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경주 왕릉에 숨은 신라 통일의 비밀과 '감격선생' 노세 우시조

"경주를 보려면 왕릉과 남산을 보라"
곳곳에서 만나는 신라 왕릉, 천년 왕국 역사를 상징
18세기 이후 가문 중시 사회 풍조
가문 시조 찾기 열풍에 기존 기록에 없던 왕릉들이 대거 등장
묻힌 왕이 누군지 정확하게 확인된 왕릉은 많이 없어
백제와 고구려 물리치고 강대국 당과 무력 항쟁 끝에 꽃 피운 신라 문화
그 실체를 알기 위해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 한국 학자 이근직은 경주에 무한 애정

박종인의 땅의 歷史 로고 이미지

김춘추의 복수극

저 쓸쓸하고 웅장한 왕릉들을 대면하려면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읽어야 한다. 서기 642년 음력 7월 신라 대야성 성주 김품일과 아내 고타소가 죽었다.

성을 침략한 백제군은 두 사람 목을 잘라 백제 수도 사비성 감옥 바닥에 묻었다. 소식을 들은 신라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삼국사기)' 그가 말했다. "백제에 원수를 갚으리라." 죽은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고 김품일은 사위였다.

18년이 흘렀다. 서기 660년 음력 8월 2일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신라왕 태종이 부여를 찾았다. 그가 김춘추다. 백제에 망명해 대야성을 함락시킨 배신자 검일을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 죽이고 백마강에 시체를 버렸다. 딸과 사위 목을 잘라간 원수에 대한 복수전이었을 뿐,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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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최강대국 당과 무력 투쟁을 통해 살아남은 왕국이다. 경주는 천년 왕국 신라의 왕경이다. 경주 남산 기슭 삼릉은 신라 박씨 왕인 아달라(8대), 신덕(53대), 경명(54대)왕과 55대 경애왕릉이 있는 숲이다. 왕릉에 누가 묻혀 있는지에 대해 정확한 기록은 많지 않다. /박종인 기자

백제 멸망을 위하여 김춘추는 일찌감치 당 태종을 만나 나당연합을 제안했다. 그때 태종이 말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니,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신라에 주어 편안하게 하겠다."

그런데 이 당 제국이 배신한 것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개선하자 당 고종이 힐난했다. "신라는 왜 가만 놔뒀느냐."

부여 함락 5년 만에 당은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을 공주 취리산으로 불러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과 치욕스러운 화해를 강요했다(취리산 회맹식). 백제 땅과 고구려 땅에 괴뢰정권을 세워 당 직할 통치를 시도했다. 670년 사신이 가져온 당 정부 문서를 보니, '백제 고토를 백제에 돌려주라'고 돼 있었다. 이에 반발한 신라 군부가 일으킨 전쟁이 나당전쟁이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서영교 중원대 교수)'에 따르면 약체 신라가 무리한 전쟁을 계획한 이유가 있었다. 7세기 당 제국은 서쪽에서 토번(티베트)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토번은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침입할 정도로 위험했다. 669년에는 신라 엔지니어 구진천을 불러 1000보를 나간다는 박격포(쇠뇌)를 만들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도 서쪽으로 이동해 참패했을 정도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 1만 명과 함께 2만 대군으로 요동을 선제공격했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가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675년 매초성에서 당군 20만 대군에 대승을 거두고 이듬해 기벌포 해전에서 다시 대승을 거뒀다. 당 세력 격퇴가 임박한 듯했다.

나당전쟁과 삼국통일

남산 여행지도

문무왕~성덕왕 대 삼국사기에는 '기아' '사면' '조공' '사신'이라는 단어가 숱하게 등장한다. 수십만 외국 군사가 옮겨온 전염병에 숱한 국민이 죽고, 식량과 군수품 징발에 범죄가 급증하고 민심이 흉흉했다는 방증이다. 대동강 이남 영토를 회복하려면 백제, 고구려 노동력이 절실했다. 신문왕은 대동강 이남 옛 고구려 땅과 백제 땅에도 주(州)를 설치하고 군부대 또한 이들을 수용했다. 그 무렵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는 개념이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한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영토 회복의 필요에 의해 이들 옛 유민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신문왕은 중국 제도를 받아들이고 귀족세력을 정리하는 외교술과 왕권 강화정책을, 그 아들 성덕왕은 적극적인 외교로 당에 맞섰다. 신라 정부는 셀 수 없이 많은 사신을 당으로 보내 영토 공인을 요청했다. 675년 이후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고도 공식 인정이 없었다. 군부를 포함한 신라 지도부는 조바심을 냈다. 전투에 이기고 잘못했다고 빌었고 지고도 사과를 했다. 왕족 미녀 둘을 진상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735년 성덕왕 34년 당 정부는 대동강 이남에 대한 통치권을 신라에 공식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성덕왕이 당 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백제, 고구려 문화를 융합해 이후 정확하게 200년 동안 왕조를 이어가게 되었다. '일통삼한'은 고려 시대에 '한 민족'이라는 이념으로 진화하고 21세기 대한민국 시대까지 민족주의 사관의 핵심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

천 년 역사의 정수(精髓), 남산

그리하여 수도 경주에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다. 통치이념이 된 불교가 경주 전역을 찬란하게 빛냈다. 그 정수가 바로 남산이다. 돌부처와 돌탑, 폐사지가 남산을 오르는 골짜기마다 빽빽하다. 삼국유사 표현을 빌리면 '기러기보다 많았고 별보다 많았다'. 칠불암 마애석불군은 그 백미다. 40분 남짓한 등산길 끝에 일곱 부처와 보살이 나타난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 앞에 사방불이 새겨진 바위가 앉아 있다. 땅에서 솟고 바위에서 튀어나온 느낌이다. 그 위 신선암 절벽에는 보살이 앉아 있다. 연꽃 위에 유유자적 앉아 있다. 보살 왼쪽 아래 경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거기가 바로 불교 최고 성역인 수미산이요, 신라를 지키는 도솔천이다. 경주 남산연구소 소장 김구석이 말했다. "경주 문화 중심은 남산이다."

왕릉의 비밀

남산 기슭에는 역대 왕릉이 흩어져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우물 나정(蘿井) 터가 있다. 5분 거리에 신라 말 경애왕이 견훤에게 죽은 포석정이 있다. 왕릉이 있고 왕릉을 에워싼 송림이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인 18세기 들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왕릉 숫자가 급증한 것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를 비롯한 왕 4명과 왕비가 묻혀 있다는 오릉(위쪽)과 신문왕릉.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를 비롯한 왕 4명과 왕비가 묻혀 있다는 오릉(위쪽)과 신문왕릉.

박혁거세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 신라왕 56명 가운데 18세기 초까지 위치가 확인된 경주 왕릉은 김유신묘까지 포함해서 10곳밖에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초 21개 왕릉이 더 '발견된다'. '신라왕릉연구(이근직 전 경주대 교수)'는 "임진왜란 이후 보수화한 조선사회에서 족보와 시조를 찾는 문중들이 왕릉의 재조정작업을 이끌었다"고 했다. 문제는 위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탓에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한 후 일정한 범위 내에 후손이 없는 대형고분을 선택해서 해당 씨족이 능묘로 비정했다"는 것이다. 왕릉 찾기 열풍이 과도하자 1730년 유의건이라는 경주 학자는 '나릉진안설'이라는 논문에서 "글자 한 자도 모르는 무지한 촌사람들 말을 믿고 정했다"라고 비판했다.

꿈을 꾸고 찾은 설총묘

그리하여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는 박씨 왕 10명의 왕릉이 몰려 있게 되었다. 박혁거세를 비롯한 초기 왕과 왕비 5명이 오릉에, 또다른 박씨 왕 4명이 삼릉에 누워 있다. 세월이 몇백 년씩 차이 나지만 시조부터 막내까지 순서대로다. 현재 신문왕릉은 조선 중기까지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의 릉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신문왕릉 남쪽 성덕왕릉 옆에 있는 무덤이 효소왕릉으로 규정되고 효소왕릉은 신문왕릉이 되었다. 천년 동안 감포 앞바다 대왕암으로 인정됐던 문무왕릉은 18세기 말~19세기 초 괘릉으로 바뀌었다가 1973년에야 대왕암으로 복원됐다. 설총묘가 발견된 기록은 이렇다. "近年因夢子孫修築建碑(최근 자손이 꿈을 꾸고 찾아내 비석을 세웠다)."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실체가 모호한 유적은 그 앞에 '전(傳)'이라는 머리말이 붙는데, 경주 왕릉 어디에도 이 단어가 붙은 왕릉은 없다. 왕릉은 천 년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상징이다. 그런데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실체는 가려지고 형상만 아름답게 남은 뭉뚱그려진 역사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노세 우시조와 이근직

지난주 경주 남산 동쪽 황복사지에서는 진귀한 유적 발표가 있었다. 무너진 왕릉으로 생각했던 곳이 만들다 만 미완성 왕릉임이 밝혀진 것이다. 1928년 그 황복사지를 처음 발굴한 사람 이름은 노세 우시조(能勢丑三略·1889~1954)다. 1926년 스웨덴 왕자와 함께 경주를 찾았던 이 사학자는 경주 유적에 반했다. 특히 그가 집착한 유물은 십이지신상이었다.

경주를 사랑한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
경주를 사랑한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

사람들이 거대 유물에 몰려다닐 때 노세는 탑 아래, 왕릉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을 연구했다. 황복사지 논두렁에 묻혀 있던 십이지신도, 십이지신이 새겨진 경주 남동쪽 원원사지 삼층석탑 두 개도 그가 발굴했다. 원원사는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 군부가 세운 절이다.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석물들을 모아서 석탑을 복원한 사람도 노세였다. 경비도 모두 자기 주머니에서 나왔다.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노세를 본 사람들은 그를 '감격선생'이라 불렀다.

2주 전 그 전 발굴과정을 촬영한 사진이 경주학연구원에 의해 공개됐다. 1920~30년대 유적지 실태를 비교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경주학연구원은 '신라왕릉연구'로 세상을 뒤집어놓은 학자 이근직이 만든 연구소다. 연구원장 박임관이 말했다. "노세 우시조와 이근직은 객관적 접근 방식과 경주에 대한 애정을 나눠 가졌다."

천 년을 생존한 왕국, 신라였다. 김춘추라는 사내의 집념, 그리고 동료와 후배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역사였다. 그 역사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내들 덕분에 우리는 천년 왕국의 진면모에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경주에 가거들랑 그들의 흔적을 보라. 이근직은 2010년 경주 왕릉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이듬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48세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15/20170215003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