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운정] 주인장을 닮은 외유내강의 정자, '강릉 해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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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강원도

2020. 8. 17.

어촌(漁村)의 마음을 담은 누정,

‘강릉(江陵)해운정(海雲亭)’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256(운정길125) / 033-640-4414

 

조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담은 정자가 있다.

주인장은 그 뜻을 담았다.

정작 주인은 3년의 시간만을

정자와 함께했다.

안정되고, 차분해지는 정자는 주인의 기품을 닮았다.

 

조선 초기였던 1530년(중종25)에 강원감찰사로 있던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 1487~1540)’이 지은 별당 건물이다.

강릉 지방에서는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며, 가장 온전하게 보전된 누정으로 그 의미가 깊어 1963년 보물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어촌은 1487년 강릉여고 인근에서 태어난 인물로, 1057년(중종2)에 진사가 되고 부제학,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문장에 뛰어났다.

 

늘 그렇듯 중종 대 조선의 정치도 상당히 어지러웠다.

중종이 누구인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이역(李懌)’, ‘진성대군(晉城大君)’이다. 서열상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반정으로 1506년(연산군12)에 왕위에 오른 조선11대왕이다. 즉,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반정세력이 자신의 집을 에둘렀을 때조차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몰랐다. 대비의 허락을 얻고 그날로 즉위식이 이루어졌는데 면류관이 없어 익선관을 쓰고 즉위식을 할 정도였다. 중종이 반정세력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중종은 왕권을 온전히 하고자 반정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등용한 인물이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다.

사림파의 맥을 잇는 인물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을 불러온 것이다. 처음에는 온전히 조광조의 도학정치가 먹혀들어갔다. 그러나 과격한 개혁에 중종은 지쳐갔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이 결국 반정공신과 별 차이 없는, 자신의 왕권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훈구파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고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것이다, 이로서 사림파들을 박살냈는데, 조광조 역시 유배 후 사사되었다.

 

이제 다시 권신들의 세상이 되었다. 심정(沈貞, 1471~1531), 남곤(南袞, 1471~1527), 홍경주(洪景舟, ?~1521)가 권신정치의 포문을 연 ‘기묘삼간(己卯三奸)’이라 하며, 이항(李沆, 1474~1533)과 김극핍(金克愊, 1472~1531)이 합류하며 심정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 했다.

 

중종의 또 다른 선택은 척신 김안로였다.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 1481~1537)’,

세상사 시비걸기 좋아하는 인물하자 자신에 반대하는 인물에 잔인한 보복을 일삼는 외척세력이다.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던 김안로는 아들 김희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가 혼인을 하면서 풀려났으나, 외척의 힘을 이용한 권력남용이 심하자 신묘삼간의 탄핵에 의해 경기도로 다시 유배된 인물이다.

이때 김안로는 유배지에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심언광, 심언경 형제가 유배지에 있던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즈음 1530년(중종25년), 강원도 감찰사로 있던 어촌 심언광은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언관을 역임한 심언광은 국방의 중요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권신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는데,

이에 대한 대응으로 김안로의 석방을 적극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를 실현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김안로는 공포정치로 세상을 어지럽혔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김안로는 붕당을 조직하고, 전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적을 축출하여 사사시키는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켰으며, 정적에 대해서는 친족, 재상, 종친과 관계없이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하였다. 경빈박씨와 복성군 미를 죽이는 등의 여러 차례 옥사가 일어났으며, 동궁을 보호한다는 명분에 중종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작금의 상황에 그의 등용을 적극 주장한 심언광은 괴로워했다.

특히 김안로가 자신의 외손녀를 동궁의 비로 삼으려 하자 이를 질책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둘은 갈라지게 된다. 1536년 김안로의 악행을 비판하였으나 역으로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김안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537년 문정왕후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들통이 나자, 도를 넘은 횡포를 방관하던 중종은 즉시 체포 유배시켰으며, 사사시켰다. 이로서 김안로의 세상은 끝이 난 것이다.

 

더불어 심언광은 공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게 된다. 형과 함께 정승의 물망에도 올랐었다.

그러나, 김안로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배를 풀어주고 등용시킨 일로 대윤과 소윤에 의해 탄핵을 받고, 형 심언경과 함께 관직을 삭탈 당했다.

훗날 1684년(숙종10)에 신원 복관 되었고, 1761년(영조37)에 ‘문공(文恭)’의 시호를 받았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중년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자 본가 옆에 ‘해운정’을 지었다.

그러나 조정의 부름에 나갔으나, 짧았다면 짧은 찰나와 같은 7년의 정치상황은 뜻에 맞지 않는 아귀다툼의 정치판에서 신물을 뱉어냈다.

 

차라리 경포호수의 한가한 바람과 경포바다의 푸르름을 벗 삼았다면 삶의 모습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뜻이 있어 나라의 부름에 응했으나 휘몰아치는 정쟁 속은 문장과 풍류를 즐기던 어촌이 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처럼 강릉에는 ‘해운정’이 고즈넉이 서있다.

누정의 뒤로 시루봉 줄기가 이어지고, 앞으로는 내가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부드러운 마당이 반기고 자연스러운 축대와 기단위에 누정이 자리한다. 주위의 풍경과 어긋나지 않는 부드러움이다. 해운정이 주는 안정감으로 기분은 차분해지고 마음은 밝아진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3단의 축대와 기단을 가진 남향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다. 대청 띠살문 위에는 창방으로 결구했고, 분합문으로 달아 서까래 끝에 달린 들쇠에 매달 수 있게 했다. 대접받침을 올린 초익공(初翼工)으로 홑처마다. 연등천장에 귀틀을 짜서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2칸을 대청마루로 하였고, 1칸은 온돌방을 두었는데 중간에 미닫이문을 두었다고 한다.

 

건물적인 특징으로만 본다면 ‘주심포(柱心包)’와 한국 최초의 ‘초익공공포(初翼工栱包)’이며, 지붕구조를 받는 구조물의 ‘충량(衝樑)’이 있다. 지붕보의 중간에 아기처럼 작은 기둥(동자주童子柱) 을 세워 꾸민 지붕틀의 ‘외기도리’를 했으며 조선 초 유행했던 대공에 물결, 구름, 꽃등의 문양을 넣은 ‘파련대공’과 ‘달동자(매달려 있는 동자?)’가 있다는 것이다.

 

건물 앞에 걸린 ‘海雲亭’현판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글씨이며,

내부에 권진응의 ‘해운정중수기문(海雲亭重修記文)’이 걸려있다.

당시 심언광은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였는데, 1537년(중종32) 명나라의 사신이었던 정사(正使) 공용경(龔用卿)이 쓴 ‘경호어촌(鏡湖漁村)’ 현판과 부사(副使) 오희맹(吳希孟)이 쓴 ‘해운소정(海雲小亭)’의 시판이 걸려있어 당대 조선 문장가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긴다.

그 외에도 율곡 등 문인들의 글씨와 시가 37개의 현판으로 걸려있다.

 

이렇듯 정치가이기 보다는 시와 문장, 그림에 뛰어났던 어촌 심언광,

다시 해운정을 찾았으나, 그가 머문 시간은 3년 남짓이다. 50의 나이에 찾은 자신의 쉼터에서 내려놓는 마음을, 버리는 욕심을 찾았을 것이다. 청렴한 삶을 살고자하는 의지를 보인 그의 호 ‘어촌(漁村)’처럼 해운정에서 그는 그만의 삶을,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정치판이 아닌 곳에서 어촌의 신념을 발휘했다면 어떠한 삶이었을까, 시(詩)로 마음을 쓰고, 그림(畵)으로 세상을 비추고, 글(文)로 자신의 기운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해운정은 그러한 문장가의 기운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서있다. 어촌의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서있다.

 

해운정에서는 그래서 사람이 차분해진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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