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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Chae 2012. 1. 21. 12:26

    *이 글은 진흥아트홀 주최로 열린 세미나 "기독교와 현대미술"(2007.4.13)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미술의 토대를 위한 연구

     - 존 캘빈(John Calvin)의 신학적 미학을 중심으로 -

     

    안용준(백석대 기독교철학연구소)

     

     

    서론

    1. 우상숭배의 금지

    2. 성례전의 이미지적 성격

    3. 은사로서의 예술

    4. 성령의 인도에 의한 예술

                                  

                           

    본 논문의 목적은 기독교미술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인물인 종교개혁자 존 캘빈의 신학적 미학 연구를 통하여 구체적이며 의미 있는 현대 기독교미술의 테제를 논의하는데 있다. 존 캘빈은 16세기 종교개혁자로서 현대의 개혁주의 미학 또는 미술의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존 캘빈의 신학적 미학에 대한 연구는 현대 기독교미술의 중요한 원리를 공급하는 개혁주의 미학의 전통이 어떠한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개혁주의 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작업은 현대 기독교미술의 방향성을 가늠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개혁주의 미학”이라 함은 개혁주의의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의 예술에 관한 견해를 말한다. 존 캘빈은 예술의 오용과 남용을 지적하며 발생한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전통 안에 위치시킬 수 있는 미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존 캘빈은 이후 19, 20세기의 중심에 있는 최근의 신 캘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 그리고 한스 로크마커, 캘빈 시어벨트의 개혁주의 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존 캘빈을 선택하여 연구하는 이유는 ‘우상숭배의 금지’, ‘영적인 것에로 인도되는 이미지’,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예술’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인도에 의한 예술’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중요한 테제가 그의 사상 가운데 담겨 있기 때문이다. 캘빈을 통하여 미래 기독교미술을 향한 아름다운 여정에 큰 지혜가 도출되리라 소망해 본다.

     

    캘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신앙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 타락, 구속과 우리의 삶의 원천이며 주관자로 알며 사회의 모든 생활 영역에 관하여 성경계시에 근거하여 개진한 참되고 바른 진리를 제시한다. 이 글은 이러한 그의 신학체계 가운데서 개혁주의 미학의 단서를 찾아내어 의의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는 중세의 미술 전통이 가지고 있는 미학의 전제들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전통에 얽매임 없이 성경과 관련하여 미학에 새로운 표준을 세워나간다. 『교회 개혁의 필연성』에서 캘빈은 16세기 로마교회의 문제점을 교리와 교회 정치의 측면에서 개혁의 당위성을 밝히 드러내었다. 성상숭배와 성자숭배 그리고 성물숭배 등,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이 고안한 미신적 의식들이 로마교회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예배의 회복은 개혁의 최우선 부분이었다.

     

     

        1. 우상숭배의 금지

     

    캘빈의 개혁교회로의 회심은 ‘참 교회’에 관한 그의 생각을 공고히 해주는 길로 나아가게 했다. 그는 참 교회란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복음이 원래의 의미대로 선포되는 개혁교회라고 단언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539년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가에 대해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내는 공개서한』(Open Letter to Cardinal Sadolet on why the Reformation was Necessary)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서신은 제네바 사람들을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야코포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67) 추기경의 초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이 서신에서 교회의 하나 됨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 개혁자들이 왜 가톨릭교회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나를 설명했다.

     

    사돌레토여, 우리는 사실 당신이 관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 교황이 자신의 모든 거짓 주교들과 더불어 목회자의 지위를 움켜쥐고 있는 굶주린 늑대들이고 지금까지 그들이 연구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왕국을 뿔뿔이 흩어버리고 유린해서 파괴와 폐허로 채우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하나님이 그 뛰어난 선하심으로 막지 않으셨다면 교회는 이미 파괴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캘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에 전적으로 대적하려는 의도가 아닌 개혁이라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교황의 권한과 그것의 남용을 올바르게 개혁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편교회(the Catholic Church)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물려받은 신학적 모체로 인하여 개혁자들에게 있어 교회의 보편성은 당연한 것이고  근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한 보편교회의 살아 있는 문맥과 이론과 실천의 세계 안에 올바르게 위치”해야 하는 것이었다.


    보편성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예배와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여러 모양의 예배를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캘빈은 라트리아(latria)와 둘리아(dulia)를 구별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천사와 사자(死者)에게 드려도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된 것”에 대해 질책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의 성자에게 돌리는 영광은 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전혀 차별이 없이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난받을 때에는 예배(latria)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나 상처를 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우물쭈물 변명한다.”

     

    그리고 캘빈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다음의 사실을 언급하여 둘이아를 정죄했음을 상기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 전까지는 ...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dulia)하였더니(갈 4:8)’라고 말하고 있다. ... 분명히 그는 사악한 미신에 ‘둘리아’란 명칭을 붙임으로써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둘리아’를 정죄한다.”

     

    캘빈은 예배 안에 성상숭배가 들어와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선물인 예술의 오용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에는 성상에 대한 숭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는데 성자상의 빰에 입 맞추는 행위(dulia)와 마리아상의 손에 입 맞추는 행위(Hyperdulia)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예배의 배경에는 이미지의 숭배에 관한 뿌리 깊은 전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16세기 초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미지의 사용에 관한 문제는 새로운 물결의 흐름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출발과 발전의 위대한 슬로건들 중 하나로 불리는 “오직 성경”의 사상이었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질서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이끌어 가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가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구 과정에서 교회의 관행, 즉 성상과 성유물의 숭배가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교회와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 이러한 새로운 개혁은 성상파괴 행위로 이어졌고, 개혁자들은 누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해야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당시의 우상숭배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칼슈타트는 성상파괴를 신앙심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행동의 기회로 간주하였으며, 루터는 파괴행위를 전복으로 이끄는 위험으로 생각하고 대항하였으며, 쯔빙글리는 성상파괴와 성상옹호의 중간입장에서 그림을 제거하되 질서 있게 행하기를 요구하였다.

     

    칼슈타트는 1522년 “이미지 제거와 기독교인 중에 걸인이 없어야 하는 것에 관하여(Von Abtuhung der Bylder, Und das keyn Betdler den Christen seyn sollen)”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이미지 문제에 관해 최초의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성상을 제거하여 성경에 타당한 권리와 판단을 부여하는 일은 훌륭하고 필연적이고 찬송할만하며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려 없음과 그것을 숭배하려는 마음을 미리 아시고 계셨기 때문에 일체의 종교적 이미지를 금지 하셨다”고 함으로서 급진적 성경해석의 입장에 서게 된다.


    칼슈타트의 영향을 받은 쯔빙글리는 급진적인 성경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미지의 숭상을 철저히 배격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을 받은 지역(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격심한 성상파괴 행위가 이루어 졌다.


    루터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려는 칼슈타트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성상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파괴난동이 벌어지는 등의 과격한 행위에 대해 우려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란 무엇이든 시각화하고 이미지를 이해하는 본성을 타고 났다고 여겼다.

     

    평범한 사람들은 까다롭고 미묘한 논의보다 은유와 삽화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한다. 그들은 잘 쓰여진 책보다 잘 그려진 그림을 더 보기를 원한다. ... 외적인 이미지들, 비유들 그리고 기호들은 좋고 유용하다. 그것들은 사실을 파악하고 간직할 수 있게 도해해준다.

     

    루터는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자연적인 인간 심리의 한 과정으로 간주했다. 예술의 필요성을 인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오용되고 있는 예술을 바로잡고 올바른 예술을 세우려고 했던 루터의 노력은 캘빈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캘빈은 이미지의 숭배, 즉 성상숭배는 우상숭배이며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면서도, 가톨릭교회는 물론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에 대한 견해와도 구별되는 개혁주의 미학이론을 전개했다. 캘빈은 올바른 예배의 회복을 연구하여, 개혁주의 미학의 근거를 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예배란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로서 죽음과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유한한 인간이 너무도 우매하고 무분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영을 우상에게 돌릴”수 있음을 경고 했다. 이미지에 대한 잘못된 시각과 해석이 예배를 대신 할 수 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2. 성례전의 이미지적 성격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캘빈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 받던 것은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캘빈은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미사와 성찬을 지적한다. 우선 잘못된 다섯 가지 성례를 부정하며 반박한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첨가한 그 어떤 것들도 거룩한 성례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캘빈은 이러한 성례에 대한 성경적 이론을 그의 주저『기독교강요』에서 전개하는 가운데, 성례전의 이미지적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캘빈에 의하면 성례는 이미 선행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례란 그러한 약속의 확증이며 우리에게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더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성례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건케 하시기 위하여 선하신 뜻의 약속들을 우리의 양심에 인 치시는 외형적인 표” 즉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그가 보이는 복음인 성례전에 대한 이해를 이미지와 관련하여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가시적 형태”로 이해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적극 수용한다.        


    그러므로 ‘성례전의 이미지적 성격’에 관한 캘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보이지 않는 은혜의 가시적인 형태인 성례의 이미지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사랑의 가시적 유형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인간에게 제시된다. 이처럼 예수께서 보이는 이야기를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가 주시는 신비한 유익을 마련한 인간에게 눈으로 직접 보고 입으로 직접 맛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사용하는 의사전달 가시적인 매체를 통하여 가까이 다가오신다.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례는 은혜의 언약과 같은 것으로 기독교적 희망의 상징들로 가득하다. 이것들은 이미 고대의 문화로부터 현상과 관습들을 통하여 이미 나타났다. 할례의 시행, 공동의 식사, 물로 씼음, 떡과 포도주의 회복하게 하는 성질 등이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와 같이 캘빈은 성례를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상징적이며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둘째, 캘빈은 성례를 통하여 제시된 유형적인 것들에 의하여 영적인 것들에로 인도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얼어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인간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것은 성례에서 인간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를 하신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육체 가운데 거할지라도, 마치 거울 속에서와 같이, 그 분의 영적인 은사들을 묵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와 같이, 성례는 영적인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또는 외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래서 성례에 등장하는 상징들(떡과 포도주 등)은 단순한 표징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이 그 안에 영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명확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그는 성찬을 한 예로 들면서, “거룩한 상징들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표시되는 바와 같이 주의 몸과 피를 참으로 나눠 가지는 일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징은 그 의미하는 것과 본질이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물들은 그것들이 항상 명확하고 틀림없이 의미하는 사물들의 이름을 차용(借用)하여 이것들에 실재성을 부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적 생명의 담보와 보증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우리 앞에 놓”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캘빈이 이야기 하는 바는, 성찬에 등장하는 떡과 포도주는 비유이기는 하지만, 눈  앞에 없는 일들 명칭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계시기 때문에 성도가 그것을 먹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이다. 이러한 캘빈의 견해는 성찬을 단순한 상징과 기념으로 이해하는 쯔빙글리의 단순 기념설을 배격한다. 또한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즉 그리스도의 몸이 육체적으로 변하여 떡에 임재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을 배격한다.


    영적 임재설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신비로운 연합이다. 이것은 일종의 유추에 의해서 성도 앞에 놓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강력하게 붙잡으며 생생하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성례전의 보이는 요소들은 그것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실재와는 물론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례는 실재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캘빈은 이미지를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았지만, 실재와의 간접적인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결국 캘빈은 성례전의 이미지적 성격을 ‘형상의 미학’(Ästhetik des Bildes)으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예술작품에 교훈적인 사명을 주는 하나의 분명한 모범이 되었다.

     

     

      3. 은사로서의 예술

     

    캘빈에 의하면 “우주 창조 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신 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의 향유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선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예술(arts)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캘빈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리들 중 모든 사람이 예술을 배우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예술 분야에 분명한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류의 공통된 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선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창조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다양한 죄악들이 세상에 관영하게 되었다. 이제 “자연적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초자연적 영역에서도 타락한 마음의 활동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캘빈은 기독교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초자연적인 은사는 파괴되었고 자연적 은사도 부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거스틴의 의견에 동의하듯이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남아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선과 악,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는 이성의 판단력은 비록 약화되고 오염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캘빈은 “이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완전한 상태로부터 타락하고 부패하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많은 은사들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내부에 선천적으로 새겨진 이성의 어떤 보편적 이해력이 잠재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악에 거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묵상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신성에 의해 인도되는 타락한 마음은 창조자의 지식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어떤 지성도 박탈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그러나 캘빈은 동시에 인간의 예술적 은사가 인간을 뒤덮고 있는 죄와 무지 때문에 효과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통찰력 있게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거의 각 사람마다 자신의 신(神)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날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자신의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캘빈에게는 이러한 인간의 예술 활동이 단지 허무하게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진 의견은, 비록 그것이 항상 막대한 오류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오류의 산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갈망하여, 나무, 돌, 금, 은, 그밖에 생명이 없고 썩을 물질로 신(神)들을 조형화(造形化)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야수적(野獸的)인 우매가 전 세계를 붙잡”게 되었다.


    캘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의, 지혜, 선을 보여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표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으나 피조물의 타락에 대해서는 인간의 전적인 책임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였다. 여기서 그는 죄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아담의 죄에 내재된 동기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그 결과 처음에 아담을 훌륭하게 장식했던 지혜와 힘과 성결 대신에 “무지와 무력(無力)과 불결과 허영과 불의 등의 가장 추악한 병들이 생겨난 벌을 받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맹목적인 자기애와 야심이라는 병을 버리고 그릇된 자기변호가 아니라 진실한 고백을 할 때, 겸손하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는 예술이 이 원리를 무시할 때 하나님 대신에 다른 대상을 경배하는 우상숭배에 빠진다고 보았다.


    캘빈은 시각 예술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러기에 순수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은 잘못 사용함으로서 왜곡되거나 인간 파괴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래서 캘빈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한다.

     

    “하나님의 은사의 사용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를 위해 창조하셨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용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계획하셨던 목적에 합당하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다”

     

     

      4. 성령의 인도에 의한 예술

     

    캘빈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그분의 의도에 일치하는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가 요구된다고 한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일을 생각할 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받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눈과 귀와 마음의 능력을 초월”하여 위대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성령의 인도에 의한 예술’에 관한 캘빈의 설명은 분명하다.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하듯이 예술과 과학이 표현하고 증거 하는 능력도 성령의 조명에 의한 은혜의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가장 뛰어난 은사를 인간의 공동선을 위해 당신의 의지대로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인간의 삶에서 가장 뛰어난 것에 대한 모든 지식은 성령과의 교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인간에게 성령의 밝은 빛을 받아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선한 예술품을 창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결코 인간의 창조적 행위와 무관하지 않음을 캘빈은 지적한 것이다. 실로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를 위해 창조하셨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용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계획하셨던 목적에 합당해야”한다. 그래서 캘빈은 성막을 만들기 위해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도 성령이 그들에게 넣어주시는 총명과 지식이 필요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캘빈은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는 인간의 태도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놓치지 않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결함이 있”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학술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하는” 인간의 오만한 태도의 결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불안정하고 무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캘빈은 하나님의 의도에 일치하는 예술적 표현을 위하여 성령의 인도에 의한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것은 캘빈이 창조기사에서 성령의 사역을 깊이 이해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캘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보존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 ...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하시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위에서 캘빈은 만물을 소생케 하는 생명과 운동의 원천으로서 성령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온 우주에 편재되어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술적 표현을 실천함 있어서의 성령의 인도에 의한 자연적 실재에 대한 성실한 접근이 가능하게 된다. 캘빈에게 있어 인간의 감각이 접근할 수 있는 창조된 세계는 예술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러나 무제약적인 상상력의 확대에 의한 예술적 표현에 대하여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이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캘빈에게 있어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문제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캘빈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 20: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예술의 기능과 한계에 관한 캘빈의 생각은 선명하다. 예술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격정의 산물로 예술이 추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예술의 범위는 오직 성령의 인도에 의해 실재에 대한 인간의 파악 능력 안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의 참된 표현을 위한 성실한 캘빈의 주장은, 예술을 거짓 및 환상으로부터 실재를 구분 짓는 인간의 행위로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캘빈이 예술을 단순한 자연의 모방 정도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술에 인간의 죄악 됨을 밝혀내고,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예술은 “타락한 세계가 보여주는 것보다도 더욱 높은 실재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고상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사명을 실행하려면 성령과 관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거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재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캘빈은 예술이 성령의 능력에 연결되어 성경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때 비로소 이미지가 올바로 전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캘빈에 이르러 예술이 억압된 우리의 현실상황에 위로를 주며 타락한 인간과 자연에 대항하여 풍요로운 삶의 가능성과 영적 차원의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술의 창조적 활동의 영역은 교회와 관련성에 단지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예술적 창조성의 원천이신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인간이 경험하고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데에 까지 그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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