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81회 ~ 120 회]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를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1회 ~  4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201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1회 ~  8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202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81회 ~12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203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121회~16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204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161회~20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06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201회~24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07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241회~28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08

 

 

81. 조지프 라이트 「공기펌프 실험」

-"잠시 후 앵무새는 살아난다… 기적은 神 아닌 과학의 것"

 

영국의 화가 조지프 라이트(Joseph Wright of Derby·1734~1797)는 흔히 출생 지명을 따서 '더비의 라이트'라고 불린다. 더비는 18세기 중반부터 기술 혁신을 통해 첨단 기계를 생산하여 전통적인 농경 사회였던 영국을 공업 국가로 변모시킨 산업혁명의 중심 도시였다.

 

더비에서 활동하며 첨단 산업의 성과에 매료된 라이트는 정밀한 기계, 과학적 실험 등 그전까지 미술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공기 펌프 실험'이다. 

 

 

 

조지프 라이트 '공기펌프 실험'… 1768년, 캔버스에 유채, 183×244㎝,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커다란 유리통이 달린 기구와 그 안에서 숨을 할딱대며 서서히 죽어가는 가련한 앵무새를 주목하고 있다. 붉은 가운을 입은 백발 과학자가 오른손에 펌프를 쥐고 유리통 속의 공기를 서서히 빼버린 나머지 지금 앵무새는 거의 진공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놀랍고도 잔인한 광경 앞에서, 두 소녀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아빠 품에 안겨 있고, 의자에 앉은 중년 남자는 사색에 빠졌으며, 왼쪽의 두 청년은 흥분 상태로 관전 중이다. 그 뒤에 선 젊은 남녀는 실험은 뒷전이고 서로 은근한 눈빛을 나누기에 바쁘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듯한 절정의 순간에 과학자가 왼손을 돌려 뚜껑을 열기만 하면, 앵무새는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고, 관중은 경탄과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생생한 이 장면에 더욱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은 극적인 명암 대비다. 테이블 가운데 놓은 조명은 마치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어두운 배경 속에서 등장인물의 서로 다른 표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거, 그림 속의 빛은 신성(神性)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라이트는 어둠을 밝히는 진리가 더 이상 신(神)이 아니라 과학에서 유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82.윌리엄 모리스 「데이지 무늬 벽지」- '평범한 사람들의 벽지', 사치품이 되다

 

 

윌리엄 모리스 '데이지 무늬 벽지'… 1862년, 종이에 인쇄,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 소장

 

영국의 공예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시인이며 출판인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가 디자인하고 자기가 세운 회사에서 인쇄한 벽지다. 꽃 중에서도 수수한 데이지를 단순하게 도안한 이 벽지는 화려한 장식품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소박하고 실용적인 '영국적' 공예를 추구했던 모리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모리스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의 영국에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공장에서 생산된 소비재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처럼 기계가 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예술가의 독창성은 사라졌으며, 단지 진부한 기존 스타일을 마구잡이로 뒤섞어 현란하기만 한 천박한 취향을 양산했다고 한탄했다.

 

기계화시대에 영혼을 잃어버린 공예를 되살리기 위해 그는 중세의 장인(匠人)들로부터 영감을 구했다. 그토록 위대한 고딕 대성당을 세운 것은 오직 믿음과 열정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동했던 평범한 장인들의 '손'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벽지를 비롯한 가구·직물 등 인테리어 용품 일체를 취급하던 그의 회사에서는 기계 대신 수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 결과, 모리스 회사의 제품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비싼 사치품이 되고 말았다.

소수를 위한 예술을 거부하고 누구나 아름다운 물건을 쓸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며 '미술과 공예 운동'을 일으켰던 모리스는 이후 사회주의에 투신했고, 1884년에 '사회주의동맹'을 결성했다. 이런 그를 두고 엥겔스는 '지식인 중 가장 정직하지만 조직에는 가장 서툰 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곧 사회주의동맹에서 축출당했다. 남은 것은 그가 만든 온갖 아름다운 것이었다.
 

 

 

83. 레오나르도 다빈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사랑에 빠진 이 여인, 곧 닥칠 운명도 모른 채…

 

  

레오나르도 다빈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1489~1490년, 목판에 유채, 54×39㎝,

폴란드 크라쿠프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소장.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모나리자'를 그렸지만, 그의 본업은 사실 화가가 아니었다. 예술과 공학,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상 만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그림 이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당시 밀라노를 다스리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 아래서 군사 기술자로 일했다.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은 루도비코의 주문으로 그린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화다. 체칠리아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라틴어에 능통하고 음악과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고, 루도비코는 그런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섬세한 입술과 선이 고운 얼굴을 가진 그녀는 화면의 왼쪽을 향해 앉아 있다가,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그림 밖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화면 오른쪽에 조명을 두고 그녀의 얼굴을 비춘 후, 목을 따라 어깨를 향해 흐르는 부드러운 갈색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처럼 미묘한 명암의 변화를 통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우아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녀의 동공 속에서 밝은 빛이 피어오른다. 사랑에 빠진, 그리고 사랑을 받는 사람의 눈빛이다. 그림 밖에서 그녀를 부른 건 물론 루도비코였을 것이다.

체칠리아가 안고 있는 흰 담비는 바로 루도비코의 문장(紋章)이자, 임신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1491년,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루도비코는 경쟁국 페라라의 유력한 귀족인 데스테 집안의 딸과 결혼했다. 그들의 성대한 결혼식을 기획했던 것도 레오나르도다. 품에서 담비를 빼앗긴 체칠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면 측은하기 짝이 없다.
 

 

84. 조토 디 본도네 「최후의 심판」- "천국으로 보내주소서… 예배당을 바칠 테니"

 

 

조토 디 본도네 '최후의 심판'(아래 일부) - 1305년 무렵, 프레스코화,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린 혁신적인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1337)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내부의 벽화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붉은 건물에 내부 또한 둥근 터널처럼 단순한 구조를 가진 이 예배당은 부유한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1303년에 가족 예배당으로 헌당(獻堂)하여 그 이름을 따 부르게 되었다.

조토는 벽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하고, 입구 위의 벽 전체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바로 그 최후의 심판 장면에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등장한다.


중앙의 권좌(權座)에 앉아 축복받은 영혼을 천국으로 끌어올리고, 저주받은 영혼은 지옥으로 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붉은 건물, 즉 이 예배당의 모형을 바치며 자비를 구하는 자가 엔리코다.

은행은 스크로베니 집안의 가업(家業)이었다. 그러나 욕심을 내다보면 건전한 은행업에서 부당한 폭리를 취하는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되는 것도 금방이다. 사실 엔리코의 아버지 리지날도 스크로베니는 기독교에서 죄악시하는 고리대금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 때문에 단테가 '신곡(神曲)'에서 '리지날도가 지옥에 있더라'고 쓰기도 했다.

엔리코는 심판자인 아들 예수보다는 이해심이 많을 어머니 마리아에게 당대 최고의 화가가 장식한 예배당을 성직자의 어깨에 얹어 바치는 것으로 어떻게든 지옥행을 면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한발만 더 가면 바로 끔찍한 마귀가 들끓고 불길이 치솟는 지옥이니 이를 피할 수만 있다면 건축비가 얼마든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지금 엔리코가 어디에 있는지는 신(神)만이 알 것이다

 

 

 

85. 윈슬로 호머 「새 밀밭의 퇴역군인 」  - 분열은 빨리 봉합되지 않는다

 

풍성한 황금빛 밀밭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바닥에 상의를 벗어 던져두고 큰 낫을 휘두르며 추수에 열중하고 있다.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1836~1910)가 1865년 여름에 완성한 작품이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남자가 바로 그 해 4월에 막을 내린 남북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벗어둔 것이 북군(北軍)의 군복이기 때문이다.

 

 

 

윈슬로 호머 '새 밀밭의 퇴역군인' - 1865년, 캔버스에 유채, 61.3×96.8㎝,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그림 속 주인공은 당시 대부분의 군인이 그랬듯이, 평범한 농부였다가 나라 전체가 절반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4년이란 고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살아서 고향으로 되돌아온 퇴역 군인이다. 그가 사지(死地)를 헤매는 동안 버려졌던 밭에서는 놀랍게도 이토록 힘차게 밀이 자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군복을 벗어 던지고 다시 평화로운 농부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 그림을 그린 호머 또한 전쟁 중에는 잡지사의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군인들의 일상을 삽화로 남겼다. 종전(終戰) 후 몇 달 만에 이 그림을 완성한 그도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본업으로 되돌아온 '퇴역군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단지 미국의 낙관적인 미래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남자의 등 뒤로 우수수 베어져 바닥에 흩어진 밀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과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링컨은 남군이 공식으로 항복을 선언한 며칠 뒤에 암살당했다.


이처럼 전쟁은 끝났어도 분열이 빨리 봉합되지는 않고, 증오와 폭력의 기억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호머는 그림을 통해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미국인이 모두 되새겨야 할 과거의 희생과 미래의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86. 아치볼드 아처「엘긴 대리석 전시실」 -  '묵은 때' 벗기기 전의 파르테논 조각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이 자랑하는 대표적 소장품은 흔히 '엘긴 대리석(Elgin Marbles)'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들이다. 1800년대 초,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1766~1841)가 신전에서 떼어내어 영국으로 이송한 것이다.

아치볼드 아처(Archibald Archer·1791~1848)가 그린 이 그림은 영국 정부가 1816년에 엘긴 백작의 소장품을 구입하여 1832년에 영국박물관에 전용 전시실을 만들기 전까지 임시로 보관하던 방을 보여준다.

 

은은하게 빛나는 조각들 사이에 일반 방문객과 박물관 이사진 및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가 바로 아처다. 그러나 이 작품 이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아치볼드 아처 '엘긴 대리석 전시실' - 1819년, 캔버스에 유채, 94×132.7㎝, 런던 영국박물관

 

이후 엘긴 대리석은 1939년에 완성된 '두벤 갤러리'로 옮겨졌다. 이는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화상(畵商)으로 손꼽히는 조지프 두벤이 엘긴 대리석을 위해 거금을 기부하여 만든 전시실이다.

 

두벤은 뛰어난 수완과 안목으로 몰락한 유럽 귀족들의 미술품 컬렉션을 사들여 미국의 백만장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는 그림을 팔기 전에 묵은 때를 벗겨내고 반짝이는 덧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작이 훼손되어 종종 비난을 사기도 했다.

엘긴 대리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물관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들을 새 갤러리로 옮기면서 두벤의 뜻에 따라 그들을 뽀얗게 세척했다. 그러자 많은 이가 아처의 그림 속에서 '꿀처럼' 빛나던 대리석의 고색(古色)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사람이라면 '백옥'이든 '꿀피부'든 모두 좋겠지만 수천 년 된 조각에서 세월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낸 건 제자리에서 떼어낸 조각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87.  해밀턴「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다르고도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쾌락이 넘실대는 이 집에서 살고 싶은가?

 

영국의 화가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2011)이 1956년에 런던에서 열린 전시회 '이것이 내일이다'의 포스터를 위해 제작한 콜라주인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다르고도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는 흔히 최초의 팝아트 작품이라고 불린다.

잡지의 광고 사진을 오려 붙여 만든 '오늘날의 가정을…'은 할리우드 영화와 텔레비전, 만화책과 자동차 광고 등 대중매체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한껏 부풀린 근육질 몸매의 남자는 역기 대신 막대 사탕 '투시팝'을 들고 있고, 과장된 제스처로 풍만한 '에스라인'을 자랑하는 여자는 모자 대신 전등갓을 쓰고 있다.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정작 본인들은 진지한 이 남녀는 사실 누구도 쉽게 이룰 수 없으나 누구나 욕망하는 현대의 이상적 육체상을 보여준다. 

 

 

 

해밀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다르고도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1956년,

콜라주, 26×24.8㎝, 튀빙겐미술관

 

화면 왼쪽에 있는 진공청소기 광고의 화살표는 '보통 청소기는 여기까지밖에 닿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별 탈 없이 '보통 청소기'를 쓰고 있던 소비자들도 이 광고를 본 순간부터 청소기를 들어 옮기지 않고도 2층까지 청소할 수 있는 신제품을 바라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가정을…'은 끝없이 소비욕을 자극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광고와 허황된 이상을 주입하는 대중매체와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각종 신제품이 약속하는 표피적 쾌락이 지배한다.

해밀턴은 결국 수백만명의 시청자가 동시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똑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동시에 울고 동시에 웃는 세상, 누구나 똑같은 인스턴트 햄을 먹고,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똑같은 뉴스를 보고, 똑같은 몸매와 똑같은 신제품을 욕망하는 세상이 과연 정말 그렇게 매혹적인지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88. 앙투안-장 그로 「에일라우 전쟁터의 나폴레옹」 

- 이겨도 져도 전쟁은 비극… 王들이여, 창칼을 탐하지 마오

 

1807년 2월 8일, 나폴레옹은 폴란드의 에일라우에서 그의 '대육군(大陸軍)'을 이끌고 러시아를 상대로 혈투를 벌였다.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도 무려 2만5000명에 이르는 병력을 잃었으니, 사실상 이 전투의 승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에일라우의 승리를 기념하길 원했던 나폴레옹은 큰 상금을 걸고 회화 공모전을 열었다. 경쟁자 25명을 제치고 우승을 거머쥔 이는 나폴레옹의 종군 화가로 이미 황제의 총애와 명성을 한꺼번에 누리던 앙투안-장 그로(Antoine-Jean Gros· 1771~1835)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실제로 에일라우에서 입었던 망토와 모자를 그로에게 하사했고, 그로는 죽을 때까지 그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로는 경연에 나설 생각이 별로 없다가 당시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었던 비방-드농 남작의 종용에 못 이겨 참여했던 것이었다.

 

 

 

앙투안-장 그로 '에일라우 전쟁터의 나폴레옹' - 1808년, 캔버스에 유채, 521×78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그로는 나폴레옹을 승리를 자축하는 무자비한 군주가 아니라 눈 덮인 대지에 쓰러져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진심으로 보살피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포연이 자욱한 공기와 암울한 겨울 하늘, 그 아래 겹겹이 쌓인 시체는 잔인할 정도로 생생해서 누구도 이 그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실제로 "지구상의 모든 왕이 이 모습을 본다면 전쟁과 정복을 그토록 탐하지 않을 텐데"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에일라우의 교훈을 너무 빨리 잊었다. 1812년, 또다시 러시아의 동토(凍土)를 침공한 그의 군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때 나폴레옹의 기세를 꺾은 러시아의 전설적인 불패(不敗) 명장이 바로 그 유명한 '동장군(General Winter)', 즉 매서운 추위였다.
 

 

89. 야코프 판 라위스달 「표백장이 있는 하를렘 전경」

-너른 들판 풍경 속, 자유와 풍요의 의미 담아

 

 

야코프 판 라위스달 '표백장이 있는 하를렘 전경' - 1665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62.2×55.2㎝,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소장

 

야코프 판 라위스달(Jacob van Ruisdael·1628~1682)은 네덜란드 하를렘의 유명한 풍경화가 집안 출신이다. 하를렘은 네덜란드 미술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17세기에 무역과 제조업의 중심 도시로 번창했다.

라위스달의 풍경화는 하를렘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매일 보고 사는 익숙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야트막한 둔덕에서 내려다본 강과 붉은 지붕 집들, 거대한 성(聖) 바보 성당과 크고 작은 풍차들이 점점이 박힌 들판이 높은 하늘 아래 펼쳐져 있다.

 

대지의 습기를 머금고 지평선에서부터 상공을 향해 솟아오른 뭉게구름은 마치 그 무게가 느껴질 것처럼 육중하고 뚜렷하게 그려졌다. 화가는 세로로 긴 캔버스의 3분의 2 이상을 하늘로 채워 비교적 작은 그림에서도 광활한 공간감을 느끼게 했다.

16세기 초부터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인들은 1648년에 이르러 마침내 80년간의 투쟁을 마치고 독립을 쟁취해 공화국을 세웠다. 대부분 개신교도이기도 했던 그들은 기존 유럽의 전통과 전혀 다른 분야의 미술품을 낳았다.

 

그때까지 미술품의 수요자는 주로 성상(聖像)을 중시하는 가톨릭 교회나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문화를 활용했던 왕실 및 귀족이었다. 이와 달리 종교와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네덜란드인들은 라위스달의 풍경화처럼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을 원했다.

라위스달의 그림 속 너른 들판에는 흰 리넨천을 길게 널어 말리는 표백장(場)이 있다. 테이블보와 냅킨 등의 사치품에 활용되던 리넨천의 제조 및 표백은 하를렘 시민에게 부(富)를 가져다준 주요 업종이었다. 이 또한 그들에게는 낯익은 광경이었겠지만 그 속에는 틀림없이 스스로 쟁취한 자유와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누리는 풍요에 대한 자부심이 서려 있다

 

 

90.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 그녀 뒤에 펼쳐진 저 화려함들… 아뿔싸, 모두 거울 속 虛像이었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 ~1883)의 말년 작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배경은 19세기 말, 파리 유흥가를 주도하던 나이트클럽인 폴리베르제르다. 만찬과 함께 오페라와 코미디, 대중가요와 서커스 등 다채로운 공연을 제공하던 폴리베르제르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성업 중이다.

가슴이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술병과 과일을 늘어놓은 대리석 바 건너편에 서있고, 그녀의 등 뒤로 사람이 가득 들어찬 객석이 보인다. 왼쪽 위 구석의 삼각 그네와 초록색 양말을 보니, 관객은 지금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먹고 마시며 서커스를 즐기는 중인가 보다.

 

그러나 뚜렷하게 그려진 여인에 비해 객석 모습은 윤곽선이 흐릿하고 군데군데 흰 얼룩이 있다. 그림을 다시 잘 살펴보면, 사실은 금테를 두른 큰 거울이 여인 뒤에 걸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잡해 보였던 그림 속 공간은 알고 보니 거울과 바 사이의 비좁은 곳이었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은 그저 거울에 비친 허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림 속에 서있는 인물은 그녀, 바텐더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 1882년, 캔버스에 유채, 96×130㎝,

런던 코톨드연구소 소장

 

거울의 오른쪽에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가 비친다. 술을 주문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녀의 하룻밤 몸값을 물을 수도 있다. 당시의 바텐더는 매춘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녀와 객석을 차지한 손님들은 비록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라도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녀는 오히려 팔려고 내놓은 술이나 과일과 비슷한 처지다. 마네는 바 위의 술병 중 제일 왼쪽 병 라벨에 서명을 남겼다. 이름을 걸고 그림을 파는 그도 그녀와 별 차이 없다는 은밀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91. 얀 스텐「성(聖) 니콜라스의 축제」 - 착한 어린이들~ 선물 많이 받았나요?

 

성탄절 전야(前夜)에 착한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준다는 '산타 할아버지'는 과연 누구일까. 흔히 '산타클로스'라고 알려진 성(聖) 니콜라스는 4세기경의 실존 인물로 많은 기적을 일으켰지만 몰래 선물을 주는 것으로도 잘 알려진 기독교의 성인(聖人)이다. 그의 전설이 세월을 따라 변형되다가,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됐다고 한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12월 5일이 바로 아이들이 선물을 받는 '성 니콜라스의 축제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던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텐(Jan Steen·1626?~1679)의 작품은 선물을 둘러싸고 한 가정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동을 보여준다.


 

얀 스텐 '성(聖) 니콜라스의 축제'… 1665년 무렵, 캔버스에 유채, 82×70.5㎝,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반짝이는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양동이 가득 사탕과 세례 요한 인형을 받았다. 과연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인형놀이가 재미있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는 무척 흡족한 표정이다. 오른쪽에는 맏이가 어린아이 둘에게 굴뚝을 가리키며 성 니콜라스가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왔는지 설명한다.

 

그 능청스러운 연기와 순진한 아이들의 경탄 어린 표정이 웃음을 자아낸다. 가운데의 사내아이는 신이 난 얼굴로 울고 있는 형을 가리킨다. 선물이 들어 있어야 할 그의 신발에 회초리가 꽂혀 있다. 심술궂은 아이였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뒤에서 슬며시 침대 커튼을 들추는 할머니를 보니, 진짜 선물은 따로 있나 보다. 방 한가운데서 웃고 있는 아버지와 두 손을 벌려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가 정답기 그지없는 대가족 풍경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많은 부모가 선물을 미끼로 아이들을 달랜다. 하지만 일 년 내내 착하게 지냈어도 선물을 받지 못했을 많은 아이를 생각하면 공평치 못한 '산타 할아버지'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92.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이수스의 전투>

- 붉은 태양과 大地… 세상은 그토록 광활한 것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이수스의 전투'… 1529년, 목판에 유채, 158.4×120.3㎝,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1480?~1538)는 16세기 전반 독일의 화단(畵壇)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화가다. 그의 '이수스의 전투'는 풍경을 성화(聖畵)나 역사화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격상시켰던 알트도르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이에른 공국의 영주였던 빌헬름 4세가 주문한 것으로 당시 레겐스부르크의 시의원이기도 했던 알트도르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장직을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이수스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격전의 현장이다. 하지만 빌헬름 4세는 고대의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보다는 자기 당대에 서유럽 국가들이 베니스를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림에 등장한 병사들은 모두 16세기 스타일이다. 오른편 알렉산더 진영의 병사들은 유럽식 갑옷으로 무장했고, 왼편의 페르시아 병사들은 오스만의 복식(服飾)을 닮은 붉은 외투에 하얀 터번을 썼다.

 

그 한가운데에 백마부대를 이끌고 긴 창을 앞세워 전진하는 알렉산더와 그에게 바짝 쫓기며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다리우스의 전차(戰車)가 있다. 퇴각하는 페르시아 군대의 머리 위로 어둠에 잠긴 초승달이 흐릿하게 빛난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즉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제국이었고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의 상징이 바로 초승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마치 지구 밖의 위성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본 것 같은 장엄한 풍경이다. 왼쪽부터 시나이반도, 홍해, 나일강 하류까지 이어진 광대한 대지와 그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태양 아래서는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 대왕의 백만 대군도 그저 깨알같이 소소하게 보일 뿐이다. 

 

 

 

93. 자크 루이 다비드 <근위병이 아들들의 시체를 브루투스에게 돌려주다> 

 -  '革命의 아이콘'이 된 가족의 비극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18세기 말의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1748~1825)가 몰표를 받을 것이다. '정치적'이라는 것이 '권력지향적'이라는 뜻이라면 말이다.

 

그는 루이 16세의 총애를 받던 왕실 화가였지만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당원이 되어 왕을 단두대로 보냈고, 이후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다가 그가 실각한 뒤에는 외국으로 망명하여 안락하게 살았다. 이처럼 격변의 시기에 늘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다비드의 작품은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크 루이 다비드 '근위병이 아들들의 시체를 브루투스에게 돌려주다' - 1789년,

캔버스에 유채, 323×422㎝, 루브르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전야(前夜)에 완성되었다. 로마사에 등장하는 브루투스는 기원전 508년 왕정을 폐하고 공화제를 확립한 정치인으로, 그로부터 약 500년 후에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조상뻘이다.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들이 왕정복고를 꾀하는 반역에 가담했음을 알고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다. 다비드는 아들들의 시체가 브루투스의 집으로 운구되는 극적인 순간을 그렸다. 그림 왼쪽, 로마를 상징하는 여신상의 그늘 아래 앉은 브루투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사형 집행령을 손에 움켜쥐고 있다.

 

러나 포개놓은 두 발은 그가 지금 얼마나 힘겹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 반대편에는 슬픔에 몸부림치는 브루투스의 아내, 즉 죽은 아들들의 어머니와 딸들이 있다. 브루투스와 여인들의 사이, 그림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텅 빈 의자다.

 

나라를 위한 희생이 이 가정에는 비극이 됐음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대혁명과 함께 공화정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비록 그 이후 다비드의 행보가 대혁명이 추구했던 공화정의 이상과 달랐을지라도, 작품은 스스로 말하는 힘이 있는 법이다.
 

 

94. 차일드 하삼 <빗속의 거리>-유럽에서 배운 인상주의,유럽 구원할 자부심 되다 


  

차일드 하삼 '빗속의 거리' - 1917년, 캔버스에 유채, 106.7×56.5㎝,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소장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09년 처음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백악관의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책상 옆에 걸었던 그림이 바로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차일드 하삼(Childe Hassam·1859~1935)의 '빗속의 거리'다.

아동 도서의 삽화가로 시작해 화가가 된 하삼은 1886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서야 처음으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때 파리의 미술계는 인상주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따라서 전형적인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인 밝고 경쾌한 색채, 스케치처럼 자유분방한 붓놀림, 부스러지듯 짧고 느슨한 윤곽선 등이 하삼의 화폭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하삼이 인상주의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 기법이 아니라 주제였다. 인상주의자들은 관습적인 그림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풍경을 그리고자 했다. 하삼의 작품이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확연히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파리 샹젤리제보다 뉴욕 5번가를 더 사랑했고, 파리의 화사한 여름 하늘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뉴욕의 잿빛 하늘에 더 깊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빗속의 거리'는 1916년, 1차 세계대전 중 고립 정책을 고수하던 미국 정부에 참전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뉴욕의 5번가에서 벌였던 행렬을 그린 것이다. 빨강·파랑·하양을 거칠고 성기게 덧칠해 표현한 성조기들은 마치 빗물이 줄줄 흐르는 유리창을 통해 내다본 것처럼 아른거린다.

 

하삼은 프랑스에서 배운 인상주의 기법으로 곧 프랑스를 전화(戰禍)로부터 구원하게 될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마련된 '미국 인상주의 특별전'에서는 하삼의 다른 작품을 볼 수 있다.
 

 

95. 알브레히트 뒤러 <묵시록의 네 기사>

- 종말의 공포… 언제 '末世' 아닌 적 있었던가

    

 

알브레히트 뒤러 '묵시록의 네 기사'… 1497~1498년, 목판화, 39.9×28.6㎝,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미술관 소장

 

종말론은 대체로 세기말(世紀末)에 고개를 든다. 종말을 예언한 대표적 종교가 기독교이고, 세기가 기독교식 기년법(紀年法)이다 보니 그렇다. 세상의 마지막 날, 지상의 선(善)과 악(惡)이 궁극의 전투를 치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한 세기의 '끝'이 올 때마다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것이다.

북유럽의 르네상스 최고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가 판화집 '묵시록'을 출판한 것도 15세기 말이었다. 흔히 '묵시록(默示錄)'이라고도 부르는 '요한 계시록'은 세상의 종말과 인류 최후의 순간을 난해한 상징을 사용해서 묘사한 신약성서의 마지막 장이다. 뒤러의 '묵시록'에 실린 15점의 판화 중 '묵시록의 네 기사(騎士)'는 '요한 계시록'의 6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을 도해(圖解)한 것이다.

최후의 날이 오면 네 명의 기사가 세상에 들이닥친다. 활을 든 정복자, 검을 든 전쟁, 천칭을 든 기근, 마지막으로 바싹 마른 말을 탄 죽음이다. 죽음의 뒤를 따르는 끔찍한 괴물, 하데스는 공포에 질려 서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집어삼키고 있다. 지금 막 하데스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는 성직자다. 죽음은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뒤러의 '묵시록'은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 그에게 상당한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저렴한 가격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집을 공들여 제작했던 뒤러의 마케팅 전략이 잘 들어맞은 덕이다.

 

한 편에는 전쟁과 기아·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 공포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이런 게 '말세(末世)'라면, 언제 '종말'이 아닌 적이 있었나 싶다.
 

 

96. 새뮤얼 모스 <루브르 갤러리>

- 美 미술계 자극 주려 했던 그림… 그 실패가 '모스 부호'를 낳았다

 

미국 화가 새뮤얼 모스(Samuel F B Morse·1791 ~1872)는 1830년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하여 소장품 중에서도 빼어난 명작만 모아놓은 전시실인 '살롱 카레'의 모습을 큰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 그렸다. 온 벽에 빼곡하게 걸려 있는 서른여덟 점의 그림은 대부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왼쪽 벽은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이 차지하고 있고, 정면 제일 아랫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걸려 있다. 그 벽의 왼쪽 끝에는 카라바조의 '점쟁이', 오른쪽 끝에는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자상(聖母子像)'이 있다.

 

 

 

새뮤얼 모스 '루브르 갤러리'… 1831~1833년, 캔버스에 유채, 180×274㎝,

시카고 테라 미국미술재단 소장

 

그림의 모습은 모스가 방문했던 당시의 실제 전시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몇몇 작품은 그가 임의로 그려넣거나 위치를 옮기기도 했다. 어쨌든 모스는 각각의 작품을 정밀하게 묘사했고, 그 덕에 루브르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그림을 보면 그 전시실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전시실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몇명 등장한다. 그 중 한가운데에 앉은 젊은 여인이 모스의 딸이고, 그 등에 기대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가 모스 자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루브르박물관은 미술가들이 전시실에서 소장품을 베껴 그릴 수 있도록 허가해주었다. 과거의 걸작을 모사(模寫)하는 것이 미술 교육의 필수 코스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모스의 야심작이었다. 유럽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미국의 미술계에 루브르의 걸작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새 자극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실망한 모스는 화업(畵業)을 포기하고, 발명가가 된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만든 것이 바로 전신기와 모스 부호다. 이쯤 되면 그때 실패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97.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베르탱 초상>

- 이 압도적 존재감, 사진기도 포착 못했을 것

 

누구나 카메라 앞에 서면 갑자기 양팔이 거추장스럽다. 팔을 내릴지 올릴지, 손가락을 펼지 말지 고민하다가 어정쩡한 자세가 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미술아카데미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시 유력한 일간지 '주르날 데 데바'의 사주(社主)였던 루이-프랑수아 베르탱의 초상화를 주문받고, 포즈를 고민하다 몇 년을 보냈다. 좌절한 나머지 스튜디오에 주저앉아 울기를 몇 번, 베르탱이 직접 나서서 다독이기도 몇 번 하고서야 마침내 포즈를 결정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베르탱 초상'… 1832년, 캔버스에 유채, 116.2×94.9㎝,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베르탱은 두툼한 어깨를 세우고 강인한 두 손을 펼쳐 허벅지에 얹었다. 그 위압적인 체구가 발산하는 기세에 의자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다. 앵그르는 현대의 어떤 카메라로도 잡아낼 수 없을 주인공의 외모와 내면을 세세하게 그려냈다.

 

노년에 접어든 베르탱의 굵고 가는 주름살, 이마를 지나가는 혈관과 허룩해진 앞머리 등은 하나하나 돋보기로 들여다본 것처럼 뚜렷하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당파로 활동하다가 입헌군주제인 7월 왕정을 적극 지지했던 베르탱은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주도하던 상류층 부르주아이자 영민한 사업가였다. 그의 단호한 눈빛, 차가운 듯 자신감 있는 미소,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가 이룬 지위에서 온다.

이 작품 이후, 앵그르에게는 초상화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역사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인류의 위대한 업적과 고귀한 정신을 전달하는 역사화와 달리 초상화는 단점으로 가득한 개인을 그릴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앵그르가 그린 '베르탱 초상'은 다만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를 보여주는 힘이 있다.

 

 

98.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밀회>-장미꽃 우거진 정원에서…몰랐네, 세상 바뀐 줄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밀회'…1771~1772년, 캔버스에 유채, 317.5×243.8㎝,

미국 뉴욕 프릭 컬렉션 소장

 

분홍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젊은 남녀가 은밀하게 만난다. 한껏 멋을 낸 청년이 대담하게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연애편지를 읽고 있던 아가씨는 가슴 뛰는 만남의 순간에 인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란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구(舊)체제 안에서 온갖 호사와 향락을 즐기며 세상 변하는 줄 몰랐던 귀족들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프라고나르는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과거 거장들의 화풍(畵風)을 익혔다. 그는 미묘한 빛과 색채의 변화를 능숙하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붓을 놀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냈다.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연애담이 펼쳐지니 귀족들 구미에 딱 맞았던 것이다.
 

그림 '밀회(密會)'를 주문한 이는 루이 15세의 후궁으로, 사치스럽기로 악명 높던 뒤바리 부인이다. 그녀는 왕이 하사한 대저택을 장식할 그림을 프라고나르에게 맡겼다. 완성작은 '사랑의 과정'을 그린 네 편 연작(連作)으로, '밀회'는 그중 하나다.  

 

그러나 당시 엄격하게 절제된 신고전주의 미술이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프라고나르의 예쁘장한 그림은 이미 한물간 구식으로 여겨졌다. 결국 뒤바리 부인은 완성작을 거부했고, 이후 프라고나르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이 그림은 1915년에 미국의 철강 재벌 헨리 클레이 프릭이 금융가 J.P. 모건한테서 구입한 이래 그의 개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릭은 최고의 예술 애호가로 손꼽히지만, 미국인이 몹시 증오하는 기업가 중 하나로 늘 거론될 만큼 악랄한 기업주로 알려져 있다. 어쨌거나 '밀회'는 대중이 미워하는 주인을 만날 운명이었던가 보다
 

 

 

99. 장 푸케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자(聖母子) >

- 눈부시구나, 우윳빛 살결의 당당한 저 엄마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권좌에 앉아 온통 빨갛고 파란 색깔의 아기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프랑스 화가 장 푸케(Jean Fouquet·1420~1481)의 작품이다. 푸케는 15세기 중반 프랑스 화가로서는 최초로 이탈리아를 방문해 초기 르네상스 미술을 경험한 후 세밀한 채식필사본이 발달했던 프랑스의 전통에 르네상스의 혁신을 결합했다

 


 

장 푸케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자(聖母子)>… 1450년무렵, 목판에 템페라, 93×85㎝,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당시 프랑스의 왕 샤를 7세의 재무상이었던 에티엔느 슈발리에가 주문한 것으로 원래는 왼쪽에 성모자를 향해 기도하는 슈발리에의 초상화가 붙어 있는 두 폭짜리 제단화였다. 아기 예수는 신의 관용을 비는 그에게 응답하듯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다. 눈부시게 흰 피부의 성모는 알이 굵은 진주와 온갖 보석을 박아 넣은 왕관을 쓰고 흰 모피를 어깨에 두른 채 황금빛 권좌에 앉아 풍만한 가슴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성스럽기보다는 관능적인 이 성모상의 모델은 샤를 7세가 애지중지하던 후궁, 아녜스 소렐이다. 이 그림은 그녀가 요절(夭折)한 직후에 그려졌다.

원래 중세의 성화에서 성모 마리아는 이 그림에서처럼 보관(寶冠)을 쓰고 권좌에 앉은 ‘천상(天上)의 여왕’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부터 수수한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엄한 ‘성인(聖人)’에서 소박하고 겸손한 ‘엄마’로 변화한 셈이다. 푸케는 화려한 ‘천상의 여왕’이면서 동시에 ‘겸손한 엄마’인 성모를 보여준다. 물론 완벽한 몸매와 피부를 유지하며 금은보화에 둘러싸여 수유(授乳)하는 상황은 ‘성인’만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에 가깝다. 

 

 

100. 프란시스코 고야, <전쟁의 참화> - 그림으로만도 끔찍한 것, 전쟁

 

나무에 목을 매달아 사람을 죽였다. 그 발치에 앉은 군인이 천연덕스럽게 시체를 바라본다. 잘 만들어진 미술품을 감상하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는 스페인 최고의 궁정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가 1810년에서 20년 사이에 제작한 판화 앨범, '전쟁의 참화' 중 한 장면이다.

 

82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고야는 전쟁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물론 과거에도 전쟁을 그린 그림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실제로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참혹한 전쟁의 실체를 묘사한 건 고야가 처음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전쟁의 참화> 중 36번 판화 Tampoco - 1812~1815년,

에칭과 아쿠아틴트, 15.8×20㎝. /스페인 국립도서관 소장

 

고야는 혼돈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었다. 1807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무력(武力)과 온갖 정치적 술수를 총동원해 스페인 왕가로 하여금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이후 독립을 위한 스페인 반군과 시민의 산발적인 게릴라전이 6년 동안 계속됐다.

 

고야는 처음에는 점령군에 반기를 든 스페인 민중의 영웅적인 행적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목격한 전장에서는 프랑스인이나 스페인인이나 결국 별 차이 없이 광기와 공포에 눈이 먼 채 극도의 폭력과 잔인한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들이었다.

그는 시체에 난도질을 해대는 사람들, 기아 속에 허덕이는 아이들,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렸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성을 잃었을 때 할 수 있는 일, 증오와 복수심이 세상을 지배할 때 발생하는 일들이다.

 

물론 '전쟁의 참화'는 고야의 생전에는 출판될 수 없었고, 그의 사후 35년이 지난 후에야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림으로만 봐도 끔찍한 것, 그것이 전쟁이다.
 

 


101.  <샌들을 벗는 니케> -- 샌들 한 짝 벗는 데도 우아한 '그리스 스타일' 


 

  

'샌들을 벗는 니케'… 기원전 410~407년, 대리석, 높이 107㎝,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소장

 

 

'가렸지만 웬만한 노출보다 야한 여자'는 '강남 스타일'이기 이전에 고대 그리스의 고전 스타일이었다. 아테네의 '아테나 니케 신전' 외부 난간을 장식한 니케의 부조(浮彫)가 바로 그렇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지금 막 날개를 접고 신전에 들어서기 위해 샌들을 벗고 있다.

 

사실 이렇게 한쪽 발을 앞으로 들고 허리를 굽혀 신발을 벗는 건 그리 고상한 동작이 아니다. 그러나 여신은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답고 우아하다.

온몸을 감싼 얇은 옷은 니케의 몸놀림을 따라 한쪽 어깨를 드러내며 부드럽게 아래로 흘러내려 굴곡 있는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다. 아무리 옷감이 얇은 들 옷을 물에 적셔서 입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몸에 착 달라붙을 수 있을까.

 

이 시기, 아테네의 조각가들은 여체의 아름다움을 직설적인 노출 없이 표현하기 위해 이처럼 투명한 옷자락을 만들어냈다. 이를 '젖은 천' 기법이라고 부른다. '젖은 천'처럼 상체를 따라 흐르던 옷 주름은 내려오면서 간격이 좁아지고 골은 깊어져 극적인 리듬감과 강렬한 음영의 대조를 만들어낸다.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결코 현실적이지 않은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그리스 고전 미술의 특징이다.

아테나 니케 신전은 기원전 420년대에 지어졌다. 그즈음 아테네인들은 숙적 스파르타와 때마침 상륙한 치명적 역병과 동시에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승리와 생존을 기원하며 전쟁과 지혜, 공예의 여신인 처녀신 아테나에게 신전을 바쳤던 것이다.

 

아테나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승리의 여신 니케가 따라왔기 때문이다. 정숙해 보이지만 이때다 싶으면 반드시 싸워 이기는 그런 반전 있는 아테나는 그리스의 신 중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102. 빈센트 반고흐 <아몬드 꽃>  - 마른 가지 뚫고 나온 꽃잎, 생명의 기운

 

 

1890년 1월 31일, 빈센트 반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동생 테오 부부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이의 이름은 그의 이름과 똑같은 빈센트 빌렘. 이 세상 누구보다 각별하게 아끼던 동생에게서 조카를 본 화가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그 기쁨을 한 점의 그림에 담았다. 맑은 옥빛 하늘 아래, 소담하게 피어 오른 작고 하얀 꽃송이들을 그린 '아몬드 꽃'이다.

 

아몬드 나무는 겨울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새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이 그림에서는, 겨우내 메말랐던 나뭇가지를 힘차게 뚫고 솟아난 작은 꽃잎들을 올려다보며 환희에 찬 얼굴로 새 생명을 축복했을 화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빈센트 반고흐 '아몬드 꽃' 1890년, 캔버스에 유채, 73.5x92㎝,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

 

 

당시 반고흐는 프랑스 남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발작과 환각 증상이 두려운 나머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안정을 되찾은 그는 옆방에 마련한 스튜디오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물론 반고흐의 병실과 스튜디오를 마련해 준 것은 테오였다. 밝고 산뜻한 색채, 뚜렷한 윤곽선, 불꽃이 타오르듯 구불구불한 형태, 거리감과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는 평평한 화면 등 '아몬드 꽃'에서 볼 수 있는 화풍이 바로 이 시기, 반고흐 작품의 특징이다.

그러나 1890년 7월 29일, 우울을 이겨내지 못한 반고흐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토록 눈부시게 예뻤던 꽃들이 떨어진 자리에 풍성하게 열렸을 아몬드 열매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극도로 상심한 테오 또한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지금 이 그림은 반고흐 미술관에 걸려있다. 미술관 개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조카 빈센트 빌렘이었다. 

 

 

 

103. 윌리엄 홀먼 헌트, 『고용된 목동』  - 너무 못 생겨 '외모 논쟁' 유발한 목동

 

 

목동을 고용하여 돈을 쥐여 주고, 양들을 보살피라며 들판으로 내보냈는데, 주인의 눈을 벗어나자마자 그 목동의 하는 짓이 가관이다. 순진한 시골 아가씨를 불러 앉히고 손에 쥔 나방을 보여준다는데, 그냥 눈앞에 보이면 될 것을 구태여 아가씨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얼굴을 비벼대며 어깨 위로 팔을 둘러 들이댄다.

 

어정쩡하게 앉은 아가씨는 이토록 '친절한' 목동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딱히 그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목동이 제 할 일을 제쳐 두고 한눈을 팔고 있으니, 양떼가 안전할 리 없다. 벌써 무리를 벗어난 양 한 마리가 도랑을 건너 이웃한 옥수수 밭으로 넘어 들어간다. 

 

 

 

윌리엄 홀먼 헌트, 고용된 목동 - 1851년, 캔버스에 유채, 76.4×109.5㎝,

영국 맨체스터 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영국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의 작품이다. 신실한 사람이었던 헌트는 종교적이고 교훈적인 회화를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악습을 지적하고 비판하고자 했다. 성화(聖畵)에 익숙한 이라면, '고용된 목동'에서 헌트가 사용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상징들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목동은 성직자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나는 선한 목자고, 너희는 내 양'이라고 비유한 이래 그렇다. 한편, 애벌레였다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나방은 부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헌트는, 무의미한 교리 논쟁에 몰두하느라 정작 길을 잃고 헤매는 신자들을 방관하는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을 '고용된 목동'에 비유해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발표되고 나서 호된 악평에 시달렸다. 무엇보다도 남녀 주인공들이 너무 못생겨서 보기 불편하다는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무의미한 교리 논쟁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무의미한 외모 논쟁이다.
 

 

 

104] 존 싱어 사전트, 에드워드 달리 보잇의 딸들

- 우리를 바라보는 19세기 파리 소녀들

 

 

사람 키보다 큰 청화백자 도자기와 붉은 병풍을 세워둔 동양풍의 실내는 19세기 말, 파리의 한 부유한 주택가 아파트의 거실이다. 원피스 위에 흰 앞치마를 똑같이 겹쳐 입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던 네 자매가 얼음처럼 멈춰 섰다.

 

화면 오른쪽에 반이 잘려나간 도자기, 왼쪽 구석으로 치우친 구도는, 그 앞에서 그림을 보는 우리가 마치 그 집에 갑작스레 들이닥쳐 소녀들과 눈이 마주친 손님이 된 것 같은, 그런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느낌을 준다

 

 

 

존 싱어 사전트, '에드워드 달리 보잇의 딸들' - 1882년, 캔버스에 유채, 222.5×222.5㎝,

보스턴 미술관 소장.

 

 

소녀들은 파리에서 아마추어 화가 생활을 하던 부유한 미국인이자 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친구였던 보잇의 딸들이다. 인형을 안고 앉아 순진무구한 얼굴로 우리를 보는 꼬마가 네 살배기 줄리아, 그 뒤에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건 여덟 살 마리 루이자,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는 아이는 열두 살 제인, 재빨리 몸을 돌려 도자기에 기대선 건 열네 살 플로렌스다.

넷 중 어느 누구도 화면의 중앙에 있지 않고, 그나마 큰 아이 둘은 어둠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그리는 게 초상화라면, 이 그림은 자격 미달이다.

 

그러나 사전트는 아직 낯 가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부터 온통 세상에 대한 경계심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춘기 소녀까지, 채 십 년이 못 되는 시간 동안 아이들이 겪게 되는 성장 과정과 심리의 변화를 대범하게 그려냈다.

현재 이 그림은 보스턴 미술관의 한 전시실에 실제 그림 속에 등장하는 큰 도자기 둘을 양옆에 두고 걸려 있다. 지금도 그 앞을 지나자면,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움찔 놀라는 소녀들의 숨죽인 호흡이 느껴지는 것 같다.

 

 

 

105.아야 소피아 - 지진에 시달리며 1500년을 버틴 '기적'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Hagia Sophia)'는 비잔틴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537년에 완성된 동로마정교의 교회였다. 이후 1453년 동로마가 투르크멘제국에 함락된 이래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다가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의 '아야 소피아'는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肉化)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기하학자이면서 건축가였던 이시도루스와 안테미우스는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상징하는 가장 완벽한 도형을 건물의 기본 틀로 삼아 거대한 정사각형 건물 위에 원형 돔을 얹었다.

 

 

 

 

  

아야 소피아 - 537년 준공, 터키 이스탄불 소재.

  

지름 33m,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높이 55.6m에 이르는 중앙 돔은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 기술이 모두 모인 놀라운 구조다. 건축가들은 엄청난 무게를 견뎌야 하는 돔 하단에 대범하게도 창문 40개를 뚫어버렸다. 그들은 교회 내부의 광대한 공간을 신성한 지혜를 상징하는 빛으로 가득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육중하기 그지없는 돔은 빛으로 둘러싸여 마치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대인들은 이를 "천국에서 내려온 황금 사슬"이라고 불렀다.건물을 완성하는 데는 단 5년이 걸렸다. 당시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밤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일손을 도왔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그 다음부터다. 터키에 지진이 잦은 탓에 완공 직후부터 '아야 소피아'는 크고 작은 지진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중앙 돔까지 완전히 내려앉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이 건물은 그 1500년 세월을 견디고 아직도 그 자리에 찬란하게 서 있다. 이는 천사들이 아니라, 반복되는 재앙 앞에 절망하지 않고 건물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 이루어낸 기적인 것이다.

[출처] : 우정아 포스텍 교수 ,서양미술사, 우정아 아트 스토리 / 조선일보

  

 

 

106 .  함무라비 법전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기원전 1780년경, 현무암, 부조(사진) 높이 71㎝, 전체 높이 225㎝, 파리 루브르 박물관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법의 원형이자 가장 오래된 성문법의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2m가 넘는 검은 현무암 비석에 새겨진 문서다. 함무라비(Hammurabi·재위 기원전 약 1792~ 1750년)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산재하던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 중 하나인 바빌로니아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주변국을 정복하고 바빌로니아의 최대 판도를 이루었지만, 수천 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기억되는 이유는 법을 세운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은 비석 상단에 새겨져 있다. 왼쪽이 함무라비고, 그 앞의 권좌에는 태양의 신이자 정의의 신인 샤마시가 앉아 있다. 신은 권좌에서 일어선다면, 함무라비의 두 배쯤 될 거대한 존재일 뿐 아니라, 양 어깨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권능을 상징하는 황소의 뿔 네 쌍이 층을 이룬 높은 관을 쓰고 있다.


함무라비는 한 손을 배에 붙이고, 다른 손은 조심스레 올려 신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전지전능한 신을 직접 마주 대하고 있다니, 함무라비 또한 초인간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샤마시는 함무라비에게 길이를 재는 자와 밧줄을 건네준다. 이 둘은 건설과 측량을 위한 도구이니, 신이 곧 왕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사회 정의를 세우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한을 위임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시나이산에서 신에게 십계명을 직접 받았다는 히브리인들의 지도자, 모세가 떠오를 것이다. 왕이 곧 신이었던 동시대의 이집트 문명에 비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은 늘 신의 뜻을 대신 집행하는 겸손한 대리인으로 그려졌다.

  

 

107. 『게트 쿠로스』 - 진품이냐 위조품이냐… 과학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게티 쿠로스

대리석,높이 약 206㎝,기원전 530년경 작 또는 현대의 위조품,로스앤젤레스,게티 미술관 소장

 

 

미국 캘리포니아의 게티 미술관에는 고대 그리스의 쿠로스, 즉 젊은 남자의 누드 입상이 있다. 흔히 '게티 쿠로스'라고 부르는 이 대리석상의 설명문에는 '기원전 530년경 작, 또는 현대의 위조품'이라고 되어 있다. 1985년 미술관에서 900만달러에 구입한 이래 이 조각이 진품이냐는 의문이 제기됐고, 미술관에서 다양한 분석과 조사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게티에서 구입을 단행하게 된 결정적 근거는 과학적 조사 결과였다. 조각을 분석한 지질학자가 탈돌로마이트화 작용, 즉 대리석으로부터 마그네슘이 침출되고 방해석 성분만 남은 것을 확인했는데, 이는 수세기의 세월이 만든 현상이지, 조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또 다른 학자는 탈돌로마이트화 작용 또한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다만 위조업자가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 과정이 대단히 까다롭고 복잡하며 오래 걸리는 작업이기는 하다.

한편 미술사학자들은 이 조각 안에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 양식이 혼재해 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뻣뻣하게 처리된 머리카락은 기원전 6세기 초 양식인데,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복부의 표현은 훨씬 후대에나 등장하는 양식이고, 허벅지와 둔부는 코린트 지역의 쿠로스와 닮았지만, 발은 보에티아의 조각이 연상되는 등 도무지 출처와 연대를 짐작할 수 없는 '별종'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이 모든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이 조각을 마주하면 진품에서나 느낄 수 있던 '걸작의 아우라'를 느꼈다.게티 쿠로스의 수수께끼 앞에서는 최신 과학도 권위 있는 감식안도 온전히 힘을 쓰지 못한 셈이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108. 聖母 마리아 곁의 피타고라스 


 

샤르트르 대성당. 12세기경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인이다. 그는 수학자일 뿐 아니라, 현(絃)의 음정이 길이에 따라 수비례를 이룬다는 걸 발견한 음악가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피타고라스가 기독교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중세,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당당하게 조각되어 있으니 의외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불경한 이교도의 상이니 말이다.

대성당의 오른쪽 문 위에는 권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고, 피타고라스는 이를 둘러싼 틀의 제일 하단에서 책상을 무릎에 얹고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그 바로 위에는 망치로 철금(鐵琴)을 두드리는 여인이 앉아있는데, 이는 음악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권위자로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틀에는 피타고라스 이외에도 문법·논리학·수사학·산수·기하학·천문학 등 일곱 가지 '자유학과(liberal arts)'의 상징과 각 학과의 권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유래한 이 과목들은 덕이 있고 지적이며 소통할 줄 아는 '자유민'을 키우기 위한 필수 교과목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가 없는 만큼 책임도 없는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오직 정치에 참여하고 국방을 책임지는 시민을 위한 학문이었다.

자유학과는 오늘날 대학의 교양 교육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왜 그 중심에 성모 마리아가 있을까. 이는 중세 신학에서 추구하는 완벽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자, 인간에게 허락된 모든 지혜를 한 몸에 포괄한 성인(聖人)이 바로 성모 마리아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건, 흔히 말하듯 '엄마의 정보력'이 아니라, '엄마의 자유학'일지도 모른다.

 

 


109.  구스타브 쿠르베『돌 깨는 사람들』 -고단한 人生의 시작과 끝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였던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려주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신화나 문학에나 존재하는 환상과 허구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기록하고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야말로, 실제 그의 눈에 비친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의 현실이었다. 


  


구스타브 쿠르베<돌 깨는 사람들>1849~50년, 캔버스에 유채, 165×257㎝, 1945년경 작품 소실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 노인은 빈약한 망치 하나로 연신 돌을 깨부수고, 형편없이 찢어진 셔츠를 입은 소년은 곡괭이로 돌을 모아 나른다. 도로포장을 위해 큰 돌을 잘게 부수어 자갈을 만드는 일이 그들의 몫이다.

 

그림 오른쪽을 보니, 그들은 지금 막 먼지 자욱한 길가에 그대로 앉아 찌그러진 냄비 하나로 끼니를 해결한 모양이다. 길을 걷다, 이 둘을 발견한 쿠르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년과 노인이 바로 한 인생의 고단한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특정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이 처절하게 보여주는 '가난'의 실체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들의 얼굴 대신에 너덜너덜한 신발, 낡은 옷가지 등을 커다란 화면에 그려 넣었다. 흙투성이의 공사 현장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갈색조의 물감을 두껍고 거칠게 칠해 올렸다.

쿠르베의 친구이자, 사회주의 사상가였던 프루동은 이 그림을 두고, "모든 종류의 노동을 수행하는 훌륭한 기계들을 끊임없이 발명하면서도, 정작 뼈 빠지는 노역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현대의 산업 문명을 풍자한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난을 구제해 줄 기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110.  조지아 오키프, 검은 아이리스Ⅲ  - 개척, 고독, 자유의 꽃 


 

조지아 오키프, 검은 아이리스Ⅲ, 1926년, 캔버스에 유채, 91.4×75.9㎝,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큰 캔버스 전체를 아이리스 꽃 한 송이가 뒤덮고 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검은 꽃술에서는 미세한 분말이 올라오는 것 같고, 동그랗게 말려있다.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 겉 꽃잎은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처럼 여리고 곱다. '검은 아이리스Ⅲ'는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1887~ 1986)가 반복해서 그렸던 많은 꽃 그림 중 하나다.

오키프는 20세기 초의 미국 모더니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녀는 마치 고화질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정밀하게 꽃의 질감을 표현했지만, 사실 진짜 관심사는 특정한 꽃을 묘사하는 것이었다기보다는, 그 형태가 가진 조형성이었다. 실제로 큰 화면 위에 유기적 곡선과, 검은색으로부터 어두운 자주색을 거쳐 핑크와 회색으로 변화하는 색채가 어우러진 이 그림은 추상 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시절에 대담한 꽃 그림을 들고 나온 오키프에 대해 평론가들은 일제히 '여성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첩된 곡선과 중심핵을 둘러싸고 소용돌이치듯 퍼져 나간 꽃잎이 여성의 몸을 닮았다는 것이다.

 

남성들의 눈에 그녀는 관능적인 꽃의 화가였고, 여성들에게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몸을 당당하게 드러낸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나 오키프는 이와 같은 성적 해석을 일관되게 부인했고, 자기 그림을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가두기를 거부했다.

오키프는 많은 미국 화가가 성지순례라도 하듯 유럽행을 열망할 때, 오히려 미 서부의 뉴멕시코 황야로 이주해 수도승처럼 홀로 살며 그림을 그렸다. 꼬박 한 세기를 살고 세상을 떠날 무렵 그녀는 개척 정신과 고독한 자유라는 미국적 이상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111.  오스카어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 '버림받은' 남자의 뒤틀린 內面

  

파도가 거센 검푸른 밤바다에 연인 한 쌍을 태운 쪽배가 위태롭게 떠다닌다. 넓은 붓으로 거칠게 그린 곡선들이 화면 위에 어지러운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어두운 색채 중간중간에는 흰색과 초록색이 마치 섬광처럼 박혀 있어 폭풍우의 기세를 전해준다.

 

옆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은 이 와중에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었고, 옆에 누운 남자만 온몸에 힘을 준 채 퀭한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쏘아본다. 부드럽고 풍만한 여체와 비교하니, 깡마르고 뒤틀린 남자의 몰골이 더욱 초췌해 뵌다.

 

'바람의 신부'는 세기의 전환기에 빈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어 코코슈카(Oskar Kokoschka·1886~1980)가 그린 자신과 연인 알마 말러의 초상이다. 


 

오스카어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1913~14년, 캔버스에 유채, 181×220㎝,

스위스 바젤 미술관 소장

 

 

알마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었다. 유능한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빼어난 미인이었던 그녀는 이미 많은 유명인과 숱한 스캔들을 뿌렸고, 말러가 세상을 뜬 직후부터 코코슈카와 온 빈이 떠들썩하도록 그야말로 폭풍 같은 연애를 했다.

 

하지만 그림에서처럼 그는 그녀가 혹 바람처럼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늘 불안해했고, 알마는 그의 심한 집착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코코슈카가 징집되어 참전한 사이, 알마는 훗날 바우하우스의 초대 원장이 되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

 

그 뒤로 코코슈카는 알마와 크기가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 어디든 데리고 다니며 하녀를 붙여주고 파티를 열어주기까지 했다.

코코슈카는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3차원 세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4차원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의 정신세계야말로 '4차원'이었던 것 같다. 

 

 

 

112. 빌렘 클래즈 헤다, <블랙베리 파이가 있는 식탁>- 정물화로 표현한 人生무상

 

 

갓 구운 파이가 테이블에 나왔다. 향긋한 냄새가 따뜻한 기운과 함께 온 방 안에 퍼진다. 파삭한 파이 껍질을 가르니, 탱글탱글한 블랙베리와 견과류가 쏟아져 나온다. 글자 그대로 '그림의 떡'이지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로 기름지고 윤기가 도는 이 파이의 주인은 누굴까. 그는 파이를 잘라 놓은 채,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빌렘 클래즈 헤다, 블랙베리 파이가 있는 식탁, 1631년, 나무판에 유채, 54×82㎝, 드레스덴 회화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화가 빌렘 클래즈 헤다(Willem Claesz Heda·1594~1680)는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를 주로 그렸다.

 

라틴어 '바니타스'는 인생무상, 즉 유한한 인간의 삶이 헛되고 덧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 속의 파이와 온갖 사치스러운 물건들은 갑작스레 주인을 잃었다. 곱게 다림질한 테이블보, 정밀하게 조각된 은제 식기와 유리잔은 그가 얼마나 부유하며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릇들이 넘어지고 깨진 모습을 다시 보니, 그는 달콤한 파이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마치 태풍에 휩쓸려 가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어디론가 끌려갔다. 허망하게 주인을 잃은 회중시계는 괴괴한 적막 속에서 저 혼자 째깍대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마저도 멈추고 말 것이다.

일찍이 개신교의 칼뱅주의를 추종했던 네덜란드인들은 근면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얻은 부와 세속적 성취를 거리낌없이 자랑했지만, 그들의 자부심이 자만심과 허영심으로 부풀어 오르지 않도록 늘 경계했다.

 

사실 정물화 자체도 사치품이다. 하지만 이 사치품조차도, 자만심이 도를 넘으면 누구라도 이 그림의 파이 주인처럼 "한 방에 훅 간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13.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가정교사>

- 귀족 도련님을 키운 중산층 가정교사와 유모들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가정교사, 1739년,캔버스에 유채, 46.7×37.5㎝,오타와,캐나다 국립 미술관.

 

 

갖고 놀던 장난감들을 바닥에 어질러 놓은 채 그대로 달려나가려던 도련님을 붙잡아 세운 건 그의 가정교사다. 모자의 먼지를 털어주며, 눈을 맞추고 차분히 타이르는 그녀 앞에서는 철없는 어린아이도 공손해진다.


 

이처럼 평범한 여인들과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 그림으로 잘 알려진 샤르댕(Jean Baptiste Sim�on Chardin·1699~1779)은 의외로 루이 15세가 무척 총애하던 화가다. 화려한 궁중 생활을 즐기던 프랑스 왕도 가끔은 소박하고 건전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샤르댕은 단순한 색채와 부드러운 조명으로 고요한 집안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그의 작은 화면 속에는 두 개로 갈라진 상반된 세계들이 존재한다.

 

열린 문 너머에서 소년을 기다리는 바깥세상과 가정교사가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가정의 질서, 장난감들이 주는 쾌락의 세계와 맞은편에 놓인 반짇고리가 상징하는 성실한 노동의 가치, 그리고 아직 배울 것이 많은 귀족 도련님과 교양을 갖춘 중산층 출신의 가정교사가 그들이다.

 

샤르댕은 왕후장상의 위대한 업적만을 그리던 이전의 미술에서 도외시했던 것들, 즉 가정과 여성, 중산층의 가치를 드러냈다. 어린 소년을 온전한 사회의 일꾼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이들인 것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양육과 훈육을 책임진 '가정의 여성'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까지 상류층 자녀의 양육은 유모와 가정교사의 몫이었다.

 

과거의 그 많은 위인은 말하자면 모두 '아줌마' 손에서 자란 아이들인 셈이다. 요즘 남의 손에 자녀를 맡기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워킹맘'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114. 호안 미로, <카탈루냐 풍경> - <몬주익 언덕'에서 꿈꾼 自由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억한다면,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레이스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가 경쟁자들을 따돌리며 끈기 있게 오르던 가파른 언덕, 바로 그 몬주익 언덕 위에 화가 호안 미로(Joan Mir�·1893~1983)의 미술관과 묘지가 있다.

 

사시사철 온화한 대기와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 있는 곳, 여행객을 들뜨게 하는 축복받은 기후의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그 주도(州都)인 바르셀로나가 바로 미로의 고향이다. 


 

호안 미로, 카탈루냐 풍경, 1923~24년, 캔버스에 유채, 65×100㎝,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그의 '카탈루냐 풍경'에서는 구불거리는 검은 선과 따뜻한 원색의 자유분방한 형태가 어우러져 마치 천진한 어린애의 낙서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경쾌하게 띄워 준다. 초현실주의자들과 가까웠던 미로는 상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예술을 통해 무의식적인 꿈과 환상의 영역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관습의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미지를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추출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자동기술법, 즉 오토마티즘(automatism)을 실험했다. 따라서 그는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의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도중에 형태가 스스로 드러난다고 했다.

사실 생기발랄한 미로의 작품은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자의 상실감과 정치적 압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담고 있는 어두운 시대의 산물이다. 20세기 초, 카탈루냐는 프랑코 정권에 끝까지 저항하다, 바르셀로나가 함락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힘들게 되찾은 자치권을 다시 한 번 잃어버렸던 것이다.

 

지난 9월, 카탈루냐 주민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화폭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자유를 추구했던 미로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그림이 나왔을지 궁금하다

 

  

115. 박래현, <노점> - '아비뇽 아가씨들' 닮은 피란지의 아줌마들 


 

박래현, 노점, 1956년, 267×210㎝, 화선지에 먹과 채색,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1920~1976)을 설명할 때는 남편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이름이 버릇처럼 따라붙는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학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기도 했던 박래현은 결혼 전에 이미 두각을 나타낸 미술가였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색에서 탈피하여 현대적 한국화를 창조하기 위해 수묵채색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서양의 추상미술과 결합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지금 덕수궁 미술관의 전시 '명화를 만나다'에서 볼 수 있는 '노점'은 바로 그 실험의 결과물이다. 큰 면으로 과감하게 분할된 추상적 형태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등은 박래현이 특히 입체주의에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커다란 화면의 전면을 차지하고 굳건하게 서있는 갈색 피부의 이국적인 여인들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닮았다.

그러나 박래현의 여인들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다. 전쟁통의 피란지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노점에 좌판을 벌인 아줌마, 한 손으로 아이를 업고 다른 손으로는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 자기 몸집만큼 큰 옥수수 바구니를 거뜬히 들고 있는 건장한 여인들은 어쩌면 화가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란 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였지만, 동시에 네 자녀의 어머니이자, 일찍이 청력을 잃은 남편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친 지극한 내조형 아내였던 것이다.

미술사에는 '거장'인 남편이 독차지한 스포트라이트 바로 옆, 유난히 더 어둡게 느껴지는 무대의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미술가'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박래현은 자기 무대가 밝든 어둡든 개의치 않고 성실했던 화가이자 아줌마였다.
 

 

116. 앤디 워홀, <황금빛 메릴린 먼로> -공장에서 예술품을 '대량 생산'한 앤디 워홀

  

  

앤디 워홀, 황금빛 메릴린 먼로, 1962년,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211.4×144.7㎝,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수퍼스타'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은 미국의 미술가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이다. 팝아트의 거장이자 영화 및 음반 제작자로서 '팝의 교황(Pope of Pop)'이라고 불리며 늘 유명인들에 둘러싸여 연예인 같은 삶을 살았던 워홀이 진짜 동경했던 '수퍼스타'가 바로 메릴린 먼로였다.

 

사실 워홀뿐이랴. 메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모를지는 몰라도, 지하철 통풍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스커트를 휘날리며 천진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모르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워홀이 먼로를 작품에 담기 시작한 건 1962년, 그녀가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직후부터다. 그는 '수퍼스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 황금색을 골라 커다란 화면에 바르고 그 중앙에 먼로의 얼굴 사진을 넣어 빛나는 노랑과 하늘색을 덧칠했다. 금빛 배경의 초상화는 기독교의 성상, 이콘을 닮았지만, 먼로는 '성상(聖像)'이라기보다는 '우상(偶像)'에 가깝다.

이는 워홀의 대표작이지만, 사실 워홀이 직접 한 일은 별로 없다. 그는 영화사에서 홍보용으로 배포한 먼로의 사진을 그대로 가져다 실크스크린으로 복사하듯 캔버스에 찍어냈을 뿐이다. 그는 이러한 제작 방식을 '조립 라인'이라고 불렀고, 자신의 스튜디오 또한 '팩토리'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조수들을 고용하여 공장에서 찍어내듯 쉽고 빠르게 '미술품'을 제작했다.

천재적인 미술가의 위대한 손이 만들어낸, 이 세상에 단 한 점밖에 없는 고귀한 미술품을 기대했다면 워홀의 '조립 라인'이 불경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워홀은 오늘날 우리가 동경하는 수퍼스타들도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117. 성녀 프와의 성유물함 - 中世 지역경제에 도움되었던 어린 聖女의 유물

 

 

  

성녀 프와의 성유물함, 나무에 은도금 및 각종 보석, 높이 85㎝, 9세기 말부터 제작,

프랑스 콩크의 수도원 성당 소장

 

 

성녀 프와(Sainte Foy)는 3세기경 제정 로마에서 기독교인으로 박해를 받고 처형당한 성인(聖人)으로 순교 당시에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그녀의 고향은 프랑스의 아장(Agen)이지만, 현재 그 두개골을 성유물(聖遺物)로 모시고 있는 곳은 이웃한 콩크의 수도원 성당이다.


9세기경 콩크의 수도승이 훔쳐와서는, 성인께서 간절히 원하셔서 어쩔 수 없었던 "거룩한 절도"라고 주장하니, 아장에서도 속절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성유물이란 성인의 몸이나 그 일부, 혹은 그들이 사용한 물건으로서 특히 중세 서유럽에서 열렬한 숭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성유물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멀고 고된 순례길에 올랐던 것은, 무엇보다도 최종 목적지인 성지(聖地)에 도달하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례길 곳곳에 있는 지방 성인들의 성유물을 참배하며 기적을 소원할 수 있다는 매력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엄청난 숫자의 관광객을 끌어모았던 성유물은 지역 경제 활성화에 효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프와의 성유물은 특히 눈먼 자들에게 시력을 되찾아주는 권능으로 유명했으니, 온 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콩크를 찾았겠는가. 아장에서는 땅을 칠 일이었을 게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성유물함이 조금 어색해 뵌다. 이 조상(彫像)이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9세기부터 19세기까지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부분들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박한 두상(頭像)이었던 것에 몸이 붙고, 권좌가 붙고, 은칠이 더해지고, 온갖 보석이 여기저기 붙었다. 성인의 작은 몸에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다

 

  

118.  폴 고갱 <신들의 하루> '神들의 하루'에 불과한 인간의 긴긴 삶

 

 

 

폴 고갱 ‘신들의 하루’, 1894년, 캔버스에 유채, 69.5x90.5㎝,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잘나가던 증권맨이던 폴 고갱은 증시 폭락으로 실직한 이후에 처자식을 버리고 화가가 되어 집을 떠났다. 자본주의 사회와 물질 만능주의에 염증을 느낀 그가 선택한 최종 목적지는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 고갱은 타히티가 마치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에 살던 에덴 동산처럼, 문명 이전의 인류가 누리던 순수하고 원초적인 삶이 지속되는 곳으로 상상했다.

 

타히티 또한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래 서구화가 진척되며 본래의 풍속이 사라져버린 다음이었지만, 고갱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능력이 있었다. 


'신들의 하루'는 그가 1893년 말, 타히티에서 2년여를 보내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린 그림이다. 기대와 달리 평단의 냉대를 받으며,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고갱의 기억 속 타히티는 여전히 에덴 동산이다.

 

하지만 중앙에 서있는 거대한 신상(神像)은 예수님도 타히티의 토착신도 아닌, 인도와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의 온갖 신들의 조합이다. 그 아래에는 매혹적인 자태로 정면을 보고 앉은 여인을 중심으로, 양 옆에 웅크리고 누운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의 앞에 마치 오색 창연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환상적인 색채의 바닷물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중앙의 여인은 두 발을 물속에 담갔다. 왼쪽의 인물은 발끝만 물에 넣었다. 오른쪽의 인물은 한껏 몸을 웅크리고 돌아누웠다. 이들은 각각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실망을 안고 타히티로 되돌아간 고갱은 54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죽을 때까지 다시는 파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지러운 물길 속에 다리를 한번 담갔다 꺼내면 끝나는 긴긴 인생이 신들에게는 정말 하루에 불과한 것일까?

 

 

 

119. 얀 반 에이크,< 성모영보> - 아래위가 뒤집혀 있는 마리아의 대답 

 

  

얀 반 에이크, 성모영보, 1434년경, 캔버스에 유채, 93x37㎝,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조용히 책을 읽던 성모 마리아에게 대천사 가브리엘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은총을 가득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AVE GR PLENA)." 그는 마리아가 곧 성령(聖靈)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거라고 알려준다.

 

마리아는 처녀 몸으로 어찌 아기를 낳을까 깜짝 놀라지만, 이미 그녀를 향해 성령을 상징하는 흰 비둘기가 날아오고 있다. 정숙한 자세로 복종하는 마리아가 대답하길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ECCE ANCILLA D I)." 마리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글귀는 아래위가 뒤집혀 쓰여 있다.

 

천상에 계신 하나님께 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리아가 대천사의 전갈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장면을 성모영보(聖母領報) 또는 수태고지(受胎告知)라고 한다.

15세기 플랑드르, 오늘날 네덜란드 지역의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1390경~1441경)의 그림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마치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극도로 세밀하게 그려졌다.

 

금실을 짜 넣은 천사의 두꺼운 망토와 부드럽고 따스한 벨벳으로 만든 마리아의 드레스, 솜털 같은 천사의 머릿결과 반짝반짝 빛나는 진주와 보석이 모두 물감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니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얀 반 에이크는 이토록 극도로 사실적인 그림 속에 기독교의 상징을 곳곳에 심어 두었다. 예를 들어 흰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바닥 타일에 새겨진 다윗과 골리앗, 삼손과 델릴라의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형과 구원을 상징한다. 눈을 현혹하는 다채로운 물질의 향연 속에서도 경건한 종교적 메시지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플랑드르 미술의 전통이었다

 

 

 

 120 . 프란츠 마르크,< 큰 푸른 말들> - 고귀한 정신을 살려 줄 선구자, 靑馬

  

눈이 시리도록 푸른 말 세 마리가 원색의 풍경 속에 모여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몸통은 육중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둥글고 원만해서 유순한 그들의 성질을 드러내준다. 말들의 목과 등허리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은 뒤편에 서있는 산봉우리의 능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초원에서 자연에 순응하여 평화롭게 살아가면서 생명력과 고결함을 간직한 동물들의 세계가 바로 독일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1880~1916)가 추구하던 이상향이다. 

 

 

 

프란츠 마르크, 큰 푸른 말들, 1911년, 캔버스에 유채, 105.7×181.1㎝,

미니애폴리스 워커아트센터 소장.

 

 마르크는 러시아 출신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파(靑騎士派)'라는 미술가들의 그룹을 이끌었다. 마르크는 푸른색을, 칸딘스키는 기사를 유난히 좋아했기에 나온 작명(作名)이었다. 각각의 색채에 추상적 의미를 부여하곤 했던 그들에게 푸른색은 바로 정신성(性)의 상징이었다.

 

원래 신학을 공부하고 성직자가 되고자 했던 마르크에게 세기 전환기의 유럽은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 만능주의와 도덕적 불안감, 퇴폐적 풍조가 뒤섞인 암울한 세상이었다. 마르크는 정신적 타락과 피폐한 영혼의 시대에 고귀하고 순수한 정신을 되살려 줄 선구자적 존재가 바로 푸른 말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1914년, 세기말의 불안은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르크는 군에 자원했다. 떠나는 그에게 칸딘스키는 "다시 보자"고 인사했고, 그는 "안녕"이라고 대답했다. 1916년, 마르크는 전쟁사상 가장 길고 잔혹했던 전장(戰場)으로 꼽히는 베르덩 전투에서 포탄을 맞고 사망했다.

 

전쟁터에서 보낸 편지에 그는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지금 평온한 청마(靑馬)의 세상에 있을까?

[출처] : 우정아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