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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Chae 2013. 8. 27. 00:07


    *이 글은 제가 기획에 참여했던 " 기독교미술시장 활성화 포럼 AUCTION + CRISTIANITY = ? "(2007.11.12 / CCMM빌딩 1층 메트로)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어떻게 종교와 미술 그리고 상업성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물음이 있었던 포럼이었습니다. 물론 그 공존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는 결론이었지만, 나름 크리스천들이 함께 진지하게 고민할 문제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참고로 이 행사는 N.G.C.G(갤러리 PM2, 빛갤러리,세오갤러리,진흥아트홀) 주최와 기독미술연구회, 아트미션,한국미술인선교회,(주)바흐컬쳐,진흥문(주),(주)타블로기획 등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N.G.C.G와 글쓴이에게 있으므로 무단 복제 및 전제는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현대미술시장의 상황과 우리의 소명




    심 상 용 (동덕여대 교수/평론가)



    I. 현대미술과 시장의 상황


      최근 오치균의 50호짜리 작품이 2006년 12월 3,700만원에서 2007년 9월 5억 원에 낙찰되어, 9개월 사이 무려 1251%의 상승률을 가록했다. 이는 이 시대의 흥분과 위기를 드러내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하지만, 동시에 시장 자체를 교란시키기에도 충분할 수 있다. 


    이 신화적인 도약 앞에서 예술과 가치의 체계는 심대한 혼란에 빠지고, 미적 기준은 흐물흐물한 것이 되고 만다. 정작 문제는 그것이 부동의 미적 가치로 호환되는 것이다. 갈등이나 충돌은 없다. 기어는 부드럽게 변속된다. 시장에서 ‘잘 나가는’ 작가들은 그 자체로 최고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시장의 기준과 선택이 최종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각종의 저널들은 이를 확증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작가들은 미학적 블루칩으로 분류되고, 그들을 모은 전시 제목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다. 


      반면, 미술품경매회사들이 감정가를 만들어내는 객관적인 근거는 잘 밝혀지지 않는다. 그 주변부에선 ‘요구가 가격을 결정한다(Estimate on demand)'는 판에 박은 시장논리가 되풀이 된다. 요구가 미적 기준의 최종적인 기준이자 합리적인 여과장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요구는 얼마든지 학습되고, 조정되고, 인도되고, 조작될 수 있다! 시장의 현 상황이 거품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문제는 그것이 인식의 시금석을 자처하며 달려드는 오싹한 상황이다. 가격이 가장 유력한 하나의 통합적인 기준이 되고, 화폐화 될 수 없는 모든 가치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는, 이는 정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의 재현이다.

       

      오늘날 상황에 역사의 페이지들을 배급하는 주체는 미술시장이다. 대부분 상업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아트갤러리들, 연일 기록을 갈아 치우며 고공행진을 하는 옥션의 감정가와 낙찰가, 아트페어들의 기념비적인 선전, 충실하게 시장과의 파트너쉽을 발휘하는 블록버스터화 되어가는 국제전들, 지난 세기 기욤 아폴리네르나 앙드레 부르통의 자리에는 찰스 사치나 사무엘 켈러 같은 인물들이 있다. 예술가들은 고독과 저항이 아니라, 현대판 파트롱인 사립 메세나와 제도에 의해 인큐베이팅 된다. 



     II. 가치의 혼돈!


      잠시 오늘의 풍경을 둘러보도록 하자. 전 세계 미술시장의 반 이상을 미국이 잠식하고 있다. 그 나머지의 반은 스위스와 영국이 장악하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구겐하임’은 오늘날 명품브랜드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이 빌바오시는 그 이름을 자기 것으로 하는데  100만 달러를 지불했고, 베를린의 도이치 빌바오를 위해서는 도이취 뱅크의 지원이 있었다. 리용도 그것을 생각했었다. 반면, 700만 달러를 들여 맨하튼의 한 가운데 문을 열었던 것은 곧 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이 구겐하임을 통해 미국의 미술이 전 세계로 보급되고 있다. 마치 헐리우드를 통해 미국영화들이 보급되듯이 말이다. “영화 다음의 미국발 문화상품은 미술관이다.”

     

      교육에서도 가치의 충돌이 야기되고 있다. 프랑스의 중등학교 수업에 현대미술의 이념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잘 알려진 현대미술가 파브리스 위베르(Fabrice Hubert)는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무언가를 시도하려고할 때마다 학생들은 싫어한다. 그들은 매우 관습적이고 고분고분하다.” 그러나, 한 통계를 따르면, 가장 성공적인 미술수업은 그들에게 그리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수업이다. 중학생의 49%는 단지 그리고 소묘하고 만들고 싶어 한다. 반면, 선생님과 토론하고, 작품에 대해 평하고, 작가들을 만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64%는 미술시간이 즐겁기를 바랬으며, 37%는 가장 배우고 싶은 미술교사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꿈꿨다. 이들에게 현대미술은 너무 수다스럽고, 특히 그들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개념의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미술교육을 받은 미술교사들은 이러한 학생들을 ‘꿔다논 모리자루’로 여기면서, 그와는 상반된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의 문화성 산하 조형예술분과장인 베르나르 블리스텐느(Bernard Blistene)는 지난 30년을 상징하는 20개의 작품을 선정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텍스트를 곁들였다. 예컨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사탕 뭉치는 “그곳에서 금기가 위반되는 축제와 욕망”, “순진함과 쾌락이 사라져가는 이때에 매우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영성채”Christine Sourgins, Les mirage de l'art contemporain, (La Talle robde:Paris,2005), p.142.등으로 극찬했다. 이러한 평론에 대해 프랑스의 비평가 크리스틴 수쟁(Christine Sourgins)은 어머니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 “사탕을 주는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Christine Sourgins, Les mirage de l'art contemporain, (La Talle robde:Paris,2005), p.143. 하지만, 2000년, 이 쿠바계 미국인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 무더기는 456,750 달러에 경매되었다. 토레스는 매우 적극적인 동성애자였으며, 1996년 에이즈로 사망했고, 미국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자국관을 토레스의 유작전으로 꾸몄다. 


      크롬으로 토끼를 만든 제프 쿤스(Jeff Koons)에 대한 블리스텐느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 “생각이 깊은 사람은 자신이 미국적 자본주의의 분열증의 키취적 증후를 가진 사람들 중의 한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해 할 것이다.” 이는 “당신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끝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더 나아가 (쿤스는) 예술이 사람들을 조작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쿤스가 대중들이 자신의 삶을 더 잘 경작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체계의 작동에 대해 교육했다”고도 말했다. 그의 아내 치치올리나와의 정사장면들을 다룬 그의 또 다른 작품 <Made in heaven>에 대해서는 “포르노이미지와 순결한 이미지 사이에 유리로 된 에로스를 선사했다”고 미화했다.Christine Sourgins, Les mirage de l'art contemporain, (La Talle robde:Paris,2005), p.143.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만화와 지난 시대의 위대한 예술을 혼돈에 빠트리고 파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명했다.” “(바스키야는) 힙합과 째즈, 폭력과 마약, 상호주의적 문화의 형태와 동거하면서 거리의 신화로 나아간 무리들 중 유일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길을 걸어갔다.” 이에 대해 크리스틴 수쟁은 다시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파편화하는 것, 혼돈, 마약중독: 희망을 향한 위대한 가르침이 아닌가!”Christine Sourgins, Les mirage de l'art contemporain, (La Talle robde:Paris,2005), p.145.




     III. 생각을 파는 시대, 개념미술의 홍수


      개념은 오늘날 현대미술의 거대한 부분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개념은 하나의 유행이상이고, 지적이고 엘리트적인 예술의 규범처럼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예술의 탈물질화를 견인해 왔다. 그리고 이는 예술이 더 이상 그것을 실현하는 기술의 숙련이나 장르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되게 해왔다. 형태야 어떤 식이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든 개념만 전달되면 되니까. 이제 생각을 파는 시대가 된 것이다. 생각을 판다는 것은 바람, 흔적, 약간의 끄적거린 낙서, 종이에 그린 것이건 캔버스에 그린 것이건, 사진을 찍은 것이건 거리에 세워놓은 것이건, 무엇이건 팔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생각’이란 것만 깃들어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새로운 ‘폭발적인 시장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더 목적에 잘 부합하거나 좋은 기술을 발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생각이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예컨대 <신의 사랑을 위하여>를 만든 데미안 허스트의 생각은 박수근의 민속적 차원의 애환이나 향수보다 더 탁월한가? 박수근의 것과 이우환의 것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거나 의미 있는 일인가?  


      이런 종류의 작품이 지니는 역설적인 면모는 그것이 경매에 붙여질 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1999년 5월 뉴욕 크리스티의 현대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안은 미국화가 로버트 리만(Robert Ryman)의 회화였다. <signet20>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흰 바탕에 흰 수평의 줄이 간, 한 변이 157.5 cm가 되는 정방형의 회화였다. 1966년에 그려진 것이다. 경매의 카탈로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리만의 것들은 캔버스일 뿐 회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의미의 추상화도 역시 아니다. 그것들은 의미나 표현이 아니면, 다만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이 하나의 경험이 과연 얼마나 하는 것일까? 150만 달러나 한다. 그것이 크리스티의 전문가들이 당시에 감정한 그 흰 바탕에 흰색으로 된 한 경험의 가격이었다. 캔버스는 팔리지 않았다. 너무 비싸지 않은가? 오늘날 이 미국의 화가는 예술가는 개념미술과 미니멀 사이의 이 뿌옇고 혼탁한 기간 동안의 거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리만의 ‘반-회화-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가장 고가에 팔린 것은 160만 달러였다.“(109쪽)


      1917년에 처음 얼굴을 드러냈던 뒤샹의 변기는 1966에  8개의 에디션이 허용되었고, 그 중 하나가 1999년의 소더비 경매에서 175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이 새로운 스타들의 시장에서 찰스 레이가 그 에가 될 수 있다. 쇼윈도우에  서 있는 털이 복슬 거리는 남자의 마네킹이 200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22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같은 경매에서 토레스의 진주 장식된 단순한 커텐이 165만 달러에 팔렸다. 


      이 모든 에들에도 불구하고, 의심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는 그것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만 사용되어야 한다. 기존의 진지하게 생각하는 태도, 정통적인 사고방식에 의존하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는 게 이 현대사의 교훈이다. 그래야 이 시대의 예술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초심자들은  이 고도의 가치를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바로 예술 자체이기 때문이다.”(110) 




     IV.  ‘창조적인 가격매기기’(creative pricing)


      미술시장은 공정성에 근거하는 다른 시장과는 다르다. 창조성에 대한 절대적 척도,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기준이 되는가(되어야 하는가)? 그 이전에 무엇이 현재 그 기준을 대신하고 있는 것인가?


      예술품의 가격은 한 마디로 작품 그 자체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그것은 작가의 유명세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작가라면, 그의; 작품들은 그 개별적인 질과 무관하게 놀라운 가격표가 붙게 될 것이다. 반대로, 즉 이름 없는 예술가가 만든 탁월한 작품이-이러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시장에서 대접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새삼스럽게 미학적 질에 대해 지루하게 논할 필요는 없다.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이런저런 세미나장을 공허한 논쟁과 지적 과시 등으로 채우는 동안, 시장에서 가격은 거침없이 정해지고, 의심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은 곧 역사적 가치가 될 것이다. 걸작(Chef d'Oevre)의 개념, 이전에 한 예술가의 직업적 성숙의 대가였던 그것의 개념은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그것은 단지  대중들의 ‘임시적인 흥분’‘을 자극하고, 지속적으로 마비되어 온 판단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많은 선동들이 충분히 모여 만들어진 아우라를 가르치는 말이 되었다. 여기서, 중심개념은 객관적인 가 아니라, 신화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 가격의 신화를 뉴욕의 화상 벤 헬러는 ‘창조적인 가격매기기(creative pricing)’로 부르곤 했다. 


      최근 경매에서 안드레아 거스키(Andreas Gursky)의 사진은 백만 불을 넘어선다.(2007년 KIAF에 출품된 그의 사진 가격은 6억 원이었다) 이렇게 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략 그가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것을 2000년에 있었던 모마의 개인전으로 볼 때, 불과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한국의 한 사진작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 “…하지만, 그 친구의 사상이나 철학적 담론, 문화의 깊이가 결코 저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작품가격에선 너무 많은 차이가 나죠. 사실 이건 국가의 GNP와 같은 것이 아주 많이 작용해요. 그는 현대사진의 최강국중 하나인 독일작가이고, 나는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의 작가니까.”(김 아타) "하지만 결국, 작가에 의해 실현된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은 그것에 의해 (생각이) 달라지곤 하는 달러나 스위스 프랑이다.”


      어떤 면에서, 거스키와 대조되는 자리에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ão Salgado) 가 있다. 거스키의 것이 대형이고 세련되고 도시적이며 칼라인 반면, 살가도의 것은 작고 가슴 아픈 흑백의 보도사진이다. 전자는 디지털이고 후자는 아날로그다. 두 작가의 사진 모두 자신이 속한 시대의 진실을 다루지만 살가도가 대면했던 삶은 낙원보다 더 지옥을 닮아있다. 브라질의 금광맥을 담은 살가도의 사진을, 그 유린당한 인간 동료들의 시선을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선뜻 사진의 가격을 물을 엄두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짓밟혀진 인류의 양심 앞에서 노출의 정확도만큼이나 부수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 앞에서 화폐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액면가는 더 작은 액면가와 비교될 때에만 확고한 가치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실을 찾는 영혼 앞에서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V. 판단과 비평의 새로운 윤리적 지평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첫째는 영화 메트릭스에 나오는 모피어스의 다음과 같은 대화내용으로부터 환기될 수 있다. 


    “네가 노예란 진실. 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 네 마음의 감옥. 불행히도 메트릭스가 무언지 말할 수는 없어. 직접 봐야 해.” 


     ‘영적 스승의 기운이 감도는’ 모피어스의 말처럼, 세상이 뭔가 잘 못된 것은 분명하다. 복음주의 저술가 존 앨드리지(John Eldledge)를 따르면, “영화 매트릭스는 우화요 비유지만, 우리가 이제껏 믿어왔던 현실이나 삶보다 훨씬 더 실제에 가깝다. ”존 앨드리지/홍종락 역, 『마음에 숨겨진 영광』 , (좋은 씨앗:서울,, 2005), p.37. : John Eldledge, Walking the Dead, Thomas Nelson Inc., Nashville, Tennessee, U.S.A. 2003. 엘드리지는 자신의 친구 줄리(Julie)가 영화 <반지 원정대>를 보고 난 후 말했던 내용을 소개 한다; “평소보다 세상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됐어.”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도 필요한 시각이다. 세상을 더 잘, 분명히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결코 다가 아니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보이는 것들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시장은 완전한 장치가 아니며, 그것에 의해 걸러진 것들이 모두 가치의 순서대로 배열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들과 자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인가’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 성공은 반드시 재정의 되어야 한다. 


    두 번째, 경매의 낙찰가와 시장가격, 유명세, 블루칩 등이 스스로를 미적인 잣대로 강변해 올 때, 그로 인해 가치의 공간이 위축되거나 파손될 위기에 처할 때, 그 때가 바로 의심하는 이성을 발현하고, 비평적 태도를 취해야 할 때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평을 소모적인 문제제기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문제제기를 불만이 많은 사람의 넋두리쯤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이 어떤, 행동을 구속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비평의 본령은 어떤 시장과 관련된 하나의 명백해 보이는 평가를 제공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는 진정한 의미의 개방성이자 운동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비평이 그 같은 역할에 등 돌리는 순간, 그것은 자칫 그 관련자들과 스스로를 허물고 파괴시키는 노예적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모든 판단을 유보한 채 담화들의 끝없는 지평에 스스로를 내던짐으로써, 또는 당대의 특권적인 담론에 부합하는 윤리적 죽음을 정당화함으로써, 이 시대 특유의 혼돈에 편승하고 부추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나는 이에 대해 여러 기회를 통해 역설해 왔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혼돈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부르심과 긴밀하게 관련된 창조적 활동을 돕고 지원하는 것이다. 


    “인간의 소명은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여러 가지 색과 언어와 현태와 구조와 소리와 조화와 돌과 흙을 가지고, 또한 하나님의 작품들과 역사상에 창조된 사람들의 작품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원을 채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을 취하여 그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창조성과 우리의 창조성을 새롭게 표현하고, 새로운 형태로 창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제람 바즈, ‘창의성의 교리’, 제람 바즈 마르디카이즈 외성인경편/,『신앙과 지성』, (일지각:서울, 1993),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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