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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사랑의 덕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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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고전 13장

2020. 11. 12.

 

 

제목 ;사랑의 덕목 5 (고전 13장4-7절)

 

옛날에 어떤 부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이 많던 사람이다 보니까, 

그의 후손들은 그의 무덤을 아주 크게 잘 만들어 주었습니다. 

비석도 멋있는 것으로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비석에 무엇이라고 써야 할지 적당한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이 글을 잘 쓰는 선비를 찾아갔습니다. 

 

맏아들은 선비에게 돈을 두둑이 주면서 부탁을 했습니다.

"저희 선친의 묘비에 들어갈 좋은 글 하나를 써 주시기 바랍니다."

선비는 써 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선비는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댁의 선친께서는 무엇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선친께서 하신 일 가운데 특별히 기념할 만한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맏아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내세울 만한 특별한 일이,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희 선친은 참 평범하게 사셨습니다. 

저희 선친은 모든 것을 잘 잡수시고, 열심히 일하시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선친은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이로움을 주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남에게 해로움을 끼치신 적도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저희 선친은 조용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선비는 그 말을 듣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약속한 글이 선비에게서 왔습니다. 

한자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食事食死."

이것이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먹기 위해 일하다, 잘 먹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평생의 삶을, 

그런 식으로 정리를 받고 평가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했던,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죽었습니다. 

그곳 원주민들은, 그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신이 오시기 전, 우리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난 지금, 우리는 빛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리빙스턴으로 인해서, 그들의 삶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한 3년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그의 사역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리빙스턴에 대해서, 

이모저모로 자세하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의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 주었는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큼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금 전에 말씀드린 부자와 리빙스턴의 삶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부자는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남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리빙스턴에게 있었던 사랑이, 그의 삶을 값지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육신의 장막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묘비에는 무엇이라고 적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 줄 것 같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던 자, 

이웃을 사랑하던 자가,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평가를 우리 모두가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값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았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 등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교회 부흥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큰 교회였습니다. 

성령도 받았습니다. 은사들도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사를 풍성히 주셨습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고, 

그 은사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라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들을 과시하기에 바빴습니다. 

결국은 은사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은사를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은사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은사는,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사랑의 덕목을 열다섯 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믿고, 바라고, 견디는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의 삼중주가 되어서, 

아름답게 연주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Love believes all things." 

사랑은 모든 것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고, 불신케 합니다. 

사랑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것을 생각해 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은 최선의 상황에서도, 최악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9장 2절 말씀입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영혼을 먼저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도 낫게 해 주셨습니다. 

마태 9장 6절 말씀입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 말씀에 따라서 중풍병자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발로 걸어서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무리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마태 9장 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서,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9장 4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똑같은 사건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육신의 병도 나음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최선의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악한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미움은 최선의 상황에서도, 최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은 서기관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성질도 급하고, 

또한 실수가 많았습니까?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 20장 2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고, 믿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바쳐, 순교하면서, 

예수님이 맡겨주신 모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누가 실수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실수하거나 잘못한 사람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6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사랑이 있는 척하면서, 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주느니, 

차라리 모른 척하고, 속아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얼마나 부족과 허물이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형제나 이웃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Love hopes all things." 

어떤 사람이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불신하여, 더 이상 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를 끝까지 소망적으로 보아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요한 17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자들이 실수하고 넘어져도,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네가 닭 울기 전,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뒤에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어린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장차 두 팔을 벌리고, 순교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비천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나약한 인물이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와 함께, 바닷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사람입니다. 

불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문제들은, 

바울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의 사 도권을 의심하면서, 

바울을 무시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코 그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망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10절의 말씀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고린도 성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이 택하신 엄연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그들이 이런저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젠가는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리라는 사실을, 

바울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과오 가운데서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끝까지 소망적으로 그들을 보아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4장 14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어릴 때 어린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럴지라도 부모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일으켜 줍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똑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4장 2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바울은 그들에게 매를 들고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징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즉시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나아갈 때는,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예수님을 버렸던 베드로까지 찾아가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내일도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소망적으로 보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소망적으로 보십시다.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십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Love endures all things."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은, 사랑의 절정이며, 극치입니다. 

너에 대한 나의 신뢰와 기대가 땅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사랑은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섰습니다. 

그는 입을 열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는 다만 몇 사람이라도,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믿음과 바람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귀를 막았습니다.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그 모든 것을 견뎠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무엇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그들의 비웃음과 돌팔매질을 견디게 했습니까?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어, 

그의 원수들까지도 선대 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까? 

그는 자기가 겪었던 시련을 고후 11장 23절 하반부∼2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이런 엄청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면서 주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목숨까지도 바쳐서 순교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극심한 환난들을 견디게 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과 핍박과 환난을 겪었습니까?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 35절 하반부∼3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견뎌 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한 것입니다.

 

주후 4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 347경∼407)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그를 핍박하는 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와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구덩이에 던지면, 나는 예레미야와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바다에 던지면, 나는 요나와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감옥에 가두면,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돌로 치면, 나는 스데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목을 칼로 베신다면, 나는 세례 요한과 같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여유로운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작은 일에 성을 잘 냈습니다. 

사랑이 없었기에 사소한 일에도, 형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혹도 견디지 못했습니다. 

불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이러한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때, 믿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바랄 수 없을 때, 바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견딜 수 없을 때, 견디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덕목 15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부족하거나,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족하거나 잘 지켜지지 않는, 바로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면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에 더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 아름답게 사랑의 꽂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또, 크고 풍성한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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