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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관한 치명적인 미혹! (한번 구원은 영원? 구원의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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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0. 6. 15.

구원에 관한 치명적인 미혹! (한번 구원은 영원? 구원의 취소?)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해 얘기할 때,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 없다를 가지고

교리적 논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논제 자체가 성경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닌 인본적 관점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정의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명제는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을 보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시켜주셔놓고,  

그 구원을 취소시킬 수가 있냐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자기가 보고싶은 성경구절들만을 골라서

그 구절들을 근거로 대며

한번 받은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구원의 '취소 혹은 탈락'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은 취소되고 탈락되는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져버리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

이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

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 내면의 성품과 속성이 늘 동일하시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지 아니할지를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신명기 11장 26-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앞에 복과 저주를 같이 두시고..


하나님의 음성에 청종할지 아니할지를

우리가 택함으로써 그에 따른 보응을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선택에 의해 

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고 말씀하시고..


디모데전서 4장 1절과 6장 10절에 보면,


그래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 믿음에서 떠나" 

죄악된 길로 나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인즉, 스스로 믿음을 져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해서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님을 통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요 16:13, 롬 8:26, 갈 5:18)


그러나 죄인인 우리가 거듭난 이후,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좁은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아니하고 외면해 버린다면..


자기 정욕에 이끌려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면서

처음엔 아주 작은 각도에 의해 방향이 틀어졌지만,

나중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런 행동을 바로 체크하신 후,

"너 구원 취소, 겟아웃!!"

이렇게 냉정하게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며 성령님을 통해

계속해서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시고,

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는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멀어져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거부한 채

그 중심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됐을 때..


스스로가 하나님을 져버리고 떠나버리는 것이지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죄사함에 관해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넘어지고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긍휼과 은혜로 우리의 죄를

항상 용서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주님을 향해 있는 자라면..

육신의 연약함으로 반복해서 넘어진다 하더라도..

그래서 죽을만큼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주님 앞에 끝까지 나아갈 때,

당신의 은혜로 감싸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죄와 싸울 수 있도록

동행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만약 "구원 취소"라는 어감 자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옳은 잣대가 되려면..  


죄사함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이런 죄를 지으면 한번 용서!

이런 죄를 지으면 두번 용서!

이러이러한 죄를 지으면 바로 탈락!!


이런식으로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죄가 됐든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떤 분들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성령을 모독(훼방)하는 죄는 그럼 뭐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 죄를 짓는 이들의 경우는 

스스로 그 죄를 지었다는 인식 자체가 없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옳다 여기는 종교적 잣대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던 예수님께

귀신들린 자라 욕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 성령모독죄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려 하지 않고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혹시 성령훼방죄를 지은게 아닐까?

그럼 용서받지 못하는데..ㅠ"

라는 마음을 갖는 일 자체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성령모독죄를 지었을까봐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어찌되었든

우리 주님은 언제나 '죄'가 아닌 용서,

즉 회개에 초첨이 맞춰져 있으시기에..


일흔번씩 일곱번, 아니 그 이상이라 하더라도..


그가 중심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며 나아온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과 마음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마치 구원을 

취소시키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 의해..


하나님이 마치 사람을  

사랑 없이 냉정하게 평가하고 내치시는 것처럼  

'원망의 대상'이자 '가해자'로 만들어버리는 

사탄의 교묘한 술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프레임에 빠져서

사랑의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교리적 기준에 기반한 심리적 대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고 져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받길 포기하고 져버린다는 말은..


대놓고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론

영적으로 포기하고 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을 떠나거나 성령을 훼방하기는커녕

누구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영적상태에 대해

주님은 지옥 판결을 피할 수 없을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23:33)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그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7)


이들의 영적 실상은 

눈멀고 벌거벗고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부자고 부족한 것이 없다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교회생활 열심히 하면서

십일조 많이 내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신앙인으로써 흠잡을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천국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상급도 클거라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그 중심은.. 


자기가 주인되어 죄를 멋대로 정의하고.. 

(죄를 짓고도 큰 죄로 여기지 않아 죄의식 결여.)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니,

이러이렇게 하신다는 자기 종교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멋대로 정의하고..


겉으론 기록된 말씀을 앞세우지만  

실상은 자기 생각과 기준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8)


어떻게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벌거벗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를 수 있을까요?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우리에게 금을 주셔서 

우리를 부요케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흰 옷을 입혀주심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안약을 넣어주셔서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겸비한 마음으로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고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경건한 신앙인이라 여기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주님이 두드리시는 음성에

귀기울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스스로 떠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바로 이 구절이

"구원 취소, 구원 탈락"을 

의미하는거 아니냐 항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현세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대 앞에서 행해지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스스로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엄중한 심판이 행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땅에 사는 동안에는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허락해 주시지만..


그 기회를 벗어나 죄롤 죄로 여기지도 않고

성령의 인도를 거부한 채 살다가 인생을 마친 자들에게

훗날 심판대 앞에서 엄중한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을 강제로 열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완고한 마음을 돌이키고

언제든 당신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음성을 청종치 않고 성령의 인도를 거부한 채,

자기 생각과 기준에 갇혀 1달란트 그대로 품고 있거나 

회개치 않고 죄를 즐기며 살지만 않는다면..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처럼..

비록 육신은 연약하여 넘어질지라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고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합당한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 안에 자리한 죄성과 처절하게 싸웁니다.


비록 연약한 내성이 자리하고 있지만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며

작은 것에도 순종하려 노력합니다.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만

연약한 내성 때문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걸 다 아시기에 

변함없는 은혜와 긍휼로 역사해 주십니다.


내 자신이 죄인임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나의 죄성과 싸우다가 또 넘어져 괴롭지만..


그래도 끝까지 십자가 붙들고 주님앞에 나아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중심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로마서 5장 20절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중심이 아니라면 

"어라? 죄 지었더니 은혜가 임하네?"라고 여기며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고 그 죄를 정당화하겠지만..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경외함으로써

그럴수록 죄가 더 싫어지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더 바라보며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2절 말씀도

이런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만약..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거듭난 경험은 있지만,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영적교제가 이어지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이 아닌,

자신의 것들로만 채우고 살아가는 자들은,

자기 삶이 철저히 '자아'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입술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부르지만..


죄에 대한 인식과 분별은 사라짐으로 인해, 

죄를 죄로 보지 못하고,

그 죄를 되려 합당케 여기는 사람들..


또 회개를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회개의 본질을 자기 멋대로 변질시키며

"죄 짓고 또 회개하면 되겠지 뭐"  

이런식의 영적 방종을 일삼는 사람들.. 


세속문화의 흐름에 그대로 휩쓸려서

이런 것들은 문화의 하나일 뿐이라 여기고

동성애와 성적음란을 되려 합리화하며

하나님과 진리를 되려 욕되게 하는 사람들.. 


또 WCC, WEA 같은 종교 다원주의와 우상숭배를

또다른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이라 말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혹을 전파하는 사역자들..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해야 할 죄들을 

삶에서 마구 풀어헤치고 있음에도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잘못한거 없고,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철저한 자기 의와 자기 생각, 기준에 의해

사역하고, 목회하고,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거듭난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위에 열거한 경우들처럼, 

스스로에 대한 영적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무시한 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게 안타까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대조적인 속성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지만..


단 한가지, 

'회개치 않는 죄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5)


사랑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인간 안에 내재된 '죄악'을 따라

그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주시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후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회개라는 놀라운 특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회개라는 은혜를

우리 스스로가 거부해버린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의해

그 사람에겐 하나님 나라가 허락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영적원리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속성에 의한 영적원리를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으로 헤아리지 않고..


사람의 기준으로..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없다 라는 명제를 가지고  

교리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은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성경말씀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다는 로마서 8장이나..


요한복음 10:28-29절처럼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에 관한 구절도 많지만..


반대로

고전 3:17, 히브리서 6장, 

계시록 2:5, 3:3,16와 같이

믿는 자에 대한 책망과 심판을 

강조하는 구절도 많습니다.


'사랑과 공의'가

하나님의 존재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신자나 불신자들은

늘 그래왔듯 넓은 길로 나아갑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좁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삶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이고,

길이 좁다는 것은, 삶 가운데 

그만큼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영적 싸움의 장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영역을

제발로 박차고 떠나버렸을 때.. 


하나님은.. 

돌이킬 수 있도록 마음문을 두드리시지만 

우리 마음문을 강제로 바꾸지 않으십니다.


흔히 간증영상 같은 걸 보면..


예수 믿고 거듭난 체험을 했는데

다시 세상밖으로 나아가  

세상의 종으로 쓰임받고 살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채찍으로,

호되게 얻어맞고 다시 정신차려  

주님께 돌아온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호소하시고 매를 들어도 듣지 않으면

그 종착지는 스스로가 선택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절대 변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을 함께 동행하시며

그 구원의 종착점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오직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구원의 지속성과 영원성은

좁은 문을 통과하고 걸어가야 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당신의 은혜를 힘입어 

당신과 함께 그 길을 가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훗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영원한 안식에 거할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1)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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