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을 달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나아가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마자 그 등록대장의 첫머리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하여 적극적인 보호대상으로 삼았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다시 세월이 흘러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의 숱한 고적유물들이 이른바 '보물'로 잇달아 지정이 되었을 때 이 삼전도비가 그 대열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때가 1935년 5월 24일이었고, 이름하여 보물 제164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였다. 말하자면 이곳은 인조 임금이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던 수항단이 세워졌던 자리라고 보면 되겠다. 그 사이에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인근의 송파마을은 거의 사라졌으나, 삼전도비만은 황량하나마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 <속경성사화>(1938년)에 수록된 '경성부근명승사적안내도'에는 청태종공덕비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삼전도비의 원위치는 지금의 석촌호수 언저리였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삼전도비의 처지는 청일전쟁 직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수치의 역사였고, 그러기에 이 비석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5년 11월 4일에 개최된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제2차 총회에서는 "내무부 치안국장의 요청에 의하여 국보 제164호로 지정되었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지정 해제되어 땅속에 매몰되게 되었다"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 1960년에 발간된 <지정문화재목록>에는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국보에서 지정해제되고, 대신에 그 자리가 고적 147호로 지정된 상황이 표기되어 있다. 이 무렵에는 진작에 매몰처리된 삼전도비가 홍수로 인해 다시 그 존재를 드러낸 때였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달가울 리 없었던 비석 하나는 세상에 태어난 지 320여년만에 그렇게 땅속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위의 결정이 지체없이 시행에 옮겨졌는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어떤 기록에는 1956년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1958년 봄에 부근의 지하 7척 깊이에 매몰하였다"고 적어놓은 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삼전도비는 즉각 국보 지정에서 해제되었고, 그 대신에 비석이 서있던 자리가 1957년 2월 1일자로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라는 이름을 새로이 얻는 절차가 이어졌다. 그 후 1962년의 문화재보호법 제정과 더불어 이 명칭은 다시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되기도 했다.

그런데 때로는 일이란 게 좀 얄궂은 데가 없지는 않았던지 애써 땅속에 파묻었던 비석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그 존재를 드러냈던 것이다. 우연찮게도 비석을 매몰하던 그 무렵에 한강에 대홍수가 밀려들었고, 그로 인해 삼전도비는 금세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미술> 1960년 8월호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후 홍수에 의한 하안유실로 인해 비신, 귀부가 모두 수중으로 전락하였으며 이대로 두면 강저(江底)에 매몰되어 버릴 위험이 뚜렷하므로 문교부에서는 시급히 이를 인양하여 석촌리의 고지에 이건할 계획이다. 그런데 비신의 무게만 약 15톤, 귀부의 무게가 25톤이나 되고 현위치의 지반이 매우 약하고 함몰되기 쉽기 때문에 그 공사는 여러 가지로 난공사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처럼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비석 하나가 지금의 모습처럼 정비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 시절은 급속히 지역개발이 이루어지던 상황이었고, 여기에다 남한산성을 순시하던 차에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패하여 항복한 굴욕의 사실을 복원하여 굴욕의 역사 속에서도 교훈을 찾도록 하라"고 했다는 대통령의 지시내용이 충실히 존중(?)되던 때였다.

▲ 삼전도비가 놓여 있는 석촌동의 역사공원이다. 삼전도비는 앞면이 만주어와 몽고어, 뒷면이 한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뒷면에 이경석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은 지워져 있다.
ⓒ 이순우
그 동안 사용되어 왔던 공식명칭 즉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라는 것이 과분하다 하여 '삼전도비'로 이름을 바로 잡은 것도 1981년 7월 10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송파구 삼전동 289-3번지에 조성된 역사공원에 삼전도비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시기가 명확하게 언제인지는 구체적으로 고증되지 않고 있으나, 1984년 7월 13일에 고시된 문화재보호구역 지정내역에 지금의 공원자리가 공식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그 시기를 얼추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은 싫건 좋건 그렇게 보존이 되고 있는 셈이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말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마음이 없으나, 앞으로 또 어느 만큼의 세월이 흘러 다시 이 비석을 땅속에 파묻는 일이 과연 생겨날 것인지는 자못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삼전도비 옆에 있는 또 다른 돌거북의 정체는 무엇일까?

 

 

 

파 석촌동의 역사공원 구역에 옮겨진 삼전도 비석의 바로 옆에는 비록 비신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약간 작은 크기의 돌거북 하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원래의 삼전도비와 무관하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적어놓은 기록도 있다. 하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그 크기만 약간 다를 뿐 세부적인 표현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흡사하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조성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에 비춰 보더라도 여러 차례 석물(石物)이 준비되었다던가 조성계획이 때때로 변경된 흔적이 확연하다는 점에서 그 당시에 만들어진 잔여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龜趺)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실제로 이 돌거북의 존재에 대해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출한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에서는 위와 같은 취지의 설명문을 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성전기에서 발행한 '경성하이킹 코스 제3집' <풍납리토성> (1937년)에도 작은 귀부가 삼전도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여기에는 "부락민의 말로는 1925년 홍수에, 혹은 그 이전에 작은 귀부에 있던 비신이 행방불명된 바 있다"는 증언을 덧붙이고 있으나,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에는 '삼전도비와 10여 발짝 떨어진 곳에 놓여진 작은 돌거북'의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것을 참고할 만하다고 하겠다. / 이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