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 좋은 생각

추로지향 2020. 10. 1. 03:47

를 보는 세상

 

나뭇잎 없는 숲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눈발이 휘날리고 있다. 노을 간 어둠 속에 서서

하늘을 본다.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제일 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은 맹인 나라와 같다. 맹인들은 사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느낌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생존을 두고 서로의 견해와 주장으로 차이와 대립과 갈등과

폭력을 부른다. 그 결과는 괴로움이다.

 

란 자신을 아는 일이다. 도를 얻는다는 것은 맹인이 눈 뜨는

것과 같다. 눈을 뜨면 사라진다. 자기 생각이 사라진다

 

자기 견해가 사라진다. 자기주장이 사라진다. 자기 자신이

사라진다. 사실 그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도란 본다는 것에 대하여 왜곡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맹인은 도저히 눈 뜬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에서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禪堂(선당)에는 이런 수련이 있다.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慧(막존지혜)- 도의 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이여!

모든 앎을 가져 오지도 말고 앎을 가져가지도 마라

 

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이는 모두 옷을 벗어야 한다.

목욕을 하고자 하는 이는 모든 옷을 벗고 들어가듯

자신의 모든 앎을 모든 지식을 모든 경험을 내려놓고

순수한 눈빛으로 가야한다.

 

우리는 체계의 구조적 盲智(맹지)를 가지고 있다.

맹지로는 사실을 볼 수가 없다. 맹지가 사실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전등록을 보면 하루는 육긍이란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옛날에 한 사람이 병속에다 오리새끼 한 쌍을

길렀다고 합니다. 이 새끼오리가 점점 자라나게 되자

병에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병을 깰 수

없고 오리를 다치게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이 오리를 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남전이 바로 말했다. 육긍아! 나왔느니라

 

참된 나를 아는 자는 자유롭다. 집착이 없기에 자유롭다.

그러나 육긍은 자유롭지 못하였다. 병과 오리에게 자신이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병과오리로부터

생각이 물들어 있었다. 병과 오리로부터 마음이 떠나지

못했다. 그에게 남전은 자애로 웠다.

 

육긍아 라고 불러주는 순간 육긍으로 하여금 오리와 병

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육긍이 대답하는 순간

육긍은 자유로워졌다. 남전이 나왔다고 한 것은 오리가

아니라 육긍 자신이다.

 

을 떠나 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인연으로 만들어진 이나 그 작용인

만 보고산다. 그러나 도인은 를 보고 사는 분이다.

는 깊은 거울과 같다. 거울을 비출 뿐이다. 거울은

비어있다. 사물이 있어도 또는 없어도 비어 있다.

 

거울에는 아무 것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잠시 비출 뿐이다. 거울은 물들지 않는다.

거울은 그 어떤 집착이 없다. 구하는 바도 없다.

 

거울은 미추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 스스로기 분별을 일으킨다. 생각을 만든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 꿈을 꾼다.

 

顚倒夢想(전도몽상)이다. 바로 病目生花(병목생화)

허공에 본래 꽃이 없는데 보는 사람이 눈병이 생겨서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이다.

 

도인이란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너희는 스물네 시간 가운데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스물네 시간을 부린다.“

사실 눈을 떠도 그곳이고 눈을 감아도 그곳이다.

 

눈감으면 천지가 어둠이고, 눈뜨면 천지가 밝다.

그러나 도인에게 있어 明暗 그대로가 現前面目이다.

: 해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