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Ⅲ [11회~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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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Ⅰ[ 1회~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2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Ⅱ[ 6회~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3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Ⅲ[11회~1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4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Ⅳ[16회~2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5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Ⅴ[21회~2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6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Ⅵ[26회~30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Ⅶ[31회~35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Ⅷ[36회~40회] 



11.‘서태후의 오른팔’이홍장,조선에 밀서를 보내다

-淸 실세의 입만 쳐다봤던 조선 조정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의 청나라 의존도 더 높아져

…‘자신감 충만’ 일본, 온갖 트집 잡아가며 야욕 드러내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해서 그린 그림. 우측 상단에 ‘조선경성전쟁 일본병대승리도 (朝鮮京城戰爭 日本兵大勝利圖)’ 라고 쓰여 있다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일본정부에 보고된 시점은 1875년 9월 28일 한밤중이었다. 일본정부 입장에서 보면 군함을 이용한 도발은 대성공이었다. 일본의 무력도발에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정도로 조선의 정보력과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지난해 대만 침공을 통해 청나라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주역들은 조선 침공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

2년 전의 정한론(征韓論) 논쟁 때 유신 주역들은 찬성과 반대로 양분됐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감 부족이었다. 현실적으로 정한론을 실천하려면 조선을 굴복시킬 만한 군사력이 있어야 했고, 나아가 청나라를 제압할 만한 군사력도 있어야 했다.

과거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볼 때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면 조선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청나라가 군사를 파병할 것 역시 분명했다. 그렇기에 군사적으로 조선과 청나라를 압도하지 못한다면 정한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와쿠라·기도 등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74년의 대만 침공을 통해 청나라는 군사력이 상상 이상으로 허약하다는 사실에 더해 전쟁을 극력 회피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나아가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의 정보력과 국방력은 더더욱 형편없다는 사실 역시 명백해졌다.


이런 사실들은 역으로 이와쿠라·기도 등에게 조선 침공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운요호 사건 이후 메이지 유신 주역들 사이에서 조선 침공을 반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예컨대 정한론 논쟁 때 외교보다 내치가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반대 입장이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역시 조선 침공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다만 기도는 즉각적인 침공에 앞서 외교 협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먼저 외교 협상을 통해 조선이 일본의 요구, 즉 국서 접수와 주요 항구 개항 등을 수용한다면 굳이 침공을 할 필요가 없고, 만약 수용하지 않으면 그때 침공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기도는 스스로 조선 사절이 돼 외교 협상을 맡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1873년에 사이고가 조선 사절로 가겠다고 했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기도 자신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조선 사절이 되기 위해 기도는 유신 3걸의 한 명으로 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찬동을 얻고자 했다.

이런 뜻을 그는 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알려 오쿠보에게 전하게 했다. 조슈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기도의 핵심 측근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기도는 태정대신 산조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조선 사절로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기도는 자신이 왜 기왕의 입장을 바꿔 외교를 우선시하게 됐는지 이렇게 해명했다.
 


“우리를 적대시하고 있다. 당장 쳐야 한다.”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에 걸려 있는 문하생의 사진들. 맨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 둘째 줄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그 옆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맨 위 오른쪽이 기도 다카요시




“1873년 정한론 논쟁 당시 저는 내치가 흡족하지 않음을 깊이 우려해 안을 먼저하고 밖을 뒤로 해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저들을 정벌하려는 죄가 아직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이 분명히 우리에게 적대했습니다. 그럼에도 헛되이 내치만을 돌아보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이에 저의 생각 역시 스스로 일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명치천황기> 8년(1875) 10월 4일]

기도는 1873년에 정한론을 반대한 이유로 내치가 흡족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조선의 죄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2년 후인 1875년에는 일본의 내치도 흡족하고 조선의 죄도 분명하므로 침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메이지 일본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년 동안 메이지 일본은 근대 해군과 육군을 양성했다. 그 군사력으로 대만을 침공했고, 운요호로 조선에 무력도발을 감행해 성공했다. 그래서 기도 역시 군사력으로 청나라와 조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조선 침공을 찬성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기도의 주장 중에 “지금 조선이 분명히 우리에게 적대했습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운요호 사건이 전적으로 조선 책임이라는 적반하장의 주장이었다. 당시 기도는 유신 3걸로 불리던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그런 기도가 운요호 사건의 내막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운요호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조선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기도 역시 운요호 도발에 직접적으로 간여됐음을 방증한다. 이는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와쿠라를 비롯한 유신의 주역들 모두가 같았다. 그들은 운요호 도발의 공모자였고, 그 도발을 통해 자신감을 가지면서 조선 침공을 찬성하게 됐다.

다만 기도는 무력 대응을 주장하면서도 보다 신중한 대응을 요구했다. 즉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기에 앞서 청나라의 의중을 떠보자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기도는 운요호 사건을 먼저 청나라에 알려 일본대신 해결하게 하고, 청나라가 거절하면 그때 가서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청나라와 조선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인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보면 청나라는 종주국이었고 조선은 속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외교의례일 뿐이었고 실제는 각각 정치 주권과 외교 주권을 갖는 독립국이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운요호 사건을 일본을 대신해 해결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먼저 청나라에 알려 일본 대신 해결하게 하자고 한 것은 청나라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술책이었다. 만약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정부는 청나라에 사과, 재발방지, 손해배상 등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런 역할을 청나라가 떠맡을 까닭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가 해결하겠다고 나선다면 조선은 분명 청나라를 일본의 앞잡이로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청나라와 조선의 외교관계가 틀어질 것이고, 그것은 곧 일본이 원하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청나라가 거절한다고 해도 일본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곧 종주권의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으므로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본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며 군사 개입을 시도하는 경우였다. 이럴 경우 청나라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유신 주역들은 이 경우에도 청나라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들은 청나라와 전쟁할 경우 조선만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만주까지 침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자신감을 은근히 청나라에 내비치기까지 했다.



“당신들이 개입한다면 만주까지 삼키겠다”



왼쪽) 이종학 씨가 일본 도쿄대 메이지 문고에서 찾아낸 1904년 1월 30일 당시 ‘경성한반도사’가 발행한 잡지 [한반도] 제2호에 실린 서울역 앞 사진. / (오른쪽) 도서 [천황과 도쿄대]에 실린 메이지 일왕의 사진. / 사진:청어람미디어



이런 자신감은 물론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일본과의 전쟁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로까지 확대된다면 조선 문제 개입에 훨씬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주는 청나라의 발상지인데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청나라에는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가 그런 모험을 무릅쓰려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청나라는 조선 문제에서 발을 뺄 가능성이 높았고, 그런 예상에서 기도는 청나라에 미리 알려 조선 문제에서 발을 빼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서 발을 뺀다면 메이지 일본이 고립무원의 조선을 침공해 점령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1875년 10월 27일, 우대신 이와쿠라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참의들과 함께 태정대신 산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운요호 사건에 대한 대책이 토론됐다. 여러 가지 토론이 있었지만, 기도의 의견을 토대로 세 가지 결정이 도출됐다.

첫째는 운요호 사건의 폭거를 조선 정부에 힐문(詰問)한다는 결정이었다. ‘힐문’이란 상대의 잘못을 꾸짖고 그 책임을 묻는다는 뜻으로, 운요호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조선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운요호 사건을 ‘폭거’로 규정해 조선 정부에 힐문하겠다는 것은 곧 조선정부에 사과, 손해배상, 재발방지 등을 요구하겠다는 뜻이었고, 만약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결정이 세 가지 결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인데 이런 결정으로 보면 운요호 사건은 유신 주역들의 음모로 추진됐고, 그 음모는 결국 조선 침공을 목표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결정은 운요호 사건의 폭거를 힐문하기 위해 먼저 조선에 사절을 보내 외교 협상을 벌인다는 결정이었고, 셋째는 청나라에 특명전권 공사를 파견해 조선 침공에 대한 청나라의 의중을 탐색한다는 결정이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결정은 모두 기도가 주장하던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 파견되는 사절은 기도가 맡는 것으로 합의됐다. 하지만 기도에게 중병이 생겨 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조선 사절에 임명됐다.

메이지 천황은 12월 9일 구로다를 조선 사절에 임명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쯤인 11월 10일에 외무성 소보(少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를 청나라에 파견할 특명전권 공사에 임명했다. 모리는 구로다와 마찬가지로 사쓰마번 출신이었다.


당시 29세의 젊은 외교관인 모리는 어린 시절 유럽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도 근무한 외교 베테랑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11월 17일 오전 10시에 모리를 궁으로 불러 특명전권 공사 임무를 잘 수행하라고 격려했다. 접견 이후 모리는 현소(賢所), 황령전(皇靈殿), 신전(神殿)을 참배하고 물러났다.

이어서 11월 20일 모리는 메이지 천황의 훈령을 받고 청나라로 출발했는데 그 훈령은 10월 27일에 우대신 이와쿠라가 태정대신 산조 집에서 참의들과 논의한 내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즉 운요호 사건을 조선의 폭거로 규정하고, 그것을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한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통고하라는 것이 모리가 받은 훈령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이 통고에 대하여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청나라와도 전쟁을 할지, 아니면 조선만 침공할지를 결정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12월 9일 북경에 도착한 모리는 총리아문에 신임장을 제출했다. 그리고 14일에 운요호 사건에 관한 일본 측 입장을 주장하는 문서를 총리아문에 제출했는데 그중에 “바라기는 조선국이 예로써 우리 사신을 대접하고 우리나라가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평화를 보장했으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 일이 낭패하게 되면 한국인은 분명 스스로 측량할 수 없는 참화를 받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셈이었다.



무기력한 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일본이 조선 침략에 앞서 대마도에서 한국어 통역사를 양성하던 한국어학교가 있던 코세이지 (현 광청사).



이에 더해 모리는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면 일본은 만주를 침공할 수 있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모리는 외교적 왜곡과 책략을 통해 운요호 사건을 정당화하면서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탐색했던 것이다.


모리는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이 조선에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하면서 그럴 경우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자 했다. 특히 당시 북양대신으로서 서태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이홍장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자 했다.

12월 14일 모리가 총리아문에 조선 침공 가능성을 통고한 후 이에 대한 이홍장의 생각은 12월 23일 그가 ‘논일본파사입조선(論日本派使入朝鮮)’이라는 제목으로 광서제에게 올린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이홍장은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과 일본 양국의 감정이 격화돼 있기에 전쟁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럴 경우 약소국 조선이 일본 침공을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수세에 몰린 조선이 청나라에 군사 파병을 요청할 경우 청나라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홍장은 만약 청나라가 파병을 거절한다면 일본은 순식간에 조선을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대로 청나라가 파병한다면 일본이 동삼성(東三省) 즉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을 공격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같은 이홍장의 예상은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으로는 일본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다는 현실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예상에서 이홍장은 조선에 군사 파병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모른 체하다가 조선이 일본에 점령되면 그 다음은 만주가 표적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조선과 청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기에 현재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군사적인 개입은 할 수 없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이홍장이 제시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이 직접 모리와 만나 조선을 침공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방법이었다. 둘째는 얼마 전 북경을 다녀간 고종의 핵심 측근 이유원을 이용해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둘 다 비군사적인 방법이었고, 이런 방법은 근본적으로 청나라의 군사적 열세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12월 28일, 이홍장은 직예총독부로 모리를 초청해 만났다. 모리는 부사 정영녕(鄭永寧)을 대동하고 이홍장을 만났다. 당시 53세의 이홍장은 29세의 모리를 설득해 조선 침공을 막고자 했다. 이홍장은 모리와 술잔을 나누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이홍장과 모리 사이에 오간 대화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모리_ 조선은 인도와 함께 아시아에 있고 중국 속국이 아닙니다.

이홍장_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정삭(正朔)을 받드는데 어찌 속국이 아닙니까?

모리_ 각국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단지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전량(錢糧)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속국으로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홍장_ 조선이 중국에 소속된 것이 수천 년임을 어느 사람이 모릅니까? 청일수호조규의 이른바 ‘소속방토(所屬邦土)’의 ‘토자(土字)’는 중국 각성을 지칭하니 이는 내지를 내속(內屬)이라 여겨 전량을 징수하고 정사를 관여함이요, 방자(邦字)는 조선과 여러 나라를 지칭함이니, 이는 외번이고 외속이라 여겨 전량과 정사는 본국에서 관리함입니다. 이는 예로부터 그러했고 청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어찌 속국이 아니라 말하십니까?

모리_ 일본은 조선과 화호(和好)하기를 몹시 원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화호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홍장_ 이는 귀국과 화호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나라가 작음을 알아 삼가 지키며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선이 각국에 대해 모두 그러합니다. 다만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리_ 일본과 조선은 이웃나라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통호하려 하는데, 조선은 어째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까요?



“전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홍장_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후 아마도 의혹과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정영녕(모리 수행원)_ 히데요시 이후에 일본과 고려는 일찍이 왕래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끊어졌고 몇 년 전 조선과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한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한 후, 국서의 제도가 변하자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홍장_ 이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조선은 감히 서양과도 통교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서양제도로 바꾸니 조선은 스스로 당연하게 의혹과 공포를 일으켜 일본과 왕래한다면, 다른 나라도 즉시 따라 올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영녕_ 종전에는 사신을 거절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일본 병선이 조선 해변에 이르러 담수를 취하자 조선이 즉시 대포를 발사해 우리 군함을 손상시켰습니다.

이홍장_ 귀국의 병선이 조선의 해구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습니다. 만국공법에 의하면 해안 10리 이내는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돼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과 통상하지도 않았으니, 본래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이 대포를 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리_ 중국·일본은 서양 나라와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와 화약하지 않았으니 공법을 인용할 수 없습니다.

이홍장_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일본의 잘못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조선이 갑자기 대포를 쏜 것은 작은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지만, 일본이 또 상륙해 조선의 포대를 파괴하고 조선 사람들을 살상했으니, 이는 또 일본의 잘못입니다. 조선은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조선을 흔드니 어떻습니까?(…)

정영녕_ 일본은 지금 또 사신을 조선에 보냈습니다. 겨우 사신 1명이 조선에 가서 조선과 협의해 조선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 합니다. 만약 협상할 수 있으면 일을 복잡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3건의 일을 결정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조선이 이후에 우리 사신을 접대하는 것입니다. 둘은 일본이 혹 태풍을 만나는 선박이 있다면 대신 보살피는 것입니다. 셋은 상선이 바다를 측량하는 데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사신이 조선에 도착했는데도 거듭 접대하지 않는다면 해당 사신이 일본에 돌아온 후 분명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바로 군대 출동입니다.

이홍장_ 사신을 보냈는데 받지 않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원나라 때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일본에 갔는데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조(北條) 때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사신을 살해했습니다.

모리_ (대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이후에 아마도 전쟁을 면하기 어렵겠습니다.

이홍장_ 고려와 일본은 함께 아세아주에 있습니다. 만약 전쟁을 벌인다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에 관계하고, 일본이 이미 화약을 현격하게 어겼으니, 중국이 어떻게든 처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일본사신삼유례부사정영녕래서오담절략’(日本使臣森有禮副使鄭永寧來署晤談節略) 1875년 12월 28일]

위의 대화를 살펴보면 이홍장과 모리는 조선의 속국 여부 그리고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논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벌어진 논쟁 자체로만 보면 이홍장의 논리가 타당했고 사리에도 맞았다.



조선, 일본의 압박에 직면하다


하지만 모리는 불리할 때마다 전쟁 운운하며 협박조로 나왔고, 그에 대해 이홍장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홍장이 겨우 내세울 수 있는 논리는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도였다.

모리와의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이홍장은 ‘도상화기 호무이익(徒傷和氣 毫無利益)’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선물로 줬다. ‘쓸데없이 화기를 손상하면 털끝만큼도 이익이 없다’는 뜻인데 절대로 조선을 침공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이런 당부만 가지고는 일본의 조선 침공을 결코 저지할 수 없음을 이홍장은 절감했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얼마 전에 북경을 다녀간 이유원을 이용하고자 했다. 본래 이유원은 고종의 원자를 세자에 책봉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북경에 왔었다. 고종은 이유원을 파견하면서 특별임무를 맡겼었다.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비밀 외교채널을 구축하라는 임무였다.

조선에서 청나라로 파견된 사신들은 관행적으로 예부의 한인(漢人) 관리들을 상대로 외교 실무를 처리했다.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외교 실무에 필요한 한문과 의전을 두루 터득한 여진족이 드물었기에 예부의 실무는 주로 한인들이 맡았다.

그렇지만 한인들은 외교 실무만 맡을 뿐 외교정책 결정이나 극비 정보처리 등에서는 소외됐다. 최고 권력이 여진족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총리아문이 설립된 후 서양 열강과의 외교업무가 총리아문으로 이관되면서 예부는 더더욱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했다. 일본·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 등과 관련된 국제정보 및 정책결정은 예부가 아니라 공친왕과 총리아문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공친왕과 총리아문을 불신한 고종은 이홍장을 통해 국제정보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고종은 이홍장이 한족 출신이며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 중신이라 해 속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유원을 통해 이홍장과 비밀 외교채널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7월 30일에 한양을 출발한 이유원은 10월 29일 북경에 도착해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이홍장에게도 편지를 보내 양국 간에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고, 이홍장은 기꺼이 응했다. 이유원은 11월 말 쯤 북경을 출발해 12월 16일 한양에 도착했다.

이유원은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하면서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모두 환대해 이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번에 칙사가 오면 우리도 각별히 잘 접대해 서로 신뢰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했다.

이유원은 청나라의 실세인 이홍장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고종과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자 이홍장은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이름으로 또는 총리 아문의 이름으로 이유원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보냈다.


모리와의 회담 이후에도 이홍장은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권고했다. 다만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고종과 조선 사람들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12. ‘굴욕 체결’의 결정판 강화도조약  - 조선 영해, 사실상 일본이 접수하다 
 

근대 세계에 무지한 탓에 수많은 독소조항 인식 못해

…쇄국·개국 국내 여론마저 갈리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재구성한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의 삽화. ‘조선산 보호 새’란 팻말을 붙인 조롱 속에 갇힌 닭(조선)이 주인(일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다



1875년(고종 12, 메이지 8) 음력 12월 10일(이하 음력),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군함 7척을 이끌고 시나가와(品川)항을 출항해 부산으로 향했다.

구로다의 공식직함은 특명전권 변리대신이었고, 이노우에는 특명부전권 변리대신이었다. 그들은 출항에 앞서 운요호 사건을 명분으로 무력과 협박을 이용해 조선을 개항시키라는 메이지 천황의 명령을 받았다. 구로다와 이노우의 임무를 보좌하기 위해 최고의 조선 전문가로 손꼽히던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동행했다.

당시 메이지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앞서 12월 2일에 있었던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주청특명전권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와의 회담을 통해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은 조선 개항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다만 조선 정부가 호락호락하게 일본 요구를 수용할지는 미지수였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운요호 사건의 피해자는 조선이었다. 그런데도 적반하장 격으로 일본이 사과와 재발 방지, 배상, 개항 등을 요구한다면 강력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럴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메이지 천황은 구체적인 훈령(訓令)을 줬다.

조선이 구로다 일행을 인정하지 않고 모욕을 가하거나 무력으로 축출하려 할 경우에는 일단 대마도로 후퇴하라고 했다. 당시 구로다가 인솔하는 병력은 약 400명의 해군으로 큰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것을 명분으로 병력을 증강시켜 침공한다는 계획이었다. 반면 조선이 모욕을 가하거나 무력으로 축출하려 하지는 않지만 공식사절로 인정하지 않고 교섭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 보복으로 협박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조선이 화친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에 보고해야 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끄는 경우에는 군대를 한양에 주둔시키고 강화성을 점령하겠다고 협박하라는 일러뒀다.


 이 경우는 조선이 일본 군함에 공포감을 느낀 것이 분명하므로 더더욱 강경하게 나가라는 훈령이었다. 즉 메이지 천황 훈령의 핵심은 조선이 강하게 나오면 약하게 대응하고 거꾸로 조선이 약하게 나오면 강하게 대응하라는 것이었다.

메이지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이런 준비를 했지만 정작 조선 정부는 무대책이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어떤 외교협상을 벌이는지, 조선을 무력침공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해군력을 동원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19일 구로다가 인솔하는 일본 군함 7척이 부산 흑암 앞바다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 훈도(訓導) 현석운은 한양에 가서 부재중이었다.

이에 따라 별차 이준수가 현석운 대신 조사를 맡았다. 이준수는 관수왜(館守倭) 대행 아마노조 유조(山之城祐長)로부터 일본 사절이 강화도로 간다는 사실을 통고받았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왜관의 일본인들이 사전에 난출을 예고한 셈이었다.


문제는 이번 난출은 땅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감행된다는 사실이었다. 기왕의 난출은 육로를 통해 동래부사에게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부산 첨사나 동래 부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다를 통해 강화도까지 가겠다고 했다. 방해하려면 해군을 동원해야 했지만 불가능했다. 일본의 군함은 근대 군함이었지만 조선이 보유한 군함은 전통 목제 군함이었다. 속도나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마노조의 통고 중에는 ‘만약 나와서 접견하지 않으면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말이 ‘한양으로 올라갈 것’이지 실상 조선의 수도 한양을 무력 침공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허둥지둥 조선 조정, 무풍가도 日 함대



▎최초의 근대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묘사한 그림.


이런 통고를 받은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그리고 경상 좌수사는 구로다를 막아야 했지만 그럴 힘도 없었고 방법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루속히 이 소식을 고종에게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보고도 빠르지 않았다. 고종이 동래 부사를 통해 소식을 들은 시점은 1876년(고종 13) 1월 2일이었다.

부산에서 아마노조의 통고를 받은 12월 19일로부터 무려 보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구로다가 탄 군함의 속도가 동래 부사의 보고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사이 구로다는 아마노조가 예고한 대로 강화도로 접근해왔다. 그때 구로다는 군함 3척은 부산에 남겨두고 4척의 함대만 인솔했다. 구로다는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했다. 조선군이 구로다 함대를 관측하고 고종에게 보고한 시점은 12월 26일이었다.

부산을 떠난 지 7일 만이었다. 장소는 남양 부근의 바다였다. 남양 다음은 인천이고 그 다음은 강화도였다. 구로다 함대는 부산을 떠난 지 7일 만에 강화도 가까이까지 접근했던 것이다. 그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남양 부사의 보고에는 단순히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다고만 했다. 이에 따라 고종은 어느 나라 군함인지, 또 정확이 몇 척이나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몇몇 이양선이 남양 인근에 출현했다는 것만 알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고종을 비롯해 조정 중신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지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기억 때문이었다. 게다가 몇 달 전에는 운요호 사건도 있었고, 부산에서 일본인 난동도 있었다.

고종과 조정 중신들은 이번 이양선은 일본 군함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일본어 역관과 중국어 역관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이양선 출현을 보고받은 12월 26일에 고종은 일본어 역관 현석운과 중국어 역관 오경석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초량 왜관 담당인 현석운은 마침 한양에 왔다가 차출됐는데 당시 최고의 일본 전문가로 꼽혔다. 오경석 역시 청나라에 수 차례 다녀온 중국 전문가였다. 이날 현석운과 오경석은 강화도로 출발했다. 남양 인근의 이양선들이 강화도 쪽으로 올 것으로 예상해서였다. 아울러 고종은 강화도 주변의 해양 경계를 대폭 강화했다.

그런데 남양 인근에 도착한 구로다는 며칠 동안 그 부근에서 맴돌 뿐 강화도로 접근하지 않았다.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을 떠날 때 구로다는 2개 소대 약 400명의 해군만 인솔했다. 일본 정부에서 더 많은 병력을 인솔하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이 정도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양 인근에 도착한 구로다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직감했다. 강화도 주변의 경비가 예상외로 강했던 것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조선정부는 강화도·통진·인천 지역의 해양 방어를 크게 강화했다. 이에 구로다는 2개 대대 약 2000의 병력을 추가 요청했다. 그 사이 2척이 합류해 구로다 함대는 총 6척으로 늘었다.

구로다가 남양 인근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1876년 1월 2일에 동래 부사의 보고서가 한양에 도착했다. 이에 따라 고종과 조정 중신들은 남양 인근의 이양선들은 일본 군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울러 강화도에 대신을 보내 접견하지 않으면 한양으로 무력 침공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고종이나 조정 중신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일본의 요구대로 대신을 강화도에 파견할지 아니면 거절할지 둘 중 하나였다.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의 협상


김포군 대명리와 초지대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초지진은 성곽의 둘레가 500m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이다. 조선 말 한양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거치는 등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다


1월 3일 고종은 대신들에게 의정부에 비상 대기하도록 명령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의정부에 모인 대신들은 이유원을 필두로 박규수·이최응·김병국·홍순목 등이었다. 고종은 이들과 협의해 대책을 마련할 셈이었다.

1월 4일 구로다는 기함 맹춘호(孟春號)를 강화도 가까이로 접근시켰다. 조선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맹춘호가 강화도의 내양(內洋) 즉 영해 가까이 접근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은 수군에 대응 출동을 명령했다.

판관 박제근과 군관 고영주가 수군을 이끌고 출동해 맹춘호를 맞았다. 비록 조선 수군은 목제 군함이었지만, 맹춘호는 조선 수군의 지시에 순순히 응했다. 맹춘호에 탑승한 박제근과 고영주는 즉각적인 퇴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이 대신을 파견해 접견하지 않으면 6척의 군함으로 한양을 공격하겠다는 답변만 들었다. 박제근과 고영주의 조사는 당일로 한양 조정에 보고됐다. 이제 고종과 중신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강화도에 대신을 파견하고 전쟁을 피할지, 아니면 거부하고 전쟁할 지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종이나 중신들은 전쟁을 할 준비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다. 이에 따라 일단 전쟁을 피하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대신을 파견해 접견하기로 했다. 이런 대응은 사전에 준비된 대응이 아니라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1월 5일 고종은 신헌을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삼아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강화도에 가서 구로다를 접견하게 했다. 신헌이나 윤자승은 근대외교에 문외한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로다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몰랐다. 이처럼 전혀 준비되지 않은 신헌과 완전히 준비된 구로다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한편 1월 9일에 현석운과 오경석은 항산도(項山島) 부근에서 구로다 함대에 승선할 수 있었다. 그때 현석운은 모리야마 시게루에게서 “귀국에서 파견한 대관이 강화도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인천의 지방관에게서 들었으며, 접견하는 절차와 날짜는 우리가 내일 강화성으로 들어가 유수와 만나 면담한 다음 결정하겠으니 이것을 강화 유수에게 알리고 군사와 백성들을 타일러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라는 통고를 들었다.

이에 현석운은 “접견 절차와 날짜는 우리 대관이 결정할 것이니 강화에 가서 논의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또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조정의 명령이 있은 다음에야 논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지만, 모리야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쫓겨나듯 하선한 현석운은 그 길로 강화도로 향했다.

현석운과 모리야마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구로다는 대화와 협상보다는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로 나왔다. 조선이 접견대관을 파견했다는 것은 곧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시였고, 그것은 곧 전쟁준비도 안 됐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반면 구로다는 전쟁 각오까지 한 상황이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밀어붙일수록 주도권은 구로다가 쥘 수 있었다.

1월 10일 일본 군함 4척이 강화도에 접근했다. 현석운을 통해 보고받은 강화 유수는 속수무책이었다. 혹 보고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접견대관이 파견된 상황에서 포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일본 군함은갑진(甲津)에 정박했고 몇몇 일본인들이 상륙해 강화성으로 들어왔다.

강화 유수와 만난 자리에서도 일본인들은 일방적으로 나왔다. 그들은 구로다가 강화도에 상륙할 때 400명의 병력을 대동할 것이니, 미리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통고하는가 하면, 조만간 2000명의 일본군이 인천과 부평 사이에 상륙할 것이니 역시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통고했다.


‘문외한’ 신헌 칼날을 잡다 

말이 통고지 협의를 빙자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강화 유수나 조선 정부는 대책이 없었다. 거부할 경우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것인데, 조선은 전쟁할 의지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1월 16일 구로다는 400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강화도 남문 앞에 상륙했다. 다음날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1차 협상이 벌어졌다. 장소는 서문 안의 연무당이었다. 1차 협상에서 신헌과 구로다는 운요호 사건 책임과 국서 접수 거부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구로다는 운요호 손해배상과 책임자 처벌 나아가 국서 접수를 요구했다.
반면 신헌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신헌은 사태무마와 우호관계 회복에만 치중했던 것이다. 그 당시 신헌은 변명이 아니라 추궁해야 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의 침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헌은 만국공법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군사적인 뒷받침이 없었기에 변명하기 바빴다. 협상에서의 변명은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1월 18일에 속개된 2차 협상에서도 구로다는 국서 문제와 운요호 사건을 추궁했고 신헌은 변명했다. 뿐만 아니라 동석한 모리야마까지 구로다에 가세해 신헌을 몰아붙였다. 모리야마는 일본의 협상대표가 아니기에 발언하면 안 되는데도 외교 관행을 무시하고 불쑥 튀어나와 국서 문제의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구로다와 모리야마의 합동 추궁에 신헌은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기회를 잡은 구로다는 “귀국 조정의 확실한 대답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직무이므로, 조정에 전달해 우리들이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있게 해준다면 아주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했다.

신헌은 “조정에 알리겠습니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이 큰 실수였다. 국서 문제는 조선과 일본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책임으로 돌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조선은 기왕의 전통을 유지하려 했고, 일본은 유신 이후의 새로운 상황을 강요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양측 모두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다는 조선 정부만의 사과 내지 해명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신헌은 수락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의정부 명의의 해명서를 구로다에게 전달해야 했다. 반면 구로다는 아무런 해명서도 제출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결과로 본다면 국서 문제는 조선의 잘못으로 발생했고 그 때문에 조선이 해명한 꼴이 됐다.

국서 문제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후 구로다는 조약 책자를 꺼내 신헌에게 보이면서 “간단하게 기록한 조약 13건을 자세히 보시고 대신께서 직접 조정에 가셔서 임금님을 뵙고 보고해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본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조약 책자를 본 신헌은 “조약이란 것은 무슨 일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근대외교에 문외한인 신헌에게는 조약이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신헌을 비롯한 조선 양반들은 근대세계에 대해 무지했다. 구로다는 “귀국 지방에 관(館)을 열고 함께 통상하자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신헌은 “300년 동안 언제 통상하지 않았던가요? 지금 갑자기 이것을 가지고 따로 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구로다는 “지금 천하 각국이 다 통행하는 일이고, 일본 또한 각국에 대해 이미 관을 많이 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신헌이 이것도 조정에 알리겠다고 대답했고, 구로다는 10일 안에 회답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헌이 구로다를 만나기 직전에 고종은 청나라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입수했다. 청나라 예부에서 1875년 12월 23일에 보낸 자문(咨文)이었는데 그것이 1876년 1월 11일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일 후인 1월 17일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1차 협상이 있었다. 청나라의 자문에는 일본의 주청특명 전권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가 1875년 12월 9일 북경에 도착한 후 총리아문 그리고 이홍장을 상대로 벌였던 외교 공작의 전모가 소상하게 실려 있었다.

따라서 1월 11일 이후 고종과 당국자들은 이번 사태와 관련된 일본의 의도 그리고 청나라의 의향까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고, 청나라는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의 경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도 청나라는 도울 수 없다는 암시도 있었다. 청나라의 자문은 조선이 알아서 선택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외교적 수사일 뿐, 사실상 개항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淸 종주권 부정 통해 조선의 외교 고립 도모 


 

조일수호조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연무당 옛터



1월 13일에 고종은 중요한 국제 정보를 알려준 청나라에 감사를 표시하며 일본과의 교섭 과정을 자세히 알리겠다는 회답 자문을 보냈다. 이 시점에서 고종은 개항을 결심했던 것이다.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협상이 한창 중이던 1월 22일 청나라 칙사가 한양에 도착했다. 훗날의 순종을 고종의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청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져온 칙사였다.

칙사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반대하는 상소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서 이항로를 필두로 하는 보수유림(儒林)이었다. 그들은 일본을 서양 오랑캐나 마찬가지라 주장하며 강화도에 정박한 일본 배들을 무력을 써서라도 쫓아내라 요구했으며, 전쟁을 하게 되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개항을 결심한 고종은 그들을 역적이라 질책하며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킨 최대 공로자 최익현이 통상 반대 상소를 올리자 그마저도 유배형에 처했다.

1월 25일 의정부에서는 일본이 요구하는 수호통상을 수락하자고 건의했다. 고종은 즉각 찬성했다. 마침내 2월 3일에 신헌과 구로다는 총 12조로 된 조약에 서명 날인했다.

이 조약은 병자년에 조인됐다고 해 ‘병자수호조규’라고도 하고 강화도에서 조인됐다고 해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했다. 이 조약으로써 조선은 메이지 일본과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게 됐다.
조약 체결을 기념해 구로다는 고종에게 회선포(回旋砲) 1문, 탄약 2000발, 전차(前車) 1량(輛), 육연단총(六連短銃) 1정, 탄약 100발, 칠연총 2정, 탄약 200발, 비단, 침(針) 등을 선물했다.

대부분 근대 무기였다. 반면 고종은 구로다에게 사서(四書) 각 1질·종이·붓·묵·비단 등을 선물했다. 고색창연한 유교 문물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상호간의 선물만큼이나 강화도 조약에 대한 인식과 입장이 달랐다.

강화도조약에 대한 조선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이었다. 반면 일본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이었다. 조선은 상대적으로 근대문물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근대의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대문물에 밝았던 일본은 근대라는 이름으로 최대한 강하게 조선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런 인식과 입장 차이는 강화도 조약의 개별 조항에 대한 인식과 입장에서도 나타났다.

예컨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일본국 도쿄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라고 규정한 제2조에 대해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조선의 경우 이 조항은 기왕의 통신사 파견과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즉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이 있을 때마다 양국이 서로 상대국의 수도에 사신을 파견해 문제를 해결하고, 끝나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석한 것이었다. 물론 사신의 체류 기간은 문제의 경중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고종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제2조를 기왕의 사신파견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규정된 상주사절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따라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만국공법>을 근거로 상주사절을 주장했고, 1877년 9월에 외무 대서기관 하나부사를 대리공사(代理公使)에 임명해 한양에 상주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은 하나부사 공사를 과거의 통신사로는 인정했지만 상주 사절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 결과 하나부사 공사는 몇 년이 지나도록 한양에 상주하지 못했다.

하나부사 공사가 한양에 상주사절로 들어간 것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나 가능했다. 조선 역시 조미수호조약 이후에야 일본에 상주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2조뿐만 아니라 4조와 5조에 대한 인식과 입장 역시 조선과 일본은 판이했다.


조약 체결 후에도 사태 파악 안 되는 조선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조선어회화 책. 한글 표현 옆에 가다카나로 발음기호를 적고 하단에는 일본어로 뜻풀이가 돼 있다. 사진은 러일전쟁 시기에 군인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된 포켓용 ‘일로청한회화’· 조선어·일본어· 중국어·러시아어로 실려 있다



4조와 5조는 부산을 포함한 세 곳에 개항장을 개설한다는 것인데 조선은 기왕의 부산 왜관을 위시해 다른 두 곳에 왜관을 더 설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할 경우 왜관의 운영은 기왕의 방식을 참조해서 하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일본은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세 곳의 개항장은 무역·통상 등에서 자율권을 갖는 자유무역항이라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화도 조약의 각 조항을 놓고 조선과 일본의 인식과 입장이 다르다 보니 그 실행방법을 놓고도 무수한 논란과 분쟁을 불러왔다.

하지만 당시의 대세는 근대였다.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입장과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입장이 부딪칠 때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입장이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강화도 조약 제4조와 제5조는 부산을 포함한 세 곳에 개항장을 개설한다는 것인데 조선은 전통적인 입장에 입각해 기왕의 부산 왜관을 위시해 다른 두 곳에 왜관을 더 설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기왕의 부산 왜관에는 세관도 없었고 관세도 없었다.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한 조선은 세 곳의 개항장에도 세관을 설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일본 상품은 무관세였다. 당시 일본은 세 곳의 개항장이 무역·통상 등에서 자율권을 갖는 자유무역항이라는 근대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3곳의 개항장에는 세관이 있어야 했고, 일본 상품이 이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세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을 악용해 관세 문제 자체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을 악용한 것은 그 외에도 또 있었다.

가령 “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해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해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는 7조의 규정을 근거로 일본은 조선 영해인 내양을 마음대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결과 조선 영해는 사실상 일본에 접수됐다. 이렇게 조선정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무력에 굴복해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근대세계에 무지해 수많은 독소조항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조선의 국익은 막대하게 손상됐다. 여기에 더해 쇄국과 개국으로 갈린 국내 여론이 극단적인 대결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은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13. 고종, 수신사 김기수를 파견하다  - “저들의 물정을 잘 탐지하도록 하라”

강화도조약을 양국의 관계 복원 정도로 여긴 개화파
… 조·일 조약 권유했던 淸은 일본의 3국 협력 제안에 반색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은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척사파의 표적이 됐다. 김홍집의 행차를 그린 그림.



신헌과 구로다가 강화도에서 협상할 때 조선 양반들이 보인 반응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조선 양반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 대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조선 양반들은 항복파와 항전파로 갈려 싸웠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항복파는 치욕보다 생존이 우선이라 주장하며 항복을 주장했다. 반면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항전파는 치욕스럽게 생존하느니 차라리 다 같이 죽자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결국 최명길의 항복 문서로 조선은 살아남았지만 항복파는 배신자로 또 굴종자로 수백 년 동안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반면 김상헌을 필두로 하는 항전파는 의리의 화신으로 또는 정의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

조선후기를 주도한 양반은 특히나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한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현실과 이념이 충돌할 때, 현실과 생존보다는 명분과 의리를 택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저 멀리 중국의 백이·숙제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에 이르기까지 사림파가 숭상하는 위인은 명분과 의리를 위해 죽은 유교 순교자들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김상헌 역시 유교 순교자로서 칭송을 받았고 유교 성인으로 숭배됐다.

그런 상황에서는 현실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었다. 서양의 중세 암흑기에 천주교가 모든 것을 지배했듯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유교 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조선후기에 유교 이념이 강화될수록 현실과 생존은 점점 더 도외시됐고, 국가와 사회는 더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후기는 가히 유교 순교자들의 전성시대라 할만 했다.

서양의 근대는 바로 절대화된 천주교로부터 벗어나 현실과 생존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19세기의 조선은 여전히 유교 이념이 절대적인 사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로다의 일본 함대가 강화도에 나타나 무력 위협을 가하자 절대다수의 조선 양반들이 제2의 김상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라고 불렀다. ‘위정척사파’라는 말 자체에 그들의 가치관이 명백하게 들어 있었다. ‘정도(正道)를 보위하고, 사도(邪道)를 배척하는 무리’란 뜻의 ‘위정척사파’는 유교 이념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면에서 그들은 서양 중세시대의 십자군과 같았다. 



제2의 김상헌 vs 제2의 최명길 



1. 고종의 특명을 받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기수. / 2.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찍은 사진.



위정척사파는 오직 유교 이념만 인정하고 그 이외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이단시하거나 야만시했다. 강화도조약 당시 위정척사파의 대표자는 최익현이었다. 그는 등에 도끼를 짊어지고 1876년 1월 23일(음력) 유인석 등 문하생 50여 명을 거느리고 광화문 앞으로 가서 상소문을 올렸다.


 이런 행동을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했다.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면 등에 짊어진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즉 지부상소란 목을 내 놓을 정도로 자기주장에 확신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유교 이념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익현은 지부상소문에서 ‘왜양일체(倭洋一體)’를 주장했다. 그것은 서양은 짐승 같은 오랑캐이고, 일본은 그런 서양의 앞잡이라는 뜻이었다. 서양이 짐승 같은 오랑캐인 이유는 삼강오륜과 조상을 무시하고 천주를 믿기 때문이었다.


이런 논리에서 최익현은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강화하면 그것은 곧 짐승 같은 서양 오랑캐에게 굴복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의 유교문명이 파탄 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고종이 앞장서서 주화매국(主和賣國)을 천명하고, 무력으로 일본을 격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최익현에게 현실적인 승패나 생존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교 이념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순교자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 승리하면 오랑캐를 물리친 영웅이 될 뿐이었다. 이런 면에서 최익현은 가히 제2의 김상헌이라 할 만 했다. 최익현은 절대다수의 양반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세기에도 현실주의자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박규수로 대표되는 일군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스스로를 개화파(開化派)라고 불렀다. ‘생각을 열고, 문명을 변화 시키려는 무리’란 뜻의 개화파는 유교 이념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현실과 생존을 중요시했다. 이런 면에서 박규수로 대표되는 개화파는 가히 제2의 최명길이라 할만 했다.

구로다의 일본 함대가 강화도에서 무력도발을 벌일 때 고종으로 하여금 전쟁보다는 강화를 택하게 한 사람들이 바로 박규수로 대표되는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남한산성에서 강화한 후 청나라와 잘 지내 오늘날까지 조선을 보존했다. 오늘날 일본과 강화하는 것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개화파의 주장은 양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단적으로 최익현의 지부상소 이후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문은 줄을 이었지만 일본과의 강화를 요구하는 상소문은 하나도 없었다.

당시 개화파는 최명길과 마찬가지로 배신자 또는 굴종자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그런 지탄을 받으면서도 개화파가 강화를 주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유교 이념보다는 나라의 현실과 백성의 생존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순교하겠다고 나서는 위정척사파 앞에 개화파의 주장은 왜소했다. 현실과 생존을 강조하는 개화파의 주장이 보다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유교 이념을 대체할 만한 미래 비전과 미래 이념이 동반돼야 했다.

하지만 당시 개화파는 그럴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주장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웠을 뿐 그 이상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과 강화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은 단지 눈앞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 또는 단지 생존하기 위한 편법이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 비난은 곧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도 좋다는 말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그 질문에 개화파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같은 한계 속에서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한 개화파는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위정척사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고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1876년 1월 30일의 이른바 ‘의정부육칙(六則)’이었다. 그것은 일본과의 강화는 곧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위정척사파의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고종과 개화파가 일본에 요구한 여섯 가지 원칙이었다. 



고종, 의정부 육칙으로 정면돌파 노려

제1칙은 상평전 사용을 불허한다는 원칙이고, 제2칙은 미곡의 교역을 불허한다는 원칙이며, 제3칙은 물물교환만 인정한다는 원칙인데, 조선의 농업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들이었다. 나머지는 아편 금지, 천주교 금지 및 서양과 교류 금지인데 이는 ‘왜양일체’를 주장하는 위정척사파에게 반박하기 위한 원칙들이었다.

고종과 개화파는 조선 건국 이래 일본과 교린을 해왔으므로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전혀 다른 국가라고 주장하며 육칙을 요구했다. 즉 고종과 개화파는 강화도 조약을 근대국가 일본과의 강화가 아니라 과거 일본과의 교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작성된 의정부 육칙은 신헌을 통해 미야모토 오카즈(宮本小一)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미야모토는 의정부 육칙을 강화회담의 의제로도 삼지 않았다. 대신 자기 선에서 아편과 천주교는 일본에서도 금지한다는 수계(手契)를 써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근대 세계에 편입된 상황이라 서양과 교류 금지는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과거의 일본을 요구하는 의정부 6칙은 구로다나 미야모토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이런 사실에서 당시 일본과의 강화를 주도한 개화파가 강화도 조약을 과거의 교린 정도로 이해했을 뿐 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또 왜 구로다 함대까지 동원했는지 그 속사정까지는 잘 몰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일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당시 개화파가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물론 일본의 국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조약을 추진한 일본의 본심은 미야모토 오카즈에 의해 드러났다.

당시 미야모토 오카즈는 외무성 대승으로 구로다를 수행해 강화도에 왔다.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는 미야모토에 대해 “나이는 40세가량 됐다. 사람이 깔끔하고 훤칠해 문자를 아는 듯했다. 일을 자세하고 합당하게 계획하고 주도면밀히 처리했다. 듣건대 그는 현재 매우 신임을 얻어 각국 관계의 사무는 반드시 이 사람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된다고 했다”는 인물평을 남겼다.


 이 인물평 그대로 강화도 조약 때 겉으로 드러난 일본의 대표자는 구로다와 이노우에였지만, 실제 막후 실무자는 미야모토였다.

2월 3일 오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구로다와 이노우에는 곧바로 떠났다. 그 대신 사후 처리를 위해 미야모토가 뒤에 남았다. 이런 사실에서도 미야모토가 강화도조약의 실세 실무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2월 3일 오후에 미야모토는 신헌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미야모토는 동북아 지도와 조선 지도를 꺼내놓고 포시에트(posyet)를 가리키면서 러시아의 남침 가능성을 언급했다. 또한 대만을 가리키면서 1874년 일본의 대만 침공 경위와 국경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물론 일본이 조선과 강화한 목적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때문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그것을 신헌이 고종에게 전해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당시 미야모토가 언급한 포시에트는 두만강 너머의 조선인 개척촌이었다. 1863년 전후로 두만강을 넘은 조선인들이 포시에트에 정착하면서 1876년 당시에는 상당한 마을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1860년에 러시아가 연해주를 영유하면서 포시에트를 비롯해 두만강 너머의 조선인 개척 촌은 모두 러시아 관할로 바뀌었다.

미야모토가 문제삼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포시에트 등 두만강 너머 조선인 개척촌이 확장되면서 두만강을 넘나드는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곧 두만강이 점차 국경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될 경우 러시아는 이것을 빌미로 두만강을 넘어 남하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 해군이 머물던 블라디보스톡은 겨울에 얼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두만강 남쪽에서 부동항을 획득하고자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유구(流寇)를 병탄하고 대만을 침공하는 등 확장일로였지만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반대였다. 메이지 일본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다가 1875년 5월 사할린은 러시아에 귀속시키는 대신 쿠릴 열도는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협정을 맺었다.

사실상 러시아의 위력에 눌려 사할린을 포기한 것이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사할린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부단히 남하하고자 했다. 그런 러시아의 제1차 목표는 당연히 사할린 남쪽의 홋카이도 아니면 두만강 남쪽의 조선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9일 후 日에 사신 파견

일본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대항해 홋카이도를 지켜야 했다. 아울러 두만강 남쪽의 조선도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만에 하나 조선이 러시아에 넘어간다면 일본 열도는 사할린·연해주 그리고 한반도에 의해 포위되는 형세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야모토가 신헌에게 포시에트와 대만 침공을 언급한 이유는 자칫 조선이 대만처럼 러시아에게 침공당할 우려가 있다는 경고임과 동시에 조선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려면 일본과 밀착해야 한다는 암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좋으나 싫으나 이제 조선은 국제 열강의 쟁탈전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했고, 강화도 조약은 과거의 교린과는 전혀 다른 국제관계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헌은 2월 6일 있었던 고종과의 면담에서 미야모토의 경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강화도조약을 과거 교린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신헌에게는 미야모토의 경고가 전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이나 일본의 대러시아 정책 등 동북아 정세에 무지한 결과였다.

고종이나 개화파 역시 신헌과 다르지 않았다. 만약 고종과 신헌 그리고 개화파가 러시아의 남하정책이나 일본의 대러시아 정책 등에 대해 깊이 이해했다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고민해야 마땅했다.


국제 열강의 쟁탈전 속에 휩쓸린 조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근대화는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군사력은 어떻게 강화해야 할지 등등에 대한 고민이 절실했다.

그렇게 하려면 일본을 넘어 서구 열강과의 교류와 군사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종과 개화파는 이미 ‘의정부 6칙’에서 천주교 금지, 서양과 교류 금지를 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넘어 서구열강과의 교류와 군사협력을 토론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헌이 고종과의 면담에서 미야모토의 경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 대신 신헌은 가능한 빨리 일본에 사신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과거의 교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신을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 당시 조선은 1811년(순조 11)에 통신사를 파견한 이후 65년 동안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일본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 제안에 따라 고종은 2월 22일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지 9일 만이었다. 사신 명칭은 수신사(修信使)였고, 대표자는 김기수였다. 수신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의를 닦는 사신’이었다. 수신사 이전의 사신은 ‘신의를 소통하는 사신’이라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였다.

그 통신사가 오랫동안 파견되지 않아 일본과 분란을 일으켰지만, 이제 강화도조약을 맺어 다시 신의를 닦게 됐다는 뜻을 드러내고자 수신사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도 고종과 개화파가 강화도조약을 과거 교린의 연장 내지 교린의 회복으로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游)]에 의하면 고종이 이토록 빨리 수신사 파견을 결정한 이유는

“저들이 비록 기뻐하면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 속마음은 끝내 우리에게 의심이 확 풀리지 않았을 것이니, 우리가 저들보다 먼저 사신을 보낸다면 저들은 반드시 망외(望外)의 기쁨으로 알 것이다. 우리가 은혜로써 회유(懷柔)하고, 의리로써 제재하며, 정도(正道)로써 굴복시키고 신의로써 화호(和好)를 맺는다면, 일본은 우리에게 순치(脣齒)가 되고 병한(屛翰)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고종은 일본을 조선의 순치와 병한으로 만들기 위해 수신사 파견을 결정했던 것이다. 순치는 입술과 이빨이라는 뜻이고, 병한은 울타리와 날개라는 뜻이다. 즉 순치와 병한은 일종의 보호막을 상징하는데, 고종은 일본을 이용해 서양 오랑캐를 막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이 일본을 조선의 보호막으로 만들기 위해 제시한 방안은 “은혜로써 회유하고 의리로써 제재하며, 정도로써 굴복시키고, 신의로써 화호를 맺는다”는 아주 이념적이고 명분론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방안들은 과거 일본과의 교린 관계 때 강조되던 방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고, 동북아의 국제정세 역시 과거의 동북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개화파는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과의 교린을 회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관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결국 고종과 개화파에게 강화도조약이란 파괴된 교린 관계의 복원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전통적인 사대교린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종과 개화파에게 수신사 파견 역시 교린 관계의 복원이라는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65년 만에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김기수는 주변 사람들에게 충고를 구했다. 사람들의 충고는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일본인을 믿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 경고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니 잘 사귀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예컨대 “왜인은 서양의 앞잡이고 귀신이며 적(賊)이면서 간첩입니다. 영남·호남지역의 목화, 관동·해서지역의 누에고치, 호서·호남지역의 쌀과 모시, 관동·관북지역의 금·은·동·철과 호피·웅담·녹용은 모두 왜인들이 크게 욕심 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엿처럼 달콤하고 용모는 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기쁜 기색이지만, 그 실정은 헤아릴 수 없으니 그대는 저들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는 의견은 근본적으로 일본인을 믿을 수 없다는 충고였다.

반면에 “저들도 자립한 나라이니 자유로이 행동할 것이고. 외국인의 견제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인의 풍속이 천하에 퍼질 적에 가는 곳마다 저절로 쏠리게 되는데도 저들은 홀로 물리치고 딱 거절했습니다. 한때 힘이 모자라 굴복해 그들 서양인의 웃음과 꾸짖는 소리를 흉내 내게 돼 겉으로는 하나의 서양인이지만 속은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리야마는 우리와 말할 적에 심히 그들의 의관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한 번은 모리야마가 사람을 물리치고 그 세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내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귀국과 중국이 이와 같이만 된다면(3국 동맹을 이름) 어찌 구라파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했는데 이 사람은 함께 서양을 방어할 술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가 이번에 가거든 반드시 그 실정을 타진하고 그와 친교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는 의견은 일본과의 협력을 위해 잘 사귀라는 충고였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자 김기수는 어느 한쪽의 충고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김기수는 수신사의 임무를 “수신이란 구호(舊好)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하며, 사명(辭命)으로써 인도하고, 위의(威儀)로써 이뤄 과격하지도 맹종하지도 않으며, 태도를 장중근신(莊重謹愼)하게 해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해야 거의 적당하게 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김기수 역시 수신사의 역할을 과거 통신사의 연장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근대 문물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1. 김기수가 일본과 수교 후 첫 번째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쓴 [일동기유] 원본. / 2. 구한말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이홍장 



4월 4일 오후 2시쯤, 김기수는 경복궁 강녕전으로 갔다. 부산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고종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위해서였다. 고종은 김기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저들의 물정을 탐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반드시 잘 탐지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기수는 “삼가 탐지할 길을 도모하겠습니다만 평소 잘 알지 못하는 곳이라 잘 탐지할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무릇 듣는 일마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해 오라”고 다시 당부했다. 고종은 수신사 김기수를 통해 일본에 환심을 사는 한편 일본의 상황도 자세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26일 부산 동래에 도착한 김기수는 3일 후인 29일에 일본에서 제공한 화륜선 황룡환(黃龍丸)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황룡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화륜선은 메이지 천황의 전용선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65년 만에 파견되는 수신사를 위해 크게 배려한 것이었다. 김기수는 두 달 가까이 일본의 근대 문물을 보고 들으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기수는 그런 근대 문물을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봤다. 김기수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 문명을 자랑스러워했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런 김기수의 눈에 메이지 시대의 근대 문명이 제대로 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수신사의 임무를 과거 통신사의 연장으로 생각한 김기수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5월 27일 도쿄를 떠난 김기수는 윤5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고, 6월 1일 오후 6시쯤 경복궁 자미당에서 고종에게 복명했다. 그때 고종은 일본과 근대문명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김기수는 그런 궁금증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일본 사행은 조선시대 통신사의 일본 사행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수신사 김기수가 돌아온 후 청나라에 그 결과를 보고한 것 역시 조선시대의 사대교린 전통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고종은 청나라에 보고하는 기회를 이용해 이홍장에게도 밀서를 보냈다. 그 밀서에서 고종은 일본과의 강화 교섭에서 겪는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일본은 김기수의 사행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미야모토 고이치를 1876년 6월 조선에 파견했다. 한 달 정도 한양에 머물던 미야모토는 영의정 이최응에게 러시아의 남하 가능성을 재차 경고하면서 일본 상인들이 육로를 통해 청나라와 교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첫째는 만주 지역에 일본 상권을 확보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그것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고종에게는 큰 고민이었다.


거절할 경우 일본의 반발이 염려됐고 수락할 경우 청나라의 반발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이홍장에게 밀서를 보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문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이홍장의 생각은 ‘논일본방교(論日本邦交)’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876년 9월 27일자에 작성된 이 글에 의하면 이홍장은 위의 문제를 놓고 주청공사 모리아리노리(森有禮)와 논의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이 러시아 기밀문서를 획득했는데 그 문서에 의하면 유사시에 러시아는 시모노세키를 점령해 일본 열도를 양분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 전략을 현실화하려면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부동항을 확보해야 가능했다. 그것은 곧 러시아의 동북아 장기 전략은 조선과 일본 전체를 확보하는데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조선이 러시아 수중에 들어가고, 그때 러시아가 사할린 방면에서 규슈를 공격하면서 조선 방면에서 시모노세키를 공격한다면 일본 열도는 각개 격파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조선·청나라·일본 3국의 협력을 적극 추진하게 됐다. 



생소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조선

그 일환으로 1876년 9월 23일에 주청공사 모리가 이홍장을 방문해 3국 협력을 타진하게 됐던 것이다. 그 당시 이홍장은 고종의 밀서를 통해 강화도조약 체결과 수신사 파견 그리고 미야모토 답방 등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비록 이홍장의 권고에 의해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이홍장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이홍장은 어떻게 하면 일본의 영향력을 줄일까 고민하던 차에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이홍장은 모리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면서 3국이 협력하려면 일본이 조선을 너무 궁지로 몰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물론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발언이었다. 이홍장의 충고에 의해 일본 상인들이 육로를 통해 청나라와 교역하겠다는 요구는 없어졌다.

하지만 고종 앞에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3국 협력이라는 큰 도전이었다. 사대교린이 국제관계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고종에게 3국 협력이란 생소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3국 협력은 고종도 모르는 사이에 이홍장과 모리 사이에 밀약됐을 뿐만 아니라 순교 정신이 넘치는 조선 양반들의 동의를 받아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난해한 도전이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14. 이토 히로부미, 류큐 왕국을 병탄(倂呑)하다 

- “명실상부한 우리 영토이니 내정간섭 말라”


日 규슈 남쪽 섬들로 구성된 왕국, 해상교통의 요지

…淸, 뒤늦게 상황 반전시키려 안간힘 썼으나 불가항력 




▎류큐 왕국은 12세기부터 몇 개의 집단이 세력을 다투다가 1429년 등장한 통일왕국으로, 오키나와 중심지인 나하(那覇)의 동부에 있는 슈리(首里)를 도읍으로 삼았다.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류큐 왕국의 슈리성


1877년(고종 14, 광서 3, 메이지 10) 음력 7월 하여장(何如璋)은 이홍장의 추천으로 초대 주일공사가 됐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북경에서 필요한 절차를 마치고 하여장이 도쿄에 도착한 때는 음력 10월이었다.

임무 수행에 앞서 하여장은 메이지 천황을 예방하고 광서 황제의 국서를 전달했다. “대청국 대황제가 대일본국 대황제에게”로 시작하는 광서 황제의 국서는 특기할 만했다. 고대로부터 중국 황제가 공식적인 문서에서 일본 천황을 ‘대일본국 대황제’라 지칭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일본에 상주사절을 보낸 것 역시 처음이었다. 그와 같은 일의 배후에 이홍장이 있었다. 이홍장은 청나라가 서구열강에 대항하자면 일본의 협력이 필수적이라 판단해 1871년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했고, 1877년에는 초대 주일공사로 하여장을 파견했던 것이다.

하여장의 공식 임무는 청나라와 일본의 협력 증진이었다. 하지만 내막은 그렇지 못했다. 동북아 ‘대표 국가’인 청나라와 일본이 협력해 서구 열강에 대항해야 한다는 명분에 앞서 양국의 국익이 심각하게 충돌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은 류큐(琉球)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류큐는 일본 규슈 남쪽에서 대만 북부 사이에 죽 늘어선 섬들로 구성된 왕국이었다. 동남아에서 중국의 상해, 일본의 나가사키 또는 조선의 부산 등으로 가려면 류큐 열도를 통과해야 했고, 반대로 동북아에서 동남아로 가려 해도 류큐 열도를 거쳐야 했다.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류큐 왕국은 이른 시기부터 동북아와 동남아의 국제교류를 중개해 부를 쌓았다. 그 같은 국제교류를 보장받기 위해 류큐 국왕은 명나라 때부터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왔다. 조선에도 사절을 파견해 교린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609년(광해군 1) 일본의 사쓰마(薩摩) 번주가 류큐 왕국을 침공해 국왕과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후 류큐 국왕은 즉위할 때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으면서 동시에 사쓰마 번주의 허가도 받았는데, 이를 양속(兩屬)관계라고 했다.

다만 사쓰마 번에서는 혹시라도 이런 사실을 청나라에서 알고 항의할까 두려워 양속관계를 비밀로 했다. 당시만 해도 사쓰마 번은 청나라의 힘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은 일본과 미·일(美日)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류큐로 가서 미·류(美琉)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류큐는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과도 화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국으로 행세했다.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에 대해서는 속국이고, 또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독립국인 류큐의 생존은 아슬아슬했다. 사쓰마 번이 류큐를 병탄하지 못한 이유는 청나라 때문이었는데, 그 청나라가 아편전쟁 이후 급속도로 약화됐다. 그 틈을 타고 메이지 일본은 류큐 왕국을 병탄하려 들었다. 



사무라이의 퇴장과 함께 가속도 내는 서구 근대화



▎19세기까지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류큐 왕국의 전통 춤. 생선 광주리와 노를 이용해 오키나와 어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1872년 메이지 일본은 기왕에 류큐 왕국이 서양 각국과 체결한 조약을 외무성이 관할하겠다고 공포한 후 류큐에 외무성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렇게 류큐 왕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탈취됐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875년 메이지 일본은 류큐왕국으로 하여금 청나라에 조공을 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일본 연호와 일본 법률을 시행하라 요구했다. 외교권에 이어 국왕 통치권까지 탈취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류큐왕국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항의해 류큐 곳곳에서 반일 독립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힘입어 류큐의 지도자들은 메이지 일본에 청원해 청나라에 조공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조공을 계속하는 한 청나라에서 류큐의 독립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류큐를 병탄하려는 메이지 일본에서 그 청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자 류큐 사람들은 1877년 초 청나라 복건성으로 밀항해 구원을 요청했다. 이홍장은 초대 주일공사로 부임하는 하여장으로 하여금 사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세우게 했다.

도쿄의 하여장은 은밀하게 류큐 사람들을 만나 관련 사실을 조사했다. 아울러 일본의 내부 사정과 군사력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일본의 군사력은 예상 외로 허약한 듯이 보였다. 당시 일본 육군은 3만 명, 해군은 4000명으로 조사됐다. 근대 군함은 15척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 일본 내부는 심각하게 균열돼 있었다.

하여장이 도쿄에 부임하던 해인 1877년에 일본은 서남전쟁이라고 하는 내전을 1년 가까이 겪었다. 지난 1873년의 정한론에서 패배해 낙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사무라이 2만여 명을 동원해 1877년 봄에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고시마(鹿兒島)에서 봉기한 사이고는 규수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사이고는 6만여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결국은 패배해 1877년 가을 자살했다.

사이고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가고시마는 도쿄에서 봤을 때 서남쪽에 위치했다. 그래서 사이고의 군사반란은 서남전쟁이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일본은 사이고의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년 국가예산에 해당하는 돈을 써야만 했다.


그 결과 열악하던 국가재정은 더더욱 열악해졌고, 정부 부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여장이 도쿄에 부임해 조사한 일본은 서남전쟁의 후유증, 사무라이들의 불만 그리고 열악한 국가재정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이고의 군사반란은 메이지 일본에 유리한 면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구 근대화 추진에 가장 큰 걸림돌이던 사무라이들이 퇴장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본래 메이지 일본은 사무라이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겠다는 존왕양이 운동 결과 탄생했다. 존왕양이의 이념으로만 본다면 서구 근대문명은 사무라이 전통과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타도 대상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주역들은 서구 근대문명의 우수성을 확인하면서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진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이고와 사무라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서남전쟁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서남전쟁으로 사무라이들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메이지 일본의 서구 근대화는 더욱 가속도를 내게 됐다.

사이고의 군사반란은 메이지 주역들의 세대교체를 불러오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합작으로 가능했다. 그래서 유신 3걸로 불리는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그리고 조슈 번의 기도다카요시(木戶孝允)가 메이지 유신 직후의 실세 중 실세였다. 



류큐 문제로 의견차 드러낸 이홍장과 하여장 



▎1682년 류큐의 소년 기사(棋士) 하마히카(濱比賀)에게 3단을 인허하는 도사쿠의 국제 면장(免狀). 당시만 해도 류큐는 일본에 속하지 않은 독립국가였다. / 사진:일본기원


하지만 사이고의 군사반란으로 사이고는 자살했고, 오쿠보는 사이고 자살 직후 암살됐으며, 기도는 사이고의 군사반란 중 병사했다. 이렇게 사라진 유신 3걸의 자리는 다음 세대 인물들이 차지했다.

예컨대 조슈 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리고 사쓰마 번의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가 대표적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고의 군사반란을 진압하면서 차세대 육군지도자로 떠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를 뒤이어 내무경이 되면서 차세대 정치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대만 침공군의 총사령관이던 사이고 쓰구미치는 차세대 해군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는 했지만 아직 이들 3명의 영향력은 과거 유신 3걸에는 미치지 못했다.

1878년(고종 15, 광서 4, 메이지 11) 음력 4월 하여장은 그동안 조사한 결과와 더불어 대책을 정리해 총리아문과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서에서 하여장은 류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 4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류큐에 즉각적으로 군함을 파견하자는 제안이었다. 류큐의 독립과 청나라의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장 무력을 사용하자는 의미였다. 하여장의 제안대로 군함을 파견할 경우, 일본이 류큐에서 물러나면 문제가 없지만 맞대응으로 군함을 파견할 경우 전쟁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군함을 파견하려면 당장 전쟁을 각오해야 했고, 당장 전쟁을 각오하려면 승산이 있어야 했다. 하여장은 현재 일본의 정부 재정과 군사력이 약화됐고, 내부 역시 분열돼 있으므로 승산이 충분하다는 판단에서 즉각적인 군함 파견을 제안했다.

둘째는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류큐의 독립을 보증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할 경우 일본이 반발해 항의하거나 아니면 굴복해 물러설 것으로 예상됐다.

굴복해 물러설 경우 문제가 없지만, 만에 하나 일본이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반발할 경우 전쟁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이 제안은 즉각적인 무력 개입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무력 개입까지 염두에 두고 류큐의 독립을 보증하자는 제안이었다.

셋째는 말로 항의하자는 제안이었다. 하여장이 제시한 첫째 대책과 둘째 대책은 근본적으로 전쟁을 각오한 대책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첫째 대책은 즉각적인 전쟁을 각오해야 했고, 둘째 대책은 장기적인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이에 비해 셋째 대책은 전쟁 가능성을 배제한 대책이었다. 전쟁을 배제하면 결국 남는 것은 말이었다. 하여장은 한 번 말해서 들어주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말로 항의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을 세계에 폭로하자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류큐를 일본에 넘겨주는 대신 다른 곳의 땅을 받거나 배상금을 받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할 경우, 청나라는 얼마 정도 돈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든 조공 국가들로부터 심각한 불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조공 국가인 류큐를 넘겨주고 돈을 받자는 것은 결국 체면이나 명분 대신 현실적인 실리를 택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대책 중에서 하여장은 첫째 대책을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반면, 이홍장은 첫째 대책을 아주 비현실적이라 판단했다. 당시 청나라의 상황으로는 일본과 전쟁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일본과 전쟁할 경우, 그것은 일본을 끌어들여 서구열강에 대항하겠다는 이홍장 자신의 구상이 깨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큰 틀에서 봤을 때, 청나라에도 불리하고 일본에도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혹시라도 일본과 전쟁을 벌였을 때,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이 침략한다면 청나라는 양쪽에서 협공 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하여장의 네 가지 대책 중에서 말로 항의하자는 셋째 대책을 채택했다. 이치를 들어 말로 잘 타이르면 일본이 이해하고 수용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이홍장은 넷째 대책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
청나라가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해도, 조공 국가를 넘겨주는 대신 돈 몇 푼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이홍장은 대국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서구열강은 수수방관, 청나라는 속수무책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09년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다



1878년 음력 5월 이홍장은 하여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답장에서 이홍장은 춘추시대의 ‘위인멸형(衛人滅邢)’과 ‘거인멸증’ 두 가지 역사를 거론했다.

‘위인멸형’은 위가 형을 병탄했을 때 강대국 제(齊)가 무력 보복을 하지 않았던 역사이며, ‘거인멸증’ 역시 거가 증을 병탄했을 때 강대국 진(晉)이 무력 보복을 하지 않았던 역사이다. 춘추 5패로 불리던 제와 진은 마음만 먹으면 무력 보복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를 이홍장은 지세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제나 진은 형이나 증을 살리기 위해 무력 보복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득이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요컨대 이홍장은 현재 청나라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진 류큐를 살리기 위해 전쟁할 수는 없다고 답장한 셈이었다.

다만 이홍장은 류큐 병탄 다음에 벌어질 사태를 우려했다. 류큐가 일본에 병탄되는데도 청나라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더 큰 욕심을 부릴 가능성이 있었다. 예컨대 류큐 다음에 대만과 조선, 더 나아가서는 청나라 본토 자체를 노릴 수도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홍장은 대만 방어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일본에 말로 항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홍장은 우선 대만에 군함을 보내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은 혹시라도 청나라가 무력 보복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 할 가능성이 있고, 설사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만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같은 조치 후 일본 정부를 향해 말로 항의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홍장은 하여장에게 보낸 답장에서 항의하는 방법 두 가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첫째는 하여장이 직접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방법이었다. 둘째는 류큐와 화친조약을 맺은 미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서구열강으로 하여금 일본 정부에 항의하도록 공작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에 따라 하여장은 자신이 직접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1609년부터 류큐는 양속관계였고, 1874년 대만 침공 이후부터는 명실상부 일본 영토라는 논리로 맞섰다. 즉 류큐는 일본 내부 문제이기에 청나라의 항의는 곧 내정간섭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하여장이 말만 가지고 하는 항의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서구열강으로 하여금 항의하도록 만들려는 공작 역시 효과가 없었다. 미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서구열강은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에 괜히 말려들려 하지 않았다. 서구열강은 모두 수수방관이었다.

설상가상 일본 정부는 청나라에서 류큐 문제를 쟁점화하자 더 강력하게 나왔다. 아예 류큐 왕국을 병탄하고 그곳에 현(縣)을 설치했던 것이다. 현을 설치한다는 것은 류큐 왕국을 일본의 내지 영토로 편입함으로써 청나라의 항의를 내정간섭으로 공식화하겠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더 이상 항의하면 내정간섭으로 간주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류규 왕국을 병탄하고 현을 설치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1878년 양력 5월 14일에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자 다음날 내무경에 임명됐다. 이토는 류큐 문제는 일본 내부 문제라 주장하며 내무경인 자신이 앞장서서 류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토는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의 항의 배후에 류큐 사람들의 독립 청원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울러 청나라가 무력 조치는 취하지 않고 말로만 항의하는 것은 전쟁 의사가 없다는 뜻임도 잘 알았다. 그래서 일본이 류큐 왕국을 병탄하고 현을 설치하더라도 청나라가 무력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홍장, 미국 통해서 ‘대역전’ 노렸으나 



▎미국 제18대 대통령(재위: 1869~1877) 율리시스 그랜트. 남북전쟁 승리의 상징적 인물로 공화당 주도로 남부 재건에 앞장섰다.



이토는 내무 대서기관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에게 명령해 류큐 병탄 대책을 강구하게 했다. 마쓰다는 류큐를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고, 번주는 도쿄로 옮겨 살게 하자는 초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곧바로 그렇게 할 경우, 류큐 사람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이 점을 우려한 마쓰다는 류큐 국왕이 스스로 외교권과 사법권을 일본 정부에 귀속시키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류큐의 외교권과 사법권은 이미 외무성 출장소와 내무성 출장소에서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를 류큐 국왕으로 하여금 공포하게 만들자는 의미였다.

 만약 제안대로 각서를 제출하면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류큐를 현으로 편입하고, 제출하지 않으면 또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무력 점령해 현으로 편입하자는 것이 마쓰다의 구상이었다.

1878년 양력 12월 27일 마쓰다 초안은 각의(閣議)에 붙여졌는데 논의 결과 류큐에 마쓰다를 파견해 국왕으로 하여금 일주일 이내에 외교권과 사법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제출하게 하고, 만약 거절한다면 무력을 써서 점령하기로 했다.

마쓰다는 1879년(고종 16, 광서 5, 메이지 12) 양력 1월 8일 요코하마를 출항해 25일 류큐에 도착해 각의 결정을 전달했다. 하지만 류큐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마쓰다는 “본관은 곧바로 귀경해 복명할 것이니, 마땅히 처분을 기다리시오”라고 최후통첩을 보내고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결국 1879년 양력 3월 11일 메이지 천황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다는 칙명을 내렸다. 다음날 마쓰다는 경찰 160명, 군사 400명을 인솔하고 요코하마를 출항해 25일 류큐에 도착했다.


뒤이어 양력 4월 4일에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다는 명령서가 류큐 곳곳에 공포됐다. 이로써 류큐 왕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탄(倂呑)됐다.

결과적으로 말로써 류큐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홍장의 시도는 이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홍장과 이토의 대결에서 이토가 승리했던 것이다. 이렇게 류큐 병탄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을 대표해 충돌했던 이홍장과 이토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결을 지속해나갔다.

그런데 그 즈음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그랜트가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랜트 전 대통령은 미국의 남북전쟁 때 북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돼 1869년부터 1877년까지 8년 간 재임했다.

1879년 당시에도 차기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랜트 전 대통령은 일본의 류큐 병탄이 청·일 양국의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을까 우려해 현지 조사차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이홍장은 1879년 음력 윤3월 21일에 그랜트의 방문소식을 들었다. 그때 이홍장은 그랜트를 이용해 이미 결판난 류큐 병탄 문제를 역전시키고자 했다. 당시 이홍장은 “일본 사람들은 미국을 마치 호부(護符)처럼 받든다”고 평가했다.

그랜트는 1879년 음력 4월 8일 천진에 도착했고 이후 북경에 가서 공친왕을 면담했다. 뒤이어 음력 4월 23일에 그랜트는 천진 북양아문에서 이홍장과 회담했다.


이홍장과 그랜트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 당시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미국의 영향력을 이홍장이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홍장과 그랜트의 대화 중 핵심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랜트: “이 일은 내가 일본에 가서 주일 미국공사에게 물어보고 자료를 조사한 후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홍장: “만약 주일 미국공사가 말하기를 ‘일본이 이미 류큐를 병탄했으니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라고 한다면 귀하는 버려두고 논의하지 않을 것입니까?”

그랜트: “주일 미국공사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일 미국공사는 내가 대통령 재임 시 일본에 공사로 파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명정대하고 명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주일 미국공사로 있으니 류큐 사태와 관련된 문제는 그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설령 끝내 주일 미국공사에게 묻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직접 일본 천황과 대신에게 묻고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부(副)영사 페식(W.N.Pethic): “주청 미국공사가 함께 일본에 가서 주일 미국공사를 도울 것입니다.” 



"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홍장: 중·미 조약 제1조는 ‘만약 타국이 어떤 불공정하고 경멸하는 일이 있으면, 상호 간에 알린 후 반드시 서로 도와 잘 조치한다’ 등으로 말했데 지금 일본의 류큐 병탄은 진실로 청나라에 대해 불공정하고 경멸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랜트: “(영어 조약문을 한 번 자세히 본 후) 진실로 불공정하고 경멸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미국이 조정하는 것이 또한 조약의 뜻과 서로 일치합니다.”

이홍장: “(중국과 일본의 수호조규 제1관 ‘양국의 소속 방토는 각각 예로써 대우하여 침월함이 없이 해 안전하게 한다’는 등의 구절을 가르쳤다.)”

그랜트: (영어 조약문을 한 번 자세히 봤다.)

부영사 페식: “애석합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홍장: “방은 속국이고, 토는 내지이니, 방이 곧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랜트: “류큐는 스스로 한 나라인데, 일본이 마음대로 병탄해 스스로 팽창하고자 하니, 중국이 다투는 것은 몹시 타당합니다. 또한 앞으로는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운다면 좋을 듯합니다.”

이홍장: “귀하의 소견이 아주 대단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홍장 [여미국격전총통오담절략(與美國格前總統晤談節略)], 광서 5년(1879) 4월 23일]

위에 따르면 그랜트는 이홍장의 논리에 크게 공감을 표시했다. 이에 따라 그랜트는 도일한 후 청나라의 입장에서 류큐 문제를 거론하게 됐다. 이는 동북아 문제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그것도 청나라의 입장에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미국을 이홍장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고, 그 결과 미국의 동북아 개입은 더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위의 대화에서 조선과 관련된 내용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부영사 페식의 “애석합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라는 발언이었다. 청·일수호조규에서 ‘소속 방토’라고만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고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명기했다면 일본의 류큐 병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소속 방토’라고 애매하게 표현하지 말고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명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였다. 그랜트 역시 ‘앞으로는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운다면 좋을 듯합니다’라고 동조했다. 이에 대해 이홍장은 ‘귀하의 소견이 아주 대단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결국 이홍장은 류큐가 독립을 유지한다면, 서구열강과 화친조약을 맺을 때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울’ 작정이었고, 장차 조선이 서구열강과 화친조약을 맺을 때도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류큐 병탄을 거치면서 동북아 문제는 이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변수에 더해 ‘청나라의 속국에 관한 별도의 조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해 더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그것은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열강의 목소리는 더 커지는 반면 속국의 목소리는 더 작아진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속국은 마치 류큐 왕국처럼 열강의 흥정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15.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의 류큐 분할 제안 - “일본은 중국을 과소평가하지 마시오” 


1894~95년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파리로 돌아간 1899년 찍어낸 그림엽서. 피 묻은 칼을 손에 든 일본이 지구를 밟고 서 있다 ​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은 천진에서 이홍장과 회담 후 미국 군함을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향했다. 그랜트의 방일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정부는 거국적인 환영행사를 준비했다.

그랜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과 유럽으로 갔었다. 그때 이와쿠라는 그랜트 대통령으로부터 큰 환대와 함께 물심양면 도움을 받았다. 지난날의 은혜를 갚기 위해, 또 신흥 강대국 미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메이지 천황은 고위관료를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나가사키에 파견했다.

비록 그랜트가 현직 대통령이 아님에도 그에 준하는 국빈으로 예우한 것이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그랜트는 접반사로부터 메이지의 환영 서한을 받았고,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도 받았다.

그랜트는 퇴임 후 가족들과 함께 세계 여행 중이었다. 며칠 동안 가족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보낸 그랜트는 도쿄로 가서 메이지를 예방했다. 그랜트의 부인과 자녀도 함께했다. 메이지 역시 황후를 대동하고 그랜트 가족을 만났다. 메이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그랜트는 류큐 문제를 중재하겠다고 이홍장에게 약속하고 일본으로 갔다. 하지만 메이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기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그랜트와 메이지의 처음 만남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랜트의 수행원 중 핵심 참모는 영(J.R.Young)이라는 인물이었다. 영은 천진에서 그랜트가 이홍장과 회담할 때도 배석한 참모였다. 이를 간파한 이홍장은 영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획득했다. 일본에 간 영은 그랜트의 일정은 물론 그랜트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도 자세하게 기록해 이홍장에게 알렸다.

일본에 도착한 그랜트와 영은 최고 실세가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랜트와 영은 일본에 손님으로 온 마당에 일본정부에서 불편해하는 류큐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그랜트는 영으로 하여금 이토 히로부미에게 류큐 문제를 넌지시 언급하게 했다.

이후 그랜트는 가족과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유명한 관광지 닛코(日光)로 떠났다. 그곳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위패를 모신 도쇼궁(東照宮)이 있었다.

영의 언질을 받은 이토는 어떤 상황인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랜트는 그냥 여행차 일본에 들른 것이 아니었다. 이홍장의 부탁을 받고 류큐 문제를 중재하겠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이홍장이 류큐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했을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류큐는 500년 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친 속국인데 일본이 갑자기 무력으로 병탄(竝呑)했다고 주장했을 것이 뻔했다. 일방적으로 이홍장의 말만 듣고 온 그랜트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 역시 확실했다.



이토 히로부미 “그 문제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이종학씨가 도쿄대에서 발견한 ‘한국사진첩’에 있는 고종황제가 여행할 때 이용했던 특별 열차의 객실 내부


이토는 담판에 앞서 우선 그랜트의 선입견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토는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역사 자료를 정리해 하나의 책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준비한 류큐 책자는 이토가 준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 무기를 가지고 이토는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등과 함께 그랜트를 뒤따라 잇코로 갔다. 류큐 문제를 담판하기 위해서였다.

담판에 앞서 이토는 자신이 정리한 류큐 책자를 영에게 주고 일독(一讀)을 권했다. 읽은 후에는 그랜트에게 전달해줄 것도 부탁했다. 이렇게 사전 준비를 마친 이토는 1879년 6월 6일(음력, 이하 동일) 정오에 그랜트와 만나 류큐 문제를 논의했다.

저녁 때까지 지속된 논의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그 대화를 영이 기록해 이홍장에게 알렸다. 그중에 중요한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았다.

그랜트: 일전에 중국에서 공친왕과 이홍장이 나에게 류큐 문제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가 중국 쪽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본이 류큐를 처리한 것이 아주 불공정했습니다. 나는 별다른 의견은 없지만 혹시라도 아시아 각국이 실화(失和)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다년간 화친했으니 다시 실화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류큐에 관한 일은 내가 이미 주일 미국 공사와 논의했고 그와 의견이 같습니다(이어서 그랜트 전 대통령은 류큐가 중국 속국이라는 이홍장과 공친왕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중국은 일본의 이번 처사가 중국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국에서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쟁 피해가 가장 끔찍하고,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 역시 원한을 품습니다. 일본이 강함을 믿고 있지만, 중국은 아주 평화롭습니다. 현재 일본의 군사력이 중국보다 강한 것 같지만, 중국의 인구와 물산은 천하제일입니다. 만약 중국이 제대로 자강(自强)한다면 인재를 다 쓰지 못 할 것이고 물산도 다 쓰지 못 할 것입니다. 나는 일본이 중국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이 일은 관계하는 것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도 만약 누군가가 중간에서 사주해 일본과 중국으로 하여금 실화하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간사한 술책일 것입니다. 일본에 현재 이런 외국인이 있는데, 그 마음과 행동이 진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분하고 원통하게 합니다. 비유하자면 중국이 아편의 피해를 입은 것이 모두 이런 사람들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같은 황인종이고 근본 정의가 한 집안 같습니다. 만약 양국 사이에 틈이 생기면 분명 구경꾼들이 선동하고 사주하고자 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일본도 알 것이라 봅니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영국 공사가 견제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북경에서 공친왕을 만나거나 아니면 천진에서 이홍장을 만나 타협해야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할 수밖에 없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일본은 중국과 실화할 뜻이 없는데, 일이 이렇게 돼 아주 난처합니다. 류큐 문제는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명령이 이미 선포돼 취소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중국을 설득할 무슨 묘안이 있으신지요? 있으시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랜트: 중일 양국이 어떻게든 서로 양보해서 타협안을 도출해야 합니다. 내가 미리 말하기는 불편합니다. 타협안을 내고 별도로 조약을 맺어 중국의 중요한 문호(門戶)인 대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 일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토: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낱낱이 집정대신에게 보고하고 다시 대통령께 알려드리겠습니다.[역미국부장양월한내함(譯美國副將楊越翰來函) 1879년 6월 30일 도착]


위 대화를 보면 당시 그랜트는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그랜트가 공친왕과 이홍장의 말만 들었을 때는 류큐가 청나라의 완벽한 속국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에 와서 들은 애기는 또 달랐다. 그뿐만 아니라 류큐는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왕국이기도 했다. 류큐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랜트와 만난 주일 미국 공사는 그랜트의 일방적인 친중 태도에 우려를 표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일 미국 공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랜트는 동북아의 복잡다단한 국제정세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이홍장과 공친왕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으로 비쳤을 듯하다.



아무도 만족 못 한 삼분지계(三分之計)


류큐 왕조의 궁전인 슈리(首理)성의 야경. / 사진:오키나와 관광컨벤션뷰로

만약 그랜트가 이홍장의 말만 신뢰하고 일본에 류큐 처분을 취소하라고 요구할 경우, 일본이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럴 경우 청나라와의 우호는 증진될지 모르지만 일본과의 우호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 역시 분명했다. 노련한 외교관의 입장에서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주일 미국 공사는 그랜트에게 중립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조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어느 한쪽만의 요구가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류큐 모두의 요구를 수용해 절충하는 방안이었다.

그것은 곧 류큐를 세 부분으로 분할해 대만 가까운 곳은 청나라가 갖고, 규슈 가까운 곳은 일본이 가지며, 중간 부분은 류큐 국왕이 갖는 것이었다. 즉 류큐를 삼분하는 분할 방안이 바로 주일 미국 공사와 그랜트가 생각하는 ‘양보를 통한 타협안’이었다.

그랜트가 이토와의 회담에서 “류큐에 관한 일은 내가 이미 주일 미국 공사와 논의했고 그와 의견이 같습니다”라고 한 발언은 바로 류큐 삼분 방안을 지칭했다. 그 같은 분할 방안이 성사되려면 일단 청나라와 일본이 수용해야 가능했다.

그래서 그랜트는 이토와의 회담에서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먼저 제시했던 것이다. 이어서 그랜트는 이홍장에게도 편지를 써서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랜트의 편지는 6월 14일 도쿄에서 쓰였다. 이토와 회담하고 며칠 지나서였다. 이홍장은 그랜트의 편지를 7월 5일 받았다. 이로 보면 당시 일본 도쿄에서 천진까지 우편물이 도착하는 데 대략 20일 정도 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랜트는 편지에서 이토와의 회담을 소개한 후 ‘양보를 통합 타협안’을 권유했다. 물론 ‘양보를 통한 타협안’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 언급만으로도 류큐 전체를 원래대로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현 상황에서는 류큐를 분할하는 것이 최선임을 암시했다.

이홍장은 일본 측의 공작에 그랜트가 생각을 바꿨음을 눈치챘다. 이홍장은 편지를 받은 다음날 그랜트에게 답장을 썼다. 그 답장에서 이홍장은 중일 양국의 화친을 위해 노력하는 그랜트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양보를 통한 타협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홍장은 지난번 일본의 대만 침공 때도 중국이 양보했는데, 이번에 또 양보한다면 “국가체제와 성명(聲名)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고 했다. 이 언급에 이홍장의 고민이 압축돼 있었다.

류큐를 세 부분으로 분할해 중국·일본 그리고 류큐가 각각 하나씩 갖자는 방안은 언뜻 생각하면 관련 3국의 이해관계를 잘 절충한 방안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3국 모두가 불만을 가질 방안이기도 했다.

국권을 강탈 당한 류큐 입장에서는 또 다시 자신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국토가 삼분되기에 당연히 불만이었다. 일본은 이미 병탄한 류큐를 3분의 2나 다시 내놓아야만 하므로 불만이었다. 청나라 역시 불만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일본이 전부 병탄한 류큐를 3분의 1이라도 받아 낸다면 청나라에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랜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정도 양보라도 일본에서 받아내기 위해 그랜트는 노력했고 그래서 이홍장이 순순히 수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그렇지 않았다. 청나라의 ‘국가체제와 성명’ 때문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수많은 조공국가를 거느린 국가였다. 류큐는 수많은 조공국가 중의 하나였다. 이홍장은 그 같은 청나라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분투 중이었다.

일본에 류큐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한 이유도 류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국가체제가 유지되기 유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조공국가의 이탈을 막아야 했다.



“이분(二分)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1896년 영국 방문 중 솔즈베리 총리(왼쪽)와 함께한 73세의 이홍장. 그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외교사절로 서구열강을 순방했다

그런데 만약 청나라가 일본과 타협해 류큐의 3분의 1 또는 절반 정도를 갖는다면 당장은 이익으로 보일 수 있지만 국가체제 전체로 봤을 때 장기적으로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다른 조공국가들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명실상부하게 조공국가를 거느리려면, 조공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줘야 했다. 그런데 구해주기는커녕 그 조공국가를 분할해서 병탄해버린다면 나머지 조공국가 모두가 청나라를 의심하며 이탈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곧 류큐의 3분의 1을 얻는 대신 나머지 조공국가 전부의 신뢰를 잃는 것이나 같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섬나라 오랑캐라 무시하던 일본과 협상해서 류큐의 일부분을 갖는다는 것은 중국의 체면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청나라가 아무리 기울었다고 해도 이홍장은 여전히 대국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조공 국가를 거느리는 청나라의 국가체제와 국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홍장은 그랜트의 타협안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답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홍장에게 달리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랜트가 중재 역할을 해줬기에 류큐의 3분의 1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홍장은 양면작전을 구사했다. 자신은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장했지만, 총리아문의 공친왕으로 하여금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수용할 수도 있다고 답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타협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랜트와 미국으로 하여금 계속 중국을 위해 노력하게 만들기 위한 심산일 뿐이었다. 만약 이홍장과 공친왕이 이구동성으로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랜트는 포기하고 그대로 귀국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그랜트와의 관계만 악화될 것 역시 분명했다.

미국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그랜트는 또다시 메이지 천황을 예방했다. 그때가 6월 23일이었다. 두 번째 예방 자리에서 그랜트는 마침내 류큐 문제를 꺼냈다. 그랜트는 막연하게 ‘양보를 통한 타협안’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류큐 분할 방안을 제시했다. 그랜트의 제안에 메이지는 “류큐 문제를 귀하와 논의하라고 이토에게 명령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토는 잇코 회담 후 그 결과를 이와쿠라에게 보고했었다. 그에 따라 일본의 핵심 실세들 사이에서는 류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다양한 토론이 있었다. 결론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랜트의 제안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하는 것이었다. 무시한다면 청나라에 더해 미국과의 관계악화를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이토를 비롯한 일본 정치가들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럴 정도로 류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랜트의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방식이었다. 그랜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류큐를 셋으로 나눠 그중의 하나만 일본이 갖는다는 것이 너무나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토가 생각한 것은 그랜트의 삼분 안을 이분 안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즉 그랜트가 분할한 셋 중에서 하나는 청나라가 갖고 둘은 일본이 갖겠다는 것이었다. 이토는 양분 안을 가지고 청나라와 협상하겠다고 함으로써 그랜트의 요구를 수용했다. 메이지가 “류큐 문제를 귀하와 논의하라고 이토에게 명령했습니다”라고 한 대답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메이지와 면담 후 그랜트는 미국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또 이홍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그랜트는 류큐 문제는 중국에서 듣던 것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언급하며 양보를 통한 타협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랜트 귀국 후 이홍장과 이토 사이에 류큐 분할이 협상됐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홍장은 협상에 임하기는 했지만 협상을 진척시키지는 않았다. 만약 협상을 진척시켜 류큐의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갖게 된다면 국가체제가 위험해지고, 그렇다고 협상하지 않으면 그랜트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기에 이홍장은 협상은 하되 진척시키지는 않는다는 전략을 취했다.

결국 이홍장은 청나라의 국가체제를 위해 류큐를 버렸던 것이다. 다만 다른 조공국가에 청나라의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협상에 임하기만 할 뿐, 협상을 진척시키지는 않았다. 그 결과 류큐에서 일본의 실효적 지배는 지속됐고 그럴수록 류큐는 오키나와현으로 굳어졌다.



이홍장, 류큐 버리고 시간을 벌다

당시 이홍장이 류큐를 버리면서까지 확보하고자 한 것은 시간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서구열강은 물론 일본에까지 몰리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근대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을 만회시키려면 근대 해군을 양성해야 했다.

 이홍장은 1875년부터 북양 해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북양 해군의 기본 목표는 철갑 전함 2척, 대형 화륜 전함 6척, 소형 화륜 전함 10척 등 20척 정도의 근대 군함을 보유하고,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근대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근대 군함을 보유하는 것이나 근대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나 모두 많은 돈과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1879년 당시 북양해군에는 아직 철갑전함도 없었고 대형 화륜전함도 없었다. 겨우 소형 화륜전함 몇 척만 있었다. 이런 전력을 가지고는 서구열강은 물론 일본과의 전쟁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홍장의 판단이었다.

북양해군을 기본 목표만큼 육성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이홍장은 일본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류큐를 버렸다. 그랜트의 노고에 감사하는 답장을 쓴 7월 6일 이후로 이홍장은 근대 군함 구입에 박차를 가하면서 북양해군 양성에 열성을 다했다.

그와 동시에 이홍장은 조선을 서구열강과 통상시키기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의 류큐 병탄에 이홍장이 별 대책 없이 당한 이유도 결국은 군사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만약 일본이 청나라의 군사력 열세를 틈타 조선을 침략한다면 류큐 병탄 때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청나라의 군사력을 길러야 했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조선이 일본 또는 러시아의 침략을 당하지 않으려면 서구 열강과 통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이홍장의 판단이었다.

그 같은 판단에서 이홍장은 7월 9일에 조선의 이유원에게 밀서를 보냈다. 7월 9일이면 그랜트에게 답장을 쓴 7월 6일부터 겨우 3일 후였다. 이홍장의 밀서는 [고종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최근의 일을 살펴보면 일본은 처사가 잘못됐고 행동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리 방어해야 하므로 감히 은밀히 그 개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요사이 서양제도를 숭상해 허다한 제도를 새로 만들면서 이미 부강해질 방도를 얻었다고 스스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국고가 텅 비고 나라 빚이 늘자 사방에서 말썽을 일으켜 널리 땅을 개척해 그 비용을 보상하려 합니다. 일본과 강토를 마주하는 곳은 북쪽으로는 귀국(貴國)이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대만이니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류큐 왕국은 수백 년이나 된 오래된 나라이고 일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올봄에 갑자기 군함을 출동시켜 류큐 국왕을 폐위시키고 강토를 병탄했습니다. 중국과 귀국에 대해서도 장차 틈을 엿봐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은 병력과 군량이 일본의 10배나 되기에 스스로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귀국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은밀히 국방을 강화하고 군량도 마련하며 군사도 훈련시키는 동시에 방어를 튼튼히 하면서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그들을 잘 다뤄야 할 것입니다. (…) 만약 귀국에서 먼저 영국·독일·프랑스·미국과 수호조약을 맺는다면 단지 일본만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도 아울러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종실록), 고종 16년(1879) 7월 9일조]


위에 의하면 이홍장은 당시 일본의 현실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유신을 추진하면서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에 필요한 개발 자금뿐만 아니라 사무라이의 불평을 완화시킬 정치 자금이 필요했고, 그 규모는 천문학적이었다. 그 자금은 궁극적으로 농민층의 세금으로 충당돼야 하지만 함부로 세금을 올리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일본정부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사방에서 말썽을 일으켜 널리 땅을 개척해 그 비용을 보상하자”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수많은 실업자 사무라이가 취업할 수 있어 좋았고, “널리 땅을 개척하면” 그곳을 수탈할 수 있어 좋았던 것이다.



“서구열강과 통상하시오” 공(球)은 고종에게

따지고 보면 1873년의 정한 논쟁 역시 이 같은 발상을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1873년의 정한 논쟁은 메이지 천황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에 의해 수그러들었지만, 1876년을 전후로 상황이 크게 변했다. 정한 논쟁 때 전쟁에 반대했던 이와쿠라·기도·오쿠보 등이 입장을 바꿔 대외 팽창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1876년 무력을 동원해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뒤이어 1879년 봄에 류큐를 병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로 일본이 대만과 조선을 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홍장은 그 점을 우려해 조선에 서구열강과의 통상을 권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이 이홍장의 권고를 수용할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은 서구열강을 오랑캐라 멸시하며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일본과 통상하라는 이홍장의 권고도 겨우 수용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런 조선이 서구 열강과 순순히 통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끝까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가능성에 대한 이홍장의 대책은 ‘논권도조선통상(論勸導朝鮮通商)’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이홍장이 7월 12일 총리아문의 공친왕에게 보낸 것으로 지난 7월 9일 이유원에게 밀서를 보낸 후 보고차 작성됐다. 제목 그대로 조선에 통상을 권고하고 지도하는 일에 관한 논의였다.

이 글에서 이홍장은 ‘류큐가 이미 멸망했으니, 조선은 쌓인 섶나무에 불을 붙이는 형세가 있습니다. 서양 각국이 또한 빙 둘러서서 보다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조선은 위기일발이라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쌓인 섶나무에 불을 붙이는 주체로 지목된 국가는 물론 일본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만 통상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 일본이 류큐에 뒤이어 조선을 침략한다면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도 기회를 노리다가 이권을 찾아 우르르 몰려들리라는 것이 이홍장의 예상이었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알아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조선은 전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홍장은 ‘차저대주(借箸代籌)’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차저대주’란 ‘남의 산가지를 빌려 대신 계획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차저대주’는 조선에 서구 열강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게 하자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애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연장이었다. 이홍장의 ‘차저대주’ 언급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외교 간섭이 점차 거세질 것임을 예고했다. 처음에는 이유원에게 밀서로 권고하는 형태였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강력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공은 조선의 고종에게 넘어갔다.

이홍장의 권고대로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고 근대화를 추구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쇄국정책을 추구할지는 궁극적으로 고종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아울러 점차 강력해질 이홍장의 ‘차저대주’에 대응하며 조선의 국권을 어떻게 지켜 나갈지 역시 고종에게 달려 있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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