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사랑의 성숙성

댓글 0

**사랑·고전 13장

2020. 11. 19.

 

제목 ; 사랑의 성숙성(고전 13장 11-12절)

 

사랑의 영원성과 온전성에 이어서, 오늘은 사랑의 성숙성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때로는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섬기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귀한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며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를 섬기며 봉사할 때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특별히 교회의 일을 할 때,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숙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주부 작가 <미우라 아야꼬> 여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쓴 소설 「빙점」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 책을 읽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도 한 때는 평범한 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월급에 의존해서 살아가다 보니까,

살림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자기 집 앞에 작은 가게를 차렸습니다. 

기독교인인 그녀는, 처음부터 많은 돈을 벌겠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자기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가게를 찾는 사람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좋은 물건을 가져다가,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그의 가게는 소문이 좋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주에 한 번,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가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트럭씩 물건을 주문해야 될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다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아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들도 다 가난한데, 가게문을 닫으면 어떻게 먹고살지, "

 

그 소리를 무심코 듣고 있던,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저 좋은 물건을 값싸게 소비자들에게 팔면,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영세 가게들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가게의 운영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은, 아예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없는 물건을 찾을 때는, 친절하게 이웃 가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물론 수입은 많이 줄어 었으나, 덕분에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엔, 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틈틈이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고 또, 

문학적인 재능을 살려서, 시간이 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그 유명한 「빙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결코 나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사랑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웃에 대한 이해, 이웃에 대한 배려, 이웃에 대한 용서는, 

인내와 연습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늘 끊임없이 훈련을 통하여 나타나고,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항상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루이스(C.S. Lewi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문제는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루는, 어떤 여자 집사님이 집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게 능력을 주셔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는 큰소리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 옆에서 잘 놀고 있던 딸아이가, 엄마에게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인형이 망가졌어요. 인형 좀 고쳐주세요!"

그러나 엄마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아이는 점점 더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인형 좀 빨리 고쳐주세요!"

엄마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눈을 번쩍 뜨고서는, 큰소리로 나무랐습니다.

"얘야, 엄마가 지금 기도하고 있잖니, 기도하고 있는데 조용해야지, 

그 소리에 어린아이는 놀라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눈을 감고 기도하려고 했지만,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아, 내가 내 아이의 일은 무시하면서, 그저 나의 필요만 기도하고 있었구나!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큰 일에 충성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엄마는 즉시 하나님 앞에서, 사랑이 부족한 사실을 회개하고, 

인형도 고쳐주고, 아이를 잘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도,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너 나 할 것 없이, "사랑!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함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주 안에서 한 지체된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가진 은사는 보잘것없는 거야! 내가 가진 은사가 진짜지! 큰 거지!"

그들은 은사 때문에, 서로 시기하면서,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 모습을 지켜볼 때, 얼마나 철없는 아이들처럼 보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서 더 이상 은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랑에 초점을 맞출 것을 당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사는 유치하고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성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은사나 직분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성숙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랑이 없는 은사는, 어린아이의 일과 같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의 일을, 세 분야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위주입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깨닫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평소에 부모들이 잘해줄 때는,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빠, 사랑해. 엄마가 제일이야!"

그러나 아이들은 조금만 토라지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담아두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립니다.

"엄마, 미워! 아빠 싫어!"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무엇이든지, 다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은사나 직분 중심이 되면, 

이처럼 철없는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나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나만 옳습니다. 

나만 잘났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별하는 분기점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 전에는 무엇이든지 나 위주로 하다가,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 언제나 사랑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이 없는 은사는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

고린도는 거울을 많이 생산하는, 거울의 특산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거울 만드는 방법이, 요즘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요즘은 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발라서 거울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저 금속을 반질반질하게 문질러서, 광을 내어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즈음의 거울처럼,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울로 보는 특징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희미합니다. 

아무리 질이 좋은 거울이라 할지라도, 

눈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만큼, 분명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둘째,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부분적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거울로 보는 것은 부분일 뿐입니다. 

아마 운전하시는 분들은 이런 경험을 종종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이드 미러를 통해서 좌우를 보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차선을 바꾸려 할 때, 

갑자기 차가 보여서 당황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블라인드 스폿(blind spot),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거울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은사나 직분 중심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거나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나 직분은 온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가면, 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잘 알려진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 한 폭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어떤 화가가, 그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그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그는 찬찬히 그 그림을 보면서,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실제로 보니까, 

자신이 기대했던 만큼 못 미쳐, 실망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함께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사실은 내가 이 그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네. 

색채감도 그렇고, 기법도 별로 뛰어나지 않은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려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네."

그 소리를 듣고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적인 사고와 시각으로만 보는가,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마음의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보게나. 

그러면 다른 감동이 있을 걸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 화가는 예수님을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금 예수님의 모습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예수님의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모습은 물론,  

예수님의 사랑까지도 느낄 수 있는 위대한 그림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볼 수 있으며, 또 예수님을 밝히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사랑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컨대, 그들은 서로 시기하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습니까?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나서, 다른 곳에 가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바울이 가고 난 뒤에,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언변이 좋아서 설교를 아주 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소위 말하는 아볼로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를 세우신 분이, 사도 바울인데 우리가 바울을 좇아야지, 

어떻게 그를 배신할 수 있나,

그래서 그 사람들이 바울파를 만들었습니다. 

바울파와 아볼로 파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사실은, 예수님의 뒤를 한 번도 따른 적이 없던 사람들이잖아, 

그래도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베드로, 

곧 게바가 최고지, 게바를 좇아야지."

그래서 베드로, 곧 게바파가 또 생겨났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또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들을 좇을 수가 있어, 

그리스도를 좇아야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파가 또 생겼습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파당을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헐뜯으며 자기들이 잘났다고, 

계속해서 다투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보기에 얼마나 한심한 어린아이 같아 보였겠습니까?

 

왜 고린도 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까? 

은사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직분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참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연조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봉사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장성한 분량에 이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가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쩌면 유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모두 살아온 배경이 다릅니다.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똑같이 생각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더불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으며,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사랑·고전 13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성숙성  (0) 2020.11.19
사랑의 온전성  (0) 2020.11.16
사랑의 영원성  (0) 2020.11.14
사랑의 덕목(5)  (0) 2020.11.12
사랑의 덕목(4)  (0) 2020.11.11
사랑의 덕목(3)  (0) 202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