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편액은 매국노 이완용 글씨"

 
[발굴] '독립문'은 정말 독립의 상징이었을까? 
 
지난 1999년에 출간된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이라는 책이 있다.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친일매국노' 이완용을 굳이 정면으로 다룬 것부터가 그러하고, 기존의 상식과는 제법 다른 시각에서 그를 바라본 서술 방식이 나름의 반향을 일으킨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 하나를 지적했다. 독립문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이완용이 쓴 것이 백 퍼센트 확실하다는 것이다.

 

 

▲ 독립문의 앞뒤로 달려있는 편액은 과연 누가 쓴 것일까? 상당히 언짢은 일이겠지만, '매국노' 이완용의 글씨라는 주장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 글씨체가 굵고 힘있는 이완용의 전형적인 필체이며, 그는 당대 제일의 명필로서 이미 궁중의 여러 전각 현판을 쓴 경력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한 이완용은 그 당시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으로서 독립문 건립 사업을 주도했다는 것도 다른 이유였다.

그런데 참으로 언짢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주장은 사실인 것 같다. 약간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때마침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분명히 들어 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독립문 글씨가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구절이 분명히 들어있다. 약간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그 시절의 <독립신문>을 뒤져 보면 오로지 왕세자 전하의 친필로 '독립관' 현판을 달았다는 구절만 드러났을 뿐이었고, 정작 독립문 편액의 작자에 대해서는 희한하게도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형편이었다. 필시 무슨 함구령 같은 것이 내려졌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쨌거나 결국 그 정답은 좀 의외의 장소에서 튀어나온 셈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독립문은 대대로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자리에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지어 올린 자주독립의 상징물이었다. 그것이 정말로 참된 독립의 표상이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독립협회란 것 자체가 이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였던 것이다.

독립문의 건축은 분명 해묵은 사대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의 하나였을 테지만, 그 결말은 어째 좀 흐지부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1896년 11월 21일에 꽤나 시끌벅적하게 벌어졌던 기공식과는 달리 독립문이 정확히 어느 날에 준공된 것인지에 대한 기록조차 찾을 수가 없다.

흔히 독립문의 준공은 1897년 11월 20일에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서재필 박사 자서전> 역시 1948년에야 나온 기록인 만큼 사실이 그러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곳에서는 1897년 11월 14일에 준공되었다고 적어 놓은 곳도 있었다.

 

 

▲ 해방 이후 서재필 박사의 귀국과 관련하여 '독립문 건립 52주년 기념대회'의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1947년 11월 18일자 기사이다. 무슨 근거에선지 이 행사는 '11월 16일'에 열렸다.

 
실제로 해방 직후인 1947년에는 서재필 박사의 귀국 당시에 서울시 주최로 '독립문 건립 52주년 기념식'이 대대적으로 거행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또 무슨 연유인지 11월 16일에 개최되었다는 보도자료가 있다.

그리고 독립문의 설계자에 대해서도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누구는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 했다고도 하고, <서재필 박사 자서전>에는 그가 아니라 독일공사관에 있던 스위스인이라는 증언을 남겨 놓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독립문의 공역을 심의석(沈宜碩) 기사가 담당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이렇듯 독립문의 완공이 언제 이뤄졌는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건립 기금의 조성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탓인지 1898년 1월 이후에는 이미 완공된 독립문의 공사 대금을 다 갚지 못해 성금을 보태어 달라는 광고가 연일 <독립신문>의 지면을 장식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마저 결국 두어 해를 넘기지 못하고 해산 조치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독립문의 건립을 이끌었던 주체 세력 가운데 상당수는 이내 친일 세력으로 돌아섰거나, 개중에는 심지어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작위를 받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 보니 애당초 자주 독립을 표방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는 한참 헷갈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독립문을 세웠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자주 독립을 위해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독립문의 공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 <동아일보> 1928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독립문 수선공사의 모습이다. 경성부 토목과가 주관했던 이 공사는 그해 10월 9일부터 한달 가량 진행되었고, 그 완성된 모습은 다시 <동아일보> 1928년 11월 15일자에 소개된 바 있다.

 
일제 시대를 통틀어 식민 통치자들의 위세에 아랑곳없이 제 이마에 태극기를 걸어두고 버젓이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 독립문 말고는 또 뭐가 있었을까? 더구나 숱한 독립투사들이 잇달아 투옥된 서대문 형무소가 바로 그 앞에 있었으니 독립문에 대한 감회가 오죽했을 것인가?

하지만 정작 독립문의 '나홀로' 시위가 그다지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지, 조선총독부는 이 독립문에다 '고적 제58호'(지금의 사적 제32호)라는 지정 번호까지 붙여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에는 '고적 제59호'라는 번호가 부여되었으니, 그때가 1936년 5월 23일이었다.

그에 앞서 1928년 10월에는 그 동안 허물어져 내린 독립문을 크게 수리하는 일도 벌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 수선 공사는 경성부 토목과가 직접 나서서 독립문 상부의 헐어내고 철근 콘크리트로 그 구조를 대신하는 공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독립문에 이토록 깊은 상처가 난 데는 남다른 수난의 역사가 있었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26일자에는 독립문이 헐린다는 소문의 진상과 기미년 만세운동 당시에 겪었던 사건의 내막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독립문 오른편 다리에는 보기에도 위태롭게 틈이 생겼습니다. 삼십년이 될락 말락한 이 문에 벌써 틈이 생긴 것이 이상하여 근처 사람에게 물어보니 삼일운동 때에 어떤 청년이 독립문에 태극기를 꽂아두었던 것을 경관이 발견하고 그것을 빼여버리는 동시에 원래부터 독립문 앞이마에 붙이고 있던 태극기의 색채(色彩)를 없애버리려고 소방대를 불러다가 소방 펌프를 들이대였더랍니다.

수년 동안 바람, 비의 침노를 입고도 엄연하게 서 있던 독립문은 소방 펌프의 줄기찬 물결에 무수한 매를 맞았을 뿐입니까. 이마에 붙였던 자랑거리까지 잃어버리게 됨에 할 일없이 병든 몸에 뼈까지 어그러진 것이라 합니다.

독립문은 앞으로도 얼마 동안 헐어 버리지 않으리라고 당국자는 말합니다. 무악재 고개에서 넘어오는 쓸쓸한 가을 바람과 악박골 좁은 골에서 내려 몰리는 눈보라를 지금 이 모양으로 한동안 더 받을 것이라 합니다."

 
 
독립문의 북면

 
 
독립문의 남면
 
 
복원된 독립관
 
 
서재필 동상

모두가 자주 독립의 상징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러한 독립문의 앞뒤에 하필이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완용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건 분명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분명히 독립은 독립이었으되 그것이 정녕 참다운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었는지는 무려 10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그에 대한 대답이 도통 잘 떠오르질 않는다.

 

독립문 이전공사의 내막 - "자동차는 문화재보다 힘이 세다"

 

 

 

▲ 1979년 8월 16일, 그날 독립문의 흔적은 하나의 표지동판이 되어 그렇게 땅 밑으로 사라졌다.

 

독립문에 관한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독립문 이전 공사'가 아닌가 싶다. 이른바 성산대로의 개통으로 독립문의 이전 계획이 처음 거론된 것이 1976년 무렵의 일이었던가 본데, 그 후 독립문을 옮긴다 만다 하여 숱한 논란이 거듭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직접 관장했던 문화재위원회에서조차도 처음에는 이전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가 결국 1978년 12월에 이르러서는 모든 결정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일임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의 계획안을 보면 사직터널에서 금화터널 방면으로 이어지는 고가도로는 독립문의 상단부와 거리로는 3m, 그리고 높이로는 불과 1m를 남겨두고 건립되는 것이었고, 실제의 시공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국 보존상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되어, 결국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는 제 있던 자리에서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내 독립문 이전 공사는 1979년 3월 19일부터 그해 연말까지 진행되었는데,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가량 물러앉은 것이 바로 지금의 자리이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겨진 동판을 맨홀 아래에 설치하였다.

그러니까 수년간의 이전 논란에도 불구하고 독립문은 독립문대로 옮겨지고 고가도로는 또 고가도로대로 에스(S)자 모양으로 한껏 휘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무릇 자동차와 맞붙어 온전하게 제자리를 지켜낸 문화재가 드물었으니, 덕수궁의 대한문이 그러했고, 광희문이 그러했고, 수표교가 그러했고, 삼전도비가 그러했고 서울 상계동의 한글고비 역시 그러한 사례의 하나였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성산대로의 개통으로 끝내 뒤로 물러나는 처지에 놓인 독립문이 한때나마 그 키높이를 지나가는 육교의 건립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연인즉 뭔가 하면, 지난 1970년 무렵에 독립문 바로 앞을 가로질러 육교건립 공사가 착수된 적이 있었다. 일이 한창 진행중이던 때였는데, 그렇게 되면 문화재를 가리는 꼴이 되니까 문화재관리국이 공사중지를 건의하고 국회 문공위원회에서도 다소간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부랴부랴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이 독립문 앞의 육교공사를 철거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 대신에 1971년 4월부터는 지하보도 건립공사에 착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는 소식이 있었다. 일이 그러했던 것인데, 결국 그 후로 십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동차를 위한 고가도로의 건설에 독립문은 참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이 사례가 말해주는 논점은 이러한 것이다. 즉 자동차는 사람보다 힘이 세다. 특히, 그러한 '조국근대화'의 시대에는 말이다. / 이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