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사랑의 덕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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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고전 13장

2020. 11. 2.

 

 

제목 : 사랑의 덕목(3)/ 고전 13;4-7

 

이탈리아의 위대한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손에 망치와 끌을 쥐고서, 

거칠고 큰 돌을 열심히 쪼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사람이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그렇게 열심히 돌을 쪼고 계시는데, 도대체 그 돌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예, 나는 지금 이 돌 속에 갇혀있는, 천사를 이끌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똑같은 돌이지만, 보잘것없는 하나의 돌로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돌 속에서 숨어있는 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자기의 손을 놀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 돌 속에서 숨은 천사를 이끌어내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 속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아울러 타락한 원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악마의 속성도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천사를 끌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악마를 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끌어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천사를 끌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천사에 둘러싸여서,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악마를 이끌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히 우리는 악마 속에 둘러싸여서, 지옥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다 사랑스럽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든지 밉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천사를 보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대적하며 미워했습니다.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곧 사랑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그 은사를 행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열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너 속에 숨어있는, 천사를 끌어내는 것이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랑은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설명이 됩니다. 

사랑은 너의 속에 숨어있는 천사를 끌어내기 위해서, 

내가 너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너에게 온유하며, 또 네가 잘된다 할지라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가 네 앞에서 나를 과시하거나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내가 네 앞에서 나를 높이려고 들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내가 너에게 결코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언제나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울러 내가 너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사랑을 끌어내기 위해서, 

나는 땀흘리고 희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랑의 덕목 열다섯 가지를 설명할 때, 

원문에 보면 형용사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동사'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인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랑은 feeling이 아니라, action입니다. 

사랑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필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도 아름답게 맺힐 것입니다.

 

사랑의 열다섯 가지 덕목 가운데,  

오늘은 사랑의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 덕목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Love is not selfish.") 

사랑은 이기적이 아닙니다.

Egoism, 곧 이기주의는 사랑과는 정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길에 내버리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마침 그곳에 제사장 한 명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또 잠시 뒤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위 사람도 강도 만난 자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피해서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는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마리아 사람은, 

그 당시 유대사람과는 상종조차도 아니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가지고, 주막까지 와서 보살펴 주었습니다.

 

과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누가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자기의 유익만 구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생각지 않고, 

먼저 강도 만난 자의 유익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통제를 맞았습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면서, 군복을 입은 한 건장한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정신차리세요!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아드님이 막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기력은 이미 쇠할 때로 쇠약해 있었습니다. 

말할 기운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흐릿한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면서, 

깡마른 자기의 손을 청년을 향해 내밀 뿐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의 두 손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말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간호사가 들어와서 할아버지를 체크할 때마다, 

그에게 잠시 눈을 붙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청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새벽녘이 되어, 임종을 했습니다. 

임종을 확인하고 난 뒤에, 

청년은 간호사에게 뜻밖에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 할아버지는 누구십니까?"

그러니 간호사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니, 이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님이 아니시던가요?"

청년은 겸연쩍은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마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할아버지 아들의 이름이 제 이름과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아들 대신에 제가 이곳에 불려 온 것 같습니다."

간호사는 깜짝 놀라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이 할아버지와 꼬박 밤을 새우셨단 말입니까?"

그때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병실에 들어서면서 할아버지의 눈빛을 보는 순간, 

저는 차마 제가 그분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고, 

그분의 임종을 이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나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서, 

먼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할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자기의 유익만 구했지, 다른 교인들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애찬식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자가 자기의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저 자신들만 배불리 먹었습니다. 

마시고 취했습니다. 

반면에 가지고 오지 못한 사람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얼마나 이기적이었습니까?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또 은사를 열렬히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전 14:12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섬기기 위하심입니다.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을 서로 섬기라고,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자기의 덕을 위해서, 은사를 구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은사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막 10:4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전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셨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있는 곳에,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도 아름답게 맺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Love does not get angry." "Love is not provoked.") 

여러분, 스데반이 순교할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억울하게 돌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에게 전혀 성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할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스데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만큼 풍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전혀 성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준 사실만으로도,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했습니다. 

그러면서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형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성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16:32의 말씀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유대인들의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의 '분수를 아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줄 아는 자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성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성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여러분, 가인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지 않으셨습니다. 

동생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셨습니다. 가인은 심히 분했습니다.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자기 동생 아벨에 대한 살인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성내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마다, 

살인자와 똑같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격한 감정에 성이 난다고, 

교회 안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상대방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악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미래적인 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도 숨겨진 천사가 있음을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천사를 끌어내라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우리에게로 인도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향해서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지금까지 계속 참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Love thinks no evil." 

사랑은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죄악들을 생각지 않으십니다. 

기억조차도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한 잘못이나 악한 것을 기억하면서, 

복수할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깨끗하게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 하에서, 

600만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후에 아르헨티나의 띠 게르 강변에 숨어있다가 

이스라엘의 비밀경찰들에 의해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국에 살고 있던 '골란즈'라는 유대인 백만장자가, 

자기의 사재를 털어 가면서, 

그 원수 같은 아이히만의 구명운동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왜 그 사람의 구명운동을 펼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그를 죽이더라도 이미 죽은 유대인들은 다시 살아날 리가 없습니다.

둘째로, 그의 육신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를 지금 죽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서 곧 죽을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충분하게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넷째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었지만, 

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다섯째로, 지금이라도 이미 식은 사랑을,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뒤에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살리고자 했던 골란즈의 정신만큼은, 

우리가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은 악으로 갚을 수가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면, 나 자신이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 얼굴에 진흙을 칠하려면, 내 손에 먼저 진흙을 묻혀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악은 절대로 악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쳤습니다. 

"그래.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저럴까? 

내가 풀어줘야지." 

그러면서 말없이 자기의 왼편 뺨을 돌려대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요놈 봐라! 감히 내 오른편 뺨을 때려? 두고 보자!" 

이렇게 앙심을 품고서 복수하려고 생각하니까,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야 말할 것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러왔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악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악한 것들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기억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홍빛보다도 더 붉은 우리의 죄를, 흰 눈 보다 더 희고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을 행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다 기록하셔서, 한꺼번에 우리를 벌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아니 매 시간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는 행위의 책들이 놓여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행위의 책들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악한 것들이, 깨알같이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책이 펼쳐지는 순간에,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감히 천국을 향해, 우리의 발을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런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후 5:19에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행위의 책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음!" 이러한 말씀만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자동적으로 덮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쁘고 감사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해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청난 죄악의 그 수많은 악한 것들을, 

하나님은 생각지 아니하시고, 다 용서해 주셨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내 형제가 내게 행한 것이, 아무리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작은 잘못들을 우리도 용서하고 잊으면서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실천해야 될 세 가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셋째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주신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면서, 

특별히 이번 한 주간, 이 세 가지 사랑의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삶 속에서,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한 주간에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시다. 

그들 속에 있는 천사를 끌어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천사들 속에 둘러싸여서, 

천국의 아름답고 빛나며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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