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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의꿈 2015. 3. 15. 00:00

 

     창의문에 가는 도로에 서면 창의문보다 먼저 경찰관 동상과 까만 비석이 눈에 뜨입니다. 1968121일 저녁 8시경에 청와대 근처까지 진출한 북한 유격대를 불심검문 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순직한 경찰관들입니다. 동상이 고 최규식 총경이며, 비석은 그날 작전에서 같이 순직한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입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고, 첩보활동은 치열했지만 1·21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별다른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경제사정은 북한이 남한을 추월하고 있다가 1967년을 기점으로 북한이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가 기밀 해제되어 남한이 경제적이나 군사적으로 취약하던 1965년에 남침계획을 수립했지만 주변국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2차 남침이 좌절되자 전면전 대신에 남한지역을 8개로 분할하여 각 지역마다 300여명의 유격대를 편성하여 그 지역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습격과 파괴활동을 훈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남한의 경제건설이 지속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청와대를 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북한 정찰국의 124군부대에서 양성한 31명의 유격대가 1968117일 밤에 국군복장으로 수류탄과 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하고 개성을 출발하여 휴전선을 넘어 파주 법원리를 통하여 남하하였습니다. 눈이 쌓여있는 추운 겨울이었지만 낮을 피해 밤에만 행군하여 19일에는 이미 북한산 비봉을 통과하여 위치를 확인하고, 개성 출발 이후 불과 4일 만에 창의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창의문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자 국군 방첩대 소속이라고 속이고 청와대 쪽으로 계속 행군했습니다. 초소 경찰이 종로경찰 서장에게 보고하자 고 최규식 서장이 위기를 직감하고 진두지휘하며 무장경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북한 유격대는 저녁 8시경에 청와대를 500m 앞둔 청운중학교 정문에서 최규식 서장의 불심검문으로 차단되고, 시내버스가 오는 것을 지원부대로 오인하여 검문 경찰과 버스에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청와대와 반대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최규식 총경은 바로 순직하고 정종수 경사는 중상을 입고 3일 후 순직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못했다면 청와대가 습격당해 대한민국은 큰 혼란 속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숭고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교전 이후 김신조를 비롯한 2명이 생포되었고, 나머지 북한 유격대는 북으로 도주하면서 곳곳에서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목 따러 왔시오라는 북한 억양으로 거침없이 방송을 타는 바람에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생포된 유격대원은 종로경찰서에서 취조 받던 중에 숨겨둔 수류탄 핀을 뽑았으나 경찰관이 기지를 발휘하여 유격대원을 덮어 폭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김신조는 귀순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부는 경복고등학교 교장 사택을 지나 학교 담을 넘어 도주하면서 순찰하던 수위에게 수류탄을 던져 수위가 사망하는 등 다른 곳에서도 민간인과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으로 도주하는 유격대원을 소탕하는 작전이 열흘 뒤까지 계속되어 생포 1, 월북 1명 외에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남한에서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군경 23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복을 위해 1968년도 4월에 공군부대 예하에 영화 실미도로 유명해진 684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부대 암호명도 창설 연월에서 따왔습니다. 다른 부대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격대를 양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21 사태에서 실패했지만 북한은 이미 2,400명의 유격대원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해 10월 말부터 세 차례에 걸쳐 무장공비 120명을 강원도 울진과 삼척 지역에 침투시켜 그 해 말 소탕되기까지 약 2개월간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침투한 무장공비 중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도 군인과 민간인이 40명 넘게 사망하였고, 30명 이상 부상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한에서도 북파공작 유격대원을 양성하여 북측에 침투시켜 큰 피해를 입히는 등 보복공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상호 난처한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급기야 19725월에 이후락 정보부장이 밀사로 북한의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의 비밀 회담을 통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로서 무장 유격대의 게릴라 전투는 막을 내리고, 그와 함께 실미도의 유격대원 양성도 끝나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식 경무관 순직비가 1969년에 세워졌습니다. 동상 제막문과 비문을 읽고 이 분들의 애국 공적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고 최규식 경무관

193199일 출생 1968121일 순직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 경찰서장에 재직 중 1968121일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 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무공 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1969121

조각 및 제작 이일영

글 이은상

글씨 김충현

정종수 경사 순직비

 

역사는 흘러가되 교훈은 남고 육신은 사라지되 뜻은 끼치나니

1968121일 북한의 무장 간첩들이 쳐들어 왔을 때

우리 경찰관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곳이 바로 여기요

그 중에서 아까운 동지 정종수 경사의 피 흘린 데가 또한 여기라

우리는 이 비석을 여기에 세우고 그날의 일을 기억함과 아울러

조국과 자유를 위해 순직한 동지의 거룩한 뜻과 행적을 기리며

32세로 한뉘를 마친 청천의 꽃다운 훈을 위로하는 것이니

영령이여 행복을 누리시고 통일을 위해 힘이 되어 주소서

 

1970년 이은상 글 김충현 글씨

그날 밤 같이 싸운 동료들이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