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일본문학기행③]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초혼제일경','아사쿠사 구레나이단','천우학','산소리'

'招魂祭一景','淺草紅團','千羽鶴','山の音'



『허연의 일본문학기행-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허연의 일본문학기행-가와바타 야스나리①』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6

『허연의 일본문학기행-가와바타 야스나리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7
『허연의 일본문학기행-가와바타 야스나리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8



41. 청년 야스나리는 탱고 카페에서 탄화배전(炭化焙煎) 커피를 마셨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청장년기를 주로 보낸 곳은 도쿄다. 1917년 이바라키중학을 졸업하고 구제(舊制) 제일고등학교(도쿄대학 교양학부)에 진학하면서 도쿄 생활을 시작해 1937년 카마쿠라(鎌倉)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으니 20대와 30대 전부를 도쿄에서 보낸 셈이다.

야스나리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등단했으며, 문예운동을 시작했고, 유명 소설가가 됐다. 야스나리는 도쿄 아사쿠사(浅草)에 있는 사촌의 집에 처음 짐을 푼 이후 아사쿠사, 오쿠보, 분쿄구, 다이토구 등지를 옮겨다니며 하숙과 기숙사 생활을 했다.

야스나리가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문학적 성가물들을 내놓은 시기인 '도쿄시대'를 대략적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야스나리는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던 왜소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1918년 가을 야스나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이즈반도로 여행을 떠난다. 이때 유랑극단과 동행을 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라는 출세작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1919년에는 교내잡지에 '치요(ちよ)'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교내에 이름을 알린다. 이즈반도 여행을 소재로 삼은 '치요'는 나중에 '이즈의 무희'로 확장된다. 그해 야스나리는 분쿄구에 있는 카페 앨런에서 약혼까지 했던 이토 하츠요를 처음 만난다.

1920년에는 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동료들과 동인지를 만드는 등 문학적 행보를 본격화된다. 이 무렵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등 훗날 유명작가가 된 사람들과 교류한다. 다음 해인 1921년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초혼제일경'이 출간된다. 하츠요와 가슴 아픈 이별을 한 해이기도 하다.

1922년 국문과로 전과를 한 야스나리는 이즈반도 유가시마에 다시 가서 '이즈의 무희' 초안을 작성한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한 야스나리는 동인지 '문예시대'를 창간한다. 이때 모은 동인들이 훗날 '신감각파'라고 불리게 된다. 1926년 입주 도우미였던 히데코와 실질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히데코는 평생 야스나리의 그늘에서 존재감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내조를 하게 된다.

1929년 신문에 '아사쿠사 베니단'을 연재하는 등 작품활동을 하면서 대학강사 생활을 한다. 1934년에는 니가타현 에치고유자와를 처음으로 여행한다. 이때 경험이 훗날 소설 '설국'으로 승화된다. 1937년 '설국'을 발표하고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한다. 같은 해 가마쿠라시 니카이도로 이사하면서 도쿄생활을 마무리한다.

도쿄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은 진보초와 아사쿠사다.

진보초(神保町)는 도쿄대에서 가까운 책방거리로 야스나리가 책을 사러 자주 들르곤 했던 곳이다. 이 거리 인근에는 당시 야스나리가 자주 갔던 서점들과 카페가 지금도 남아있다.

진보초에서 간다(神田)에 이르는 서점가에는 현재까지도 170여 개의 고서점이 영업 중이다. 130여 년 전 메이지 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이 거리는 일본의 오늘을 만든 수많은 지식인과 작가들이 서구문물을 흡입했던 세계로 열린 창(窓)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야스나리도 이곳 서점들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영문 고서점인 기타자와(北澤) 서점처럼 야스나리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서점들을 만날 수 있다. 3대, 4대를 이어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는 이들 서점은 선대에 물려받은 20세기 초반의 정신과 모습과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야스나리가 청년시절 드나들던 진보초 거리 탱고카페 '밀롱가 누에바' 


진보초 거리에는 야스나리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밀롱가 누에바'라는 탱고 카페가 있다. 하루키도 가끔 들른다는 이 카페는 거의 변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모된 출입문과 창틀에서조차 연륜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야스나리는 일본 특유의 탄화배전(炭化焙煎) 커피를 마시면서 탱고음악을 감상했을 것이다. 탄화배전이라는 로스팅 방법은 숯을 사용해 생두를 볶는 것으로 묵직하고 농후한 맛이 일품이다. 불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아 숙달된 노포(老鋪)에서만 취급할 수 있는 커피다.

그곳에 가면 구석자리에 앉아 탄화배전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는 야스나리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된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


42.곡마단 소녀의 비애를 그린 데뷔작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



▲ 메이지시대 아사쿠사공원을 그린 그림.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곳에서 마상곡예를 하는 소녀를 본 후 '초혼제일경'을 집필했다

 

아사쿠사는 야스나리가 오사카 이바라키에서 처음 도쿄로 상경해서 살았던 곳으로 야스나리 인생에서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아사쿠사는 야스나리 초기 작품들의 주요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소설가로서 야스나리의 이름을 열도에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들 대부분이 아사쿠사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아사쿠사는 도쿄에서 일본 전통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 불교의 중심지인 센소지(淺草寺)를 축으로 사찰과 신사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야스나리는 자신의 고향인 오사카와 많이 닮았다는 이유로 아사쿠사를 각별히 좋아했다고 전한다.

아사쿠사는 야스나리의 출세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의 무대다. 야스나리의 본격 등단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21년에 발표된 '초혼제일경'은 곡마단의 17세 소녀 오미쓰를 주인공으로 그의 비애로 가득한 삶을 그린다.

이 소설 역시 야스나리의 개인적 체험이 바탕이 됐다. 도쿄대 재학 시절 야스나리는 아사쿠사 공원을 거닐다 우연히 곡마단의 마상곡예를 보고 큰 감흥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열린 초혼제 구경을 갔다가 곡마단의 소녀 곡예사를 다시 만난다. 야스나리는 소녀 곡예사에게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비애와 허무를 느낀다.

당시 최하층 천민이었던 곡마단의 17세 소녀를 통해 야스나리는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내면을 소설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지상의 소음들을 모두 빨아들이는 듯한 가을 하늘이었다."

초혼제의 풍경을 묘사하는 초반 장면에서부터 소설은 운명적이다. 지상의 온갖 소음들을 모두 삼킬 듯한 가을 하늘, 그 하늘이 결국 운명이라는 듯 야스나리는 절망적인 묘사를 쏟아낸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오미쓰는 초혼제에서 곡마 연기를 펼친다. 연기가 끝나도 그녀는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곡마 연기를 배우느라 크게 휘어버린 다리를 군중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그곳에서 오미쓰는 우연히 오래전 곡마단을 떠난 오토메를 만난다. 오토메는 오미쓰에게 "말 냄새 배고 몸도 흉하게 변하는" 이 직업을 빨리 그만두라는 말을 남긴 채 휘어진 다리를 절룩이며 사라진다.

곡마단의 고참인 사쿠라코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며 불안해하는 오미쓰를 다독거린다. 다시 공연은 시작됐고 오미쓰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결국 균형을 잃어버린 오미쓰는 사쿠라코의 말과 충돌하면서 불붙은 링과 함께 말에서 떨어진다.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진 듯한 소설이지만 상당한 울림을 전해준다. 너무나 상징적이다.

소음을 빨아들이는 가을 하늘 아래 불붙은 링과 함께 추락하는 오미쓰의 모습은 허무의 극을 보여주는 듯하다. 훗날 쓰여진 '설국'에서 요코가 은하수와 함께 불붙은 창고에서 떨어진 장면이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오미쓰의 나날들, 현실의 모습이 가엾고 피폐할수록 꿈은 아름다움을 더해간다. 하지만 이제 꿈과 현실 사이의 다리 같은 것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대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천마를 타고 꿈같은 하늘로 날아가리라."

오미쓰는 천마를 타고 날아갔을까. 아니면 야스쿠니의 차가운 바닥에 추락한 것으로 그의 운명은 끝이 났을까. 알 수 없지만 작품을 읽는 우리의 운명도 함께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발표 당시 최고 반열의 평론가 기쿠치 간(菊地寬)에게 극찬을 받은 이 소설은 놀라운 작품이다. 작은 이야기가 어떻게 우주를 품을 수 있는지, 억지로 힘을 주지 않은 소설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3."춤은 보이는 음악이고, 움직이는 미술이며, 육체로 쓰는 詩다"



▲ 30대 후반 무렵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교바시에서 바바사키몬으로 가는 전찻길 선로를 나가니 큰 가로수들이 잎은 다 지고 고쿄(皇居) 숲에 가느다란 저녁달이 걸려 있었다."

도쿄 중심부 왕궁 근처 가을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소설 '무희(舞姬)'의 한 구절이다. 도쿄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장편이다.

또한 '무희'는 야스나리 탐미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세 무희의 인생을 바라보는 건조한 시선이 압권인 이 소설은 절대허무에 매달린 야스나리의 문학세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야스나리의 문학세계는 '무용'을 빼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 자신이 이름난 무용평론가이자 무용애호가였기 때문이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무용평론가로 그려지듯 그의 소설에 무용이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무용은 미학의 정수를 만나는 하나의 창(窓)이자 촉수이다.

그는 "무용은 보이는 음악이고, 움직이는 미술이며, 육체로 쓰는 시이자, 연극의 정화다"고 말했을 정도로 무용지상주의자였다.

'무희'는 야스나리 작품 중 가장 본격적인 무용소설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여인이 모두 춤인생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 전체의 바탕화면이 무용인 셈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지 않았으므로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주인공 나미코는 젊은 시절 프리마돈나를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20년째 이어가고 있는 여인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다케하라가 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결단을 내리지는 못 한다.

나미코의 딸인 시나코는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 위해 유명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자리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그의 꿈은 전쟁으로 인해 유학이 좌절되면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시나코는 소녀시절 자신에게 무용을 가르쳤던 가야마 선생을 짝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나미코의 제자이자 시나코의 친구는 도모코는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나미코의 일을 도우며 무용을 배우지만, 재능만큼은 천재적이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무용을 포기하게 되고, 결국 아사쿠사의 스트리퍼가 된다.

소설은 야스나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어느 주인공도 승자로 만들지 않은채 끝을 맺는다. 그들은 운명에 전투적으로 대항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운명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이 저항과 순응의 경계선에 소설 '무희'가 존재한다.

"인간이란 저마다 슬픔을 짊어지고 사니까요. 그이도 그래요. 슬픔이 너무 크면 그 밖의 다른일들은 알고도 이해하지 못 하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들도 생기고요."

소설에서 주목해 봐야할 인물이 나미코의 남편인 야기다. 문학을 전공한 그는 일본의 전통미에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는 인물이다. 그의 정서 밑바탕에는 패전 이후의 허무감, 전쟁공포증 등이 깔려 있다. 처음에는 나미코의 춤에서 궁극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잘 안 되면서 불상이나 도자기 같은 고미술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이런 특성으로 미루어보건대 야기는 야스나리 자신의 분신인 듯 보인다.

1950년대 무력함에 빠진 일본사회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굴절된 삶을 사는 세 명의 무희를 그린 이 소설은 섬세한 묘사가 압권이다.

"평범한 결혼이라는 게 있을까요? 거짓말을 하시는 군요. 모든 결혼은 하나하나 비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비범해서 결혼이 비범해 지는 것이 아니에요. 평범한 두 사람이 만나서 해도 결국 비범해 지는 게 결혼이에요."

야스나리에게 소설은 하나의 이미지다. 양적 결과물이 아닌 질적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의 수려한 문장에서 '허무'를 만난다. 그것이 승자도 패자도, 옳고 그른 것도 없는 야스나리의 미학이다.

야스나리는 일본이 군국주의 행보를 걷는 동안,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대해 거의 언급도 묘사도 하지 않는다. 물론 행동으로 가담하지도 않는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작품에서도 군국주의에 대한 입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왜 그랬는지는 몇 가지 정황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아 신감각파를 형성했던 야스나리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절대미를 찾아 헤매는 그에게 전쟁이나 이념, 국가주의는 어울리기 힘든 세계였을 것이다. 야스나리에게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 소년이 되기도 전 부모와 조부모를 비롯한 전 가족구성원의 죽음을 목격한 그에게 현실은 그 자체가 무의미했다. 삶과 죽음의 궁극을 본 그에게 현실이란 어느 순간 가차 없이 사라지는 것에 불과했을 테니까.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4. 신감각파 선두주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성영화에 빠지다



▲ '아사쿠사 구레나이단' 초판 복각본.



  야스나리가 청년기를 보낸 1920~1940년대 도쿄는 전근대와 근대가 뒤엉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일본으로 밀려들어온 근대의 산물은 도쿄를 거쳐 열도로 퍼져나갔다. 도쿄에서도 가장 역동적으로 근대문물을 실험했던 곳이 아사쿠사다.


당시 아사쿠사는 일본의 젊은 예술가들을 매혹시킨 '활동사진', 즉 영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대형 영화관과 영화사가 아사쿠사에 밀집되어 있었고, 영화인을 꿈꾸는 젊은이들과 관객들이 아사쿠사의 밤거리를 가득 메웠다.

야스나리 역시 영화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1926년 신감각파영화연맹의 일원으로 영화 '어긋난 한 페이지(狂った一頁)' 시나리오 공동창작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 행보를 보인다.


더 나아가 그는 영화의 문법을 문학에 이식하는 데도 관심을 보인다. 야스나리는 아마도 신감각파 문학의 표현기술이 영화문법과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영화에 경도된 야스나리의 면모가 단적으로 드러난 소설이 '아사쿠사 구레나이단(淺草紅團)'이다.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은 소설가인 '나'를 주인공으로 아사쿠사의 모습을 그린다.

'나'는 아사쿠사의 뒷골목에서 아름다운 소녀 유미코를 알게 되고, 그녀로 인해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이라는 집단을 만나게 된다. 유미코는 이 불량소녀 집단의 수령으로 남자에게 버림받은 언니의 복수를 꿈꾸기도 하고, 부랑자의 소굴로 전락하고 있는 아사쿠사를 부활시키겠다는 소망도 가지고 있다.


유미코가 여러가지 변장한 모습으로 아사쿠사를 떠돌아다니는 게 소설의 주요 구성이다. 사실 소설에서는 줄거리가 큰 의미가 없다. 주인공인 유미코가 중간에 죽고 소설 자체가 이야기적 요소보다는 아사쿠사의 모습을 생중계하듯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사히신문 연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영화화됐다. 야스나리 소설 중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35편인데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이 가장 먼저 영화로 제작된 작품이다.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은 당시 대중들에게 '아사쿠사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실제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쇼 전용극장이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면서 부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소설에서 이 극장을 이슈화했기 때문이다.

소설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은 철저하게 영화식 문법으로 진행된다. 소설의 구성은 '나(我)'가 '제군(諸君)'들에게 아사쿠사를 안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은 유미코와 함께 아사쿠사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아사쿠사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우리는 1920년대가 무성영화의 시대였음 상기해야 한다. 당시는 변사(辯士)가 영화의 내용을 말로 들려주던 시대였다. 그래서일까. 소설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은 변사식 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렌즈를 따라가면서 변사의 대사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문장이 이런 식이다.

"화려한 무대에서 화려한 무희가 춤추고 있다. 무대 앞에 철조망이 나타난다."

이 같은 단문의 배열은 변사가 영화 진행을 설명해주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아사쿠사 쿠레나이단'은 변사식 문체를 활용해 그 어떤 기록보다도 정밀하게 당시 아사쿠사의 모습을 재현해준다. 첨탑 위에서 주인공과 유미코가 아사쿠사를 내려다보는 부분을 보자.

"아사쿠사 강변은 공사 중, 그 강기슭에 돌공장과 작은 배의 무리, 고토토이바시, 건너편 강변 삿포로 맥주회사, 긴시보리역, 오시마 가스 탱크, 오시아게역, 스미다공원, 초등학교, 공장지대, 미메구리신사, 오쿠라별장, 아라카와방수로, 쓰쿠바산은 구름 낀 겨울 날씨에 싸여 있다."

흡사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동시에 단어 하나 하나가 영화의 장면 전환을 떠올리게 해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설에는 당시 아사쿠사에서 살아가던 숱한 인간 군상들의 가감 없는 모습도 담겨 있다. 상인이나 예능인에서부터 부랑자, 걸인, 범죄자들까지 그려진다. 여기에 더해 당시 식당의 메뉴, 음식 가격에서부터 극장 포스터의 세세한 내용까지 등장하고 있어 가히 '1920년대 아사쿠사 백서'라고 할 만하다.

당시 아사쿠사는 신문물의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야스나리에게도 그랬다. 신감각파였던 그는 아사쿠사라는 용광로 안에서 문학과 영화가 합성된 그 무엇을 창조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5. 작은 방 한 칸 구해 딱 한 달만 살고 싶은 곳 '가마쿠라'



▲ 가마쿠라에 있는 오래된 사찰 하세데라(長谷寺)정문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가마쿠라(鎌倉)다.

가마쿠라에는 아름답고 예쁜 거리가 있고,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가 있으며, 중독성 있는 라면집이 있다. 지나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소에도 풍성한 수국과 보랏빛 붓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곳이다. 작고 단정한 집들이 모여 있는 이름 없는 골목들 사이로 협궤열차가 지나가는 곳. 그곳이 가마쿠라다.

가마쿠라는 인간에게 평온과 기쁨, 예술과 교양, 자연과 소소한 일상, 그리고 죽음까지 모두 누리라고 만들어진 곳 같다.



▲ 카마쿠라역 전경



요란스럽지 않지만 모든 것의 핵심이 존재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격조가 있고, 그리고 그곳에 스며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공존하는 곳, 그곳이 가마쿠라다.

도쿄 남쪽 도심에서 불과 전철 40분 정도 거리에 자리 잡은 가마쿠라는 작은 집 하나 구해서 몇 달만이라도 살고 싶은 그런 곳이다.

가마쿠라에는 또 역사가 있다. 한 시절 일본막부의 수도였고, 일본 선불교의 일파인 니치렌종(日蓮宗)의 요람이었던 가마쿠라에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정갈한 사찰들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마쿠라 고잔(五山)이라고 불리는 5대 사원인 엔카구지(円覺寺), 겐초지(建長寺), 주후쿠지(壽福寺), 조치지(浄智寺), 조묘지(淨妙寺)에서부터 하세데라(長谷寺)와 쓰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 신사까지 히말라야 삼나무 숲에 둘러싸인 사원을 산책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을 남겨준다.

가마쿠라에는 바다가 있다. 한국의 청춘들이 열광했던 '바닷가 마을 다이어리'의 무대가 된 바다도,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츠바키 문구점'의 무대가 됐던 그 바다도 가마쿠라에 있다. 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바다와 철길 건널목도 모두 가마쿠라에 있다.

이곳 바닷가 풍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갈 때마다 내 발목을 잡았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에서는 서퍼들의 웃음이 들려오고, 그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곳. 생선 비린내와 빵 냄새가 함께 있는 곳. 바로 가마쿠라의 바다다.

가마쿠라에는 문학과 예술이 있다. 송나라의 인쇄기술이 일본에서 가장 먼저 도착했던 가마쿠라는 아주 오랫동안 일본 교양과 문학의 산실이었다.


이미 오래전 가마쿠라는 '고잔분가쿠(五山文學)'라는 선불교 문학을 탄생시켰다. 가마쿠라에 있는 5개의 대형 사찰(五山)을 중심으로 꽃을 피운 불교문학은 후대 수많은 일본 문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전통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1889년 요코스카 선이 개통되어 가마쿠라가 도쿄와 가까워지면서 많은 작가들이 도쿄를 떠나 하나둘 이곳에 정착한다. 나쓰메 소세키, 다카미 슌, 구메 마사오, 나카야마 기슈 등 일본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곳에 집이나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가마쿠라 문고'를 냈을 정도다.

1936년에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던 영화사인 마쓰타케(松竹)가 촬영소를 가마쿠라 북쪽 오후나로 옮기면서 영화 관계자들과 배우들도 속속 가마쿠라에 정착하게 된다.

내 생각에 일본 문화예술계에서 가마쿠라의 위치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유파(流派)다.

'무기 창고'라는 의미를 지닌 이곳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여가와 예술과 종교를 감싸 안은 도시가 됐는지 아이로니컬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마쿠라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있다.

야스나리는 1937년 가마쿠라시 니카이도로 이사한 이후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 1972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가마쿠라에서 보냈다. 가마쿠라의 거리와 바다는 야스나리의 마지막 35년을 고스란히 지켜본 곳이다. 야스나리의 중요한 후반기 작품인 '천우학(千羽鶴)' '산소리(山の音)'의 무대도 바로 가마쿠라다. 야스나리의 무덤도 가마쿠라에 있다.

그렇다. 가마쿠라는 야스나리가 완성되고 죽어간 곳이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을 보러 가마쿠라로 간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6.800년전 무사정권 시작된 가마쿠라, 지금 그곳엔 평화가 있다.



▲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품은 땅이다.

1185년부터 1333년까지 가마쿠라는 가마쿠라 막부(幕府)의 중심지였다. 일본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셈이다. 일본 역사를 풍미한 막부시대를 최초로 연 집단이 가마쿠라 막부다.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수립한 무사정권으로 일본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가마쿠라 이전 일본의 정치 중심지는 일왕이 있던 교토였다. 1159년 교토의 양대파벌이 전쟁을 일으켰고, 패배한 파벌은 교토에서 밀려난다.


이때 밀려났던 세력들은 여러 지역을 떠돌다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힘을 키웠고, 급기야는 1185년 교토에 있는 일왕까지 굴복시키고 명실상부한 무사정권을 수립한다. 이것이 바로 가마쿠라 막부다. 쇼군(將軍)이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하는 막부정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까지 700년 동안 이어진다.

교토에서 밀려난 세력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데는 가마쿠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큰 역할을 했다. 가마쿠라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바다로 열려 있다.


12세기 무렵만 해도 바다를 통하지 않고 가마쿠라에 접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천혜의 요새에서 패자부활전을 꿈꾸었던 세력이 일본의 주인이 된 것이다. '가마쿠라(鎌倉)'라는 지명이 '화살 창고' '낫 창고'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도 지정학적 위치와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가마쿠라 막부는 정권을 잡은 이후 바다와 접해 있는 이점을 살려 활발하게 해상교역을 시작한다. 송나라 선종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융성하게 된 것도 이때다. '가마쿠라 5산'이라는 대형 사찰들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불교의 융성은 인쇄술과 문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건축과 조각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도 가마쿠라 막부 시기였다. 가마쿠라 시대는 기존 일본 문화에 송나라 원나라 고려의 문화가 배합된 일본 중세문화의 뿌리가 만들어진 시기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몽골의 침입을 막느라 피로해진 사이 고다이고 일왕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했고, 패배한 막부는 결국 1333년 멸망한다. 막부가 막을 내린 이후 가마쿠라는 사찰이나 신사의 배후지역인 몬젠마치(門前町)로 남게 된다.

가마쿠라에 또 다른 바람이 불어닥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당시 서구 문물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일본 정부는 서구식 해수욕장의 최적지로 가마쿠라를 지목하고 개발을 시작한다. 곧이어 도쿄와 카마쿠라를 연결하는 요코스카센이 개통되면서 가마쿠라는 역사와 휴양이 공존하는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전통을 해치는 막무가내 개발을 제한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이때문에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고즈넉한 가마쿠라의 모습이 보존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마쿠라에 가면 고층건물이나 대형 아파트,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쿄의 예술가들이 가마쿠라를 찾아 남진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번잡한 도쿄를 떠나고 싶어했던 예술가들에게 역사와 문화와 자연이 조화된 가마쿠라는 당대의 이상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7년 가마쿠라에 집을 얻어 살기 시작한다. 1945년에는 동료 작가인 구메 마사오, 고바야시 히데오 등과 함께 가마쿠라에 거주하는 소설가들의 장서를 대출해주는 '가마쿠라 문고'를 연다. 문고는 얼마 후 출판사 업무도 하게 된다. 이 출판사에서 '인간'이라는 잡지가 창간됐고, 당시 신인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담배'가 바로 이 잡지에 소개된다.

야스나리는 1949년부터 가마쿠라를 배경을 한 소설 '천우학'과 '산소리'를 쓰기 시작한다. 야스나리의 후기 대표작 대부분이 가마쿠라에서 탄생한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다음해인 1969년에는 가마쿠라 명예시민으로 추대된다. 야스나리는 말년을 가마쿠라 하세(長谷)에 있는 저택에서 보냈고, 가마라 남쪽 즈시(逗子)에 있는 리조트에서 자살한다. 사후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은 가마쿠라 묘원이다. 가마쿠라를 빼놓고 야스나리를 말하기는 힘들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7. 관능도 외설도 허무속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 소설 '천우학'에서 다회가 열린 장소인 가마쿠라 엔가쿠지



 1968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낭독한 수상소감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어떤 주장도 힘주어 말하지 않는 습관을 가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말만큼은 힘을 주었다.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철학과 문학적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고백이다. 그에게 현실은 죽음이었고, 죽음은 자연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허무하고 아름다운 궁극 같은 것이었다. 이런 세계만을 바라본 그에게 현세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나 승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천우학'(千羽鶴)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 가장 완벽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천우학'은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여러 잡지에 나늬어 실렸던 원고를 모은 것이다.

줄거리는 파격적이다. 주인공인 기쿠지는 다도(茶道) 대가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산다. 그러다 어느 날 가마쿠라 엔카쿠지에서 열리는 다회의 초대장을 받는다.


다회에 참여한 기쿠지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오타 부인을 만나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그의 딸까지 사랑하게 된다. 오타 부인은 자신을 자책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딸 역시 여자의 숙명을 한탄하다가 어머니가 물려준 찻잔을 깨뜨려버리고 길을 떠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 '거부감'은 힘을 잃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의 묘한 자기장에 걸려들면 외설도 천박함도 허무한 아름다움에 자리를 빼앗겨 버린다.

주인공 기쿠지가 오타 부인과 함께 있다가 돌아오는 장면을 보자

"이케가미에 있는 절 혼몬사(本門寺) 숲의 석양이었다. 붉은 석양은 마치 숲의 나뭇가지 끝을 스치며 흘러가는 듯 보였다. 숲은 노을진 하늘에 검게 떠올라 있었다. …기쿠지는 눈을 감았다. 나무 꼭대기를 흐르는 석양이 지친 눈에 스며들자 기쿠지는 눈을 감았다. 기쿠지의 눈 속에 남은 노을진 하늘에서 보자기에 그려진 천마리 학이 날고 있는 영상이 문득 나타나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노을진 하늘'과 교감을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미화라기보다는 치환이다. 현세에서 벌어진 일은 부지불식간에 노을이 벌인 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다른 장면들도 그렇다. 소설 '천우학'을 읽다보면 어떤 외설적인 이야기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적막한 다실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왜 그럴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거리두기'의 천재다. '천우학'에서는 죽음도 외설도 한낱 멀리 있는 대상이나 현상에 불과하다. 그는 직접 이야기에 뛰어들어 개입하지 않는다. 가치평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이런 고도의 장치 속에 소설을 집어넣는 것은 그만의 특출난 마술적 재능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설의 장면은 하나하나가 매우 완벽한 상징이다. 오타 부인이 사용하던 입술연지 자국이 남은 찻잔을 그의 딸이 기쿠지 앞에서 산산조각내는 장면은 소설의 절정이다.

"3, 4백년 전 옛날 찻잔은…생명력이 퍼져 있어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아버지의 수명이 찻잔 수명의 몇 분의 일에 지나지 않을 만큼 짧아서…."

비록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아버지와의 신뢰를 깨뜨리고, 모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깨뜨린 주인공은 산산조각난 조각들을 주워 모아 고이 포장해서 벽장 속에 간직한다. 악당과 고수의 모습이 함께 드러나는 장면이다.

찻잔 하나로 소설의 모든 관계망을 설명하고, 삶과 죽음과 관능을 모두 말해버리는 재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니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훗날 "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보다는 비속화된 다도문화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그는 늘 아름다워보이는 것에서 추함을 찾는 악취미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민낯이라는 걸 알려주듯.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일깨워준다.

"죽은 사람에 대해 얄팍하게 번민하는 건 죽은 사람을 욕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어떤 도덕도 강요하지 않는데 말이다."

이렇게 차갑게 말하고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 천역덕스럽게 위로의 말까지 건넨다. "지나가 버리면 그리워지는 경우도 있어요"라고 읊조리는 오타 부인처럼.
   

[출처] : 허연 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8. 야스나리 소설 '산소리' 여전히 그리운 옛사랑



▲ 소설 '산소리'에 등장하는 가마쿠라 감승신사


 야스나리의 가마쿠라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소설이 '산소리'다. 말 그대로 '산에서 나는 소리(山の音)'라는 뜻이다. 소설은 야스나리가 말년에 기거했던 가마쿠라 하세 저택에서 쓴 작품이다. 저택 바로 옆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감승신사가 있고, 신사 뒤편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소리'의 주인공은 62세의 노인 오가타 싱고다.

"그리고 문득 싱고에게 산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없다. 달은 보름달에 가깝게 밝지만, 작은 산 위를 수놓은 나무들의 윤곽은 습한 밤 기운으로 희미해져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다 (…) 싱고는 바닷소리인가 의심도 했지만 역시 산소리였다. 먼 바람소리와도 닮았지만 땅울림과도 닮은 저력이 있었다 (…) 소리가 멎은 뒤에 싱고는 비로소 공포에 휩쓸렸다. 임종을 알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한이 났다 (…) 악귀가 산을 울리고 간 것처럼 여겨졌다."

일본에서 '산소리'는 죽기 전에만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소설은 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소멸, 즉 노화와 죽음에 대해 탐구한다. 이야기의 기본 틀에는 야스나리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욕망, 죽음, 허무, 탐미 같은 정서들이 밑바탕에 스며들어 있다. 줄거리를 보자.

싱고는 어느 날 넥타이를 매다가 깜짝 놀란다. 40년 동안 해오던 넥타이 매는 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싱고는 온몸의 기관들이 낡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는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에게만 들린다는 '산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싱고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가족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싱고는 원래 지금의 부인인 야스코가 아닌 야스코의 언니를 좋아했었다.


두 자매는 자매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외모도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하지만 싱고는 언니가 죽고 야스코와 결혼을 하게 됐다. 부부지만 사랑은 없는 사이다. 둘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다.

딸인 후사코는 어머니 야스코를 빼닮았는데 이혼하고 2명의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들어와서 산다. 후사코는 자신의 불행이 아버지가 사랑을 쏟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싱고를 원망한다. 아들 슈이치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성격이 난폭해졌고 아내 기쿠코를 무시하고 바람을 피운다.

싱고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대상은 며느리인 기쿠코다. 기쿠코는 싱고가 젊은 날 좋아했던 처형을 닮았다. 가끔씩 싱고는 주책맞게도 며느리에게 연정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갈등과 불화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틀이 깨지거나 하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이들 가족이 단풍구경을 가기로 약속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그려낸다. 불협화음 속에서 야스나리는 끊임없이 욕망과 허무를 동시에 이야기한다. 주로 싱고의 생각과 독백, 그리고 싱고가 꾸는 꿈을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과 허무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매우 몽환적이다. 싱고가 기쿠코에 대한 연정을 마음속에서 포기하는 순간 시(詩)를 한 편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늙은 사람이 사랑을 잊으려고 하면 한 차례 비가 내리는구나."

중의적으로 읽히는 시다. 늙은이가 사랑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비까지 내려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늙은이가 사람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비가 내려 마음을 적시니 미련이 남는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야스나리는 이런 식으로 시종일관 몽환의 세계를 오간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그는 어엿한 가장이다. 자식들을 챙기고 가족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삶은 하루하루가 허무하고,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도 가정이라는 틀을 지키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순간순간 화인처럼 남아 있는 사랑은 여전히 떠오른다.

"싱고는 또 옛날 사람이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그리웠다. 예순셋이 되어서도 20대에 죽은 그 사람이 역시 그리웠다."

무의식과 의식을 왔다 갔다 하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아마 자기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무수하게 금기를 넘어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반듯하다. 무너져가는 자기 자신마저 숨긴 채 우리는 주어진 역할을 산다. 그래서 인생은 비극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49. 그는 작품속에서 환생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산소리'에는 야스나리가 가진 죽음에 대한 의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젖먹이 시절부터 끊임없이 겪었던 죽음 체험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특유의 생사관(生死觀)이 드러나 있다. 특히 그가 50대 이후, 즉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어가는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에서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표적이 작품이 '산소리'다. 소설의 주인공 싱고는 어느 날 집안 식구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몸을 물에 맡기는 구나. 가을 연어."


 "죽는 곳도 모르고 내려가는 구나. 여울의 연어."

흡사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이 문장 속에서 싱고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백한다. 이것은 곧 작가 야스나리의 생사관이기도 하다.

연어는 대표적인 모천회귀(母川回歸) 어종이다. 먼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을 할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찾아와 산란을 하고 생을 마감하는 물고기다.

야스나리는 왜 연어 이야기를 했을까? 그건 아마도 야스나리가 회귀와 환생의 생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연어가 그렇듯 삶은 어느 날 죽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 죽음은 다시 삶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형식을 소설에 담아낸 것은 아닐까. 그것도 단순한 생사교대가 아닌 환생을.

소설 '산소리'를 떠올려보자.

주인공 싱고는 어느 날 죽음을 고지하는 소리라는 '산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그토록 사모했던 일찍 죽은 처형이 들었다고 했던 그 '산소리'였다. 산소리를 들은 이후 싱고는 다른 사람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즈음 자신이 연정을 품고 있었던 며느리가 인공 낙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순간 싱고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환생'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사라진 그 태아가 자기가 젊은 시절 사모했던 처형의 환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싱고는 며느리에 대한 연정에서 드디어 벗어난다. 며느리의 몸을 빌려서까지 환생하려고 했던 첫사랑에 대한 책임감일 수도 있고, 모든 게 결국 왔다가 사라진다는 만사 무의미를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싱고는 자기가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 나오려다 결국 실패해 저세상에 남아 있는 처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자기의 노년과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화일 수도 있고 자기구제의 방법일 수도 있다.  



▲ 노년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야스나리의 다른 소설 중에 '불사(不死)'라는 소설이 있다. 야스나리가 64세 때 쓴 이 작품은 '산소리'에서 드러난 그의 생사관을 더욱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야스나리가 '산소리'를 출간한 시기가 54세 때였으니 정확히 10년 이라는 세월 동안 그의 생사관은 더욱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아주 짧은, 이른바 손바닥소설(掌篇)인 '불사'의 줄거리는 이렇다.

바닷가 골프장에서 17년째 공을 줍는 일을 하는 노인이 있다. 그가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는 55년 전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소녀가 이 바닷가에서 몸을 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 노인을 찾아온다.


노인은 이제는 헤어질 수 없다며 함께 저세상으로 가자고 말한다. 소녀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더라도 당신은 이곳에 남아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인은 그것이 싫다. 서로 다른 세상에 떨어져 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저세상이든 이 세상이든 함께 있자고 말한다.


결국 둘은 백년 된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이다. 어쨌든 둘은 함께 나무로 환생하는 것을 택한다. 물론 소설에서 이 장면이 환생을 뜻한다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야스나리는 또 소설 속에서 사물과 기억을 통한 영생을 꿈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소설 '천우학'에 보면 오타 부인이 사용하던 입술연지 자국이 있는 찻잔이 주요 오브제로 등장하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한 망자의 존재가 어떤 사물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생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야스나리 자신에게 그 사물은 '소설'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영생과 환생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유서도 없는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너무나 쉽게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것 아닐까.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50.야스나리 소설은 악마적 모습으로 해방을 꿈꾼다



▲ 1968년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른 수상자들과는 달리 야스나리의 표정에서는 짙은 허무가 느껴진다



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을 논할 때 '마계(魔界)'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한다. 한국의 문학평론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다. '마계'라는 표현은 사전적으로는 말 그대로 악마적인 세계를 뜻한다.

야스나리는 이 악마적인 세계를 활용해 일탈을 한다. 퇴폐문학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일탈은 야스나리 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야스나리를 마계라는 분석틀로 설명하는 모리모토 모사무는 야스나리가 마계를 통해 "악함과 추함에 집중되는 비정한 시선을 보여주며,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고뇌의 세계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사실 마성(魔性)이 두드러지는 몇몇 야스나리의 작품은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금기를 깨는 연정, 죽음에 대한 공포와 환생, 사회이면에서 벌어지는 일탈, 성적인 문란함 등이 주요 이야기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야스나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가 보편적인 소설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서정적인 기대를 산산조각 낸다.

야스나리 문학의 마성은 그의 손바닥 소설들에서 강력하게 드러난다.

그의 손바닥 소설 중 '정사'라는 작품이 있다. 아주 짧은 분량의 작품인데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부인이 싫어서 도망을 친다. 도망친 남편은 환청에 시달린다. 딸이 내는 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에게까지 들리는 것이다. 점점 미쳐가는 아버지는 딸에게 편지를 보내 공놀이도 하지 말고, 미닫이도 닫지 말고, 밥먹을 때 소리도 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나중에는 호흡도 하지 말고, 시계소리도 나지 않게 하라고 강요한다. 결말에서 부인과 딸은 죽는다. 더 괴기스러운 것은 남편도 베개를 나란히 베고 죽은 채 발견된다는 점이다.

야스나리는 이 소설에 대해 "사랑의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사랑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치고는 너무나 괴기스럽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 내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남편에게 들린다는 설정도 그렇고 나중에 그들이 원인모를 죽음으로 발견된다는 설정도 그렇다. 야스나리는 이렇게 후기작으로 갈수록 판타지적 경향을 보인다.

특히 야스나리는 환청(幻聽)과 환시(幻視)를 자주 활용한다.

앞서 거론한 소설 '산소리'의 주요 모티프도 환청이다. 주인공 신고가 산에서 나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면서 죽음의 공포를 대면하고 소설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환시가 나오는 대표적인 손바닥 소설이 '옥상 위의 금붕어'다. 첩의 딸인 소녀에게는 수족관 속 금붕어의 환시가 보이고,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금붕어를 입에 문 채 죽는다는 해괴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 대해 야스나리는 "인간의 해방을 그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금붕어를 물고 죽음으로써 소녀를 옥죄었던 출생의 저주, 즉 첩의 자식이고 사생아였다는 저주가 풀린다는 뜻이다.

야스나리의 신비주의와 마성은 현실에는 아름다움도 깨달음도 없다는 그의 가치관과 맞아떨어지는 문학적 경향이다.

그에게 현실은 이미 죽은 것이었다. 젖먹이 때 부모가 죽고, 소년이 되기도 전 누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그에게 현실이 이미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원체험을 가진 야스나리에게는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현실부정의 욕망'이 이글거린다. 야스나리 소설을 보편적인 시작에서 보면 안되는 이유다. 보편적인 시각으로 야스나리의 내면을 만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또 여성의 문란함을 소재로 자주 차용한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여성의 무정조(無貞操)'라는 말로 분석한다. 이 단어 역시 우리 정서에서는 거부감이 드는 말이다. 이 무정조성에 대해서도 야스나리는 묘한 말을 남겼다.

"나는 무정조 자체를 쓴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상징으로서 무정조를 노래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비애와 자유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버리면 재미가 없다."

야스나리가 평생을 살면서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을 일별해보면 그를 움직인 가장 큰 동인이 콤플렉스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귀족 콤플렉스, 죽음 콤플렉스, 고아 콤플렉스, 왜소함에 대한 콤플렉스, 남성성 콤플렉스, 패배한 일본 콤플렉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콤플렉스들이 모여 야스나리 문학이라는 누구와도 닮지 않는 거대한 산을 세운 것이다. 거대한 산이기에 야스나리 문학은 캐도 캐도 끝이없다. 그리고 그 산은 유쾌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마성은 쉽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51.그는 늘 그랬듯 죽음마저도 설명하지 않았다


1972년 4월 16일 오후 1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의 책 추천사를 쓰다 말고 가마쿠라 하세의 집을 나선다. 함께 살던 히데코 여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후 2시경 한 택시기사가 복잡한 유이가하마(由比ヶ浜) 도로 위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한다. 30분쯤 후 택시기사가 태우고 있던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유이가하마 거리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노인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택시기사가 그의 앞에 차를 세우고 행선지를 묻자 노인은 즈시마리나 리조트로 가 달라고 말한다. 택시에 탄 노인이 야스나리인 것을 알아챈 기사가 반갑게 인사하고 이것저것 말을 걸었지만 야스나리는 묵묵부답으로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오후 3시쯤 택시에서 내린 야스나리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려 자신이 4개월 전에 구입한 417호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사람들 눈에 띈 야스나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밤 9시 45분. 아무 연락 없이 야스나리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집안 가사도우미가 즈시마리나로 가서 이 사실을 경비원에게 알린다. 경비원은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내부로 들어가자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고 야스나리는 사망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한 즈시 마리나 리조트 앞에서 바라본 바다 



경찰은 야스나리의 사망시간이 오후 6시쯤이었다고 발표한다. 주민들은 그보다 1시간쯤 전인 5시께부터 이미 가스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

유서는 없었고 경찰은 수사 결과 '일산화가스 중독이 원인이 된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야스나리는 왜 이룰 것 다 이룬 늦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스스로 살아서 해야 할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순간적인 충동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가 죽은 지 45년. 아직도 수많은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필자는 야스나리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죽음의 형식을 갑작스레 실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한다. 야스나리는 종종 "죽음을 미화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정신 구조에서 죽음은 병마에 시달리다 끌려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정리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때였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몇 가지 짚히는 것들이 있다.

야스나리는 죽기 얼마 전 맹장염 수술을 받고 건강이 많이 쇠약한 상태였다. 게다가 사촌들의 잇단 죽음과 팬클럽 행사를 진행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병 수발을 했던 할아버지처럼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죽음의 형식으로 이미 자살을 생각해놓은 그는 심신이 무너진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혹자는 불과 4년 전 노벨문학상을 받고 모든 명예와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시기에 그가 자살한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에게 명예 따위는 오히려 짐이 되고 작가를 위축시켜 버리는 것"이라고 했던 그의 노벨상 수상 후 발언을 떠올리면 명예가 그의 자살을 막아섰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야스나리는 수상 이후 창작 활동이 지지부진한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 야스나리에게 극도의 허무감을 안겨준 사건이 애제자이자 동료였던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이다. 미시마는 야스나리보다 2년 앞선 1970년 자위대 청사에서 쿠데타를 요구하며 할복자살한다. 둘은 일본적 미학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시작점은 비슷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시마는 극우 국가주의로 흘렀고, 야스나리는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버렸다. 야스나리는 다른 길을 갔지만 미시마의 재능을 누구보다 아꼈다. 죽음마저 조롱의 대상이 된 미시마를 보며 그는 깊은 허무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속해 있었던 한 시대의 종말을 읽었을 수도 있다.

야스나리의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야스나리는 그 무렵 하이미나루라는 수면제에 중독돼 있었다. 진정 효과가 너무 강력해서 현재는 일본 내에서 생산 판매를 하지 않는 약물이다. 이 때문에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하나가 가스관 조작 실수다. 불과 4개월 전에 구입한 리조트인 데다 상주하고 있던 상태가 아니어서 가스관 조작이 미숙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중에 히데코 여사가 야스나리가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었다는 언론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면서 이 의혹은 증폭되기도 했다.

미안하고 위험한 말이지만 유서 없는 자살은 야스나리와 너무 잘 어울리는 죽음의 방식이다. 그는 늘 그랬듯 죽음마저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홀연히 이사 가듯 다른 세상으로 갔을 뿐이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




52. 나는 야스나리라는 문 앞에 여전히 서 있을 뿐.



▲ 카마쿠라 공원묘원에 있는 야스나리 묘소



야스나리의 무덤은 가마쿠라 공원 묘원에 있다. 가마쿠라 시내에서 버스로 30분 안팎이면 닿는 풍광이 아주 좋은 곳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잘 꾸며진 공원 묘원 진입로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주차장과 사찰, 관리사무소가 나온다.

내가 야스나리 묘소를 찾아간 것은 7월 초순. 진입로에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의 꽃들이었다. 흡사 남국에 온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꽃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마치 인간의 마지막 처소를 장식하듯 현란하게 피어있었다.

관리사무소는 고요했다. 명절과는 상관없는 더운 여름날인 데다 평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야스나리 무덤의 묘지번호를 물었다. 직원의 첫말이 뜻밖이었다.

"아 그러세요. 차를 가지고 오셨나요?"
"차가 없는데요."
"아, 그럼 힘드실텐데."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지도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직원은 지휘봉 같은 걸로 복잡한 도면의 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가는 길은 두 가지 코스가 있다고 덧붙였다.


 첫 번째는 힘들더라도 계단을 이용해 가로질러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차도를 따라 빙빙 돌아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직원이 적어준 묘지번호를 손에 들고 나와서 공원을 둘러보니 그 면적이 엄청났다. 커다란 몇 개의 산등성이가 모두 묘지였다. 내 시야에 잡히지 않는 산등성이가 더 많다고 했으니 살면서 내가 가 본 공동묘지 중 가장 큰 곳이 아니었나 싶다.

난 급한 마음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계단 끝까지 올라가서 또 다른 산등성이 무덤군에 올라야 야스나리 무덤이 보인다고 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힘겨웠다. 한 70~80계단을 오르면 도로를 만나 계단이 잠시 끊겼다가 다시 시작되는 식이었다. 처음 70계단을 오르자 금세 체력의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날은 더웠고 태양은 뜨거운데 아뿔사 내게는 물 한병이 없었다. 그래도 돌아갈 수는 없어서 계속 올라갔다.


첫 번째 등성이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니 엄청난 무덤군이 펼쳐져 있었다. 보통 화장을 하고 유골만 작은 묘소에 모시는 게 보편적인 일본의 장례문화인데 이렇게 넓은 공간에 널찍하게 묘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마도 장례문화가 점점 간소화되기전 조성된 묘소들이거나 아니면 부유한 사람들의 묘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봤다.

야스나리 묘소는 산 정상 부근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꽤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묘소 앞에는 가와바타가 묘소(川端家墓所)라고 적혀 있었고, 촛불을 켜놓는 석등, 간단한 약력이 새겨진 비석 등이 있었다. 가족묘라고 써있기는 하지만 다른 누가 묻혀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 오사카에서 사망한 가족들이 합장되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상에 오르니 그제서야 바람이 조금 불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한참을 무덤가에 앉아 있었다.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나섰던 과정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야스나리의 길을 따라가는 건 쉽지 않았다. 번번이 비틀대야 했고, 번번이 넘어져야 했다. 그는 때로는 미로 같은 장치를 만들어 나를 괴롭혔고, 가끔은 안개를 피워 나로 하여금 방향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야스나리는 몇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다. 야스나리는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의 기질과 성장 과정은 조화롭다기보다는 파편적이고,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보다는 기이한 특수성을 더 많이 지니고 있었다.

야스나리는 친절하게 자신을 설명하는 법이 없었기에 그를 찾아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문은 끝이 없었다.

야스나리라는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없이 문을 열었지만 아직도 나는 야스나리라는 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
 

[출처] : 허연문화전문기자 시인 : <허연의 일본문학기행> / 매일경제 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