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대학신입생과 복음을 나누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 세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첫째, 죽음이 당장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젊고 건강하고 아무 부족함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대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막상 암에 걸리거나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겪게 된다면 그제서야 비로소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처럼 사람은 당장 눈 앞에 닥친 일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근시안적인 인생이기에 죽음을 미리 감지하거나 대비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련한 인생은, 살아가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만사형통하여 하나님 없이도 부족함없이 살아가는 인생일 것입니다. 그는 살아가면서 단 한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 곧 바로 지옥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은 영원히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한달뒤에 사형을 받은 사형수라면 두다리 뻗고 잘 수 있을까? 그 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 올 것입니다. 실제로 사형수들은 사형당일 너무너무 두려워 오줌을 지리며 극도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인생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형집행일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는 사형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단지 사형집행날짜가 명확히 정해져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두려움이나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면서 살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 원래부터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죽음이란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셋째, 죽음에 대해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을 때에 생각해서 답이 나오고 대책이 나온다면 그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생각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껏해야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사람답게 잘 살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아프지 않게 잘 죽을 것인가? 정도가 고작입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들에 대해서는 밤잠을 설쳐가면서 고민하고 밤새 잠못 이루면서도 정작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준비도 없는 속수무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죽음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