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로투스 2019. 5. 8. 23:17

법과 삶의 기묘한 연금술 블루드레스 알비 삭스

 

@ 제니퍼 네델스키는 20세기에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갱신하려 했던 한나 아렌트의 제자였는데, 나는 그녀와 이성과 판단의 차이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내 기억에 의하면 제니퍼는 칸트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성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판단은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순수이성은 만약 AB보다 크고 BC보다 크다면, AC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러나 판단은 비중에 따라 달라진다.”

 

판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녀는 나는 저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과 저 그림은 아름답다.”는 말의 차이를 예로 들었다. ‘나는 저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에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사실에 관한 순전히 주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 그림은 아름답다.’는 말에는 무엇이 아름다운 예술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합의된 기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림이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화자는 이미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합의된 기준이 예술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법적 판단에도 적용된다. 만약 내가 어떤 결과가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법조계에서 수용되어온 원칙과 규범,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확인해주는 것이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으로 그 결과가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공적 결과를 가져오는 공적 행위이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서평이라면 그럴 수 있고 또 그래도 된다. 판결은 수학문제의 해답과는 달리 순수한 논리적 연습만으로 생산되는 종류의 해답이 아니다. 판결은 합의된 기준에 비추어 결정적 사실 요소를 평가하고 저울질한 결과물이다.

 

재판관으로서 나는 내가 쓴 판결문의 독자들에게 그 결과가 정의롭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서 수용된 원칙과 규범, 기준을 따라야 하고 추론과 분석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각자의 주관적 기호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것에 따라 평가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법조인들 간의 담론은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법적 담론은 그 절차를 지배하고 있는 규범과 가치에 대해 법조인들 사이에 형성된 공통의 이해와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법적 담론에서 순수이성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지만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만약 정의가 자동판매기에서 선택한 상품이 아니듯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데이터를 입력하고 법규범들 사이에 순서를 정하는 것뿐이다.

 

그러고 나면 기계에 입력된 수식이 나머지 일들을 처리해 줄 것이다. 이는 분명히 비용을 절감하고 확실성을 담보해 줄 것이다. 또한 일관된 결론을 내림으로써 상소의 여지 따위는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직장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판결이라는 것은 필연적 결론은 없다고 상정하고 있다. 판결은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심리한 후 내린 결론이다. 합의된 기준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을 평가하고 저울질한 후 최후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판결이다.

 

제니퍼가 말한 임무누엘 칸트의 철학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해석을 상기해보면, 판결은 순수이성의 추론과정을 통해 독자들이 그것을 수용하도록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려는 것이다.

 

법공동체와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부분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바로 법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공동체의 정체성과 자의식은 법의 원칙과 그리고 가치와의 관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만약 제니퍼가 옳다면, 사실 그렇게 믿고 있지만, 설득은 매우 합리적인 판결에 따라붙은 불필요한 첨가물이 아니다. 설득은 결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판결이라는 법의 궁극적인 생산물을 정당화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판결은 단순히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판결은 그 성격상 그곳이 꽃 박람회장이든, 권투 경기장이든, 스케이트 경기장이든, 법정이든, 그 어디에서든 평가적 요소를 미리 상정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을 객관적 저울대 위에 올려놓더라도, 각각의 요소에 개별적으로 주어진 무게와 모든 요소를 합했을 때 나타날 종합적인 균형은 결정권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과도한 주관성을 통제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주관성을 통제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적극적인 비전이다. 이는 제니퍼가 말한 확장된 사유방식을 판사들에게 요구함으로써 부각되는 것인데, 판사가 적극적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개인적인 특수성의 한계를 벗어나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 즉 설득해야 할 모든 사람들의 관점을 포괄적으로 살필 수 있다. 따라서 경험이 있거나 확장된 사유방식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 보인 사람들 가운데 판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다수의 판사로 구성된 법정이다. 여러 명의 판사가 동시에 평가함으로써 판사 개인의 선입견이 다른 판사들의 생각에 의해 중화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소는 판결의 공개성이다. 법정에서 내린 판결문은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광범위한 법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일반대중이 판결문의 추론방식과 일관성을 정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해야 판사의 주관성이 통제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알아야 할 점은 법공동체가 단지 법률가들로만 구성된 좁은 의미의 법조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법공동체는 어떤 문제를 처리할 때 법조인처럼 사고하거나 느끼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관념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나는 판결문을 준비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관념적 법공동체를 염두에 두곤 한다. 내 판결문을 읽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그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논거 방식을 찾아다닌다.

 

적어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만이라도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주길 희망한다. 이는 내 판결이 옳고 다른 사람들이 그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법기능 속에는 태생적으로 겸손함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래서 자신이 필연적으로 옳다거나, 무엇이 어떤 문제의 유일할 해답이라거나, 자신이 그 해답에 도달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 어느 판사도 자신이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옳다고 믿고 있는 주장을 방어할 때 뻔뻔해질 수 없다면, 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겸손하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겸손은 제도적 겸손이지 개인적 겸손이 아니다.

 

재판관으로서 나는 법기능이 항상 옳게 작동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그렇다. 동료 재판관들 간의 개인적 차이가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항상 옳을 수 있겠는가?

 

우리 재판관들의 의무는 옳기 위해 사건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판결문이 판결집 목록 어딘가에 포함될 것이고, 앞으로 발표될 다른 판결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서로 수렴하기도 하는 법적 사고들 간의 무한한 토너먼트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것뿐이다.

 

나는 나 자신을 헤라클레스라고 상상하려고 애쓴 적이 있다. 헤라클레스는 로널드 드워킨이 법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잘못된 주장을 거부하고, 유일한 정답에 도달하고자 꿈꾸는 판사에게, 그런 영웅적 인물은 법률문제에 관한 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장난삼아 만들어낸 인물이다.

 

나는 드워킨이 후기 모더니즘과 극사실주의 둘 다에 반하는 철학적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기 모더니즘은 정답이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극사실주의는 우리가 그럴듯하게 언어를 꾸미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 시대의 지배적 관점을 강요하기 위해 사법 권력을 단순히 이용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 사회가 훨씬 나아질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재판관으로서 한 모든 일이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처리하기 위해 주어진 맥락 속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내가 이해한 대로 법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능한 한 법적으로 분명하고, 진실되고, 조화로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러 가지 목소리 가운데 하나로밖에 볼 수 없다. 내 목소리에 결론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판사의 목적은 유일하게 옳은 결론을 찾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특정 사건과 관련해서 최선의 법해석을 내놓겠다는 끊임없는 갈망으로 정직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기준은 내 판결문이 회자될 법공동체의 생각과 관행에 적합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법에 대한 공동체의 이해가 끊임없이 진화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차원에서 내가 발전시키고 있는 특정한 입장은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앞선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판결문을 써왔으며, 그러한 입장을 담고 있는 다른 판결문에 대해 내 이름을 걸고 지지할 것이다.

 

나의 법적 양심이 변화의 필요성이 무르익었으며, 진보적 판결문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는 단지 여러 가지 다른 목소리와 함께 조화를 이루거나 불협화음을 내며 담론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만약 순수법이성이 전부였다면 어떤 문제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판단력의 행사가 일의 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라면, 나는 확실성보다는 그 순간에 적합한 최대의 설득력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올리버 홈스의 유명한 반론이 그 당시에도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중에 그의 주장이 단순히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고 해서 옳은 판단으로 변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논리가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위대한 반론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브랜다이스의 반론들은 발표 당시에 일관성 있는 법철학을 분명하게 담고 있는 중요한 관점을 제시했다. 유일한 목소리가 결국 지배적인 목소리가 되었다. 그것이 법적 변증법의 본성이며 반론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희망이다.

 

그래서 나는 내 법적 양심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판결문을 작성할 때, 내 동료들이 보일 반응을 먼저 생각해보았다. 새로운 접근법에 대해 이런 라운드에서는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다음번을 위한 씨앗은 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다른 심급의 판사들과 치안판사들이 그들 자신의 판결문과 씨름하다 내 판결문을 읽고 거기서 교훈을 얻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변호사들이 내 판결문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그들의 고객을 돕기 위해 새로운 주장을 탐색하는 장면도 상상해보았다.

 

여러 해 동안 법학을 가르쳐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학자들이 판결문에 대해 학생들과 토론하고 교과서의 부교재로 사용하면서 비판적으로 파헤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특별히 학생들이 아직 탐구적인 정신과 살아 있는 사상으로 무장하고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보통 사람들에게 법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법은 접근 가능하고 설득력 있는 형태로 그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구성원 전부가 잠재적 독자인 집단도 있다. 그들은 바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문제의 사건에 개입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해당 영역에 특별한 책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캐나다 최고법원 판사가 나에게 미국의 경우 많은 법적 추론이 정부를 적으로 상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간섭받지 않을 권리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반면에 캐나다의 법정은 정부를 적이 아닌 친구로 보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와 웰빙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와 합동해서 일을 추진한다고 한다.

 

나는 캐나다처럼 우리 남아공의 헌법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인간 존엄성, 평등,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공통의 프로젝트를 합동으로 추진하는 친구 관계로 그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권력분립의 원칙은 삼부가 모두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한 형태의 공적 책무에 종속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고, 그러한 분립이 삼부 간의 저속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문명화된 대화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

 

사법부는 정부가 헌법을 위반한 경우 적당히 날카로운 언어로 그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법정은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경계하는 동시에 정부가 어쩔 수 없어 내린 어려운 선택에 대해 통찰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변혁의 필요성이 크고 그것을 위한 가용자원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나라의 법정이라면 특히 더 그래야 한다.

 

공적 생활에서 문민성은 좋은 매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민주적 다원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입법, 행정, 사법 삼부는 상호 의례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사실 사법부와 행정부 간의 대화적 관계는 우리 헌법의 구조 속에 내재된 전제조건이다.

 

헌법재판소는 법을 심사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 즉 법률심사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의회가 헌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만큼의 범주 내에서 의회의 법률제정권에 대해서도 심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끊임없이 입법부의 타당성 여부를 주시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헌법재판소에 부여된 권한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의회에서 헌법에 맞지도 않고 타당성도 없는 법률이 제정될 때, 헌법재판소는 정부에게 그 법이 가진 오류를 수정하도록 유예기간을 가질 것을 명령할 수 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방식을 동원해 정의롭고 공평한 입법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법부의 권한 속에 의회와의 대화의 개념이 구축되어 있다.

 

나의 허영심을 좀 더 내보이자면, 의원들이 새로운 법률안을 제안할 때 내가 쓴 판결문을 읽어볼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법률 자문은 내 판결문의 발췌본이나 요약본을 읽어볼 것이다.

 

물론 신문에도 우리의 판결문이 실린다. 언론은 우리의 판결문을 검토하고 대강의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한다. 우리는 종종 언론이 복잡하고 긴 판결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요 이슈와 결론을 간추려 만든 간단한 보도자료를 그들에게 배포한다.

 

우리의 의도는 보도를 통해 일반 대중들이 그들의 기본적 권리를 알게 하고,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고 기능하는지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판결문은 대중에게 그러한 지식과 이해의 주요한 원천이다.

 

판결은 소송당사자 간의 분쟁에 대한 결정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법원의 결정은 그 사회의 기본적 가치체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입헌민주주의의 구축에도 기여한다. 모든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우리는 판결문을 한 줄 또 한 줄 쓸 대마다 그것이 갖는 공적 중요성을 생각해야 한다.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오레가 그의 건축물에 대해 말한 것처럼, 신은 사소함 속에 존재한다. 누구도 완벽하게 확실하고 분명할 수는 없다.

 

보도자료를 통해 내 판결문을 완독할 실질적 독자층은 줄어들 수 있지만, 잠재적 독자층은 더 넓어진다. 잠재적 독자층에 의해 광범위하고 다양한 검토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게으름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된다.

 

목적은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거나 기분 나쁘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많은 독자와 가능한 많은 헌법적 책임의 엄중성, 진실성, 중요성에 대해 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경험상 기본적 권리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면, 고도로 훈련된 법공동체에 가장 강력하게 호소하는 말과 개념은 확실히 일반 대중에게 가장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것들이다.

 

물론 법공동체는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는 안정적인 조직체가 아니다. 법공동체가 지나치게 자기 지시적이고 폐쇄적이면 공통성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중립적이고 균형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준들은 거기에 어떤 편견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편견은 숨기면 더욱 치명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주의 법리학은 합리적 남성이라는 기준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법을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남성들이 자연의 질서라고 여기는 관념에 기초한 규범들 속에 무의식적인 편견이 들어 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여성주의자들은 단순히 용어를 합리적 남성에서 합리적 사람으로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법원은 구타당한 여성이 반복적인 폭력에 의해 생성된 심리적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에 대해 심의할 때 여성의 실질적인 인생 경험을 고려해야 하며, 남성 고용주의 성행위를 빗댄 반복적인 농담은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릴 때도 고용된 처지에 놓인 여성이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신을 마치 질병인 것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릴 때도 여성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여성주의자들은 말하고 있다.

 

법적으로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여성주의와 유사한 주장을 해왔다. 기존의 법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완강하게 유지되어온 법적 관점을 바꾸기 위해 환경론자들은 상당한 저항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법적 비전을 만들어내야 했다. 비록 구속력이 약하긴 하지만, 마음속에 그리던 이상을 연성법으로 발전시키고, 결국에는 구속력을 갖는 경성법으로 정착시켰다.

 

여기까지 오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그들은 미래 세대를 위한 신탁의무라는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또한 법적 보호의 의무를 국경을 초월해 확대 적용해야 하며 태만이 아닌 사전예방원칙을 적용기준으로 발동시켜야 한다는 개념을 개발했다.

 

나아가 간접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도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법공동체는 변하지 않는 공통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고정된 조직체라고 볼 수 없다. 법공동체를 규정하는 규범과 기준은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르고 진화하고 있다. 좋든 싫든 사법부는 법공동체의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 한가운데 위치하게 될 것이다. 때론 법공동체와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할 것이다. 때론 앞서 나아갈 때도 있을 것이다.

 

누가 기준을 결정하는가의 문제는 남아공과 같은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법공동체는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백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고, 더욱이 종교적으로는 추정컨대 기독교가 지배적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기준을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적극적으로 적용해왔다. 그래서 누가 봐도 인종주의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령을 폐지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적 계율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법조항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헌법은 분명하게 종교적 믿음을 존중하고 있다. 아마도 남아공 인구의 70퍼센트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투투 대주교와 같은 사람들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실제로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남아공의 헌법은 종교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보다는 협력을 상정하고 있다. 헌법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나 믿음을 갖고 지킬 권리를 강력히 보장하고 있다. 헌법은 분명하게 어느 한 종교나 믿음을 지지하거나 선호하지 않음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일요일이나 성 금요일, 크리스마스에 주류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 헌법을 위반하는가에 대해 판결을 준비할 때, 나는 누구의 입장을 심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고심해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고민이었다.

 

합리적인 기독교인의 입장? 똑같이 합리적인 비기독교인의 입장? 그것도 아니라면 합리적인 무신론자의 입장을 심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입장을 정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 입장에 동의해주어야 하는가? 덤덤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결국 나는 합리적인 사람 중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다. 합리적인 사람 중에는 둔감한 사람도 있고 예민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람은 모두 평등의 권리와 열린 민주사회에서 살 권리를 비롯해 모든 헌법적 가치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열린 민주사회에서는 국가가 특정한 세계관을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논리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반쯤 잠이 든 무의식 상태에서 갑자기 떠 오른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추론해낸 결과였다. 그래서인지 이 판결문은 다른 나라의 법정에서 인용되지 않았다.

 

이슬람 법에 따라 혼인한 여자가 죽은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다루는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청구된 적이 있었다. 헌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남아공의 법정은 무슬림과 힌두 공동체에 혼인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혼인이 전 세계 기독교 국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혼인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혼인은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부다처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 중 다수가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데, 다수 재판관의 의견을 지지하는 판결문에서 나는 특정 종교가 규정한 배우자라는 단어의 언어학상의 개념은 우리 새 헌법의 평등 개념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법공동체는 보수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지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재판관들은 기존의 법원칙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수용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딜레마와 늘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재판관의 개인적 기호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현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를 결정한다면 그 판결은 원칙에 입각한 판결이라 볼 수 없다. 현재의 균형 상태를 설득시키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정도의 합리성과 정당성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법공동체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기존의 원칙과 기존에 급진적 변화를 도입한 판결은 새로운 헌법질서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재정의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사실 나는 새로운 법정에서 새 헌법을 적용한다는 것이 법적 추론의 규범과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으로서 남다른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판결은 변화를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법공동체를 유연하게 만들고, 동시에 원칙에 입각한 방식으로 진보를 정당화함으로써 공동체의 자기 확신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법공동체가 실제로 오랫동안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왔던 기준이나 법규범을 재구성할 때 가능한 한 그것을 투명하고 열린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아공과 같이 다문화와 다종교가 혼재된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투명성은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