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사랑의 온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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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고전 13장

2020. 11. 16.

 

제목 ; 사랑의 온전성(고전 13장 9-10절)

 

막스 비어봄(MAX BEERBOHM)이 쓴 단편소설 가운데 「행복한 위선자」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소설이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헬은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난폭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길에서 부딪치는 것조차, 

피하고 꺼려할 만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은 제니 미어, 라는 아리따운 여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헬은 미어와 꼭 결혼하고 싶을 만큼,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정중하게, 미어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러나 헬은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여성이, 난폭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헬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어와 결혼하고 싶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헬은 한 가지 궁리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얼굴 모습의 가면을 만들어, 그것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헬은 밀랍으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시 미어에게 접근했습니다. 

항상 최선을 다해서, 좋은 매너로 미어에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헬은, 다시금 미어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미어는 그 남자가 가면을 쓴 헬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의 인품이 훌륭하고 또 얼굴이 인자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헬은 결혼하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자기 얼굴의 가면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바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헬은 미어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헬은 미어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를 격려해 주고, 따뜻한 말로 용기를 북돋워 주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미어는 헬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또 그런 미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헬도 역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옛 연인이자 친구인, 갬 보기가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는 헬의 모든 비밀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 갬 보기는 헬과 미어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헬의 정체를 폭로하기로 하고, 미어의 면전에서, 

헬의 가면을 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헬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버렸던 헬의 친구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면 속의 얼굴이, 과거의 험상궂은 헬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헬의 얼굴은 쓰고 있는 가면처럼, 

정말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의 얼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헬은 자기의 아내 미어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 모습이 실제로, 그와 같이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헬이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위선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양두구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 썼는데, 속은 이리인 사람을, 빗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양가죽을 뒤집어썼다 할지라도, 

양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양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실제로 양처럼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훈련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하나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늘 연습하고 훈련을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은사에만 목말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몸 된 교회와 또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은사를 구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은사를 뽐내고, 과시하고 싶어서, 

은사를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은사가 아닌, 

사랑에 초점을 맞추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랑은 영원하지만, 은사는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온전하지만, 은사는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성숙한 것이지만, 은사는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첫 번째,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사랑의 온전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한 사랑에 대해 깨닫고,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릴 수 있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은사는 부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세 번씩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2절에도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다시 한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부분적"이라는 단어를, 

무려 네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은사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온전하지도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우리가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쉽게 성경을 터득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더 깊이 공부하게 되면,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통해서도, 성경 지식을 알아 가는데, 

턱없이 부족하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배우고 연구할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8장 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우리는 그저 부분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부분적으로 아니까, 예언하는 것 역시, 부분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공간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예언을 "프로 페미"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prophesy가 나왔습니다. 

"프로"는 영어의 before에 해당되며, 우리말의 "∼앞에"라는 뜻입니다. 

또 뒤에 나오는 "페미"는 영어의 to speak로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을, 문자적으로 보면 "to speak before"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쓰인 before가 시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공간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타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장래의 무엇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오늘날의 설교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할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 또한, 부분적으로 아니까, 부분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극히 부분적이라는 것입니다. 

 

빌 3장 8절을 보십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자랑거리들을, 

이제는 배설물처럼, 하찮게 여겨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서 12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서, 

그것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가까운 그 순간에서도,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갔던 신비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후 12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하늘나라의 놀라운 영광을, 인간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예언이 부분적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틀렸다든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1+1=2"라고 덧셈을 가르칩니다. 

그 자체는 틀리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덧셈, 뺄셈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뒤에도 곱하기, 나누기, 분수, 방정식, 미분, 적분, 등 복잡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불필요하다 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부분적이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한계성과 타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유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우리는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유한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어찌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1장 3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타락한 인간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심성을 가진 인간이,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나 직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그것은 결코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감사의 동기가 되고, 겸손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 

어디까지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또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폐하기 마련입니다.

촛불이 있는 곳에, 전깃불이 환하게 비추이면, 촛불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것은 촛불이 전깃불에 비해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깃불이 아무리 밝다 해도, 태양 빛이 비추이게 되면, 

전깃불의 존재감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태양 빛이 전깃불에 비해, 훨씬 더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은사도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사만 옳고, 절대적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고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과연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개인적으로 말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우리의 영이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일 것입니다. 

또 전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시고 영광 가운데, 

우리 모두를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하러 오실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는, 

이 땅에서 은사도 필요하고, 예언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늘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온전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사랑과 은사를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온전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떠한 점에서 온전하다고 하겠습니까? 

먼저 사랑은 시간적인 면에서 온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존재합니다. 

천국은 사랑과 빛이 언제나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온전하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은 공간적인 면에서도 온전할 것입니다. 

사랑이 존재하지 못할 영역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어디에서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은사나 직분에 연연해하거나

자랑하게 되면, 

우리의 심령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더욱 힘쓰게 되면, 우리가 겸손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겸손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사랑에 힘쓰며, 행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어나게 되고, 

풍성한 사랑의 열매도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가 넘쳐나는,

천국 백성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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