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2016년 겨울 정읍과 의인 박잉걸(朴仍傑)

불치병 걸린 부자 박잉걸, 적선하며 살던 걸치기마을
동진강변에는 '동학 혁명' 만석보 말뚝…
일제강점기 화호리 평야, 구마모토 농장 흔적…
군수 조병갑은 판사로 복귀…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
정읍 땅에서 마주친 2016년 대한민국의 민낯

[박종인의 땅의 歷史]

사람들은 숨긴다. 창피한 일을 숨기고 남 손길 탈까 두려워 귀한 일도 숨긴다. 그래서 역사가 은폐되고 왜곡된다. 그런다고 영원히 은폐되는가. 기록이 없어도 다행히 흔적은 남아, 2016년 겨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즐겁다. 정읍으로 간다.

백암마을 자지바우

박잉걸이 세운 백암마을 남근석.
박잉걸이 세운 백암마을 남근석.

1676년 전북 정읍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난 박잉걸(朴仍傑)은 의인이었다. 부지런한지라 젊을 적부터 큰돈을 만졌는데, 환갑 되던 해에 온몸에 비늘이 돋는 병을 앓게 되었다. 돈도 소용없었고 노력도 소용없었다. 산 너머 마을로 장가간 아들이나 보고 죽겠다고 굴치라는 고개를 넘는데, 마주친 수염 하얀 노인이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적선(積善)을 하시게."

그 길로 박잉걸은 재산을 털어 고갯길 두 개를 넓히고 홍수 때마다 무너지는 다리를 보수하고 마을 어귀에 움막을 짓고 옷가지와 신발을 걸쳐놓아 아무나 가져가게 만들었다. 마을 남정네가 죽어나가고 흉사가 잇따르자 당산나무 아래에 잘생긴 남근석(男根石)을 세워 재앙을 막았다.

그 고갯길이 굴치와 구절치다. 움막이 있던 그 마을 입구가 '걸치기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걸치기방아간, 걸치기휴게소, 걸치기세탁소가 있다. 속칭 '자지바우'라는 그 남근석은 백암마을 앞에 서 있다.

착한 부자 박잉걸 후손들은 효자였다. 5대손인 박덕래는 호랑이를 감동시켜 타고 다녔다. 호랑이에 씌웠던 굴레와 가죽끈이 가문에 남아 있다. 증손자 박연진(朴延鎭)은 효자이기도 했고 도학에 정통한 학자이기도 했다. 일문삼효(一門三孝), 삼대에 효자를 낳은 가문이었다.

1820년 효자 박연진과 관찰사 이서구

고창 선운사 마애미륵불.
고창 선운사 마애미륵불.

1820년 어느 날 박연진에게 전라관찰사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찾아왔다. 이서구는 조선 후기 실학 시대 4대 시가 중 한 명이다. 시(詩)는 물론 토목, 수리, 천문, 예언에 능하고 행정에 능한 인물이었다. 박연진과 도학을 논한 끝에 이서구는 고창 선운사를 찾았다. 선운사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 배꼽에 '세상을 바꿀' 비결(祕訣)이 있는데, 벼락살도 함께 있어서 꺼내는 순간 벼락 맞고 죽는다는 것이다.

예순여섯 살 먹은 노인이 낑낑대며 올라가 미륵불 복장 감실을 열었다. 과연 책이 한 권 있었다. 표지를 바삐 넘겨보았다. 이리 적혀 있었다. '이서구가 열어본다(李書九開坼·이서구개탁).'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식겁한 이서구는 책을 밀어넣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1892년 고창 동학(東學) 접주 손화중 무리가 미륵불을 찾았다. 스님들 제지를 뿌리치고 손화중은 절벽으로 올라가 비결을 꺼냈다. 이서구한테 벼락살이 떨어졌으니 날벼락은 치지 않았다. 동학 비서 탈취 사건은 여러 문서에 기록돼 있는 사실(史實)이다. 그런데 세상은 변하였는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정읍

1892년 4월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했다. 아귀 같은 자였다. 돈 되는 곳에는 모조리 주둥이를 꽂아넣고 백성들 기름과 피를 빼먹는 자였다. 닥치는 대로.

동진강 들녘 배들평야는 넓디넓다. 백성들은 동진강에 보(洑)를 짓고 농사를 지었다. 흉년이 나도 만석이 나온다고 만석보(萬石洑)라 이름 지었다. 조병갑은 그 아래를 또 거대한 보로 틀어막고 물세를 받았다. 물이 넘쳐 오히려 농사를 망쳤지만 개의치 않았고, 물세 감면을 호소하는 농민들을 잡아 죽였다. 그 가운데 전창혁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동학 지도자 전봉준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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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변에 있는 만석보 말뚝들. 동학혁명 진앙이다.

흉흉한 민심에 익산으로 도망간 조병갑은 2년 뒤 고부로 재부임했다. 일관성 하나는 끝내주는 학정(虐政)에 농민들이 낫으로 대나무를 베고 창을 만들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손에 고부 관아가 부서지고 쌀 창고 문이 열렸다. 조병갑이 세운 새 만석보는 반파됐다. 조병갑도 쫓겨났다. 새 세상이 온 듯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보낸 관료 이용태가 더한 놈이 아닌가. 그리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개시됐다. 사령관은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이었다. 군수 처단 차원을 넘어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건, 혁명이 시작됐다. 불과 122년, 4세대 전 이야기다. 고부 관아터도 남아 있고 만석보 만들 때 박은 말뚝들도 남아 있다.

1894년 3월 고창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5월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대파했다. 청(淸)과 일본이 개입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한성에서 세 갈래로 남하하며 농민군을 토끼 몰듯 공주 우금치로 밀어넣었다. 명분과 의지가 신무기까지 이길 수는 없었다. 11월 우금치에서 동학군은 전멸했다. 고창에 있는 동학혁명 발상지도, 황토현 전적지도 우금치도 그대로 남아 있다. 혁명은 실패했다.

동학혁명기념탑과 동학 접주 박성빈

화호리 구마모토 농장 관사.
화호리 구마모토 농장 관사.

황토현 전적지에는 기념관과 기념탑, 농민들을 기리는 사당이 서 있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허허하다. 사당 앞 광장 왼쪽에는 5공화국 때 만든 '황토현 전적지 정화(淨化) 기념비'가 서 있다(도대체 무엇을 정화하겠다는 것인가).

사당 뒤편 언덕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서 있다. 5·16 군사 쿠데타 2년 뒤인 1963년 10월 건립됐다. 군사 쿠데타를 동학혁명 연장선으로 미화했다는 비난을 받는 탑이다. 탑에 적힌 구호 가운데 보국안민(輔國安民)의 '輔'자는 '保'자로 그릇되게 적혀 있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본다.

박성빈(1871~1938)이라는 선비는 경상도 동학군 접주였다. 무과에 합격했지만 동학에 동참해 전투를 하다가 생포돼 구사일생했다. 이후 초야에 묻혀 가난하게 살았다. 박성빈에게 아들이 여럿 있었다. 셋째 아들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남로당 당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1946년 10월 대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동생은 형이 죽고 2년 뒤 여순 반란사건에 간여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사면됐다. 훗날 대통령이 된 이 사내 이름은 박정희다. 동학(東學)에 '난동' 꼬리를 떼고 '혁명'이라 명명한 사람도 박정희다. 역사라는 게 대개 이렇다. 앞에서 보면 군사 쿠데타 미화 도구요, 뒤에서 보면 숨은 가족사가 보인다.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은 동학을 동비(東匪)라 불렀다. 도적떼라는 뜻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은 젊을 적 황해도에서 동학군을 토벌했다. 정읍 땅에 서면, 역사가 입체적으로 보인다.

1898년 대한제국 법원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조병직, 배석판사 중 하나는 조병갑이다. 농민 고혈을 짜내다 쫓겨 간 바로 그 조병갑이다. 훗날 1대 교주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의 죄를 없애고 사면하기를 고종에게 요청한 사람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화호리 구마모토 농장

엉망진창인 대한제국이 결국 망했다. 논이 호수처럼 넓은 정읍 화호리(禾湖里) 마을에는 오사카 출신 고리대금업자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가 들어왔다. 지주들을 끌어들여 논을 대거 매입했다. 땅값이 바닥일 때 그 논들을 사들여 구마모토는 왕국을 건설했다. 쌀창고만 다섯 채가 있었다. 가끔 일본에서 오면 농장 언덕 별장에 묵었다. 별장 아래에는 농무과장, 경리과장 관사가 있었다. 언덕 뒤편에는 노무자 사택도 있었다. 자체 병원도 있었다. 농장 둘레에는 돌담을 쌓고 그 위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해방 후 창고 한 채는 병원으로 쓰이고 훗날 화호여고 교실로도 쓰였다. 2016년 겨울, 허물어졌지만 모든 게 남아 있다. 왕국을 내려보는 구마모토 별장도, 과장들 관사도, 담벼락도, 쌀창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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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 화호리에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남아 있다. 왕국이라 불리던 구마모토 농장이다. 쌀창고는 병원으로, 여고 교실로, 약장수 공연장으로 쓰이다 폐허가 됐다. 거기에 우리 역사가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화호중앙병원으로 쓰이던 1951년 기념사진과 구마모토 농장 쌀창고.
화호중앙병원으로 쓰이던 1951년 기념사진과 구마모토 농장 쌀창고.

흔적이 남아 있기에 볼 수 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볼 수 있다. 누가 어떤 덕을 쌓아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왔는지, 누가 어떤 짓을 숨기려고 작당했기에 2016년 겨울 대한국인(大韓國人)이 분노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정읍 여행수첩]

〈볼거리〉

정읍

1. 구마모토 농장: 신태인읍 화호리. 미곡 창고와 구마모토 별장, 농무과장과 경리과장 집 등이 남아 있다.

2. 만석보 유적: 돌로 만든 만석보 유지비 건너편을 보면 강변에 말뚝들이 보인다. 만석보 추정 흔적이다. 만석보 혁파비는 유적지에서 차량으로 5분 거리.

3.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과 기념탑 등. 기념탑은 전적지 관통 도로 오른쪽 사당 뒤.

3. 백암리 남근석: 칠보면 백암리. 마을 입구 다리 부근이 걸치기마을. 남근석 주변에 돌장승 부부.

4. 피향정:벼락 비석군 오른쪽 두 비석을 볼 것. 맨끝은 군수를 지낸 독립지사 홍범식, 둘째는 이서구 선정비다.

5. 정읍동초등학교: 1946년 이승만 정읍발언이 있었던 장소. 그 옆 향교가 당시 건물 그대로 남아 있다.

〈맛집〉 현대옥: 콩나물국밥. 자칭 '대한민국 최고'. 전북식 모주가 곁들여 나온다. 아침식사 가능. 정읍시 중앙1길 15, (063)537-5789.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23/20161123001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