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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도 구원받는 사람 vs 두려워서 심판받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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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0. 8. 11.

두려워도 구원받는 사람 vs 두려워서 심판받는 사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열왕기하 13:23)

 

열왕기하 13장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언약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앞에 죄를 지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져 있던 때였는데..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왕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며 

그 악행이 계속 쌓여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계속 두고 보시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하나님은 구약 곳곳에서

당신과 언약 맺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에게 은혜를 거두지 않으실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에스겔 7:9)

 

에스겔 7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에 합당한 심판을 받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 외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구절들과..

 

반대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지 않고 

심판을 행하신다는 구절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언약을 맺고

세워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을 때마다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이런저런 사인들을 통해 돌이킬 기회를 주시며

당신의 은혜안에 나아올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단순한 주종관계였다면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바로 멸절해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아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을 향한 마음을 그대로 내비치셨습니다.

 

예레미야 2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예레미야 2:5)

 

사실 언약을 져버리고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의미의 

다른 구절들이 많지만..

 

이 구절이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이 그 언약을 져버리자..

당신의 마음을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너희는 나를 버리고 떠나갔니?ㅠ"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찮고도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어떻게 이렇게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ㅠ 

 

이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담담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이별을 통보하고 떠나갈 때,

붙잡는 사람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날 버리니?ㅠ 

라고 할 법한 얘기를..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의 엄위를 내려놓을 정도로

이스라엘을 향한 그 애끓는 심경 그대로를 

나타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이 

당신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죄악 가운데 거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체면 생각치 않고,

나약해보일 정도로

당신의 그 애끓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만큼 당신과 언약 맺은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여호와를 떠나 

죄악된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애통해하며 돌아오라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하라 명하시고,

결혼 후에도 이방 남자들과 

음란한 짓을 하던 고멜을 

다시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떠나 죄악 가운데 빠진 

백성들에 대한 그 사랑을 

고멜이란 여자를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3:1)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이처럼 절절하게 드러내셨음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앞에 그 죄악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도한 죄로인해 

민족 자체가 멸망에 준하는 심판을 받고 

여러 나라에 뿔뿔히 흩어져

수천년 동안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겔 20:23)

 

그러다 마지막 하나님의 섭리에 발맞춰

이제 다시 회복되어 가고 있지만..

(겔 20:41)

 

어쨌든 결과적으로만 봤을 땐

이스라엘은 그들이 행한 죄로 인해

공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의 마음을 강제로 바꾸실 순 없기에..

 

그들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 

죄악에 대한 심판을 

행할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그들을 향한

은혜의 섭리는 끊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그들을 더 이상 불쌍히 여기지 않고

엄중한 공의의 섭리만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하나님은 당신이 손수 창조하신 인간들이 

온갖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을 때

한숨을 내쉬며 괴로워 하셨습니다.

(창 6:6)

 

하지만 그 다음 구절을 보면..

타락한 모든 인류를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창 6:7) 

 

그리고 그런 심판을 확정하신 후에는..

노아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만

심판에서 건져내시고선.. 

 

이미 확정된 심판에 놓인 이들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비가 오기 전까지

방주를 만들던 노아를 비웃던 많은 이들이

실제로 비가 쏟아지자 

우리 좀 방주에 태워달라며 아우성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정확히 그 일곱식구와 동물들만 방주에 태웁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렇다고 저 사람들 다 죽게 놔둘 순 없지 않냐" 

라고 하며..

 

자기 의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태우려 했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기간을 지나

심판의 기간에 들어가게 됐을 때는

더 이상 그전에 임하던 그 은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공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심판을 정하셨으면

그 어떤 사람이 하나님앞에 나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5장 1절에 보면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고 말씀하시고.. 

 

에스겔 14장에도 보면..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겔 14:14,20)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섭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걸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는

아주 잘못된 종교적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약 이후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한번 구원받은 사람에겐 

심판을 절대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약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복음의 섭리가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섭리안에는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깊게 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하지만 이 오래 참으심에도

분명한 기한이 있고..

 

그런 긍휼과 은혜의 기한이 끝나게 되면 

심판의 섭리가 시작되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2)

 

그래서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돌이켜 구원받을 기회를 주셨음에도

끝내 돌이키지 않는다면..

 

오래 참으시는 기간만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게

하나님의 변함없는 공의의 섭리입니다.

 

그러면 이 공의의 섭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만 적용될까요?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1-22)

 

이 말씀을 읽어보시고

성령안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원 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과 언약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셨다는 의미하고..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도 찍히게 된다는 이 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주님의 은혜의 섭리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준엄하심, 

즉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가 적용되어 

우리에게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기반한 

은혜 시대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이런 은혜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앞에 온전한 중심으로 

그분과 동행함으로 그 뜻을 헤아리고

그 뜻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된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실제적인 은혜(구원)의 섭리가 적용되어져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하게 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가 적용되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이하에 보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러나 열 처녀 중

다섯 처녀는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오시고 

기름을 이미 가지고 있던 다섯 처녀만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히게 됩니다. 

 

기름이 없던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뒤늦게 문을 열어달라 애원하지만 

신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며 외면합니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 때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기름을 사서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었는데..

 

그 기회의 시간을 스스로 허비해버림으로

은혜의 문이 닫히고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심판)만이 

그들에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섭리안에 들어가게 되느냐는

내가 어떤 중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메세지를 전하게 되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구원받기 위해 

행위적으로 이러이러한 행위를 

이러이렇게 해야 한다는식의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대체 뭘 그렇게 부담스럽게 여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심을 보신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중심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볼 수 있다면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할 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앞에 온전한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받았던 사울왕이 

끝내 버림받은 이유는.. 

 

사무엘로부터 죄의 책망을 받았을 때

겸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자기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님앞에 엎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온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 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보고 

주님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부담스러워 하며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나? 

불안하고 두렵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런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이 드니까.. 

 

이 사람의 메세지는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아 보이지만

두려움을 조장하는 미혹된 메세지를 전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내 중심이 하나님앞에 어떠한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감정을 절대적 잣대로 삼아서..

 

평안한 마음이 들면 이건 진짜고

두렵거나 불안한 마음이 들면 가짜로

결론지어 버립니다.

 

이런 분들께는 더 이상 

어떤 말씀도 드릴게 없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은

메세지를 듣고(보고) 겸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하는 사람..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에게

이 메세지가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거지..

 

자기 감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렇게 자기가 주인되어 살면서 

메세지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설득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낄지 불안함을 느낄지..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의식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고 이끌어 주시는대로 

진리에 합당한 메세지만 전할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자신을 겸비하게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메세지를 듣고 잠시 두려운 마음이 들었더라도..

 

이내 마음을 붙들고 주님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 포커스를 맞출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느낌이나 감정에 치우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출 33:19, 롬 9:15)

 

경외함이란..

내가 하는 모든 생각, 감정, 말,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지를 늘 분별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외함이 없으면 

입술로는 하나님, 예수님을 찾고

스스로 믿는다고 하지만

철저한 자기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자기 위주의 신앙생활의 예가 바로

앞서 얘기한 자기 느낌이나 감정을 

판단의 잣대로 내세우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외적인 모습, 즉 현상적 결과를 보시는게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은

외적으로 변화가 빠르냐 더디냐가 아니라

변화할 마음(중심)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령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몸 찢고 피흘리는 처절한 고통을 받으며 

죽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신이 직접 고통받고 죽었다는 경우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만든 신들임에도.. 

 

그 신들이 인간을 위해 죽는다는 발상은 

인간의 머리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신이 아닌

진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이 이상 어떻게 더 보일 수 있을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전혀 거룩하지 않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주셨을 때..

 

최소한 

그 사랑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 구원의 은혜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 7:21, 눅 12:47, 요 9:31)

 

그리고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공의의 섭리로 역사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몸소 증명해보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안에서 

주님과 온전한 관계로 살지 않는다면

당신의 또다른 속성인 공의로 역사하신다 해도

전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겸비하게 자기자신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게 아니지..”

라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자기 감정과 생각, 또 자기안에 심겨진 교리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자기 멋대로 재단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몸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스스로 져버리고 

자기가 주인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확정하시고 그 심판을 행하실 때는..

 

은혜의 문이 닫히고 

일방적인 심판이 부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역사의 마지막 타임라인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는..

 

심판만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의 구원 또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환란 속에서도 

은혜를 완전히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엄연히 은혜 시대가 아닌 환란 시대이기 때문에

 

은혜 시대가 끝나지 않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안에 온전히 거하며 사는 자들이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시편 102:13)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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