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한천] 조광조, 마지막을 다한 그곳. 죽수서원(竹樹書院)

댓글 3

[길손의 旅行自由]/전라남도

2019. 3. 21.

급진 개혁, 사람을 키우고 죽이다.

죽수서원(竹樹書院)’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3 / 061-379-3501

 

조선 선비의 표상이라 불린

정암 조광조,

사약 받은 그를 묻고 제사를 지낸

학포 양팽손.

두 사람을 배향한 죽수서원이다.

 

죽수서원 가는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을 배향한 서원이다.

1519(중종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순 능주로 유배되고, 양팽손은 그를 위해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여 고향인 능주로 돌아 온 뒤, 조광조와 함께 자연스럽게 친해지며 공부하였는데,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그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화순 쌍봉사 골짜기에 장사를 지낸 뒤 초가를 짓고 제자들과 제향 하였다.


그러던 1568(선조1)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에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 건립을 건의하자 죽수(竹樹)’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후, 1630년 유림들의 뜻을 모아 양팽손도 추가 배향하게 되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손 되었다가 1971년에 서원을 복원 하였고, 1983년 한양 조씨 후손들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 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조선조의 학자이며, 정치가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그 심신이 너무도 올곧은 강한 인물이다.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았음이 그의 강직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다.

어릴 때부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하였으며, 언행도 성현의 예를 따랐다. 조광조는 17세의 나이에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1454~1504)’에게서 수학하였고, 불과 몇 년 만에 성실하고 촉망받는 성리학자로 명성을 날리며 점필재 김종직(佔畢齎 金宗直,1431~1492)’의 학통을 잇는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1504(연산군10) 임사홍이 궁중세력과 결탁하여, 신진사류들을 제거하기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는데, 이와 연관이 있었던 김굉필등의 신진사류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조광조도 23세의 나이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한양조씨 후손들의 관계를 적은 비석과 원지복원비


외삼문 '고경루(高景樓)'


죽수서원 강학공간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1510(중종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15(중종10)에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용된 후, 예조좌랑을 역임하면서 중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엉망이었던 나라는 중종반정으로 수습 중이었는데, 그 방안으로 조광조의 이상정치관이 시대에 맞았다고 판단을 한 중종의 전폭적인 지원과 그를 따르는 사람파들이 있었다.

당시 훈구파가 의정부와 육조에 있었다면, 사림파는 이조에서 인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이상정치(理想政治)’의 실현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관직에 있는 자들이 도학을 실제 이행하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 ‘왕도정치라 한다.


그러면서 이에 반하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에 대한 공격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비판하였으며, 이들은 권좌에 올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취하니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실천방안으로 반정공신 일부를 개정해야하며,

공 없이 나라의 녹을 먹고 있으므로 삭제해야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사림파의 이러한 급격한 개혁의 주장은 그를 옹호하는 중종이라할지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리분별 분명한 주장이 거침없었고, 자신의 뜻이 관철 될 때까지 길어지기도 했으니 승지들은 모두 싫어하는 생각을 품었고, 왕은 듣기 싫어했다.” <사재집 思梓集>고 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유를 두고 왈가왈부 할 수도 있게 되는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공신의 4/3을 공훈에서 삭제하게 된다.

 

서재 '정윤당(精潤堂)'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서원 강당으로 사용된다.


동재 '박약재(博葯齋)'

정면3칸, 측면2칸으로 1칸은 툇마루를 두었다.


그러자 젊디젊은 사림파에 대하여 나이 먹은 훈구파들은 불만을 들어내기 시작했고, 조광조를 몰아 낼 무고를 꾸미고 있었다.

조광조는 “재상의 욕심이 이리 요사하고 간특할 수 있는가”라며 남곤을 공격하기도 했다.

지정 남곤(止亭 南袞, 1471~1527)’, 그가 누구인가, 평생을 정치로만 살아온 정치가다. 성종 때 정치에 입문하였고, 연산군 갑자사화로 유배, 중종반정으로 다시 복귀하여 의정부에 오르고 훗날 영의정이 된 뿌리까지 훈구파인 인물이다.

또 한 인물 남양군 홍경주(南陽君 洪景舟, ? ~1521)’가 있다. 견성군을 옹립하려 했던 이과의 난을 다스린 공응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자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아닌가,

수세에 몰린 이들은 반격을 개시한다.


홍경주는 딸을 이용하여 나라의 인심이 조광조에 돌아갔으니 그대로 두면 왕의 자리까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게 하였고, 남곤과 심정 등은 후궁들을 이용하여 궁궐의 나뭇잎에 꿀물을 발라 벌레들이 갉아 먹고 나니 글자가 새겨졌는데 그것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다. , +를 합하면 조가 된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나뭇잎을 왕에게 바쳐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피곤했던 중종이었다. 더하여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하여 왕권을 위협하고 조정을 문란하게 만들고 있다며 탄핵하기에 이른다. 이에 사림파와 조광조등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1519(중종14) 11,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림파의 많은 인물들이 사형 당하거나 자결하였으며, 사사의 명을 받았던 조광조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비호로 죽음은 면하였고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 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남곤 등이 실세에 오르면서 한 달이 되지 않은 12,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3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원 묘정비와 내삼문


내삼문 '조단문(照丹門)'


내삼문에서 내려본 강학공간


죽수서원(竹樹書院)’

사후, 1568(선조1)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층 되었다. 이듬해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1570(선조3)죽수(竹樹)’라는 사액을 받게 되는데 이는 옥천서원에 이어 선조 대에 두 번째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1613(광해5)에 서원을 중수하였고, 1630(인조8)에 양팽손을 추가배향 하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헐려 제사를 위한 단만 유지하여 제향 하다가 1971년 도곡면에 서원을 복원하였고, 1983년에 이르러 사액을 받은 지금의 자리로 이전 복원하였다.

 

대숲 우거진 중앙에 홍살문을 지나 이끼 낀 돌계단을 따라 오른다.

시원스런 댓잎 비비는 소리를 들으며 올라서면 배석복원비가 서며 그 앞에 외삼문이 선다. 안으로 들어서면 동재 박약재가 강당 정윤당’, 마당 좌측으로 비껴 서원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다시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내삼문이 반기고, 사당인 천일사.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내삼문 담장으로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보통의 서원은 강당을 정면에 두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게 되는데, 죽수서원은 그러한 배치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죽수서원이 처음부터 서원의 의미로 건립된 된 것이 아니라 제향을 위한 사당이 만들어 지고 훗날 강학공간이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죽수서원 사당 '천일사(天日祠)'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이다.


사당 뒤편에 피어난 '영춘화'

보고자했던 죽수매는 어디가고, 영춘화만 무성하다.


죽고 나서야 인정을 받은 학자, 조광조.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그는, 개혁적인 정치로 훈구파의 감정을 샀고, 도학정치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무죄를 알면서도 무고를 받아들인 것도 있다. 그의 학문이 온 나라의 관심을 집중해서 받은 것도 이유가 되겠다.

그의 죽음에 수많은 사림들이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등을 역임한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3차례에 이은 상소와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1515~1590)’,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등은 그에게 포상을 내려야한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조광조가 도학을 창명하고 이황이 이치를 깊이 파헤쳤다.”고 주장하며 조광조와 이황을 문묘에 모셔야 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율곡은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조광조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했다.


결국, 조광조는 선조 초에 신원되었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이후 조광조의 학문과 인격은 조선 선비의 귀감이 되었고,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들이 세워졌다. 화순 능주의 죽수서원을 비롯, 1573년 양주에 도봉서원(楊洲 道峰書院)’을 세웠고 1576년에는 평안도 희천에 양현사(兩賢祠)’, 1605(선조38)에는 그의 묘소 아래 심곡서원(深谷書院)’을 세웠다.

 

동재옆에 세워진 '추모비'

"정암조선생 학포양선생 죽수서원 유지추모비"


조광조, 그는 조선시대 가장 개혁적인 선비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너무 급했다. 중종을 도왔으나, 중종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중종은 반란으로 왕이 되었다. 그것도 자신의 힘이 아닌 연산군에 반대하던 신료들의 손에 의해 왕이 된 것이다. 고로 정치세력들은 모두 공신들로 채워졌으며, 모든 정치는 신료들에 의해 의지되었다. 중종에게도 새로운 힘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러한 때 조광조가 나타난 것이다.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조광조는 개혁정치를 밀어부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중종은 자신을 흔들던 반정세력을 추스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제 왕은 조광조가 더 이상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계속 밀어부친다. 왕과 신하들의 경연은 중종 자신도 귀찮아했다.

그러던 중 빼들은 위훈삭제’, 이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중종 자신도 공신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국, 위훈삭제의 이면에는 그 대상이 중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조광조는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조선 최고의 선비로 불렸으나, 시대에 스며들지 못한 급진개혁, 그것이 그를 키웠고, 그를 죽였다.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한국기행.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