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강화] "이곳이 편하였다"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강화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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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인천광역시

2019. 3. 11.


이곳이 편하였다.”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강화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 강화문화관광과 032-930-3123


망조의 시대,

정쟁에 휘말려 쓸쓸한 죽음까지

제 마음 제대로 내보이지도 못한

허망한 임금,

그는 지금도 이곳 용흥궁을 그리워 할 것이다.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던 곳이다. 원래는 민가의 모습이었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철종 4(1853)에 강화부유수 정기세(鄭基世, 1814~1884)’가 건물을 고쳐 짓고 ‘용흥궁(龍興宮)’이라 했다.

한 나라의 왕이 머물던 곳,

그러나 그 모습은 보통의 민가와 닮았고, 새로 고쳐지었다고는 하지만 좁은 골목에 자리한 양반네의 작은 집으로 왕이 자란 곳이라고 보기에는 작고 초라하다. 어찌하여 왕이 될 인물이 이런 곳에 머물게 되었을까, 또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머물던 자가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잠저였기에 가능한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소박한 용흥궁을 걸어본다.

   

 

조선 25대 왕 철종 이변(哲宗 李昪, 1831.06.17. ~1863.12.08)’

재위는 146개월(1849.06 ~ 1863.12), 아버지는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壙)’,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로 초명은 원범(元範)’, 이름은 ()’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 훗날 장조莊祖로 추존)’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恩彦君 裀)’의 셋째아들 전계군(全溪君)’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은언군, 이복삼촌 상계군 담(常溪君 湛)’ 큰형 원경(元慶)’등의 옥사로 교동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 후 왕족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농사와 행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중, 순원왕후의 명을 받고 궁으로 들어가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제25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즈음 조선은 본격적으로 망조(亡兆)’를 보이기 시작한 때이다.

세도정치의 불균형이 가져온 참혹함으로, 안동김씨 일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동김씨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무리수를 띄우게 되는 것으로, 왕가의 법도를 무시하면서까지 잡아 놓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 시기인 것이다.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

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임을 당할 때, 사도세자의 죽음을 찬동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정조를 밀어내고 새 왕으로 사도세자와 경빈박씨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역모는 발각이 되어 은전군(恩全君)은 자결했고,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은신군이 그 곳에서 병사하자 정조는 은언군을 강화도로 옮기도록 한다.


그러나 홀로 남은 은언군 인(恩彦君 䄄)’의 가족사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남 상계군 담(常溪君 湛, 1769~1786)’은 정조3(1779), 홍국영의 음모로 인하여 역모죄를 쓰고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나 자살을 하였고,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1801)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平山郡夫人 申氏)’는 순조1(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당시 천주교 신자임을 들어 사사되었다. 은언군 역시 가족이 사교에 물듬을 방치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결국 사사되었다.

 

그나마 정조의 후임으로 왕위에 오른 순조(純祖)’가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은언군의 자손들을 보호하려 했다.

순조17(1817)에는 강화도에 집을 지어주었고, 순조22(1822)에는 위리안치형을 감형하여 가시울타리를 거두도록 하면서 여느 백성들처럼 살 수 있도록 하였으며, 순조30(1830)에는 은언군의 자손들을 아예 강화도에서 방면하여 한양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한 덕에 원범은 한양에서 태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계군 광(全溪君 壙, 1785~1841)’에게는 부인 셋에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 중 장남 회평군 명(懷平君 明, 초명은 원경元慶, 1827~1844)’은 헌종10(1844), 안동김씨의 세도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전계군의 아들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민진용의 옥사가 발각 되면서 사사되고, 그로 인하여 전계군과 후실의 아들 영평군 경응(永平君 景應, 초명은 욱, 1828~1901)’과 계실 염씨의 아들 덕완군 변(德完君 昪, 초명은 원범元範, 조선25대왕 철종)’의 가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 되었고, 이렇게 남은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나무를 해다 파는 행상을 하며 살았던 것이다.

 


헌종15(1849) 66일에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원범을 '헌종의 대통을 잇는다.'는 언문 교지를 내리자 부랴부랴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문무백관과 함께 의장대를 앞세워 강화도 원범의 집을 찾았다. 그리하여 몰락한 왕족, 원범은 한양으로 들어오게 된다.

68,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다음날 25대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이름을 ()’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도 서자, 아버지도 서자, 자신도 서자출신에 강화도에서 농사꾼으로 있다가 임금에 올랐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강화도령’이라며 조롱하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더욱이 정치의 경험도 전무한 이유로 19세의 청년이었으니, 순원왕후 김씨가 섭정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상, 철종의 즉위는 조선왕조의 왕위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사건이다.

철종이 왕위를 잇는다 하여도 항령상에 의해 헌종의 후사가 아닌 그의 아버지 익종의 후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동생 내지는 조카가 되는 사람이 왕통을 잇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종묘의 제사에서 항렬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의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의 이유다. 같은 경우는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이은 세조가 유일하며, 중종반정, 인조반정에서조차 왕통의 계승관례는 지켜졌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종의 7촌 아저씨가 되는 원범을 불러들인 것이다.

순원왕후의 섭정아래에 있으면서 철종2(1851), 순원왕후의 간택으로 안동김씨 가문의 김문근(金文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가례를 올리니, 이는 대를 잇는 세도정권의 지속적인 권력을 위함으로 영은부원군이 된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에 의해 다시 안동김씨의 세도에 휘말리게 된다.

 


이후, 철종의 시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다.

기근과 가뭄, 화재와 홍수까지 더해지며 민초들의 삶은 황폐되었고,

철종 홀로 아무리 위민정책을 펼친다 해도 왕권을 우습게 보는 세도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지는 수탈이 극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나라의 법이 안동김씨로 통했고, 안동김씨에 의지하여야만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으니 뇌물이 성행했고, 벼슬을 사고파는 일들이 공공연했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횡포는 결국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게 되고, 전국적인 민란으로 많게는 수만 명, 적게는 수천 명의 규모로 농민들이 민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를 진주민란(晋州民亂)’, ‘삼정의 난(三政_)’이라 하며 통칭하여 임술민란(壬戌民亂)’이라 한다.

천재지변으로 까지 더해졌다.

기근과 전염병이 이어졌고, 전국적으로는 민란이 일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처절한 압박 속에서도 천주교의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었다. , 더 이상 믿을 곳이 없는 백성들이 천주교로 몰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수운재 최제우(水雲齋 崔濟愚, 1824~1864)’가 창시한 동학(東學)’까지 출현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철종13(1862),

흥선대원군의 사촌형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1862)’죽음은 그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하전은 실제 헌종이 승하하면서 왕위계승 물망에 오른 인물로 한 때 유력한 왕위계승자였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에 의해 관직을 제수받자, 그는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여 안동김씨 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왕위를 품으려 한다.”며 무고하여, 이하전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8월 사약을 내려 사사시켜버렸다.

이렇듯 임금인 자신의 목숨조차 위태로운 상황이 될 수도 있음을 철종 또한 알고 있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빈곤한 상태였던 철종,

왕위에 오르기 전 강화도에 머물 때, 마을의 양순이라는 처녀와 혼약을 맺었었다.

그러나 천민은 궁궐에 들어 갈 수 없는 규범으로 궁으로 데려 올 수 없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양순을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자, 궁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양순을 죽이도록 지시하였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철종은 비탄에 빠지기 시작한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속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았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 하며 조롱하는 것을 알았으며, 하물며 자신의 연인마저도 잃고 나더니 주색(酒色)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하전의 사사가 있고 난 후 부터는 거의 병석에 누워 있다시피 하였고, 철종15(1863) 128,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살의 나이로 승하했다.

 


철종은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아둔하였다.”

시인이자 역사가, 그리고 독립운동가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선생이 철종을 조롱한 말이다. 그런데 과연 철종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라는 의문이다.

물론, 철종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허수아비 왕으로 앉혀 놓고는 대신들은 물론이고, 학자, 일반 백성들의 조롱거리를 만들어 버린 사실을 지나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2019, 그러고 보면 다 똑같은 놈들이다.

지금의 세태를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으로 단 한번 살아본 적 없는 국개의원들이 민생고를 해결한답시고 개싸움을 벌이고 있는 국개투견장의 모습이 별다름이 없다. 그들이 민생고를 알겠는가? 그것들은 지들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인 년! ! 들일뿐이다.

 


차라리,

지금의 용흥궁의 모습이 좋다. 마을 속에 숨겨둔 듯 살아있는 옛 집의 소박함이 좋다.

민초로 살다가 갔으면 그나마 평안한 생이었을 것을, 험한 시대에 이끌려 자신의 삶은 사라져 버린 안타까운 삶의 역사를 바라보며 자박자박 발걸음의 소리를 듣는다.

이곳이 편하다.”라면서,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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