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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예언과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와 분별, 한반도 정세 관련 자료 총모음!

마지막 때에 가장 중요한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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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필독) *

2020. 10. 20.

마지막 때에 가장 중요한 '본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음성에 순복하며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때 징조, 휴거, 짐승의 표 등등... 

 

마지막 때를 강조하는 이런 부분을 

특별히 인식하지 않고 산다 해도 

사실 크게 문제될게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삶 가운데 

주님의 신부된 자로써 

옳은 행실을 드러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분명하게 강조하면서..

 

그날을 사모하고..

(딤후 4:8, 벧후 3:12)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 24:44, 눅 12:36, 12:40)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더 깨어있고 주님앞에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예언되어 있는 타임라인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라는 사실은..

 

마지막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중심에 두고 살아야함을 말해줍니다. 

 

다만 이 마지막 때를 

바르게 분별하고 준비하기 위해선

경계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그 정확한 때와 시기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마 24:36, 마 13:32)

 

즉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 1:7)

 

여기서 아무도 모른다는 그 날은 

휴거 또는 환란의 시작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종종 

그 때와 시기를 알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4절에 보면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근거삼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에 있지 않기 때문에

도둑같이 임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그 때와 시를 알게 하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바로 앞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도적같이 이르지 아니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임신한 여자가 해산하는 정확한 날은 알 수 없고..

 

대략 280일(9-10개월) 정도의 임신기간 후에 

아이를 해산하게 된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 기간이 다가오면 올수록

해산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해산의 기간에 대해 

정확한 날짜를 알거나 아니면 

몇일부터 몇일 사이에 

100% 해산되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요즘은 초음파검사를 통해

예정일을 예측한다고 하지만

정확한 예정일에 해산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특정 절기에 맞춰서

정확히 휴거가 일어난다는 말은..

 

예정일에 100% 해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있지 않는 이들에겐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정확한 날짜나 기간을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임신한 상태에서, 

해산할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

즉 예언된 마지막 타임라인이 

조만간 시작될거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임신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으면..

 

해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평안하다 안전하다 여기는 것이고..

 

그러다 갑작스럽게 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겐

갑자기 도둑처럼 이르게 된다는 것이고..

 

임신한 상태를 분명하게 인식한 상태라면

해산할 날에 대한 인식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날이 갑작스레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미 힌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3절에 보면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즉 깨어서 주님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영의 눈으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기 때문에

그날이 임박했음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때에 맞춰

성취되는 절기들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이 

아주 명확한 의미로 기록된 말씀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때와 시를 알 수 없다는 것은..

 

특정한 시간, 날짜, 년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절기까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초림의 때에 정확히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를 성취하셨는데..

 

재림의 때에는

남은 절기들(나팔절, 속죄절, 초막절)을 어떻게 성취하실까요? 

 

이 부분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을 

이미 영상으로 전한 바 있으니 

아래 영상을 클릭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xIQrPio58zY

 

마지막 때를 

바르게 분별하고 준비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두번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후 2:2)

 

마지막 때를 알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함을 의미합니다. 

 

물론 두려운 마음이 잠시 들었더라도

이내 마음을 붙들고 주님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구하며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워한다는 말은

그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입니다. 

 

만약 이런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

성령님께 나아가 조명을 받고  

온전한 마음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힘으로써

중심이 변질되어 버립니다. 

 

원래는 마지막 때를 앎으로써,

더욱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분과의 동행함 가운데 나오는

자연스런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휴거에 꽂혀서.. 휴거되기 위한 목적으로..

 

전도도, 봉사도, 심지어 회개까지도..  

그 목적 때문에 하게 됩니다. 

 

만약 다시 오실 주님을 너무 사모해서

주님 얼굴 보고싶어 휴거를 소망하는 거라면..

 

이것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중심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설사 환란 가운데 처해진다 하더라도

내 생명보다 더 귀하신 주님과 맞바꿀 순 없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허나 그게 아니라..

지긋지긋한 이땅의 삶을 벗어나,

그곳에서 영원히 안락을 누리기 위해 

휴거를 소망한다면..

 

이것은 애초부터 

주님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에는

그 자체로 '선한 것'들이 많습니다. 

 

휴거 역시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결코 중립적 가치가 아닙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당신의 자녀들을 신부로 데려가시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런 일인가요?

 

하지만

아무리 선한 것(비본질)이라 하더라도

본질이신 예수님을 제껴놓고

휴거 자체에 모든 포커스를 둔다면

휴거를 바라는 그 소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순교적 결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매우 귀하고 선한 행동가치입니다.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주님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결단이

주님 보시기에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 또한.. 

그 사람의 중심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인은 그렇게 순교적 결단을 했는데

어떤 사람이 자꾸 

환란 전 휴거를 말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순교적 결단'을 한 자기 입장에서 볼 때,

휴거를 말하는 저 사람은 믿음없어 보이고

마치 환란을 피해 도피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물론 환란이 두려워서 

환란을 피하기 위해 

휴거되기를 소망한다면.. 

 

앞서 얘기한 것처럼 

휴거 자체가 목적이 되버린 경우이고..

이런 목적으로 휴거를 소망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게 사실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알아서 걸러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휴거에 대해

이런식의 잘못된 마음을 품는 경우와,

 

휴거를 소망하는 모든 사람을

일반화시켜서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판단해버리는 일은 다른 문제입니다.  

 

특별히 교리적으로 

휴거 시기를 논하는 이들 가운데,

이런 모습들이 두드러지는 것을 봅니다. 

 

환란 중이나 

환란 후 휴거를 주장하는 경우,

 

성도라면 모름지기 

환란 속에서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는게 당연한데..

 

환란 전 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은 다

환란을 이길 생각은 안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믿음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최근들어 이런 주장을 하는 

몇몇 분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는

자기 종교적 기준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그 어떤 거룩해보이는 결단을 하든간에 

하나님앞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내가 휴거를 소망하냐 아니냐,

내가 언제 일어날 휴거를 믿고 있느냐,

내가 어떤 의로운 결단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품고 있는 마음과 생각,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앞에 합당하냐입니다. 

 

이것이 내 중심의 온전함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환란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거나 순교하는 일은.. 

내 결단만으로 가능한게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환란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려는 결단이나

죽음을 각오하는 순교적 결단을 하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이 맞지만..

 

그 결단 속에는 반드시

내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당해야만

실제 현실을 맞딱드렸을 때 

그 결단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운 믿음의 결단마저

자기 의가 누룩이 되어 틈타게 되면

그 누룩이 어떻게든 내 중심을 변질시킵니다.

 

로마서 10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외적으로만 보면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올바른 지식, 

즉 위로부터 부어지는 지혜로 인한

행함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하신 섭리는 알지 못한 채,

자기 종교적 기준대로 행하려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 26:35)

 

실제 상황은 어떠했나요?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해 버립니다. 

 

그럼 베드로가 당시에 했던 그 말이

상황이 닥치면 예수님을 부인할걸 알면서도

일부러 속이고 했던 말일까요?

 

아닙니다. 

 

본인은 진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상황에선

결단한대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본인 스스로

그 어떤 거룩한 결단을 했다한들..

 

실제 그 일을 

이룰 수 있게 도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의 은혜없이

스스로 순교적 결단을 했을 때는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성령안에서 사도로 거듭난 후에는 

믿음의 결단 속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때 베드로의 결단은 

그 자체로는 거룩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그런 결단이 나오게 된 중심은 

하나님앞에 합당한 중심이 아닌,

자기 종교적 의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결단대로 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또 다른 종교적 의의 모습은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당한 후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자.. 

(마 16:21)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항변합니다.

 

"주님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그런 일은 절대 주님께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 16:22)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아주 강하게 질책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이 말은

예수님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저 나쁜 놈들이 선량한 

우리 스승님을 잡아죽인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고선..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된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하나님의 계획된 뜻과 섭리에 대해

하나님의 기준으로 분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기준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의도가 어떠했든간에 

그가 보인 말과 행동이 본질적으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니가 지금 한 그 말은 

너의 종교적 의에서 비롯된 말이고

그 종교적 의는 사탄이 원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실상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자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 

뒤이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직후에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뭘까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의의 기준에 따른 생각과 판단 등을 

철저히 내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대로 나아가는..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나도 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 전에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마 16:16)

 

그런 진심어린 입술의 고백에도   

그는 특정 상황에서

자기 의의 기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입술로는 얼마든 하나님을 아버지라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지만.. 

 

그런 입술의 고백만 한다고 해서..

 

자기 의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한 말이

본인은 선한 의도로 한 말이었을지 몰라도.. 

 

본질(영)적으로는 

자기가 옳다 하는 종교적 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의도가 아닌 

선한 의도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더라도

 

그 의도의 어떠함보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지금 하나님이 뜻하고자 하는 바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은 분명 

선한 의도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기 종교적 의의 기준으로 

행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배도한 교회에서 나와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할 때마다

듣는 얘기 중 하나가.. 

 

"교단이 배도했고, 교회가 배도했으면 

교단에,교회에 끝까지 남아서 

배도에서 돌이키도록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하고,

다함께 거룩해지도록 힘써야 하는게 옳지

비겁하게 혼자만 살려고 도망치는게 옳은 일이냐?"

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관점(기준)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얘기일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엔 저런 주장과 태도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아주 당연해보이는 

의로운 모습으로 보여지기에..

 

지금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어떠한지를 

분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저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거룩히 구별되려는 것보다 

"교회공동체"라는 종교적 프레임에 

그대로 종속되어 버리는 것을 택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라는 특정한 때에 역사하시는 섭리가 

어떠한지를 헤아리려는 마음은 없이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의 기준에 의해

당연하다는듯이 저런 태도를 견지해 버립니다.

 

과연 이런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합당한 모습일까요?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는 한마디로

신랑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중 하나는..

다시 오실 예수님앞에 합당한 

당신의 신부들을 구별하시고 택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들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는 이들에 대한 구원이

이 마지막 타임라인을 전후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구원의 섭리속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키워드는 바로 "거룩한 구별"인 것입니다.

 

계시록 18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자녀)들에게

"여자와 음행하는 곳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거룩한 구별됨"이 

마지막 때 섭리의 핵심키워드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곳에서 나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끝까지 중심 지키고 

여자와 더불어 음행하는 다른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진리를 선포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환란 전이든, 환란 중이든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섭리가 

"거룩한 구별됨"이 아니라면..

 

끝까지 그곳에 남아 순교를 각오하고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의의 기준엔 

맞지 않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면서 

거기서 나와 구별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여자와 음행하는 곳은

로마 카톨릭을 필두로 하여 

온갖 가증한 종교가 혼합된 영역을 의미합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시록 18:2)

 

이 여자와 음행하는 행태는

환란이 임박한 지금부터 서서히 진행되다가

환란속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거룩한 구별됨"을 의미하는 이 말씀은

환란속에서의 상황만 지칭하는게 아니라..

 

마지막 타임라인을 전후로 하여

이미 여자와 음행하고 있는 교단(교회)들에 속한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 뜻을 구하려 하진 않고..

 

혼자만 살려고 

교회를 나오는건 비겁한 짓이고

교회에 끝까지 남아서 회개를 외치고 

다함께 거룩해지도록 힘써야 한다는 

자기 의의 주장만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의의 기준만 앞세우는 걸까요? 

 

성경적인 거룩한 구별됨이 

어떤 영적원리로 우리에게 적용되는지를 

여러 영상들을 통해 계속 전했지만..

 

도무지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접할 때마다 답답한 마음만 듭니다. 

 

내가 그 어떤 의로운 목소리를 내고 

의로운 결단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인지에 대해 

겸비함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되면..

자기 종교적 의의 기준으로 나아가 버립니다.

 

그리고선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지 아닌지를 

성령안에서 분별하려 하진 않고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합니다. 

 

지난 2018년 10월초, 

환란 전 휴거를 믿고 있었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환란이 닥칠 수 있고,

그러면 반드시 순교하겠다는

나름의 결단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휴거에 대한 

이런저런 말씀(내적음성)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성경을 읽는데

그전까진 전혀 보이지 않던 부분을 보게 해주셔서 

말씀해주신 그대로를 성경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느꼈던 것은..

 

분명 주님안에서 선한 일(것)을 

내 의지로 결단하고 추구하려 할 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영역, 다른 방향일지라도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중요하단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휴거를 소망하는 것도,

순교적 결단을 하는 것도, 

(사람 기준의)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내 중심이 어떠한지를

하나님안에서 분명하게 조명받고..

 

바로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오직 그 뜻대로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중심이 기반되어 있다면..

 

휴거를 간절히 소망하지 않아도..

휴거가 언제 일어날지를 몰라도..

 

주님 다시 오시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신부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런 중심이 전제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믿음의 결단이라고 한다면,

성령께서 역사해주셔서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의지적 결단이 있다 해도..

 

중심이 온전하지 않으면,

즉 지금 하나님이 뜻하신 방향과 다르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으니,

순교는 커녕 믿음조차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추구하고

선한 일을 결단하기 이전에,

내 중심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 후,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 귀한 일이라 생각되서

밖에 나가 열심히 전도하다가..

 

성령님이..

집에 가서 남편 저녁밥 차려주라는 

마음의 감동을 주시거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 머리론 전혀 이해가 안되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자기가 생각하는 의의 기준이 

거룩한 모양으로 하고 

내면을 완전히 지배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분별하려는

겸비함이 상실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겸비함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중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내가 그 어떤 선한 것을 소망하고,

그 어떤 의로운 결단을 하고 목소리를 낸다 해도

그것들이 나를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 곧 오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신부들은 바로.. 

 

삶 가운데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까지

주님을 의식하며 주님의 뜻하시는 방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24)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모스 3:3)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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