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음암] 박해, 그 안에서 핀 단아한 아름다움, 서산 상홍리공소

댓글 7

[길손의 旅行自由]/충청남도

2015. 7. 2.

독특한 아름다움의 건축물,

'서산 상홍리 공소'

충남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159-2 (상홍2122)

 

 

박해기부터 이어져 온 교우촌, 상홍리공소,

서산 천주교 전파의 초석이며, 한때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해미읍성 순교자 약사의 정리와 유해보존을 통하여 현양운동

시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서양건축과 한옥구조가 독특한 조화를 이룬 근대건축물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사진들의 촬영은 지난 5월말입니다.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들이 지천이지요.

제 게으름을 용서해 주시길요.

 

 

 

상홍리 공소를 찾아가는 길은

서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음암면방면으로 좌회전하여 32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서산 중앙병원수석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약1.5km정도 더 가면 우리마을아파트가 나오고, 아파트를 끼고 돌아 들어가 잠홍저수지방면으로 약300m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가서 만날 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역사는 박해(迫害)’의 역사입니다.

정조15(1791)에 일어난 신해박해(辛亥迫害)’를 시작으로 100여년에 걸쳐 극심한 탄압을 받은 천주교입니다. 그 당시 이러한 박해를 피하여 신자들은 뿔뿔히 흩어져 다시 모이면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공소가 세워지게 됩니다.

 

공소(公所)’, 본당에 속하는 공식적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정기적인 방문을 통하여 미사가 진행되거나,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침례와 예절이 행해지는 곳으로 신자들의 모임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실제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의 시작은 공소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박해를 피하여 모인 교우촌의 형성이었기에 우리나라 천주교의 첫 모습이 공소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피안의 이유로 공소는 접근이 어려운 촌락에 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 서산 상홍리공소 사제관(좌)과 상홍리공소(우)의 전경으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찾아간 서산 상홍리도 그 중 한곳입니다.

이미 교우촌이 형성 된 가재지역(현 상홍리) 일대에는 박해를 피하여 피신하는 교인들을 도와 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더 많은 신자들이 찾아들었고, 고종 2(1886)에는 100여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로서 1919가재공소에 새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고 1920년부터 1937년까지 서산성당으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서산 공리에서 금학리로 다시 상홍리로 본당 이전을 하게 된 것이지요. 1937년부터는 서산 동문동으로 본당이 이동 되었고, 상홍리 본당은 다시 공소가 되었습니다.

 

상홍리 공소(上紅里 公所)’

서산 동문동 성당에 속해 있으며,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소유로 2007등록문화재 제338로 지정 되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첫째, 셋째 주일 오후 2시에 미사가 봉헌 되며, 매월 첫째 주 오전 11시에 신부가 방문하여 미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소 인근의 마을 주민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로서 80여명의 신자들이 미사참례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상홍리는 서산 지역 천주교의 성지(聖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종18(1881),

두세(Doucet, 1853~1917)신부가 서산 소길리 일대에서의 전교를 시작으로 서산지역에 천주교가 시작 됩니다.

서산 지역 첫 본당은 구항면 공리의 수곡성당으로 초대 본당 신부로 폴리(Polly, 1884~1950)신부가 부임되었지요.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되어 본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5년 후 1919년 전쟁이 종전되자 폴리 신부는 제4대 본당 신부로 재 부임하여 금학리 본당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금학리 본당은 각각의 공소들로부터 불만이 많았던 곳입니다.

이로서 폴리신부는 본당 이전을 계획 하였고 상홍리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로 합니다. 마침내 19213, 한옥 목조양식의 성당과 함께 사제관(추정)이 완공되면서 금학리에서 상홍리로 본당을 옮기게 됩니다.

 

이로서 상홍리 본당은 서산, 홍성, 예산지역을 관할하였고, 소속 공소는 18, 총 신자의 수는 1,805명으로 본당 신자는 118명이었습니다.

 


 

 

 

19218, 폴리신부는 신학교 교수로 임명 되어 떠나자,

그 해 10월 제5대 본당신부로 멜리장(Melizan, 1877~1950)신부가 부임합니다.

그 해, 신부의 어머니로부터 그 녀의 이름을 딴 세사리 종을 기증 받아 1923년 종루를 설치하였는데, 이 종은 동문동 성당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멜리장 신부는 본당 재임 중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로 서산 천주교 청년회를 조직하여 지역 청소년들의 참여를 유도하였고, 야학강습소를 개설하는 등 특히 청소년들을 위하여 노력을 쏟다가 1932년 옥천 본당으로 부임됩니다.

 


 

 

 

그리고 19327, 6대 본당신부로 지금의 동문동 성당을 세웠으며,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를 세상에 알린 바로(Barraux, 1903~1946)신부가 부임하게 됩니다.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고종3(1866)에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특히, ‘병인양요(丙寅洋擾)’ 이 후에 내려진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 먼저 죄인을 처형한 후에 보고한다.’라는 뜻으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벌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내포지역의 지역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고 처벌을 담당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에 힘을 실어주게 되어 더욱 참혹하고 악랄하게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게 되지요.

 

해미읍성 내 감옥에서는 짚으로 엮은 줄로 신자들을 때려죽이는 잘개질, 해미읍성 서문 밖에서는 참수(斬首)’, ‘교수(絞首)’등으로 신자들을 처형하였고, 또한 해미 조산리에서는 교수하거나 생매장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한 해미 지역 순교자는 197명에 이르지만 무명의 순교자는 그 보다 더 많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19354,

바로신부는 처참했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현장을 직접 목격한 박승익(朴承益, 목격당시17)’, ‘이주필(李周弼, 목격당시18)’을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됩니다.

 

이로서 범 바로신부는 이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조산리 생매장 터를 발굴하여 10여구의 유해들을 수습하였고, 상홍리 성당 뒷산에 안장하게 됩니다.

이 후 1982년 해미읍성 내에 순교비를 세우고, 1985년에 순교자의 유해를 본래의 자리인 해미읍성으로 옮기기로 결정, 1995920일에 해미성지 순교탑 아래 안장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해미읍성이 순교의 현장으로서의 성지임을 알리게 된 것입니다.

 

서산지역으로의 천주교가 전파되는데 초석을 다진 상홍리 공소는

1935년 범바로 신부에 의해 해미 지역의 순교자 발굴, 정리 및 유해의 보존이 어우러지면서 한국 내 순교자현양운동(殉敎者顯揚運動: 1939년 경성교구에서 태동한 운동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신앙을 지키고자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순교자들의 업적을 널리 알려 신앙생활을 더욱 깊고 굳건히 하는 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본당 발전을 꾀하던 신부는

서산 읍내에 부지와 가옥을 매입하고 1936년에 성당과 사제관 건립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93710, 낙성식을 올리면서 서산읍내로 본당이 이전 되었으니, 지금의 동문동 성당입니다.


 

 

 

 

이로서 상홍리 성당은 17년간의 서산성당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다시 공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본당과 공소 신자들은 공소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6년 종루를 복원하면서 사제관과 공소 강당의 노후 시설보수를 하게 됩니다. 복원에는 대전교구 백남익(白南翼, 1925~2004)신부와 서강대학교 임진창(任珍昌, 1937~1994)교수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이름난 상홍리 공소,

전통의 한옥과 유럽의 성당건축 방식이 조화를 이룬 형태로, 종탑과 본당, 배면부의 제의실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본당은 바실리카 양식과 전통 한옥 양식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성당 외부에는 회랑을 두어 삼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종탑은 기와 3칸의 형태로 성당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사침례를 위한 한옥의 변화라 할까요?

 

이에 서양의 종교공간에 한옥의 구법을 활용한 귀중한 자료라 하여 문화재청에서 200773, 등록문화재 제 338로 지정했습니다.

 

 

 

△ 서산 상홍리 공소의 내부입니다.

직접 들어 가 볼수 없어 창을 통하여 촬영하였습니다.

 

 

△ 공소의 종루

처음에는 제5대본당신부 멜리장신부의 어머니가 기증한 '세사리 종'이 걸려 있었으나, 공소로 있던 1940년, 상홍리공소의 종루가 낡아 해체하면서 본당의 종과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이 후 상홍리 공소의 종은 태평양전쟁의 군수품으로 빼았기었고, 본당에서는 공출을 피해 성당옆에 묻어두는 대신 안면도 누동리 공소의 종을 공출하게 됩니다. 이 후 광복이 되면서 세사리 종은 다시 동문동 본당에 설치 되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 성당 건립 당시 붙혀진 '천주당' 현판

 

△ 상홍리 공소 사제관

 

△ 서산 상홍리 공소의 옛모습 사진입니다.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웹서핑중에 구한 사진인데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길손이 찾은 날은 굳게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린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넉넉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박하면서도 순결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잔잔한 감동의 기분, 상홍리 공소를 만난 기분이 그러했습니다.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