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楊平> Section

메주 2012. 4. 28. 09:45

 

 

 

두물머리 , from : http://cafe.daum.net/gyeonggido-photo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년(1597)에 이르러 왜적의 재침이 일어나자

선조는 힘겨웠던 의주로의 피란을 떠올리며 조정의 중신을 모아 방비대책을 논의했다.

지금의 경부선에 해당하는 수원 방면은 독산성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으로 무리 없이 합의됐다.

 

이제 또 하나의 대로(大路)이자 우리나라 교통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국도의 하나인 평해로,

일명 관동대로이자 지금의 양평지역 국도6호선에 대한 방비책 마련이 시작됐다.

 

애초 믿었던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면서 왜적이 한달음에 서울까지 진격했던 아픔을 알고 있던 터였다.

한음 이덕형을 비롯해 훗날 병조판서가 되는 군사전략가 노직 등

대신들이 제각각 지역의 자연지세를 고려한 방비책에 대해 상주했다.

 

양평은 서울 동쪽을 방어하는데 있어 마지막 보루로

평해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양평의 성곽과 진지를 십분활용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용문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어나간 지맥 속에는

동쪽에서부터 각각 함왕성, 남산, 부용성 등의 산악진지가 구축되어 있고,

북한강을 건너 서울로 통하는 최후의 방어선에는 용진(龍津, 지금의 양수리)이 있었다.

 

선조는 함왕성에 백성을 피란시켜 적을 위협하고,

남산과 부용성 등에서 적을 기습하며,

용진에 배수의 진을 쳐 서울을 지키라고 파발마를 급히 띄웠다.

 

이처럼 양평의 국도6호선은 예로부터 국가의 기간 도로로서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시켜준 중추도로 역할을 한 대로였다.

 

이는 18세기 후반, 실학자로서 지리학의 대가였던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저술한 '도로고(道路考)'에 잘 기록돼 있다.

신경준은 조선의 간선도로망을 6대로로 분류했다.

중국으로 통한 가장 중요한 길을 제1로로 명하고

시계방향으로 6로까지 정리하는데 평해로는 제3대 대로였다.

 

20세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히 교통혁명이라 불릴 만큼

교통수단의 변화는 물론이고 교통기반과 지세의 변동이 극심했다.

옛길이 부분적으로 폐쇄된 곳도 있고 기능이 약해진 구간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수 백 년간 평해로가 구축해 놓은

인프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발달됐음을 알 수 있다.

 

인천 중구에서 시작된 국도 6호선은 남양주 팔당을 거쳐

운길산 아래에 이르러 북한강을 조우한다.

 

강 너머가 양수리이고 또 다른 큰 물길인 남한강이 있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지만 길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을 건너는 과정은

가히 우리나라 교통 발달의 역동성을 한 눈에 보여주는 듯하다(두물머리 용담대교).

 

조선시대 평해로는

남양주시 조안면의 고랭이 나루에서 북한강을 건너 양수리 두물머리 지역에 도착했다.

두물머리는 서울의 물산을 사려고 내륙의 상품을 갖고 온 인파로 호황을 누렸다.

사람과 재화가 모이자 문화가 발달했다.

 

남양주의 정약용 생가,

광주 분원의 자기와 천진암,

양평의 구정승(九政丞)골과

천주교 성지 같은 풍부하면서 앞선 문화도 생겨났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도 이런 현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소위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평해로를 왕복2차선의 3등 도로로 정했다.

3등 도로는 지금의 국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양수교를 북한강 상류쪽 3㎞ 지점에 구축하면서

두물머리 나루는 구 도로로 전락했다.

 

1939년 양수교와 함께 중앙선이 지나는 양수철교가 건립되자

양수리의 중심부는 완전히 두물머리를 떠났다.

여기에 1974년 팔당댐이 준공됨으로써

이제 두물머리에서 도로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  1 광탄호수를 끼고 철도와 구 6번 도로가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있다.

     2 새로 확장된 6번 도로.
     3 양평군 청운면 소재의 구 도로에는

       옛풍경이 잔잔히 흐르는

       건물들이 자리 잡고있다.

 

그런데 1998년의 양수대교 준공으로 평해로가 극적으로 부활했다.

곧, 서울~양평간 국도 6호선의 확장공사가

옛 평해로를 교량 형태로 연결 짓는 것이 효율적이란 결론이 나왔고

이 계획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새로 확장된 국도6호선,

중앙선 철도, 구 국도6호선과 더불어 한강물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양수리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경은

한국교통 발달의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두물머리).

 

남한강 물길과 나란히 거슬러 동진하는 국도6호선은

양평 시내에 이르러 37번 국도와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내륙길로 변모한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진정한 국도로서의 역할은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내륙으로 뻗어간 길은 남한강과 인접한 길보다 더 넓어야 했고 중요했을 것이다.

곧, 물길은 대량 운송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이나 산적이나 비적 등

인재로부터 더 안전해 언제든 '길의 역할'을 내어줄 수 있었지만,

내륙길은 막히는 순간 다른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 확장된 6번도로로 옛 구도로는 지역민들의 이동 수단이 됐다).

 

내륙길의 초반부인 양평읍에서 용문면에 이르는 산길을 살펴보자.

10㎞ 남짓한 이 구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구간은 그리 높지 않은 고개 하나와

남한강의 지류인 흑천을 따라 형성된 협곡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고개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살펴본다.
옛날 강원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양평읍 대흥리에 있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개는 용문산의 큰 봉우리 중 하나인 백운봉 자락이어서 도적떼들의 출몰이 잦았다.

고개를 한두 명이 넘어갈 때면 꼭 화를 당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었다고 한다.

이에 이 고개를 넘어갈 때면 100명이 모이길 기다렸다고 하여 백고개라고 한다.

 

백고개를 넘으면 말무덤의 전설이 내려오는 협곡구간이 시작된다.

내륙길 초반에 호되게 신고식을 치른 길은 이제 양평지역을 벗어나기 전까지

20여㎞의 평야를 가로지르는 수월한 길을 맞이한다.

용문면 시내를 지나면서 지평면으로 넘어가는 옛 평해로 길과 중앙선 철도와 갈라진다.

양수리를 넘어 양평에 함께 들어왔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혼자 가는 길이 된 것이다(용문면 시내모습).

 

더 이상 남한강의 물길은 보이지 않지만
 

대신 북쪽으로 펼쳐지는 용문산의 위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용문산은 경기 제일의 명산이자 경기 동부의 맏형으로 동양 최대의 유실수인 용문사 은행나무로 유명하다.

1천157m의 가섭봉 정상은 안개와 구름으로 장관을 이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을 일컫어 '용문산에 안개 두르듯'이라고 한다.

용문면내를 지난 국도6호선은 얼마 가지 않아 옛 용문읍치 역할을 했던 광탄리를 만난다.

광탄리는 양헌수 장군을 배출한 남원 양씨의 세거지로서 흑천가에 봉황정은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하다.

또한 북쪽으로는 용문 조욱선생 이후로 용문산 자락 아래에서 평양 조씨가 대대로 덕을 베풀며 살아온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안동 권씨가 자리를 잡았으며

동쪽으로는 조선시대 한문4대가인 택당 이식의 덕수 이씨가 있다

(광탄리 호수를 끼고 구 6번도로와 철길이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있다).

 

국도6호선은 양평군 청운면에서 강원도와 도계를 이루면서 양평지역을 벗어난다.

청운면에는 용문산에서 내려온 용의 머리가 잔뜩 웅크린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용두리가 있다.

이곳은 한양 4대문 밖 동쪽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 서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두리는 국도 6호선과 44호선이 나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런 탓에 횡성은 물론이고 홍천 등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장시가 크게 섰다.

용두리의 장세가 얼마나 컸던지 지역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번 신도로가 생기기 前'에는 강원을 향하는 마지막 고을 청운면 소재지 옛 풍경이 잔잔히 흐르는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청운면과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이름은 도덕(道德)고개이고 주변에는 도덕산도 있다.

이름만 놓고 보자면 주변에 큰 인물의 사당이나 서원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지역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름과 전혀 다르다.

원래 이 고개의 이름은 도둑머리고개란 것이다.

용두리 우시장에서 소를 팔아 돌아가는 사람을 노리는 도둑이 극심해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다.

곧, 도둑고개가 이러한 세태를 사회징벌적 의미로 반의법을 써서 도덕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용문장).

 

도움말/양평군청 박물관팀장 이강웅 학예연구사
기사제휴. 경인일보 심재호·서인범기자

아리아

 

 

 

From : http://www.ypnews.co.kr/site/news_view.php?nno=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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