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스 할스의 작품세계Ⅰ -[Frans Hals]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1~1666]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년경~1666년)는 ‘황금 시대(The Golden Age)’라 불리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사 최초의 거장으로, 자연스러운 구성과 활력 있는 필치의 초상화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화가이다.

스페인에 대항한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은 16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64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끝이나 ‘80년 전쟁’이라 불리지만, 1600년대에 들어서면 독립된 네덜란드 공화국의 성립은 기정 사실이 된다.

당시 인구당 소득이 유럽 최고였던 국제적인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 암스테르담을 비롯해 하를렘, 위트레흐트, 헤이그, 델프트, 레이덴 등은 네덜란드 경제의 거점이었을 뿐 아니라, 이전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던 미술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들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유럽 미술의 주요 후원자였던 궁정과 가톨릭 교회, 막대한 재산을 가진 세습 귀족이 없었던 개신교 공화국 네덜란드의 미술 수요자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간 계급’이었다.

 

거대 선박의 소유주에서 동네 빵집 주인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의 범위가 넓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의 취향도 당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발달한 가톨릭 바로크 미술의 후원자와는 달랐다. 이 검소한 캘빈주의자들은 과시적인 스케일과 화려한 장식의 역사와 신화 주제 그림보다는 소규모의 초상화, 정물화, 장르화, 풍경화, 해양화 등을 선호했다.

이러한 회화의 주제들은 도시별로 특화되고 화가별로 전문화되어, 전에 없던 회화 장르와 해당 분야의 수작들이 탄생했다. 초상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림들이 주문과 관계없이 미리 그려지고 전시, 판매되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화상(art dealer)과 미술 시장(open art market)의 역사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이다.


할스의 전문 분야는 초상화다. 그는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인 1590년경에 하를렘(Haarlem)으로 이주했다. 그때부터 1666년에 80대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외국으로 나가거나 도시밖 여행도 거의 하지 않고 하를렘에만 머무르며 1인, 2인 초상화와 집단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전성기인 17세기 전반은 하를렘이 미술 문화를 이끌던 시기였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네덜란드 미술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 중심 인물은 할스보다 한 세대 어린 렘브란트였다.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세번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델프트의 베르메르는 렘브란트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이다.

 

황금 시대, 네덜란드 미술의 정체성

 

할스는 1610년에 화가 조합인 성 누가 길드에 등록하여 독립된 장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북유럽 미술가들의 전기인 [화가의 책] 저자로 더 유명한 하를렘의 매너리스트 화가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가 그의 스승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할스의 그림에서 스승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초기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카라바지오의 화풍을 따르던 위트레흐트의 화가들(Utrecht Caravaggists)과 할스보다 5살 정도 많고 그가 태어난 안트베르펜을 근거로 활약하던 화가 루벤스다.

 

할스의 [이삭 마사 부부의 초상 Marriage Portrait of Isaac Massa and Beatrix van der Laen]은 루벤스의 [인동 덩굴 그늘의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를 직접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모델은 하를렘의 부유한 상인 이삭 마사와 그의 아내인 시장의 딸 베아트릭스 판 데어 란으로, 그림은 이들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기대 앉은 나무에서 내려온 덩굴과 오른쪽 원경에 보이는 공작 모두 결혼과 관련된 상징이고, 오른손을 심장에 대서 사랑과 정절의 표시하고 있는 남자의 자세와, 여자의 오른손 둘째 손가락에 보이는 두 개의 반지 역시 결혼과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부부의 모습은 서로 다른 캔버스에 각각 그려져, 남편과 아내 초상화가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걸리는 것이 관례였다. 할스도 이러한 형식의 부부 초상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처럼 둘을 한 화면에, 그것도 야외에 배치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이런 구성뿐 아니라 모델의 머리와 손 등을 견고하고 힘차게 모델링한 것이나 이마와 볼의 하이라이트 처리, 전체적인 색채 등에서 17세기 전유럽에 미쳤던 루벤스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으나, 할스가 그린 부부의 분위기는 루벤스 부부보다 더 밝고 격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활기와 명랑함은 할스가 그린 거의 모든 초상화의 특징으로, 이것은 플랑드르 미술과 다른 네덜란드 미술만의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즉 할스의 그림은 삶과 세계를 긍정하고 사랑했던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 시민 사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 시민 사회의 분위기

 

[웃는 기사 The Laughing Cavalier]는 할스가 그린 1인 초상화의 전형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빛은 왼쪽 위에서 비스듬하게 들어오고 모델은 상반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제목과 달리 살짝 미소만 짓고 있으나, 절제된 듯하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색채와 생생한 얼굴 표정은 관람자의 기분마저도 좋아지게 하는 낙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획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붓자국이 특징인 할스의 작품치고는 이례적으로 꼼꼼하게 묘사된 왼쪽 소매의 자수는 횃불, 하트, 화살표 등으로 모두 사랑을 표시한다. 작품에 서명과 제작 연도를 거의 남기지 않았던 화가가 이례적으로 그림 오른쪽 상단에 제작 연도와 함께 써 넣은 모델의 나이는 26세로, 그런 자신감 있고 정열적인 사랑과 어울리는 시절이다.


1865년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을 두고, 하트포드 후작(4th Marquess of Hertford)과 로스차일드 남작 (Baron Rothschild) 사이에 구매 경쟁이 벌어져, 그의 작품 중 사상 최고치의 가격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품은 하트포드 후작의 손에 들어가, 그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설립된 왈라스 컬렉션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시기는 할스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달라진 때이기도 하다.

 

할스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지만 명성은 지역적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의 거친 양식은 사망 직후인 18세기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 평가절하되어 왔었다. 그러다 1860년대 이후, 테오필 토레(Théophile Thoré)와 같은 비평가의 영향으로, 그의 즉흥적이고 밝은 그림이 주목할 만한 개성의 산물이자, 17세기 네덜란드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시장에서의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이 시기에 명랑하고 밝은 그림을 찾던 부유한 수집가들이 취향에도 부합하면서, 그의 위치는 렘브란트 다음 가는 대가로 확정이 되었고, 작품 가격은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못지 않은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독립 전쟁의 기념, 활기찬 모임의 한 때

당시 네덜란드 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작품이자 할스의 명성을 만든 그림 주제는 실물 크기 인물 여러 명이 등장하는 집단 초상화(group portrait), 특히 시민군의 연회 장면이었다.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마을마다 조직된 길드의 일종이었던 시민군(civic guard)은 사용하는 무기에 따라 수호 성인을 선택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석궁수들은 성 조지를, 활을 쏘는 사람들은 성 세바스찬을 내세우는 식이었다.

네덜란드의 시민군은 용감한 저항과 처참한 집단 처형 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이 거의 없었던 17세기에 들어와선 이전의 전투적인 성격은 없어지고,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거나 외부에서 귀빈이 방문했을 때 에스코트하는 정도의 임무만을 맡았다.

이들은 수호성인의 축일이 되면 모여 거의 일주일간 지속된 연회를 열었는데, 이는 부유한 엘리트 계층 남자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는 사교 모임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할스는 1616년부터 1639년까지 시민군의 집단 초상화들을 그렸고, 그 대부분이 현재 하를렘의 프란스 할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민군의 전신상을 주로 그렸던 암스테르담의 경우와 달리, 그는 모델의 몸을 3/4 정도 보이게 하는 하를렘의 전통을 따랐고, 주로 실내나 야외에서의 연회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1633년에 제작한 [하를렘의 성 아드리안 시민군의 장교들 Officers and Subalterns of the St. Adrian Civic-Guard Company, Haarlem]은 그 한 예로, 화승총을 다루던 시민군 장교들을 그린 집단 초상화다.

초상화는 제약이 많고, 전통과 관습에 많이 의존하는 보수적인 장르이다. 따라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할스의 집단 초상화는 그 이전의 시민군 초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그는 인물의 특징을 정확히 포착하여, 모델 한명 한명이 개성을 가진 독자적인 개인으로 보이게 했다. 그 이전 집단 초상화들에서 서로 비슷비슷해 보이던 얼굴을 그의 작품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또한 그는 구성에 있어서도 비상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공간 속에 기계적으로 배치되어 부자연스럽고 비좁게 복닥거리던 느낌을 주던 그 이전 집단 초상화와 달리, 그의 작품 속에서 모델은 충분한 여유 공간을 가지고 있다. 인물의 다양한 자세는 화면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고, 자칫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가로로 긴 화면에 깃발이나 창으로 만든 대각선과 세로선은 활력을 만들어 냈다.

인물의 의상은 거의 모두 검정색에 흰 칼라로 동일하나, 할스는 어깨띠와 깃발의 현란한 색채를 통해, 모임의 떠들썩한 흥취와 과시적인 화려함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의 집단 초상화는 오늘날의 스냅 사진처럼 즉흥적, 순간적, 직접적, 비공식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이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화가 특유의 붓질이다. 그는 작품 제작에 앞서, 주문자에게 모델을 오래 세우지 않겠다는 조건을 전달할 정도로 작업 속도가 빨랐다.

(주문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보통 시민군 회관에 걸릴 목적으로 제작된 이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작품값을 1/n로 나눠 동일하게 부담했다.) 그는 예비 드로잉 없이 처음부터 캔버스에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할스 작품의 서명이자 필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특유의 헐겁고 속도감 있는 붓질은, 끊임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과 하나가 되어 그림 전체에 통일적인 리듬감을 만들어 냈다

화면 밖을 향한 웃음과 대화의 순간

빠르고 가벼운 붓질에 어울리는 대상 중 하나가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웃음일 것이다. 할스가 그린 많은 인물들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데, 특히 가장 밝은 웃음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장르화이다.
할스가 초상화 이외에 손을 댄 유일한 분야인 장르화는 얼핏 보면 초상화처럼 보여 ‘성격 그림(character pictur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경 묘사 없이 한 명이나 두 명이 등장하는 장르화의 구성과, 강하고 단순한 조명은 위스레흐트 카라바지오주의자들의 영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할스의 붓은 주문 초상화를 제작할 때보다 더욱 자유롭고 느슨해져, 화가 특유의 ‘올이 풀린 듯한 윤곽선’이 두드러진다.

하층 계급판 ‘모나리자’라고 불릴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보여주는 [집시 소녀 Gypsy Girl]와, 술집의 한 구석에 앉은 여성이 옆 사람을 향해 농지거리라도 내뱉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말레 바베 Malle Babbe]가 이런 분야의 대표작이다.

[집시 소녀]의 모델은 매춘부인 것으로 보이며, ‘정신나간’ 바베라는 뜻의 [말레 바베] 모델은 ‘하를렘의 마녀’라는 별명을 가졌던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바베의 어깨에 앉은 올빼미는 그녀가 가진 악마적인 힘의 상징이기도 하고, ‘올빼미같이 취한다’라는 당시 네덜란드 속담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할스는 이런 인물들 외에 배우, 어린이 등을 모델로 장르화와 5감, 7대죄 등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 그림들에서 잘 나타나는 할스 인물화의 특징은, 주인공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의 누군가와 함께 있고, 그를 상대로 대화를 하거나 시선을 주고받고 있는 듯한 표정과 자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성격은 그의 작품이 재발견된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는 높이 평가 받은 요소였지만, 그 이후에 ‘명랑한’ 미술이 경박한 것으로 의심받으면서, 또 렘브란트 인물화와 비교당하면서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즉 내적 성찰에 잠겨 있는 렘브란트의 인물이 사회적 가면 이면의 심오한 진실과 정신적인 힘 혹은 영혼 자체를 드러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데 반해,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듯한 할스의 인물은 남의 눈에 비친 외적인 면만을 보여주는 그림, 깊이 없는 피상일 뿐이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이다.

할스는 렘브란트와 달리 그림의 주인공에게 특별히 감정을 이입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고객을 그릴 때나 사회적 약자를 그릴 때나 대체로 한결같이 감정적인 중립을 유지하여, 모델에게 아첨도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을 이입하지 않은 초상화

그림에 편만한 밝고 명랑한 분위기와 달리 할스의 생애는 그다지 행복한 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610년에 결혼했다가 아내가 1615년에 사망하자 1617년에 재혼했고, 두 결혼에서 많은 수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아들 다섯은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 화가가 되었으나, 아들 하나는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딸 중 하나는 매춘부가 되었다. 할스는 작품에 서명이나 연도를 명기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그가 인기를 얻자 모방작과 위작이 넘쳐나서, 전문가들도 그의 손으로 그려진 작품 총수에 합의를 하지 못하고 1백여점에서 2백9십점까지 큰 차이를 보이는 추정치들을 내놓고 있다.


어느 경우든 작품 활동 기간과 작업 속도를 봤을 때 작품 수가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이 때문에 그는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는 데 늘 곤란을 겪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의 많은 화가들처럼 그도 부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술품 중개업이 그것이었다. 본업과 부업을 합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는지, 그의 이름은 채무 관련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식비와 숙박비 대신 그림을 맡겼다는 기록, 화가 길드의 회비가 연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가 한때 시민군(St. George Civic Guard Company)과 수사학회(De Wijngaertrancken)의 회원이었다는 기록을 보아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를렘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화가로서 인정받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스승 판 만더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것이 제자 할스가 자신보다 더 유명해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할스가 마지막으로 주문 받은 대작은 하를렘 양로원 이사들의 집단 초상화로 [하를렘 양로원 여성 이사들 Regentesses of the Old People’s Home, Haarlem]과 남성 이사들이 짝으로 그려져 양로원 회의실에 걸렸다. 고아원, 양로원, 구빈원, 병원 등의 자선 기관 운영진은 이 시기 네덜란드 그림의 주요 후원자 중 하나였다.

가난이나 질병이 신의 뜻으로 여겨졌던 중세에는 이를 불가피한 사회현상으로 보고 방치하거나 교회나 개인 차원에서 돕는 정도에 그쳤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구걸과 범죄를 낳는 가난과 질병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실용적 목적과 인도주의가 함께 작용해 자선 기관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 건물에는 기관의 목적을 나타내는 성서나 알레고리 주제 그림 혹은 운영진의 초상화들이 걸렸다.


80대에 그린 이 작품에서 할스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어둡고 적은 수의 색채를 사용했고, 모델도 거의 정면관에 가깝게 정적으로 배치하는 변화를 보였다. 붓질은 이전에 비해 더욱 헐거워졌고 손과 같은 부분의 묘사에는 최소한의 붓질만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특징을 그의 기교의 정점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고, 노령과 굳어진 근육, 나빠진 시력으로 인한 퇴보로 보는 입장도 있다. 미화하지 않은 이사들의 모습 때문에 잘못된 추정이 나오기도 했다. 즉 이 양로원에 화가 자신이 수용되었는데 부당한 처우를 받아 그 앙갚음을 하기 위해 일부러 이사들을 추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또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한 알콜 중독자였고 취해서 아내를 폭행하기도 했다는 설도 있었는데, 현재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제자에는 동생 디르크 할스(Dirck Hals), 아들 얀 할스(Jan Hals)와 여성 화가인 주디트 레이스터(Judith Leyster) 등이 있고, 이들은 그의 자유로운 붓질과 밝은 분위기를 모방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르화가 얀 스텐(Jan Steen)이다. 19세기 말에 할스는 근대적인 회화의 특징을 선취한 화가로 여겨졌다.

그의 자유분방한 붓질은 빛과는 별 관련이 없어 인상파의 붓질과는 맥락이 달랐으나, 그 자체가 목적인 붓질의 창조적인 에너지는 근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미술에서 렘브란트 다음 가는 지위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특히 좋아하고 습작시기에 모방한 화가로는 쿠르베, 반 고흐 등이 있다

[출처] :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Portret van Frans Hals 1650, oil on panel , Version at the Frans Hals Museum

 

네덜란드 화가. 안베르스 출생. 1591년경 하를럼으로 옮겨 카레르 판 만델에게 사사하고 1616년경 최초의 작품 '성(聖)조르조시(市)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그려 초상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대담한 필치로 모델의 감정과 심리를 교묘하게 묘사함으로써 초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1640년경부터 작풍이 변하여 색채가 어둡고 표현이 억제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렘브란트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만년은 불우하여 양로원에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 '웃고 있는 기사', '니콜라스 하셀라르',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 '집시여인' 등이 있다. 하를럼에는 국립 '프란스 할스미술관'(1913 개관)이 있어 그의 주요작품을 비롯하여 플랑드르·네덜란드파 전반에 걸친 작품이 수집·전시되어 있다.

 

 

 

프란스 할스 박물관 정면의 모습. 옛 건물의 일부가 아직도 잘 살아 있다. 

 

 

 

할스가 임종한 하를럼에 있는 양로원은 프란스 할스 미술관이 되었고, 할스의 작품 11점 외에 하를럼파의 주요 작품 및 16~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가 수장되어 있다.

할스는 두번 결혼해서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그중 레이니에르(Reynier, 1627~1672), 니콜라스(Nicolaes, 1628~1686), 얀(Jan, 활약기 1635~1650년경)은 화가가 되었고, 외동딸은 하를럼의 풍속화가로, 정물화가인 피텔 로스트라텐(Pieter Roestraten, 1630경~1700)과 결혼했다.

제자에는 세 아들 외에 동생 디르크 할스, 아드리안 브라웰, 얀 민스 모레나르, 유디트 레이스텔, 아드리안 판 오스타데 등이 있다

 

 

 

Jacobus Zaffius, 1611, Oil on Panel, 54.5 X 41.5cm, 프란스 할스미술관, 하를렘

 

 

해골을 든 남자 초상 Portrait Of A Man Holding A Skull, 1611 ,

Barber institute of Fine Art , Birmingham, England 

 

 

Portrait Of A Woman, 1611, Oil on Panel, 94.2 X  71.1cm,

Chatsworth House, Devonshire

 

Shrovetide Revellers, 1615, Oil on canvas, 131 x 100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Pieter Cornelisz Van Der Morsch, 1616, Oil on Panel, 88.1 X 69.5cm,

  

 

성(聖) 조르조시(市)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 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St George Civic Guard, 1616, Oil on canvas, 175 x 324 cm, Frans Halsmuseum, Haarlem

 

 

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St George Civic Guard, (detail)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1616, 하를럼, 할스 미술관)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1616, 하를럼, 할스 미술관)은 17세기 네덜란드화를 대표하며, 전성기의 최초의 봉화를 올린 작품으로 간주되며, 이후 1664년까지 6점의 시민대의 대군상을 그리는 등 집단초상화의 유행을 낳았다. 단숨에 그려버린 할스의 화면은 그 힘찬 필촉(筆觸), 색조, 명암의 뉘앙스에 의해 신흥 네덜란드의 정신을 가장 잘 전하고 있다. 만년의 『하를럼 양로원의 여자 관리인』 ∙ 『하를럼 양로원의 이사들』(1664, 할스 미술관)은 심리묘사의 걸작이다.  

 

 

The Rommel Pot Player, 1618-22

 

 

Catharina Hooft With Her Nurse, 1619-20

 

 

Paulus Van Beresteyn, 1620, Oil on canvas, 137.1 X 104cm, 루브르박물관,파리,

 

 

Catharina Both van der Eem, 1620, Oil on canvas, 137,2 x 99,8 cm,

Musee du Louvre, Paris

 

 

Group of Children, 1620, Oil on canvas, 150,6 x 107,5 cm,

Museum Royaux des Beaux-Arts, Brussels

 

 

Family Portrait In A Landscape, 1620

 

 

Three Children With A Goat Cart, 1620

 

 

Married Couple In A Garden, 1622

 

 

Married Couple In A Garden(detail)

 

 

Buffoon Playing a Lute, 1623, Oil on canvas, 70 x 62 cm, Musee du Louvre, Paris

 

 

Yonker Ramp And His Sweetheart, 1623 , 캔버스에 유채, 106 X 79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프란스 할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작품 중에 선술집에서 애인과 함께 축배를 드는 순간을 포착해 묘사한 작품이 <융커 람프와 그의 애인>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축배를 들기 위해 술잔을 높이 들고 있는 남자가 시골 귀족 융커 람프다. 융커의 애인은 그의 커다란 모자 때문에 몸이 가려져 있지만 사랑스럽게 안고 있다.

선술집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있는 융커와 애인은 술에 취해서 얼굴이 붉어져 있지만 두 사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융커의 오른손은 다정하게 개를 쓰다듬고 있는데 개는 부부간의 정절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이 작품에서 융커와 그의 애인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할스는 이 작품에서 유쾌한 두 사람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커튼을 이용해 선술집의 벽난로와 요리를 들고 가는 요리사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서 선술집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분리시켰다.

 

 

Singing Boy With A Flute, 1623-25

 

 

웃고 있는 기사 The Laughing Cavalier, 1624, Oil on canvas, 83 x 67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난 프란스 할스(1582~1666)는 하를렘에서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화가로 성장했다. 할스는 특히 대형 집단 초상화로 명성을 떨쳤지만, ‘웃고 있는 기사’는 그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시선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이 ‘기사’는 사실 웃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기사도 아니다. 사실 그림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오른쪽 위의 명문으로 1624년에 이 사람이 26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복잡하게 수놓인 상의와 사치스러운 레이스칼라와 커프스는 이 사람이 부유한 멋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약혼 초상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매에 있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횃불, 하트와 화살, 연인의 매듭, 꿀벌 장식은 모두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할스는 아주 훌륭하게 순간을 포착했다. 이 사람은 사랑에 빠진 남자일까 아니면 꼬마처럼 입에 사탕을 물고 있는 걸까? 단순히 자신감에 차있는 걸까, 거드름을 피우는 걸까, 아니면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을까? 몸을 살짝 돌린 자세는 놀라운 솜씨로 표현된 옷의 화려한 장식을 잘 보이게 해준다. 주름 깃 위의 화려한 붓놀림, 장식 띠 위의 검은 물감으로 휘갈긴 붓자국, 커프스 위에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수놓인 모티프 위에 대담한 하이라이트가 그것이다.

살면서 내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할스는 죽은 후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아주 쉽게 사라졌다.
1865년에 ‘웃고 있는 기사’가 경매에 나오자 하트퍼드 후작은 로스차일드 남작보다 높은 값을 불렀고, 그 이후에 할스는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는 특히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할스의 명성이 부활했음을 알리게 된 사건이었다.

 

 

Willem van Heythuyzen, 1625, Oil on canvas, 204,5 x 134,5 cm,

Alte Pinakothek, Munich

 

 

Two Boys Singing, 1625

 

 

Jacob Pietersz Olycan, 1625, Oil on canvas,  124.6 X 97.3cm, 마우리추이스, 헤이그,,

 

 

Anetta Hanemans, 1625, Oil on canvas,124.8 X 98.2cm, 마우리추이스, 헤이그,

 

 

St Luke, 1625

 

 

St Matthew, 1625, Oil on canvas, 70 x 55 cm,

Museum of Western European and Oriental Art, Odessa

 

 

Isaac Abrahamsz Massa, 1626

 

 

Young Man With A Skull, 1626-28

 

 

Verdonck, 1627, Oil on panel, 46,7 x 35,6 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Edinburgh

 

 

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St George Civic Guard Company, 1627

 

 

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St Hadrian Civic Guard Company, 1627

   

 

Portrait Of A Man, 1627

 

 

The Merry Drinker, 1628-30, Oil on canvas, 79.5 X 59.5cm, 암스텔담 왕립미술관

 

17세기는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라고 불리운다 할스를 시작으로 렘브란트, 로이스달, 베르메르 같은 훌륭한 화가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프란스 할스는 그가 그리는 대상을 웃거나 유쾌한 모습을 그려내어 인물이 살아 있는 느낌이 들게 해서 생기있는 초상화를 그려 냈다.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어느 특징하나를 순간 포착으로 단숨에 그려냈음을 알수 있다.

술꾼의 오른손이나 좌측 어깨의 줄무늬를 보면 마치 그림을 대충 그리다 만 것 같은 텃치를 하였지만 유쾌한 표정,무언가 말하려는 표정, 기분 좋게 취해있는 표정 모두가 실감나게 묘사를 하였다. 이전 초상화에서 주로 사용하던 대칭도 아니면서 한쪽으로 치우쳐 불안정감도 없는 할스 만이 갖고 있는 비법으로 그림은 훌륭한 균형감을 유지하고있다.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나라 네덜란드에서  최초의 유명 화가인 할스는 자신의 그림을 많이 구입할  돈많은 시민들이 많은 자유도시인 하를렘으로 남부지역을 떠나 이사를 하였다.  그당시 부유한 주민들이  많이 찾았던 단체초상화도 할스는 이전의 그림과는 달리 생동감있는 독특한 구도로 인기를 끌게 된다.

 

"알라 프리마 기법"이라는 단숨에 그림을 그리는 기교로 캔버스 위를 바탕칠 없이 그대로 그림을 그려 나가는 방법을 썻다.그래서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면  붓 자국만 보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럴듯한 형태를 이루는 그림이 된다. 그러나 그의 장기인 순간적인 인상의 포착은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닌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할스의 자유 분방한 화풍은 인상파화가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오묘한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 가서 그는 유행에 뒤처지는 화가로 전락하였다, <즐거운 술꾼> 처럼 그도 술을 좋아애서 큰 돈을 모으지 못해 어려운 노후를 보내야 했다. 시립 양로원에서 제공하는 수입으로 연명하였으며 양로원 이사들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고 한다.

  

 

Peeckelhaering, 1628-30

 

Mulatto, 1628-30

 

 

집시여인 Gypsy Girl, 1628-30, Oil on wood, 58 x 52 cm, Musee du Louvre, Pari

 

 

A Young Man In A Large Hat, 1628-30 

 

Portrait Of A Man, 1630, Oil on canvas, 116.1 X 90.1cm, 로얄콜렉션, 런던,

 

Samuel Ampzing, 1630

 

The Fisher Boy, 1630-32

Fisher Girl, 1630-32

Fisher Boy, 1630-32

 

 

Portrait Of A Man, 1630-33

 

 

Portrait Of A Woman, 1630-33, Oil on canvas, 75 X 58cm, 베르린 국립미술관 

 

니콜라스 하셀라르 Nicolaes Hasselaer, 1630-35, Oil on canvas, 79,5 x 66,5 cm,

 

Rijksmuseum, Amster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