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쇼트트랙 레전드 3위 – 김기훈]
@ 커리어 하이라이트
김기훈은 이준호와 함께 한국 쇼트트랙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선구자였으며 쇼트트랙이 동계올림픽의 인기 종목으로 정착된 1990년대 이후의 쇼트트랙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쇼트트랙의 황제였습니다.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의 에이스 계보는 ‘김기훈 -> 채지훈 -> 김동성 -> 안현수’로 이어졌고 1990년대 이후의 남자 쇼트트랙 황제의 계보는 ‘김기훈 -> 마크 가뇽 -> 김동성 -> 안현수’로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쇼트트랙의 불모지였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출신인 김기훈, 이준호, 모지수 등이 쇼트트랙 전문 선수로 전향하면서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이 탄생했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 경력에서는 이준호가 김기훈보다 선배였고 쇼트트랙 선수로는 같은 시기에 데뷔했습니다. 네이버캐스트의 ‘스포츠인 김기훈’ 코너에 나오는 김기훈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는 김기훈이 쇼트트랙을 처음 시작할 당시 ‘가와이 도시노부, 이시하라 다쓰요시, 윌프레드 오레일리의 경기 장면을 비디오로 보면서 쇼트트랙을 연습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고 김기훈은 1500m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가 500m와 10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고, 김기훈이 1500m 금메달, 이준호가 3000m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비록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포함되지 않는 시범종목 시절이기는 했지만 김기훈, 이준호, 오레일리는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시범종목) 금메달리스트’로서 쇼트트랙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김기훈과 이준호는 쇼트트랙 선수 시절 내내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치열한 승부욕을 드러냈고 때로는 과열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김기훈, 이준호, 모지수, 송재근 등이 주축이 된 한국 쇼트트랙 1세대 선수들은 한국 쇼트트랙을 아시아 정상과 세계 정상으로 이끌며 금자탑을 쌓았지만, 이 시절 깊은 감정의 골이 쌓이며 훗날 한국 쇼트트랙의 고질적인 병폐인 파벌싸움의 씨앗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기훈은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3관왕에 오르며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기훈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500m, 1000m, 3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김기훈은 개인종합 포인트에서 캐나다의 미첼 데이그놀트에 이어 2위에 오르며 금메달 1개, 은메달 4개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김기훈은 단숨에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스타로 떠올랐지만, 이 대회 도중 북한 선수와 충돌하면서 부상을 입고 약 1년가량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김기훈은 부상에서 복귀한 후 199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개인종목인 500m, 1000m, 1500m, 3000m 금메달을 모두 휩쓸며 4관왕에 올랐습니다. 1991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기훈은 500m에서 영국의 오레일리와 공동 1위로 골인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3000m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습니다. 김기훈은 개인종합 포인트에서는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에 이어서 2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에서 통산 두 번째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김기훈과 이준호가 쇼트트랙에 입문하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쇼트트랙 최강국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쇼트트랙의 쌍두마차였던 가와이 도시노부와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1986년 제1회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도 일본 쇼트트랙을 아시아 최강으로 이끌었습니다. 김기훈은 1986년 제1회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 2개를 획득한 후 1990년 제2회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획득하며 3관왕에 올랐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김기훈과 이준호 쌍두마차가 이끄는 한국 쇼트트랙은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최강으로 올라섰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 무렵에는 ‘쇼트트랙 아시아선수권’, ‘아시아컵 쇼트트랙’ 등의 대회들이 신설되었는데 여기에서도 김기훈과 이준호는 일본, 중국의 선수들을 제치고 한국 쇼트트랙을 아시아 최강으로 이끌었습니다. 일본의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전성기가 지난 시점인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김기훈, 이준호와 함께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 남자 쇼트트랙의 당대 세계 최강자는 일본의 가와이 도시노부, 이시하라 다쓰요시, 그리고 캐나다의 미첼 데이그놀트였습니다. 일본의 가와이 도시노부는 세계선수권에서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의 이시하라 다쓰요시는 세계선수권에서 1986년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으며 준우승도 두 차례, 종합 3위도 한 차례 있었습니다. 캐나다의 미첼 데이그놀트는 세계선수권에서 1987년 공동우승에 이어 1989년에도 우승하며 통산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종합 3위도 한 차례 있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의 쌍두마차인 김기훈과 이준호, 그리고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는 영국의 오레일리가 2관왕에 올랐고 한국의 김기훈과 이준호가 금메달 1개씩을 획득했습니다. 이준호는 1990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최초의 ‘세계선수권자’에 올랐고 윌프레드 오레일리는 1991년 세계선수권을 제패했습니다. 김기훈은 1989년과 1991년 세계선수권에서 두 차례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이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개인종목 중에서는 1000m에만 유일하게 금메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기훈은 아직 세계챔피언에 오르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두 차례나 차지하고 동계 유니버시아드, 동계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아시아컵 등의 대회를 휩쓸며 한국 쇼트트랙의 에이스로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김기훈은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도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의 에이스이자 금메달 후보로 각광받았습니다.
당시 국제대회에서 김기훈의 최대 라이벌은 영국의 윌프레드 오레일리였습니다. 오레일리는 4년 전인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시범종목 시절 최초의 올림픽 2관왕에 오른 데 이어서 직전 시즌인 1991년 세계선수권에서 챔피언에 오른 선수였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오레일리가 우승후보 1순위였고 김기훈은 2순위였습니다. 김기훈은 세계선수권 본선에서는 오레일리와의 맞대결에서 패했지만, 그 전초전 격이었던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오레일리와 맞대결을 벌여 완승을 거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이미 세계 최강자라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상태였습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예선과 준준결승까지는 김기훈, 이준호, 오레일리가 순항하면서 우승후보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기존의 세계 무대 강자였던 미첼 데이그놀트, 이시하라 다쓰요시 등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고 있었고, 캐나다의 프레드릭 블랙번, 뉴질랜드의 맥밀런 등이 새로운 얼굴로 떠올랐습니다.
김기훈은 남자 1000m 예선을 조 1위로 통과한 뒤 준준결승에서 뉴질랜드의 맥밀런과 만났습니다. 김기훈은 준준결승에서 맥밀런에 이어 2위를 달리다가 막판 아웃코스에서 ‘스케이트날 내밀기’로 역전을 하면서 맥밀런을 제치고 조 1위로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케이트날 내밀기’가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었는데, 김기훈은 나중에 남자 5000m 계주(릴레이) 결승전에서도 극적인 ‘스케이트날 내밀기’ 역전승을 일구어내면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명장면을 남기게 됩니다.
영국의 오레일리는 남자 1000m 예선을 조 1위로 통과한 뒤 준준결승에서는 캐나다의 블랙번을 제치고 조 1위로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남자 1000m 준결승에서는 대한민국의 김기훈과 캐나다의 블랙번이 같은 조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이준호, 영국의 오레일리, 뉴질랜드의 맥밀런이 같은 조가 되었습니다. 준결승 첫 번째 경기에서는 김기훈이 조 1위, 블랙번이 조 2위로 각각 결승에 진출했고 준결승 두 번째 경기에서는 이준호가 조 1위, 맥밀런이 조 2위로 각각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영국의 오레일리는 준결승에서 뉴질랜드의 맥밀런과 부딪쳐서 넘어지면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오레일리의 탈락은 이 대회 최대의 이변이었습니다. 라이벌 오레일리의 탈락으로 인해서 김기훈의 우승 가능성은 더욱 확실시 되었습니다. 오레일리는 ‘5~8위전’인 B파이널에서 선두로 골인하며 남자 1000m 5위를 차지했습니다.
남자 1000m 결승전에는 대한민국의 김기훈과 이준호, 캐나다의 프레드릭 블랙번, 뉴질랜드의 맥밀런이 진출했습니다. 처음 스타트를 끊었을 때는 맥밀런이 선두, 이준호가 2위, 블랙번이 3위, 김기훈이 4위로 출발했습니다. 이윽고 블랙번이 아웃코스에서 이준호와 맥밀런을 한꺼번에 추월하며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맨 뒤에서 달리던 김기훈은 아웃코스에서 단숨에 3명을 추월하면서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이 틈을 타서 맥밀런이 블랙번을 제치고 다시 2위로 올라섰습니다. 마지막 두 바퀴를 남겨둔 시점에서 블랙번이 맥밀런을 추월하면서 2위에 올랐고 곧 이어서 이준호가 맥밀런을 추월하면서 3위에 올랐습니다.
결국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1000m 최종 순위에서는 대한민국의 김기훈이 금메달, 캐나다의 블랙번이 은메달, 대한민국의 이준호가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뉴질랜드의 맥밀런은 4위를 차지했고 영국의 오레일리는 5위를 차지했습니다. 김기훈, 블랙번, 이준호는 최초의 올림픽 정식종목 개인전 메달리스트에 오르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김기훈이 선보였던 ‘호리병 주법’은 이후 라이벌 국가들의 집중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김기훈은 ‘사상 최초의 올림픽 (정식종목)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하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단체 종목인 5000m 계주(릴레이)에서도 김기훈, 이준호, 송재근, 모지수가 팀을 이룬 대한민국 대표팀은 결승전에서 종주국이자 최대 라이벌인 캐나다 대표팀을 상대로 막판 뒤집기 대역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주자였던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 김기훈은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극적인 ‘스케이트날 내밀기’를 통해서 캐나다 팀을 0.04초 차이로 제치며 짜릿한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김기훈은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시범종목’과 ‘정식종목’ 채택 이후 두 차례 모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시범종목 시절에는 라이벌인 영국의 오레일리가 ‘최초의 올림픽 2관왕’에 올랐지만 정식종목 채택 이후에는 김기훈이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의 영예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 알베르빌에서 김기훈이 선보였던 ‘스케이트날 내밀기’의 명장면은 1994년 릴레함메르에서 채지훈, 1998년 나가노에서 김동성과 전이경이 재연하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짜릿한 감격과 기쁨을 선물했습니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직후 미국 덴버에서 개최된 199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기훈은 500m, 1000m, 1500m, 3000m 금메달을 휩쓸고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선수권 남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초의 ‘전종목 석권’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특히 예선부터 결승까지 모든 레이스를 1위로 골인하는 완벽한 레이스를 펼치며 ‘덴버의 연인’이라는 찬사를 얻었습니다.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낸 김기훈은 1993년 시즌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량이 서서히 쇠퇴하면서 세계 정상권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며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김기훈 vs 채지훈’, ‘김기훈 vs 이준호’, ‘이준호 vs 모지수’의 신경전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1993년 시즌에 한국 대표팀은 거의 대부분의 국제대회에서 라이벌 캐나다에 완패를 당했습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은 하계올림픽과의 개최 주기 조정을 위해 2년 만에 다시 열렸습니다. 이 대회부터는 1000m 외에도 500m 부문에도 개인종목 금메달이 추가되었습니다. 김기훈은 이미 세계 정상권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마지막 불꽃을 태우면서 남자 1000m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써 김기훈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 채택 이후 2회 연속 개인종목 금메달을 획득하며 통산 3관왕에 올랐습니다. 시범종목 시절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의 올림픽에서 모두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세계선수권에서의 활약
김기훈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1989년 개인종합 2위, 1991년 개인종합 2위, 1992년 개인종합 1위에 올랐습니다. 올드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김기훈이 세계대회에서 1등을 밥먹듯이 차지한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고 올림픽 이전부터 세계 최강자였던 것처럼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이전까지만 해도 김기훈이 공식적으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직후 개최된 199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기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며 단일 시즌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세계선수권자’라는 수식어를 연달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선수권에서 종합우승이 딱 한 번뿐이기 때문에 우승 횟수만을 놓고 봤을 때는 절대강자라고 표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단 한 번의 우승에서 ‘전종목 석권’의 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김기훈은 예선부터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레이스를 1위로 골인하면서 세계선수권 단일시즌 역사상 가장 완벽한 레이스를 펼치며 ‘덴버의 연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김기훈은 단일시즌에 있어서만큼은 전무후무한 역대 최강자였습니다.
@ 올림픽에서의 활약
올림픽 쇼트트랙 역사에서 김기훈은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시범종목 시절에도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에 오른 데 이어서 정식종목 채택 이후에는 ‘최초의 개인종목 금메달리스트’이자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최초의 개인종목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의 영예까지 차지했습니다.
김기훈이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을 살펴보면 시범종목 시절인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1500m 금메달을 획득했고,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는 1000m 금메달과 5000m 계주(릴레이) 금메달로 2관왕에 올랐으며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도 1000m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의 공식 기록에서는 두 차례의 올림픽에서 2회 연속 개인종목 금메달을 획득했고, 단체종목인 계주(릴레이) 금메달 1개를 포함해서 통산 3관왕에 올랐습니다. 비공식 기록인 시범종목 시절의 성적까지 합산하면 통산 세 차례의 올림픽에서 개인종목 금메달을 획득했고, 계주(릴레이) 금메달을 포함해서 통산 4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기타 국제대회에서의 활약
1980~90년대까지는 쇼트트랙 선수들이 뛸 수 있는 국제대회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2000년대 이후에는 ‘쇼트트랙 월드컵 시리즈’가 세계선수권 전초전의 기능을 하기도 하는데, 1980~90년대까지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륙별 선수권’, ‘프레올림픽’, ‘올림픽 예선’ 같은 대회들이 ‘올림픽 전초전’ 또는 ‘세계선수권 전초전’의 성격을 지니며 비슷한 기능을 했었습니다.
세계선수권 전초전 격인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김기훈은 1989년 대회에서 3관왕, 1991년 대회에서 4관왕에 올랐습니다. 특히 1991년 대회에서는 개인종목 네 종목의 금메달을 모두 석권하며 라이벌인 윌프레드 오레일리와의 맞대결에서 완승을 거뒀습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이전까지 김기훈은 공식적으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고 있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세계선수권 전초전 격인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라이벌 오레일리에게 완승을 거뒀던 기억으로 인한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김기훈은 1986년 제1회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 2개를 획득했고 1990년 제2회 삿포로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획득하며 3관왕에 올랐습니다. 두 차례의 동계 아시안게임을 통해서 아시아 쇼트트랙의 헤게모니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신설된 ‘쇼트트랙 아시아선수권’, ‘아시아컵 쇼트트랙’ 등의 대회에서도 김기훈은 이준호와 함께 수많은 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쇼트트랙을 아시아 최강으로 이끌었습니다.
@ 순위 선정 근거
김기훈은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이 시범종목과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올림픽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며 그 누구보다도 경이적인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세계선수권에서도 개인종합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횟수가 딱 한 번뿐이기는 하지만, 그 단 한 번의 우승에서 ‘전종목 석권’의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김기훈의 은퇴 이후 김기훈을 능가하는 괴물이 두 명이나 더 등장하면서 김기훈은 통산 성적 부문에서는 안현수, 마크 가뇽에 밀려서 역대 3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세계선수권 통산 우승횟수만을 놓고 보면 마크 가뇽의 통산 4회 우승도 1990년대 당시까지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이었고,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 안현수는 이 기록마저 가볍게 뛰어넘으며 통산 6회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김기훈은 비록 통산 성적에서는 역대 3위로 밀려났지만 단일시즌 성적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전무후무한 역대 최강자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2년 시즌에 김기훈은 ‘올림픽 2관왕’, ‘세계선수권 5관왕’에 오르며 단일시즌에 ‘올림픽+세계선수권 통합 7관왕’, ‘올림픽+세계선수권 통합 전종목 석권’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김기훈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각종 국제대회에서 수많은 메달을 획득하면서 세계적인 강호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단일시즌의 ‘개인종합 세계챔피언’으로 군림했던 시즌은 1992년 딱 한 시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992년 시즌의 김기훈은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완벽한 단일시즌 최강자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오늘날에 비해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도전할 수 있는 금메달의 개수는 적었지만, 김기훈은 당대의 쇼트트랙 선수가 도전할 수 있는 단일시즌의 모든 금메달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예선부터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레이스를 1위로 골인하며 가장 완벽한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김기훈은 ‘단일시즌 성적’에서만큼은 안현수도, 마크 가뇽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인물로서의 희소가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김기훈 이전에도 쇼트트랙 역사에서 세계 최강자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오늘날 쇼트트랙 최강국의 지위에 오른 대한민국에서 김기훈의 시대부터 쇼트트랙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만큼 김기훈은 대한민국 쇼트트랙 역사와 세계 남자 쇼트트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출처: 야후 위키피디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과거 신문, 방송 뉴스기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