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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의 재반박은 왜 네이버에 검색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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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도서관/현대

2012. 12. 25.

 

 

 

 

인터넷에서 '박정희 친일'을 검색하면 흔히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란 글이

 제일  먼저 검색됩니다. 제가 알기로 이 글은 박사모의 회원이 적은 글로 그 까페 회원들이 잘했다고 자화자찬

일색이었다가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과 그 자손 분들이 조목조목 반박하여 어느새 자취를 감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글에 대한 반박문은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데다 오픈지식에까지

등록되어 있더군요.(깜짝 놀랐습니다.)

이상한 일이네요. 왜 유독 그 글만 검색되고 그 많았던 재반박문은 검색되지 않는지.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은 너무 어이 없는 내용이라 그 사실을 믿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적어도 독립유공자 후손인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웃음)

하지만 이제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은 그대로 믿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혹시나 해서 당시 보관해 뒀던

자료를 올립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이것 뿐이네요.





황국신민 박정희의 친일행적


아래 파란색 글은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란 글로

<박사모> 홈피의 '박정희대통령&친일호도대응자료실' 대문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글입니다. 박사모 회원들은 이 글에 대해

"어느 분이신지 대단하다"며 온통 칭찬일색이죠.

화살표가 가리키는 글은 이 글의 오류를 잡기 위한 자그마한 노력입니다.

글재주가 없어 스크롤 압박이 심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길...^^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까지라고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 1940년대는 식민지 조선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해 상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일제와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의 민족영웅 박정희는 그 시대에 어떠했는가?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긴 칼을 옆에 차고 싶은" 욕망을 위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즉 "충성을 다해 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국가를 받들겠다."며 일왕에게 바치는 충성혈서(忠誠血書)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냈다.

▲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모습

안중근은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지만,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바친 덕택에 일제의 철저한 신원조회·사상검증에도 불구하고 1940.4.1일 만주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해 꿈에도 그리던 일본군 장교가 된 것이다.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이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

라며 제안하자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하고 혈서를 썼다고 한다.

 유증선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고도 증언했다.

 박정희추종자들이 주장하길, 유증선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인물이라 한다.

 하지만 유증선은 안동교육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고 박정희가 죽기 석 달 전 박정희로부터 청와대 초청까지 받았던 실존인물이다.

1962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도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신문에 났다. 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러한 당시 혈서론의 근거를 뒷바침할 취재 내용이 들어있다.

이 내용들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나온다.

박정희 찬양이라면 진실과 상관없이 미쳐 날뛰는 조갑제조차 충성혈서(忠誠血書)의 존재를

인정하는 글을 쓴 것이다. 설마 박통교의 교주 조갑제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겠는가?

▲ 이 사진은 박정희가 만주행에 오르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붉은 원 안이 박정희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자들은 박정희가 머리를 깎지 않자 이를 지적한 일본인 교장과 싸운 뒤(장발사건) 교사직을 버리고 만주로 갔다고 하지만, 당시 박정희의 머리칼은 짧고 단정하다.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라는 글을 보면,

혈서론의 출처인 만주일보는 1927~1934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니 박정희가 입교한 1942년에는 만주일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1940년에 만주신경군관학교 입교). 그 근거로 서울대 소장목록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대 소장목록은 말 그대로 1927~1934년 사이에 발행된 만주일보를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지 실재로 만주일보가 존재했던 기간은 아니다.


만주일보(滿洲日報)는 1919년 7월 21일에 만주 봉천에서 친일 언론인인 선우일(鮮于日)이

창간한 친일지로 폐간과 재창간을 반복했었는데,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의 박정희

사진에서 보듯 1942년에도 존재했던 신문이다. 만주일보의 <창간-폐간연도>도 모르고 박정희가

입교한 해도 모르면서 거짓글을 써댄 글쓴이와 '명쾌한 반박'이라며 입이 쩌억 벌어진 수만명의

꼴통 박사모 회원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_^

▲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졸업식장에서 재학생의 송사에 답하는 졸업생 답사를 낭독했는데, 그 답사 내용 중에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滿洲日報 1942.3.24)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등...)


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滿洲日報 1942.3.24)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 상증의 전달이 있고 폐식 하였다."(滿洲日報 1942.3.24)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박정희를 지도했던 일본인 장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 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일본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한 일본 외교관이 『국가와 정보』라는 책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 동료)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 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 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동경의 한 요정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기시 수상 앞에서 맹세 ..)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전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박정희가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한 완전한 일본인이란 이유를 대기위해 근거가 될 만한 글들을

대충 모아봤다.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지닌 분들이라면 대충 읽어도 박정희가 어떤 의식을 지닌 인물인지

충분히 느끼시리라 생각된다. 박정희를 옹호하고자 하는 변명이 일왕에게 충성한 황국신민이 되기 이전인

교사로 재직시 박통 제자들의 증언이라니 이또한 참으로 궁색하다. 박정희의 친일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후인 일왕에게 충성한 황군이후의 일인데, 객관적 자료란게 고작 교사로

재직시의 민족교육 타령인가. 그 민족교육도 스승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눈물어린(?) 미화·왜곡된 증언이라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 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를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47512

▲ 만주 군관학교를 우등졸업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편입돼 57기로 졸업했다. 앞줄 오른쪽 끝(붉은 원 안)이 박정희 생도.

→ 저널리스트 이상우는 『신동아』1987년 10월호에 게재한 <박정희, 그 ‘컴플렉스의 정치학’>에서 다음과 같이 이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장교로 임관된 다음 처음 배치된 곳은 일본의 마쓰야마(松山) 제14연대였다.

그러나 곧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얼마 안있어 이곳으로부터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일본 북지나파견군의

열하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열하지구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임없었던 곳이다. 항일세력의 중심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었으나

당시 동북지구성과 화북일대에서 일본군에 항거한 세력은 이밖에도 여러갈래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관 군벌군, 독립적인 항일유격군, 심지어는 만주일대의 비적들까지도 일본군과 싸웠다.

주력은 중국인이었으나 조선인의 항일조직도 만만치 않았다. 한인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혹은 독립된 게릴라부대로서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국부군이나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부대의 목표는 우선 한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

박정희가 일본군장교로서 싸운 항일세력이란 이런 것이었다. 식민지민족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속해 있던 일본군이 소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항일세력 속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피흘린 동족의 청년들이 있었다. ...... 당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서는

일본군으로부터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상우)

박정희 부대와 맞서 싸운 대표적 항일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을 간단히 살펴보자.

1942. 7월에 중국의 화북지방(연안)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위해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그 밑에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거느린다.

 조선의용군이 속한 조선독립동맹은 건국강령으로 보통선거실시, 의무교육실시, 조선에 있는 일제의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실시 등를 내걸어,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건국강령에 천명된 내용과도 별반 차이가 없던 항일조직이었다.

즉 조선의용군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활동한 한인무장부대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합류하지 않고, 연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8로군과

협동작전도 펼치고 화북, 만주지역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했다. 또한 8로군에도 한인무장단체나 독립투사들이

소속돼 있었다. 이들 독립투사들은 독자적 군대를 결성하기 힘들어 민족 독립을 위해 무기를 얻고자 8로군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의 시발점은 진보학자의 주장이 아닌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다만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을 덮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공비들로 매도된 그 분들이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110여회의 토벌설은

오히려 박정희의 악행으로 부메랑이 돼 인터넷상에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110회 토벌설을 먼저 주장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박통교 친일수구꼴통들이었다.

 왜 박정희는 자신의 추종자가 쓴 이 내용에 대해 침묵했으며, 왜 추종자들은 이제와 자신들이 주장하고 인정했던

110여회의 토벌사실을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라며 부정하는 건가?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박정희가 110여회나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은 개인적 생각으론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간도특설대나 만주보병8단

출신들의 증언도 자신들의 죄를 축소하기 위해 박정희의 전력을 축소시켰을 가능성이 많아,

박정희가 겨우 수차례 토벌작전에 참가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또한 그 신빙성이 희박하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또한 일본인인 다카야나기 도시오 일본 법정대 교수조차도 "당시 공비로 불리던 독립군 토벌이

 군관학교의 역할"이라며 "황국군인으로 길러진 청년 장교들이 만주국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이용됐다"고 했다.

어쨌든 박정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들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란 사실엔 추호도 변함이 없다!

*위에 추종자가 출처를 밝힌 네이버 오픈백과사전은 개인의 자유주장일 뿐 검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잘못된 정보라 생각될 경우 누구나 이의제기를 해서 수정을 요구할 수 있죠.

헌데 위에 밝힌 주소를 찾아갔더니 글이 이미 삭제되었더군요... ^,.ㅠ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

(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 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 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 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는 조선인(재일동포 포함)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로 육군군관학교 조선인 출신들이

이들을 지휘, 일명 ‘독립군 사냥개’집단으로 불리었다. 5·16쿠데타의 핵심역할을 했던 군인 대부분이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만주국군은 1932년 3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제1단계 치안숙정’기간을 정하고 대부대를 동원하여

‘집중적 배치전술’로 항일운동의 중심지를 대규모적으로 토벌하였다. 이 기간동안 1만여 명의 항일운동가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집단도살당하거나 살해되었고 700여 채의 가옥이 전부 불에 탔으며 650만 권에 달하는

 역사책들이 소각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함께 같은 해 5월부터 만주지역에는 일제의 앞잡이(개)를 잡는 유격대조직인 일명

 ‘개잡이 부대’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어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만주제국 옌볜(延邊,간도성)

초대성장 이범익(李範益,기요하라 노리에키·淸原範益)은 1938년 9월15일 일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로

결성된 특수부대를 옌볜에 조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이 제의를 쾌히 받아들여 안투(安圖)현 치안대, 훈춘(琿春) 국경감시대, 옌지(延吉) 청년훈련소,

펑톈(奉天,선양·瀋陽) 육군군관학교와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급군관과 사관

각각 3명을 선발하여 안도현 명월구에 조선인 특설부대 본부와 분부를 설치했는데 후에 이 부대를

 ‘젠다오 특별설치부대(間島特別設治部隊)’라고 불렀다.

당시 연길 특무기관장 겸 옌볜지구 고문인 오코시 노부오(小越信雄) 중좌는 조선인 거주지구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간부 이하 전원은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 대장은

야나가와 가즈오(梁川一男) 소교였고 부대장은 고모리야 요시카쓰(小森谷義一) 상위였으며 연장은

하시기 기요시(橋木淸) 상위였다. 병사는 제1, 2련 및 기관통련이 각각 120명씩으로 360명이었다.

나머지 각 부대 대장은 와타나배 주고로(渡邊捨五郞), 소노베 이치지로(園部市二郞),

사사키 고로(佐佐木五郞), 시바타 기요시(柴田淸) 소교였다.

간도특설대는 옌볜 각지의 병력을 집결하여 이르는 곳마다 ‘수비대’‘헌병대’‘경찰서’‘분주소‘‘산림경찰대’

그리고 각종 ‘특무기관’을 설치하였다. 민족반역자 집단인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20일

중국 만리장성 부근인 리허(熱河)성에서 조선의용군 토벌을 감행하다 뒤늦게 8·15광복소식을 듣고 선양에서 해산됐다.

 간도성 특별설치부대는 그 암흑의 나날 민족앞에 천추에 용납못할 악행을 저지른 민족반역자 집단이었다.

한편 간도특설대 중대장급 군관이었던 육군 중위 박정희(朴正熙,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는 광복 후

시세에 편승하여 중국 하북지대 조선족 청년들을 모아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 했으나 추방당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관련 박정희 의혹들

①박정희가 속했던 보병 8단이 간도특설대와 연합했다는 증언.

②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있다가 갔다는 의혹.

③같이 근무했던 부대원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가 북간도로 건너가 '간도조선인특별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증언.

④1980년 8월 18일에 육군본부가 펴낸 '창군전사'란 자료집에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근무했다는 기록.

⑤1991년에 중국만주지방의 조선족 유지들이 발간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에 "특설부대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민족반역자들이다. 박정희는 특설부대의 중대장급 군관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시세에 편승하여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조선의용군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뺐는데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라고 기록.

*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의 편집위원들은 65명이나 되며 연변대학 총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조선족

학자들이 위원을 맡고 있다. 이 책은 중국 조선족역사연구에 있어서 가장 방대하고 신빙성이 있는 자료집으로,

박정희가 간도특설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연변 역사학계에서 공동으로 인정한 정설이다.

* 현존하는 간도특설부대 관련 서류에 특설부대 성원 전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일설에 따르면 간도특설부대 성원은 743명으로 79명의 십 배에 가까운 숫자라한다.

지금은 한줌 흙이 된 합창의장 출신의 장창국이란 인간도 박정희를 비밀광복군으로 미화시키는

글을 쓰다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며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관련되었다고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와같이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와 관련되었다는 자료와 의혹들또한 상당하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 글은 사실이며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공산주의를 배신한 것이 왜 기회주의가 되어야 하는지?

그러면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남아 있어야 했다는 뜻인지?

솔직히 공산주의 배신한 것 잘한 것 아닌가요?

 

 

→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쳐 만주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노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만주군 중위에서 가짜 광복군 중대장으로,
가짜 광복군 중대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제국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가 공산당 진압군 작전장교로,
무기징역 죄수에서 다시 육군 정보장교로,

'빨갱이'에서 반공주의자로,
육군장성에서 반란군 두목으로,
민정이양공약에서 출마선언으로,
"개헌은 없다"에서 삼선개헌으로,
"이번이 마지막 출마"에서 종신 대통령으로,
어제까지 악마라고 욕하던 김일성과 손에 손잡고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전민족과 세계를 상대로 '역사적 사기'를 치고...
-'알몸 박정희' 중에서-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는 '마루야마(丸山)'로 김대중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로 김영삼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로 창씨개명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창씨개명이 시행되던 당시 김대중은 만15세, 김영삼은 만13세, 박정희는 만23세였다.

 박정희는 당시 만주군관학교 생도로 본인 스스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김대중·김영삼은 창씨개명 당시의 나이로

자신들이 했다기 보다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대중의 창씨개명소식에 흥분해 앞뒤분간도 못하고 박정희의 친일행위를 덮고자

김대중을 끌어들이는 추종자들의 작태가 가증스럽다. 일왕에게 충성혈서를 쓰고 황국신민이 되고자

자진해서 창씨개명한 다카키 마사오와, 강제에 의한 창씨개명으로 친일파의 기준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국민들의 한 사람에 불과했던 겨우 15살의 어린 소년 김대중을 같이 엮을려는 게 말이 되는가.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명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이름은,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한국 광복군에 합류한 진짜 광복군

장준하가 주장한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개명이며 박정희의 일본군 시절 동료들이 증언한 이름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편입했을 때 다카기 마사오에서 완전히 일본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는데,

그 증거로 일본 백과 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되어 있다.



 

▲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력. 일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기록돼 있다. 이 사전은 동경대학출판회가 2005년 8월15일 발간한 것이다.


▲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⑧⑨⑩은 소모적인 내용으로 박정희의 친일행적과 직접적 관련성이 없어 상상에 맡기렵니다.

 

 

 

-출처- http://kimchangkyu.tistory.com/545

출처 :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글쓴이 : 어서오세요 호갱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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