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낙이 없는, 네 종류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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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전도서

2020. 6. 13.

 

본문 ; 전도서 4:1∼16 

 

오늘은 4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전도서 4장에서 솔로몬은 '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고 불행하게도, 이들의 심령에 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새로워 지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것을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학대받는 인생

솔로몬이 1∼3절에서 논하고 있는 인생은, '학대받는 인생'입니다. 

학대를 받으며 사는데, 무슨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번째 종류의 인생입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합니다.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합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억누릅니다. 

이처럼 어디에나 다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솔로몬이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는데, 

문제는 학대받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시 한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하는 사람의 손에는, 권세가 있어, 사람을 마음껏 학대합니다. 

그러나 학대받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 눈에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 

솔로몬은 학대 속에,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복되다 하였으며."

무슨 말씀입니까? 

위로받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3절에서,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악은 아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고, 학대가 있고, 

그에 따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십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욥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찾아왔지만, 

욥이 세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까? 

시편 121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에게 서로 다."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울 때, 

해 아래 인생들에게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위에 계신 분,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와,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사악한 여인 '이세벨'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멀리 하나님의 산, '호렙 산'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습니다. 

광야 길이기 때문에, 길이 험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엘리야는,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갈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 19장 4절)"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엘리야를,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실 것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에게 어려운 곤경이 임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욥기 3장에서, 욥이 자기의 생일까지, 저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장 11절)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탄식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으로, 그의 무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모든 곤경을, 다 돌이키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이 자기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간에,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히 넘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2.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두 번째 종류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6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종류의 인생은, 

마음속에 '시기심'과 다른 사람에 대한 '경쟁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에 무슨 낙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이 사람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재주가 좋아서, 무슨 일을 하든지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좋은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결과로, 

이웃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문맥에 적합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이 시기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지요?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성공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두 번째 인생은, 

옳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사람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무리하게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한들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성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인정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아보십시오. 

잡힙니까? 

잡히는 것 같아도, 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이 끝이 없습니다.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는 것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삶입니까?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남과 다투기 싫다고, 경쟁하기 싫다고, 팔짱을 끼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바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몸을 축내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도 않는데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 잘못입니다. 언제나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이 사람은 그래도 한 손에는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매자처럼 팔짱을 끼고 굶어 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한 손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과도한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힘써 일하고, 스트레스받고, 긴장이 쌓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수고하고, 사업을 하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또는 내가 이웃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이것이 늘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 돼.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런 마음에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평온함이, 

비로소 우리 마음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수 있도록, 

늘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세 번째 종류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7∼12절에 나오는 인생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을 모릅니다. 

너무 독립심이 강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뭐든지 자기 혼자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그 마음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도 알고,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7-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가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가족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의 문을 넓게 열면, 이웃사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여기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아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업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그저 혼자서만 수고를 계속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같이 협력해서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벌어놓은 '부'를,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해도, 양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동업해서 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벌어놓은 '부'를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기 싫어서,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하려고, 

모든 영광을 다 혼자 차지하려고, 

그렇게 독립심이 강해서 혼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양이 차겠습니까? 

결국은 허전한 마음이 되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힘들게 고생해봤자, 누구를 위한 수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한 것입니까? 

nobody입니다. 

아무도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어서 자기가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죽은 후 재산을 관리해 줄 친구라든지, 

동업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수고를 통해서 유익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유익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9절 이하에서 협력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하면 더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좋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광야 길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광야 길은 아스팔트처럼 좋은 길이 아닙니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빠져 있습니다. 

그런 험한 길을 더군다나 밤중에 여행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밤중에 여행을 하다가 한 사람이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잘못해서 발을 삐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를 붙들어 일으켜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아주 결정적으로 화를 초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밤이 되었습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아주 덥고, 밤에는 아주 춥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혼자이면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그 추위를 혼자서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서 등을 대고, 또는 끌어안고 잔다면, 

체온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따뜻합니다. 

또 광야에는 강도가 나타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길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이 1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안전합니다. 

뭉치면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무슨 말입니까? 

뭐니뭐니해도 '돈' 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저 물질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 제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이웃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협력하면서, 

더불어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창고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잔뜩 쌓아놓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두지 마세요. 

우리가 안심하고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웃을 위해서,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 일은 끝이 없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꾸 주십니다. 

주시는 대로 값있게 쓰면 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오래 삽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

마지막, 네 번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네번째 종류의 인생은 13∼16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신분이 서로 다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가난하지만 젊은이입니다.  

반면에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왕이지만 늙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살펴보면,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제3의 요소가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고(간함)를 받을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신 줄 압니다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집이 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주장만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과 철학이 고정되어 있어서, 

분명히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항상 그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그는 왼편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감옥에까지 갔었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지혜로 극복하고, 

나중에 왕이 되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젊은이가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젊고, 가난하지만, 지혜로워서 좋았는데, 

왕이 되고 나니까, 지혜로웠던 젊은이도 또 둔해집니다. 

경고를 받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젊은이도 그 이전의 왕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도, 

제3의, 또 다른 새롭게 일어난 젊은이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덧없지만, 

인기와 명성도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제3의 젊은이가 왕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백성들의 마음은, 제4의, 제5의 젊은이에게로 자꾸 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권력, 인기, 명성 등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소망으로 삼고, 

그 한 분만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의미 있는 삶,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4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네 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심령 위에 크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셔서,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복된 삶을 받고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