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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개혁주의 신앙의 근간, 다섯 가지 오직( Sola)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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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열쇠

2020. 4. 13.

 

중세의 종교개혁은,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에 의해서, 가리어졌던 신앙의 먹구름을 제거하고, 

교회를 갱신하여, 그동안 세속에 가려졌던, 복음의 진리를, 인류에게 다시금 비취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와 같이, 성경으로 돌아가 '구원의 복음'을 명확하게 드러나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다섯 가지 '솔라(sola)'

로 요약했는데, 이것은 대부분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과정에서, '루터'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는, 가톨릭과 인본주의를 뛰어 넘어, 개혁주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어 내는, 

복음의 가르침과 원리를 확립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다시 중세의 암흑시대로 돌아갔다는, 비난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근본이 되는, 원리를 외면한 교회가, 세상 중심의 가치관 속에서, 

복음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세상속에 동화되어, 

그것들을 받아들임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참 복음의 가르침과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를 모른 체, 

신앙생활을 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교회는, 이러한 비난과 지탄을 외면하고 있으며, 돌이키기 보다는 

도리어 변명으로 일관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교회가 참 복음을 떠나, 가짜복음이나 유사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보이는 모습으로 

성도들은, 진리를 사수하고, 이단과 배교를, 더욱 경계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원리인, 다섯 솔라( 5 sola)를,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핵심 논쟁 가운데 조명해 

보면서, 다섯 가지, 오직(SOLA)의 참뜻을, 우리의 신앙에 접목해, 개혁주의 신앙을 세워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내면에는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야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작은 공간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채울 때, 완전해질 수 있다, 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고, 주장 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지만, 그래도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을 때, 인간은 선행을 위해서, 더욱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중세의 인간성 신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하나님만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도적 신앙을 옹호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성육 신하 신, 자기 계시이며,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 임을 

성경적으로, 확정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루터의 칭의론'에서는, 크든 작든,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에 대한, 구원 문제의 핵심이, 아주 명료하게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루터의 칭의론'으로부터, 개혁주의 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솔라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오직 그리스도 ( solus Christus) 

에라스뮈스는 '인본주의자'로서, 인간은 비록, 일그러지고, 병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한 면이, 조금은 있으므로, 이것을 잘 고양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며, 성경이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라스뮈스는, 인간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서, 

본성을 잘 살려나가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치고 있는 소위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를 

추종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유일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 타 종교를 믿어도,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했으며, 죄로 죽었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잘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그리스도 밖에는 없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입니다. 

 

당시의 인문학자들은,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통하여, 성경을 포함한, 고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으나, 성경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도 필요한 것이지만, 다른 책들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이 아니었다, 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그리스도와 성경 외에 심리학, 사회학, 상담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차차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완성과 총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연신학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 구원론과 다원주의를, 단호히 배격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승을 부리는 이때에,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원래 '교회 일치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종교일치 운동'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운동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고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2. 오직 은혜 (sola gratia) 

에라스뮈스는 인간의 내부에는, 아직 '자유의지'라는,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을 성(城)에 비유하자면, 성의 대부분이 적에 의해 점령을 당했지만, 

'자유의지'라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곳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면, 

이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가톨릭에서는,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성시켜준다, 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믿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협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선행'을 힘써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루터는, 인간의 중심, 다시말하면, 가장 깊은 곳(마음, 양심)이, 이미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과 가르침은, 사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게 되면,  죄가 더할 뿐이지,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내리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게 자신을 만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공적은, 물과 불같아서, 결코 섞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 아무것도 없다, 고 루터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인간 자신의 능력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그의 선행도, 인간 자신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오직 믿음 (sola fide)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선물로 받기 때문에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얻는 길은, 인간의 공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때, 그분이 이루신 의가, 나에게로,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길 뿐이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 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문을 보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순전한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속죄와,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제61문을 보면,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에, 공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을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 자체도, 나의 그 무엇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도우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믿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받아들여서, 그 결과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고,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인간의 편에서,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개혁주의자들이 가르친 믿음이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믿음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심어준 것이나, 

믿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는 믿음의 파워와 능력만을 , 강조하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참 뜻을 벗어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활용했으며, 따라서, 

교회는 외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하였으나, 정작 기독교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으며, 

세속화의 길로, 빠져들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거룩함과 사랑의 정서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대신, 그들이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소리, 거짓 예언, 뒤로 넘어지는 것, 금 이빨로 변하기, 

부자가 되고, 성공하여, 행복해지기 위한 기도, 등이 많은 교회에서, 성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4.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에라스뮈스는,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교부들의 해석, 성경과 전통,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 성경과 철학, 

성경과 건전한 이성, 이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흠이 없고, 아주 명료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루터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죄로,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뿐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깨달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경은 다른 권위에 의존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내세우며, '오직 성경'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인간이 기록했으나,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다음의 네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성경의 권위성: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에 의해, 권위가 증명된다.
2) 필수성: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방편으로서, 필요 불가결하다.

3) 명료성: 성경에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교회나,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도, 구원의 도를 알 수 있다.

4) 충분성(충족성): 하나님의 구원의 뜻(예정)은, 성경에 충분히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주권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의 모든 삶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 구원받고 ,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칼빈'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도 드뭅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냈고,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살았으며, 그의 다소 엄격한 삶의 모습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유언대로, 묘지도 초라하게 하고, 비석도 세우지 않아, 그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법학도 시절에, 교수 대신 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수재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분명하지만, 

자신은 이것을,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어서 그가 박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생애의 모토로 삼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는 이러한 킬 빈의 신앙과 삶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겠습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서 나온다. 

기쁨은, 신적인 것들이, 자기들과의 이해관계나, 어떤 연관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신적인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자기의 마음이 즐겁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위선자와 참된 성도의, 기쁨을 구분하는 차이이다. 

 

즉, 위선자는 자아가, 그 기쁨의 첫째 기초이며, 참 성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위선자는, 자기가 도달했거나, 도달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찾는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먼저 하나님께 속한 일들의, 영광스럽고도, 호감 어린 본질들을, 아름답게 

생각함으로써,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기쁨의 샘이요, 그들의 모든 유쾌함의 진수이다.  

 

그러나 위선자의 정서는, 정반대의 순서를 따른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이 많이 조성된 것을 즐거워하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고양된다. 

그런 다음에,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이다. 

참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기쁨의 가장 큰 기초는,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아름다움이다.  

 

복음의 거룩한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높아지고, 사람은 낮아지며, 거룩은 영예롭게 되며 

촉진되고, 죄는 수치를 당하고, 기가 꺾이게 된다. 

그리고 은혜롭고도, 값없이 주어지는, 주권적인 사랑이 드러난다.

바로 그 거룩한 복음의 교리들이, 성도의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며, 그의 취향에 아름답게 보인다. 

이것들은 이러한 일들이, 자기와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는지, 생각하기 이전의 일이다. 

실로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이심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신이 선한 상태에 있다는 착각으로, 그러한 교리 아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가를, 듣고 대단할 정도로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기쁨은, 그들 자신 속에 있는, 기쁨이다. 

즉, 그들이 기뻐하고, 마음을 스스로 부풀릴 때, 자기들의 시선을, 늘 자기에게 두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소위 영적인 발견이나 체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은 후에, 

그들의 마음이, 그것들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체험을, 크게 찬탄한다. 

그들은 계속,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이 체험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 발견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났는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름다움과 온전하심의 자리에, 자기의 체험을 가져다 놓는다. 

이들은, 자신이 체험하고, 성취한 것의 위대한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한 한, 

대단한 수다꾼들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욕망을, 크게 채워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의 복종심과 맹렬한 열성은, 보통이 아니다. 

자기에게 꼭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를 높이고,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서는, 자신이 대단한 성도라는, 상상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 그 자체에 대하여, 진정으로 

발견한 것들을 기뻐한다. 

그들의 정서는, 자기밖에 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