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의 역사 - 2>

 

@ 남자 쇼트트랙의 역사 - 1980년대

   1976년에 개최된 최초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미국의 Alan Rattray 선수가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선수권 대회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1회 대회 준우승자였던 캐나다의 Gaetan Boucher(게이튼 바우처)1977년 제2회 대회와 1980년 제5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사상 최초의 2회 우승자에 등극했습니다.

 

   게이튼 바우처는 본래 롱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분야의 전설적인 선수로서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부문의 금메달 2, 동메달 1개를 획득했으며 1980년 레이크플레시드 동계올림픽에서도 은메달 1개를 획득한 바 있었습니다. 게이튼 바우처는 롱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분야의 세계선수권 또는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에서 수많은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였으며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해서 개인종합 우승 2, 준우승 3회를 차지하며 롱트랙쇼트트랙을 망라한 스피드스케이팅분야의 전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쇼트트랙의 종주국인 캐나다 선수들이 절대적인 강세를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Guy Daignault(가이 데이그놀트) 선수는 개인종합 우승 2, 준우승 1, 31회를 기록했습니다.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남자 개인종합 우승 2회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를 통틀어서 단 9명뿐입니다. 따라서 쇼트트랙 선수들이 뛸 수 있는 대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1980년대 초창기의 역사에서 세계선수권 종합우승 2회를 기록한 것은 대단한 위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선수권 남자 개인종합 통산 2회 이상 우승자)

=> 게이튼 바우처, 가이 데이그놀트, 가와이 도시노부, 미첼 데이그놀트,

마크 가뇽, 리자준, 김동성, 안현수, 이호석)

 

   우리나라의 쇼트트랙 팬들에게는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김기훈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부터의 역사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쇼트트랙이 대중화될 무렵에 명실상부한 쇼트트랙의 황제로 등극한 선수가 김기훈이었으며, 이후 쇼트트랙 황제의 계보는 김기훈 -> 마크 가뇽 -> 김동성 -> 안현수(빅토르 안)’으로 이어졌습니다.

 

   김기훈이 쇼트트랙에 데뷔할 무렵인 1980년대 중~후반 무렵에 당시 세계 쇼트트랙의 패권을 주름잡고 있던 선수들은 일본 쇼트트랙의 쌍두마차인 가와이 도시노부, 이시하라 다쓰요시 그리고 캐나다 쇼트트랙의 에이스인 미첼 데이그놀트였습니다. 가와이 도시노부는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 2회를 기록했으며,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 1, 준우승 2, 31회를 기록했습니다. 미첼 데이그놀트는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 2회를 기록했는데, 1987년 대회에서는 가와이 도시노부와 공동우승을 기록했습니다.

 

   쇼트트랙이 사상 최초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종목에서 미첼 데이그놀트는 프레드릭 블랙번과 함께 캐나다 대표팀을 이끌며 은메달을 획득했고 가와이 도시노부와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일본 대표팀을 이끌며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밖에도 가와이 도시노부는 1986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1, 은메달 1개를 획득했습니다.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1986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3개를 획득했습니다.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전성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김기훈, 이준호 등과 아시아 정상을 놓고 경합을 벌였습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걸쳐서는 한국 쇼트트랙의 선구자인 김기훈, 이준호의 쌍두마차와 함께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가 삼각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김기훈과 이준호는 국내 대회와 아시아, 세계 무대에 걸쳐서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드러냈으며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같은 국제대회에서는 김기훈과 오레일리가 치열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올드팬 중에서는 김기훈이 이준호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붙이는 걸 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김기훈과 이준호는 모두 스피드스케이팅선수 출신으로 쇼트트랙으로 전향했습니다. 쇼트트랙은 똑같이 시작했지만, 이준호가 김기훈보다 스피드스케이팅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김기훈이 이준호에게 운동선수로서 선배라는 호칭을 붙인 것입니다. 한편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는 자료를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네이버캐스트스포츠인 김기훈코너에서 김기훈 선수가 쇼트트랙 선수로 데뷔할 당시 가와이 도시노부, 이시하라 다쓰요시, 윌프레드 오레일리의 경기 장면 비디오를 보면서 연습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따라서 영국의 오레일리가 대한민국의 김기훈, 이준호보다 국제무대에서 먼저 데뷔한 베테랑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는데 영국의 오레일리가 500m10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고 대한민국의 김기훈이 1500m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대한민국의 이준호가 3000m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따라서 김기훈, 이준호, 오레일리는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반열에 올랐고 이 중에서 오레일리는 사상 최초의 올림픽 2관왕에 등극했습니다.

 

   본래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상징성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업적입니다. 하지만 ISU(국제빙상연맹)의 쇼트트랙 역사 자료 정리는 그야말로 개판 오분전입니다.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빙상연맹을 가리켜서 속된 말로 빙신연맹’, ‘빙엿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ISU(국제빙상연맹) 역시 빙신연맹이기는 마찬가지여서 과거 역사 자료, 기록물에 대한 정리가 엉망이고 1980~90년대 전설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언론매체에서도 1990년대 또는 그 이전 선수들은 거의 언급조차 잘 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연맹의 과거 역사 자료, 기록 관리가 엉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 시리즈에서만큼이라도 초창기 쇼트트랙의 역사 자료를 제대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국제 연맹 또는 협회의 역사자료 관리가 엉망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역사적 사실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닌 만큼 후세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이 좀 있습니다.

 

[부연 설명: 예를 들어 우리나라 고구려 역사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호칭이 1980년대에는 광개토왕’, 1990년대에는 광개토대왕’, 2000년대에는 광개토태왕으로 변했는데, 이는 후세에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비록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의 역할에 의해서 그 호칭이나 평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본명: 고담덕’,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과 그 업적은 결코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 스포츠 분야에서도 역사자료 기록과 관리에 대한 역할이 좀 바로잡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무튼 비록 쇼트트랙 종목의 과거 역사 기록과 자료 관리가 엉망이기는 하지만, 1980년대 쇼트트랙의 전설들과 최초의 세계선수권자내지는 세계선수권 2회 우승자에 대한 전설 대우, 그리고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기훈, 이준호, 오레일리 선수에 대한 전설 대우는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 남자 쇼트트랙의 역사 -1990년대

   김기훈은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3관왕을 차지한 데 이어서 1989년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2위에 오르며 한국 쇼트트랙의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한창 승승장구하며 상승세를 타던 김기훈은 부상으로 약 1년 동안의 공백기를 가졌는데, 김기훈의 공백기였던 1990년 세계선수권에서 이준호가 개인종합 우승을 하면서 이준호는 한국 쇼트트랙 최초의 세계선수권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김기훈은 부상에서 복귀한 뒤 199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4관왕에 올랐고 1991년 세계선수권에서는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에 이어서 개인종합 2위에 올랐습니다.

 

   김기훈과 이준호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획득 경쟁을 벌이며 한국 쇼트트랙을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습니다. 김기훈은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3관왕, 199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4관왕에 올랐고 이준호는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2관왕, 1993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4관왕에 올랐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출범한 쇼트트랙 아시아선수권’, ‘아시아컵 쇼트트랙등의 대회에서도 김기훈, 이준호는 일본, 중국의 선수들과 경쟁하며 대한민국 쇼트트랙을 아시아 최강으로 이끌었습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이 사상 최초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남자부에서는 1000m 한 개 종목에만 개인종목 금메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당대의 세계 정상급 선수였던 대한민국의 김기훈과 이준호,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 캐나다의 미첼 데이그놀트와 프레드릭 블랙번, 일본의 가와이 도시노부, 이시하라 다쓰요시, 뉴질랜드의 맥밀런 등의 선수들이 사상 최초의 올림픽 (정식종목)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하기 위해 경합을 벌였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4년 전 시범종목 시절의 2관왕이자 직전 시즌 세계선수권자였던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김기훈 선수와 이준호 선수도 4년 전 시범종목 시절의 금메달리스트이자 직전 시즌 세계선수권 개인종합에서 각각 2위와 3위에 오르며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당초 남자부 금메달은 오레일리, 김기훈, 이준호의 3파전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특히 김기훈과 오레일리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왕년의 강자였던 미첼 데이그놀트, 이시하라 다쓰요시 등도 전성기가 지나기는 했지만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한 투지를 불태웠고, 캐나다의 차세대 주자였던 프레드릭 블랙번도 이 대회를 통해서 처음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초반에는 김기훈과 오레일리가 모두 순항했지만 준결승에서 오레일리는 결정적인 실수로 넘어지면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김기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오레일리는 알베르빌의 실패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참가를 마지막으로 선수에서 은퇴했습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000m 부문에서 우리나라의 김기훈은 사상 최초의 올림픽 (정식종목)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했습니다. 캐나다의 블랙번과 우리나라의 이준호는 사상 최초의 올림픽 (정식종목) 은메달, 동메달리스트에 등극했습니다. 이어서 남자 5000m 계주(릴레이)에서 김기훈, 이준호, 송재근, 모지수로 구성된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김기훈은 사상 최초의 올림픽 (정식종목) 2관왕에 올랐습니다. 이준호도 개인종목 금메달 획득 실패의 아쉬움을 계주(릴레이) 금메달로 달래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프레드릭 블랙번과 미첼 데이그놀트 쌍두마차가 이끄는 캐나다는 계주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블랙번은 은메달 2개를 기록했습니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최강자로 올라선 김기훈은 올림픽 직후에 열린 1992년 덴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역사상 최초의 전관왕 신화를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쇼트트랙의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김기훈은 500m, 1000m, 1500m, 30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고 개인종합 금메달까지 거머쥐며 5관왕으로 전종목 석권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특히 예선부터 결승까지 모든 레이스에서 단 한 번도 1위를 내주지 않는 완벽한 레이스를 펼치며 덴버의 연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김기훈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도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김기훈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자로 한국에서는 채지훈, 캐나다에서는 마크 가뇽이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마크 가뇽은 1993년과 1994년 세계선수권에서 2년 연속으로 개인종합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며 새로운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채지훈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남자 1000m에서 김기훈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한 후 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릴레함메르의 영웅으로 등극했습니다. 특히 결승전에서 독주하던 이탈리아의 미르코 빌레르민을 상대로 막판 스케이트날 내밀기대역전극을 펼친 장면은 두고두고 명승부로 회자되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한 채지훈은 1995년 시즌에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채지훈은 세계선수권 전초전 격인 199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4관왕에 오른 데 이어서 1995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1500m, 500m, 3000m 금메달을 석권하고 개인종합 금메달까지 거머쥐며 4관왕으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이어 세계선수권자에 오른 채지훈은 라이벌 마크 가뇽과의 경쟁 구도에서도 한발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채지훈은 부상으로 상승세가 잠시 주춤했는데, 1996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라이벌 마크 가뇽에게 개인종합 우승을 내주며 다시 한발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96년 시즌까지는 여전히 채지훈이 세계 정상급 선수로 건재함을 과시하며 그 시절 획득할 수 있는 대부분의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채지훈은 1996년 시즌에 동계 아시안게임 3관왕,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2, 10월 세계랭킹대회 우승으로 연말 세계랭킹 1위 등극, 아시아선수권 4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채지훈은 다시한번 부상을 당하면서 또다시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채지훈은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개인종목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멤버로 참가해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투혼을 선보였습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과 1998년 세계선수권에서는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멤버로 참가해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선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그러나 채지훈은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과 이어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모두 개인종목 메달 획득에 실패하며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했습니다.

 

   채지훈의 라이벌 마크 가뇽은 1998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통산 4번째로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는 위업을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쇼트트랙의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이로써 쇼트트랙 황제의 계보는 김기훈에서 마크 가뇽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마크 가뇽은 유독 올림픽 개인종목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성기가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남자 500m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종목 금메달을 획득하며 마침내 올림픽 징크스를 털어냈습니다. 이와 더불어서 마크 가뇽은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과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종목에서 캐나다 대표팀 멤버로 참가해서 2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포함, 올림픽 통산 3관왕에 등극했습니다.

 

   여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에이스 계보는 김기훈, 이준호의 쌍두마차 시대에서 채지훈의 시대로 이어졌으며, 세계 쇼트트랙 황제의 계보는 김기훈에서 마크 가뇽으로 이어졌습니다. 김기훈 시대에는 국내 선수 중에서는 이준호, 해외 선수 중에서는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고 마크 가뇽의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채지훈이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습니다. 한편 김기훈의 전성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마크 가뇽과 채지훈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던 무렵에 캐나다의 프레드릭 블랙번이 세계 정상급 선수로서 함께 경합을 벌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데라오 사토루가 아시아 무대에서 채지훈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김기훈 vs 이준호 vs 오레일리, 마크 가뇽 vs 채지훈의 라이벌 시대를 거쳐서 이번에는 김동성 vs 리자준의 새로운 라이벌 시대가 막을 열었습니다. 김동성은 김기훈과 채지훈의 계보를 잇는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고, 김기훈과 마크 가뇽의 계보를 잇는 쇼트트랙의 황제에 등극했습니다. 김동성과 리자준이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민룡과 이승재, 일본의 데라오 사토루, 이탈리아의 파비오 카르타 등이 세계 정상급 선수로서 함께 경합을 벌였습니다.

 

   중국의 리자준은 본래 우리나라의 채지훈, 일본의 데라오 사토루와 비슷한 연배의 선수로서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도 참가했던 선수였습니다. 리자준은 1990년대 중반에도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 동계 유니버시아드, 동계 아시안게임 등에서 채지훈, 데라오 사토루 등과 경합을 벌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에이스 계보가 채지훈 -> 김동성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무렵인 1990년대 후반부터 리자준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리자준은 김동성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의 김동성은 1997년 세계 주니어선수권 대회에서 전관왕 신화를 달성하며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쥔 후, 시니어 무대에 데뷔해서 1997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캐나다의 마크 가뇽과 일본의 데라오 사토루를 제치고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며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남자 1000m 결승에서 김동성은 중국의 리자준을 상대로 극적인 스케이트날 내밀기역전극을 선보이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4년 전 채지훈이 선보였던 명승부를 그대로 재연한 김동성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하며 새로운 최강자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김동성과 리자준의 길고 긴 악연이 시작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세계선수권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한 김동성이었지만, 그의 앞길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2000년 세계선수권 대회 도중 중국의 리자준은 넘어진 상태에서 김동성에게 스케이트날을 내밀고 돌진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김동성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동시에 깊은 마음의 상처까지 입었습니다. 김동성이 부상과 재활에 전념하는 사이 라이벌 리자준은 1999년 세계선수권에 이어서 2001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며 통산 2회의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오랜 재활 끝에 마침내 재기에 성공한 김동성은 다시 한 번 세계 최강자의 기량을 되찾으며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 출전해서 내심 전관왕까지도 기대를 걸어볼 만큼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 1000m 준결승에서는 중국의 리자준에게 노골적으로 다리를 잡아채는 반칙을 당하면서 억울하게 탈락했습니다. 남자 1500m 결승에서는 1위로 골인하고도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인해 억울하게 금메달을 도둑맞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김동성은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최강의 기량을 보유하고도 억울하게 노메달에 그쳤습니다. 올림픽 직후 열린 200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동성은 그 유명한 분노의 질주를 선보이며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김동성은 200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1500m, 500m, 1000m, 3000m 슈퍼파이널 금메달을 획득하며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었고, 한국 대표팀 멤버로 참가한 5000m 계주(릴레이)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며 6관왕으로 전관왕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남자 쇼트트랙에서 세계선수권 전종목 석권의 신화를 달성한 인물은 1992년 대한민국의 김기훈과 2002년 대한민국의 김동성이 유이합니다. 김동성은 주니어(1997)와 시니어(2002)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전종목을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김동성은 올림픽 금메달을 억울하게 도둑맞았지만 세계선수권 전관왕 신화를 달성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김동성은 라이벌 리자준과의 경쟁 구도에서도 최종 승자로 등극했고, 김기훈과 마크 가뇽의 계보를 잇는 쇼트트랙의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 남자 쇼트트랙의 역사 -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이후의 남자 쇼트트랙 세계 최강자를 꼽을 때는 그 어느 누구도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현수(빅토르 안)의 이름을 떠올리게 됩니다. 안현수는 김기훈 -> 채지훈 -> 김동성의 계보를 잇는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차세대 에이스였습니다. 안현수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며 종전 기록 보유자였던 마크 가뇽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로써 안현수는 김기훈 -> 마크 가뇽 -> 김동성의 계보를 잇는 명실상부한 쇼트트랙의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안현수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르며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안현수가 국제 쇼트트랙 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다지 감흥이 크게 와닿지 않을 정도로 안현수는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독주했습니다. 그러나 안현수에게도 부상으로 인한 공백기를 맞는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안현수는 러시아에 귀화하면서 이름도 빅토르 안으로 개명했습니다.

 

   빅토르 안2014년 유럽 선수권을 석권한 데 이어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3관왕에 오르며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로서 안현수(빅토르 안)은 인간승리 드라마의 주역으로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빅토르 안은 2014년 세계선수권에서 7년 만의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며 통산 6번째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이 기록은 남녀 쇼트트랙을 통틀어서 중국의 양양 A와 함께 최다 우승 타이기록이었습니다.

 

   안현수(빅토르 안)의 시대가 워낙에 철옹성 같은 1인 독주 시대이다 보니, 그의 전성기와 라이벌 구도 역시 총 세 차례의 시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안현수 시대 1기의 라이벌 구도는 안현수 vs 아폴로 안톤 오노’, 안현수 시대 2기의 라이벌 구도는 안현수 vs 이호석’, 안현수 시대 3기의 라이벌 구도는 빅토르 안 vs 찰스 해멀린의 라이벌 구도였습니다.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와 캐나다의 찰스 해멀린은 단일 시즌 성적만을 놓고 볼 때는 확실한 최강자로서의 임팩트를 주지 못했지만, 10년이 약간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세계 10위권 이내에 드는 강자로서의 기량을 꾸준히 유지하며 롱런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이호석은 최전성기 시절에 안현수라는 라이벌을 만나는 불운으로 인해 2인자의 설움을 겪어야 했지만, 세대교체 주기가 빠른 대한민국 쇼트트랙 선수로서는 매우 보기 드물게 롱런한 케이스였습니다.

 

   아폴로 안톤 오노, 찰스 해멀린, 이호석은 모두 안현수 시대의 2인자 그룹에 해당하는 선수들로서 안현수의 최대 라이벌로 꼽혔던 선수들입니다. 물론 안현수가 워낙에 절대 강자였기 때문에 라이벌이라고는 해도 그 격차는 상당히 큰 편입니다. 오노, 해멀린, 이호석은 과거 1990년대를 주름잡았던 김기훈, 채지훈, 김동성, 리자준, 마크 가뇽과 같은 대전설들과 비견될 수 있는 선수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시기만을 놓고 봤을 때는 안현수(빅토르 안)라는 절대강자가 존재하는 가운데, 그 다음 자리를 놓고 2인자 그룹을 형성했던 선수들이 오노, 해멀린, 이호석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쇼트트랙 무대에 발을 들여놓는 신예 선수들의 눈높이에서는 아폴로 안톤 오노, 찰스 해멀린, 이호석도 나름 전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안현수 시대 2기와 3기 사이에는 부상으로 인한 공백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잠시나마 세계 최강자의 지위에 올랐던 선수들은 대한민국의 이정수, 곽윤기, 노진규 선수였습니다. 이정수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남자 1000m15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고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멤버로 참가해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정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력한 차세대 세계챔피언 후보로 떠올랐으나 2010년 세계선수권 개인종목에 출전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고, 이는 나중에 이정수와 곽윤기 두 선수 사이의 짬짜미 파동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이정수가 짬짜미 파동 이후에 전성기 기량을 찾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걸은 반면에 곽윤기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한 단계 더 발전한 기량을 선보이며 201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대표팀 후배 노진규를 제치고 개인종합 우승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이정수와 곽윤기는 모두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했지만 이후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정수는 2017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서 남자 1500m1000m 두 종목에서 3위를 차지했고, 이 중 남자 1500m 부문에서만 시상대에 올라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곽윤기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며 생애 두 번째로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루게 되었는데, 개인전에는 출전하지 못하지만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멤버로 참가해서 대표팀 후배인 서이라, 임효준, 황대헌, 김도겸과 함께 메달 획득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비운의 스타 노진규는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오른 데 이어서 2011년 세계선수권에서는 1500m, 1000m, 3000m 슈퍼파이널 금메달을 휩쓸고 개인종합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4관왕으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노진규는 2011년과 2012년 월드컵 시리즈에서 두 시즌 연속으로 세계랭킹 1위에 올랐고 특히 1500m 부문의 절대강자로 군림했습니다. 2013년에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2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노진규는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인전 출전권을 놓치고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대표팀 멤버로만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육종 발병으로 인해 올림픽 출전을 포기해야만 했고, 오랜 투병생활 끝에 201643일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고 노진규 선수는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까지의 시즌이 마무리된 이후로는 세계 쇼트트랙계의 양대 베테랑 선수인 빅토르 안(안현수)과 찰스 해멀린(샤를 아믈랭)이 모두 노쇠화로 인해 기량이 저하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빅토르 안과 샤를 아믈랭은 이제 세계 최강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세계 10위권 안팎의 기량을 유지하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해서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 최근에는 세계 쇼트트랙의 판도가 절대강자가 없는 혼전 양상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그래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로는 네덜란드의 싱키 크네흐트가 있습니다. 싱키 크네흐트는 2014년 유럽선수권 대회에서 빅토르 안(안현수)의 뒤에서 뻐큐를 날렸다가 푸틴에게 찍혀서 징계를 받으며 유명해진 선수입니다. 그 유명한 뻐큐 사건이 있은 지 이듬해인 2015년 시즌에 싱키 크네흐트는 유럽선수권과 세계선수권의 개인종합을 연달아 제패했습니다. 싱키 크네흐트는 2017년에 자국인 네덜란드 홈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에서는 개인종합 2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은 올림픽에서는 김기훈(1992), 채지훈(1994), 김동성(1998), 안현수(2006), 이정수(2010)의 계보로 이어지는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해냈고, 세계선수권에서는 이준호(1990), 김기훈(1992), 채지훈(1995), 김동성(1997, 2002), 민룡(2000), 안현수(2003~2007), 이호석(2009~2010), 노진규(2011), 곽윤기(2012), 신다운(2013), 서이라(2017)의 계보로 이어지는 개인종합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쇼트트랙의 최강국입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시즌 이후 사상 최악의 침체기에 빠지며 몰락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냈던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에서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임효준황대헌 투톱이 새로운 에이스로 떠오르며 다시한번 쇼트트랙의 맹주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출처: 야후 위키피디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과거 신문, 방송 뉴스기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