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세종대로] 한양도성의 정문, 그 역사, 서울 '숭례문(崇禮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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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서울특별시

2020. 5. 17.

600년 역사의 상처와 가치, 그리고 지금,

‘숭례문(崇禮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40

 

국보 제1호,

1396년(태조5)에 축성되어

1398년(태조7)에 중건 된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도성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남대문으로도 불렸다.

 

당시 한양은 총 4,700리(약 18.6km)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태조와 함께 정도전은 1395년(태조4)에 도성축조도감을 만들고 성터를 측정하였는데, 당시 한양을 둘러싼 4개의 산에 올라 실측하여 5성터를 결정하였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게 된다.

 

4대문은 유교의 덕목으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방향에 따라 이름 지었는데,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숙정문(肅靖門=북대문)’과 함께 도성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었고, 그 대문의 사이사이에 소문을 두었다.

 

동쪽은 ‘仁’을 붙여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했고 보물 제1호다. 東의 산인 ‘타락산(駞駱山=현 낙산)’)의 지세가 약하여 산의 기운을 더하기 위하여 ‘지(之)’자를 더했다. 더하여 한양 도성땅에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아래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서도 之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지리적인 열악함을 보완하고자 반달의 옹성(甕城)을 쌓아 성문을 가려 적으로부터의 방어와 공격에 염두를 둔 유일의 성문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한 대문이기도 하다.

 

서쪽은 ‘義’에 해당하여 ‘돈의문(敦義門)’이라 하였고, 西의 산은 ‘인왕산(仁王山)’이다. 그러나 1413년(태종13)에 풍수에 의해 좋지 않다하여 폐쇄하고 새로 문을 만들어 경희궁의 서쪽에 있다는 뜻으로 ‘서전문(西箭門)’이라 했다. 1422년(세종4년)에 도성을 새롭게 고치면서 서전문을 헐고 서대문 마루 턱에 새 문을 세우고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하였다. 하여 훗날 새롭게 지은 문이라 하여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렸고, 문을 지나는 길을 ‘신문로(新門路)’라 불리게 된다.

 

‘禮’는 남쪽에 해당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南의 산은 ‘관악산(冠岳山)’으로 현 남산에 해당한다. 특이하게도 숭례문의 현판은 가로로 쓰여 졌는데, 이는 남산의 모습이 불꽃의 모양을 하고 있어 火를 의미하는 崇禮를 씀으로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현판은 그림과 시에 뛰어났던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이라고도 하고, 당대 명필로 꼽혔던 세종의 셋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라고도 한다.

 

‘智’의 대문은 ‘숙정문(肅靖門)’이며 北의 산은 ‘북악산(北岳山)’이다. 북은 음기를 뜻하여 가장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더하여 음기가 강하여 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진다 하여 항시 문을 닫아 두었다. 또한 최양선은 문을 내어서는 안된다하여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기를 권하였고, 나무를 무성히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사실 산 중턱에 자리한 문은 사람들이 애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문(大門)’의 사이사이에 ‘소문(小門)’을 두었는데,

東北의 동소문은 ‘혜화문(惠化門)’으로 숙정문이 닫히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東南의 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으로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 문을 통해 나갔다고 하여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했다. 西南의 서소문은 ‘소의문(昭義門)’으로 죽은 사람들과 함께 죄 지은 자들이 유배를 나설 때 지나는 문이었고, 西北의 북소문은 ‘창의문(彰義門)’으로 고양, 양주를 통하는 문으로 북대문이 잠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작은 문이다.

 

간단히 알아본 4대문과 4소문,

결국 ‘한양성문(漢陽城門)’들은 단순히 독립적인 건축이라고 하기 보다는 어느 한 장소를 알리는 ‘문간(門間)’의 성격이 강하다. 즉 그 자리에 있는 건축, 물건에 대한 보호를 위한다고 할 것이다.

하여 조선 초기 태조와 정도전은 ‘오행(五行)’을 근간으로 ‘오상(五常)’에 기초를 두었다.

‘五行’이란, 목(木=나무), 화(火=불), 수(水=물), 금(金=쇠), 토(土=흙)을 뜻한다. 여기에 五常을 더하는데, 오상이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仁, 義, 禮, 智, 信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서로 연결해보면

목(木)은 동(東)이며, 인(仁)을 뜻하니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한 것을 보면 가엽게 여겨 정을 나누고자하는 마음)’이며,

금(金)은 서(西)이며 의(義)를 뜻하여 ‘수오지심(羞惡之心=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고,

화(火)는 남(南)으로 예(禮)를 뜻하는데 이는 ‘사양지심(辭讓之心=자신을 낮추고 겸손해하며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다.

수(水)는 북(北)을 말하며 지(智)를 뜻하는데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며,

토(土)는 중앙을 의미하는데 신(信)을 의미함으로 ‘광명지심(光明之心=중심을 잡고 항상 가운데에 바르게 위치해 밝은 빛을 냄으로써 믿음을 주는 마음)’을 말한다.

 

즉 사대문과 사소문을 건축함에 있어,

각각의 오행에 방위와 오상을 배치해서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뜻이다.

 

이렇듯 사대 성문이 세워졌고, 그 중에 한양 성곽의 정문이 ‘숭례문(崇禮門)’이다.

1396년(태조5)년에 최초로 축조, 2년 뒤인 1398년에 중건 되었고, 1448년(세종30)에 크게 개축했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의 경복궁의 방향에 남쪽이며 정문이다.

남쪽의 관악산(=남산)이 북쪽의 북악산 보다 높았고, 산의 모양새가 화기를 품은 일렁이는 모습이어서 관악산의 화기에 맞불을 놓고자 예(禮)의미를 담아 이름 지었다. 다른 도성문들과 다르게 종(縱)으로 쓰인 글씨는 불에 타오르는 형상에 따른 것으로 숭례문의 현판으로 맞불을 놓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처음의 숭례문은 양편으로 성곽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도 피해갔으나, 1907년(고종44) 도로를 내기 위한 일제에 의해 성곽들이 헤쳐졌다. 남산에서 서소문까지 이어져 있던 성곽을 모조리 떼어낸 것이다. ‘고종 실록’에 의하면 3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 1858~1916)’이 숭례문 좌우 8칸을 헐자고 제안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 숭례문의 남은 성곽까지 없앨 것을 왕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일본 왕세자의 조선 방문이 있었다. ‘대일본제국 천황의 세자가 약소국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치욕이며, 더욱이 고개를 숙이고 성문(홍예문)으로 들어설 수 없다.’라고 하였고, 그에 따라 한양의 성곽들 중에서 가장 먼저 헐렸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일제의 조선근대화 식민지정책은 시작되고 있었으니,

1899년에 돈의문에서 흥인지문을 거쳐 청량리로 향하는 전차가 놓였고, 12월에는 종로에서 숭례문을 지나 용산으로 가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한일강제합병)’ 이후에는 더욱 노골화 되어 남산과 장충동 사이의 성곽을 시작으로 한양의 성곽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숭례문은 석축 위에 2층짜리 문루가 올라선 모습만 남아있게 된다.

 

그러던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숭례문에 방화사건이 일어난다. 화재 5시간만인 새벽 1시 55분, 돌덩이들만 남긴 채 전소되었다.

불을 지른 이는 ‘채종기(1939~ , 당시69세)’로 1998년 일산신도시 내 토지 30평의 소유자로 공시지가 9,600만원의 책정에 반발하며 4억을 요구하다가 건설사가 토지매입을 거부하였는데, 이에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2006년 4월 창경궁 문정전을 방화하여 검거 되었으나, 600만원 공탁과 전과가 없고, 나이가 많다며 집행유예 2년에 추징금 1,300만원을 선고하게 된다.

 

그리고 2008년 2월 10일,

시너와 라이터를 들고 숭례문 1층 누각을 통하여 2층으로 올라가 시너가 담긴 페트병 3개 꺼내 불을 붙이고,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하고 현장을 도주했다.

범인은 하루 뒤인 2월 12일 강화 경찰서에 붙잡혔고, 방화사건이 채종기 본인이 범인임을 시인했다. 여전히 “토지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어 범행했다.”면서,

진술 중에

“인명피해는 없고,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

“노무현의 잘못이 99.9%, 내 잘못은 0.1%다.”라고 하여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결국 채종기는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2018년 2월, 만기 출소했다.

 

이 후 2013년, 5년 3개월에 걸친 복구사업이 완료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시간을 보내며 복원된 숭례문의 모습은 지금에 이른다.

 

복구공사는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지켰으며,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성곽의 원형도 복원했다. 석재들은 화재로 인한 안정성의 평가를 거쳐 재사용하였고, 일부 석재는 경기도 포천에서 가져다 썼고, 강화 매음리에서 박석을 구했다. 상층부는 대부분 불탔으나 하층부는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있어 원형을 유지하며 안정성이 확인 된 목재와 부재들을 재활용하였고, 새로운 목재는 국내산 육송이 사용됐다. 전남 장흥과 충남 부여에서 기와를 전통기법으로 구웠으며, 전통안료의 사용으로 차분해진 색이다.

 

용마루의 길이가 16.6m로 기존보다 0.9m가 늘어났으며, 2층 누각의 잡상 9개는 그대로이며, 1층 누각의 잡상은 원래 8개였던 것을 짝수를 쓰지 않는다는 풍수에 따라 7개로 줄였다.

없던 성곽도 생겨났다. 동으로 53m, 서로 16m, 그 이후에는 가드 레일로 구분을 두었다.

 

“사라진 것을 되살린 것이 아니라 훼손 된 것을 바로잡은 복구”라 한다.

그럼으로 “국보1호로서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숭례문의 복구는 현재 진행형이라 하고 싶다. 과거 선조들이 만들어낸, 색칠해낸, 쌓아올린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진 못했다.

 

숭례문이 가진 가치,

그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필요성이고, 지키고자하는 안전 의식이다.

숭례문의 앞, 편의점에서 진한 커피 한잔 들고 바라보는 도심 속의 성문,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문화유산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은 여유다. 편안함이다.

그것이 국보1호의 위엄이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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