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되고 살이되는

    알고서 2008. 11. 13. 11:55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출생 1906년 사망 1962년

    출신지 서울

    학력

    1926년: 휘문고보 졸업

    1929년:와세다대학교 법학부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

    문화재 수집 시작

    1934년: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

    1938년: 한국 최초의 사설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

    1942년: 훈민정음 원본 발굴 소장

    1960년: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

    1962년: 그의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64년: 문화훈장 모란장 추서

    1966년: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제자리에서 개편

    경력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

    1945년 보성중학교 교장

    1940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인수



    nero

        
        

         

        위에서 간송의 약력을 잠시 살펴 보았지만 누가 "아름다운 문화지킴이"라는 별명을 지었는지

        정말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에도 급급하고 나라는 일본에게 강탈 당한 마당에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문제이려니와

        도굴과 밀반출에 대응할 능력이 전무하다 싶은 상황에서 이를 간송이 전재산을 쏟아 넣어 지켜냈으니 하는 얘기다.

         중국 돈황 막고굴의 불교 벽화 채화도 19세기 말 청나라의 쇠약한 틈을 타서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고고학자들의 손에 뜯겨 나갔으니,이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돈황에 있어야 할 것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가 겸제나 혜원이나 단원이나 추사의 서화를 비롯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같은 국보급인 문화재를

        대영박물관이나 루불이나 동경에서가 아니고

        서울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간송을 만난 우리 문화의 행운이고 우리 후손들의 자랑이다.


         


        20살의 간송

         간송은 젊은 나이에 휘문고보를 나온 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법학부에 공부를 하면서 ,  

        일본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한국 골동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간송의 대학시절

         新文學을 접하면서 개화기의 우리 실정에 서양의 선진 문화에 매력을 느껴 심취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진데,

        어떻게 풀뿌리 처럼 누구도 중요성을 못 느끼는 우리 고미술품에 관심을 -더구나 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에-갖게 되었는지 이는 하늘이 내린 것이리라.마치  백제 문화의 대표적인 유산인 백제 금동 대향로가 나당연합군의 발밥굽 소리에 진흙속으로 숨었다가 1400년 뒤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 처럼

        우리 문화재의 오늘을 볼 수 있는 것도 간송의 태어남이리라.

         

        그에게 문화재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분,즉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 같은 훌륭한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와세다 법대를 졸업하고

        망국의 한을 씹고 있을 때 휘문고보 미술은사인 고희동 선생님이

        " 이 암흑시대를 밝힐수 있는 길은 민족문화재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뜻이 있더라도 자금이 뒷 바침되지 않으면 불가할진데 하늘이 도와서 그를 10만석 재산을 상속 받게 만들었으며

        (당시 김성수 집인 재산이 3만석 규모),그 많은 전답을 팔아서 사금파리(도자기)나 휴지 같은 그림 조각을

        사 모으는데도 극구 반대하지 않은 가문에 태어나게 한 것도 하늘의 뜻이리라.


         20살의 간송

        당시 집한채 값이 1,000원이었다. "훈민정음 원본"이 1,000원에 나오자

        두말 않고 지금 같으면 아파트 10채 값인 1만원을 주고 

        사면서 1,000원을 수고비로 건넸다고 하니 보통 집안 같으면 가치도 모르는 고
        문서에 더구나 달라는 값의 10배를 쳐 주고 샀다면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매도했으리라.

         

        국립 박물관 보다 못지않는 간송미술관의 귀중한 소장품들도 625를 맞으면서 한 때 위험한 고비를 맞았으나,

        서울이 함락되고 인민군이 이를 북으로 반출하려고 포장을

        소전 손재형과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 에게 지시하였으나 이들의 기지로 ,심지어 소전은 다리를

         뿌러트린 것 처럼 위장하여 포장 작업을 지연 하는 바람에 무사히 살아 남았고,

        1.4후퇴 때에는 피난민도 타기 힘던 열차를 미군의 도움으로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피난했다고 하니 이 또한 하늘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  했을까?

         그 뒤 수복 후 간송의 지시로 미술품을 부산서 서울로 반송하고 난 뒤 1주일 뒤에

        그 별장에 화재가 나서 소실 되었다니 하늘의 뜻을 얘기 안 할 수가 없다.

         10월 문화의 달을 맞아 아무쪼록 간송의 뜻이 살아 꽃을 피워

        우리 모두에게 허물고 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의 옛 것을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 널리 퍼지기를 이번 서화대전을 본 후의 바램이다.

         

        간송미술관과 함께 개인 미술관으로 리움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때 구설수에 올랐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해외로

         

        유출될 문화유산이 국내에 보존된다는 큰 뜻은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제한된 봄, 가을 2회가 아니라  더 넓은 전시공간에서 상시로

        우리의 귀중한 선조의 유물을 후손들이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이제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에서도 방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