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경험이 없는 내가 전쟁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가 입 또는 글로 표현하는 경험 또는 트라우마는 ‘내가 죽거나 다칠 일은 없다’는 일종의 위안을 기반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약간의 낭만마저 더해질 수 있는 ..
가지치기를 했다. 시기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렇게 자라버린 가지들을 쳐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새순과 꽃망울이 굵어지는 2월을 생각하면, 그리고 겨우내 그것들을 준비할 나무를 생각하면, 겨울이 좀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쳐 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11년 3월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캔모어 중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의 교사와 교육열을 언급한다. 그 전에도 이미 한국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번 언급한 적 있는 그는, 한국교육을 미국 교육개혁의 롤 모델로 제시했다. 물론, 그가 초등학생도 밤 열..
의사의 업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거리를 느끼는 일이었다. 언제나 제 3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그렇다. 방관의 편리함을 즐기는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함께하지 못함의 불편함이었다. 의사의 업을 유지하며 살아갈수록, 전자보다는 후자의 무게가 더 커졌다. 의료 역시, 세상..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조건을 생각한다. 그것은 수평적으로는 경계를 만들고 수직적으로는 계급을 만든다. 조건이란 다양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 없어도 상관없는 그림자처럼, 무심하게 흘려버리거나 의식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경계와 계급이 조밀하게 만드는 ..
‘피로사회’로 잘 알려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느닷없이 땅을 예찬한다.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땅의 예찬’이라는 제목은 그가 시리즈처럼 펴내는 철학책 내용에 관한 상징적 제목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3년간 정원을 일구면서 일기처럼 그 과정을 써 내려갔다. 땅을 ..
무의식적으로 비껴 서려는 나를 발견한다. 함께 있으면서도 논지를 회피하려는 심리가 자연스레 생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작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것은 내가 싫어했던 선배나 동료 의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습으로 수렴되어 가는 건가 ..
지난 일주일은 텃밭에 앉을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나 골똘히 생각하며 바라볼 일도 없었다. 병원 일이 바쁘고 진료시간도 일시로 조정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병원에 있어야 하는 신세여서 텃밭을 생각할 겨를도 없긴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실제 텃밭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제..
머리 위로 신열이 뜰 만큼 피로하고 짜증이 이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이 신열은, 내가 스스로를 쥐어짜는 일이라면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외부 또는 타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예상하거나 종잡을 수 없는 앞으로의 시간이 더해져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
영화를 한 번에 다 감상할 수 없었다. 조용하고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오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겹으로 쌓이는 기분 때문이었다. 감독은 주인공을 처음부터 버리기로 작정한 듯 했다. 항상 주인공을 비추는 화면은, 보는 사람에게도 버려짐의 기분을 충분히 선사했다. 마치 나락으로 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